이 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과 괴임대석 위에 이중기단(二重基壇)을 마련하고, 3층의 탑신(塔身)을 받고 있는 일반형 석탑이다. 하층(下層)기단 면석(面石)의 안상(眼象)과 갑석(甲石)의 복련(覆蓮)이 혼용되며 상층기단 갑석의 경사진 부연(副椽)이 주목된다. 탑신부는 탑신(塔身)·옥개석(屋蓋石)이 각 1석씩으로 조성되었으며, 옥개석 받침은 3단씩이다. 이 탑의 초층 탑신석 윗면에는 16.7×10cm, 깊이 3cm의 얕은 사리공(舍利孔)이 있으나 사리장치는 완전히 없어졌고, 하대석 밑에서 높이 4.4cm의 동제여래좌상(銅製如來坐像)이 이건(移建) 당시 발견되었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기단부와 탑신부의 짜임새가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추정된다. 원래 창리의 과수원내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11월 이곳 한강변에 위치한 영월루(迎月樓) 밑으로 이건하였다.
제 92호 : 여주하리삼층석탑(驪州下里三層石塔)
이 탑은 단층기단< 單層基壇 > 위에 3층의 탑신부< 塔身部 >를 형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지대석< 地臺石 > 위에 2단의 높직한 괴임을 각출< 刻出 >하여 4매의 판석< 板石 >으로 조립된 기단 면석< 面石 >을 받고 있는데, 각면에는 양쪽에 우주< 隅柱 >가 모각되었다. 갑석< 甲石 > 하면에 얕은 부연< 副椽 >이 있고,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 塔身 >·옥개석< 屋蓋石 >이 각 1석씩이며, 옥개받침은 4단씩이다. 탑의 높이는 3.7m이며, 이건 당시 특이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각부의 양식수법< 樣式手法 >으로 보아 고려시대< 高麗時代 >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원래 하리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11월 이곳 한강변에 위치한 영월루< 迎月樓 > 밑으로 창리< 倉里 > 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제91호)과 나란히 이건하였다.
제 93호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거대한 천연암벽에 2구(二軀)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긴 이 마애불상(磨崖佛像)들은 머리 위에 돌갓을 얹어놓은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석불입상이다. 전체적으로 괴량감(塊量感)이 느껴지는 이 불상들은 불성(佛性)의 특징보다는 토속적인 특징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자연적인 미소가 깃든 네모진 얼굴과 삼도(三道)가 없는 원통형(圓筒形)의 목, 당당한 어깨를 나타내고 있으며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화(蓮華)를 쥐고 있다.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痛肩衣)는 양쪽으로 단계적인 세로무늬를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가운데는 V자 모양을 선각(線刻)하고 있는데 아래 끝쪽은 의외로 부드러우며, 가슴에 보이는 띠매듭는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을 하고 있는 수인(手印)만 다를 뿐 세부의 조각수법은 오른쪽의 원립불(圓笠佛)과 거의 같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 불교조각으로는 별로 우수한 편은 아니나, 고려 선종(宣宗)과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왕자인 한산후(漢山侯)의 탄생과 관계된 설화가 있고, 옆의 명문까지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제 94호 :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충북 제원군 한수면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상·하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위기단은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네 모서리에 한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탑신에는 지붕돌이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제 95호 : 괴산미륵리오층석탑(槐山彌勒里五層石塔)
이 탑은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를 갖춘 5층석탑이다. 기단의 중석(中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모각(模刻)되어 있지 않고, 갑석(甲石)은 형식적인 수법을 가미(加味)한 매우 좁은 두 장의 판석(板石)으로 덮여 있다. 탑신부는 1층 옥개석(屋蓋石)이 두 장일뿐 다른 옥개석은 한 장씩으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석(塔身石) 역시 형식적인 우주(隅柱) 모양을 모각하였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남기고 있다. 노반은 지나치게 커서 탑신석으로 오해받기 쉬우며 복발은 장식이 없는 반구형(半球形)으로 정상에 철제찰간(鐵製擦竿)만이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미륵불(彌勒佛)과 함께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관계 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제 96호 :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忠州 彌勒里 石造如來立像)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제 97호 :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槐山 院豊里 磨崖二佛병坐像)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부수법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傳)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 98호 : 충주 철조여래좌상 (忠州 鐵造如來坐像)
높이 0.98m의 철로 만든 불상으로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제512호)과 같은 양식이며 더욱 엄격미가 강조된 점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삼각형에 가까운 얼굴, 길고 넓은 눈, 꽉 다문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형(八字形)의 주름 등에서 근엄하고 무서운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당당한 상체와 무릎을 넓게하고 앉은 자세 등 몸의 균형이 비교적 잘 잡혔지만, 팽팽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좌우대칭을 지키면서 기하학적 옷주름선을 규칙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유행하던 철로 만들어진 불상 가운데 하나로 도식화된 표현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 99호 : 천흥사지당간지주(天興寺址幢竿支柱) 천안
고려 태조 4년(921)에 창건되었던 천흥사의 당간지주로 현재 천안시 천흥리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서있는 두 지주는 60㎝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다. 기단은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기단 주위에 안상(眼象)을 새겨넣어 당간지주의 장식화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동·서 지주 사이로 깃대를 직접 받치던 받침은 남아있지 않다. 안쪽면에 조각이 없으며 상단 꼭대기끝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다. 지주의 바깥 면은 위에서 아래까지 중앙에 1줄의 선을 새겼다. 지주 각 부의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퇴화된 기법으로 만들어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특히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으로 되어 있어 이 당간지주도 절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제100호 :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唐津 安國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
안국사는 안국산(일명 은봉산)에 위치한 폐사지(廢寺地)로 1929년에 다시 세웠다고하나 또다시 폐사되었다.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높이 5m에 가까운 큰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신체의 비례상 어색하게 큰 편이다. 불상의 몸은 대형화되었는데 인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네모난 기둥같은 느낌을 준다. 또 몸과 어울리지 않게 팔과 손을 붙여 비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붙여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에는 본존불을 모시는 보살상이 있는데, 오른쪽 보살은 허리까지 묻혀 있고 왼쪽 보살은 머리만 파괴되었을 뿐 형식은 본존불과 같다.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괴체화한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괴산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함께 주목된다.
제101호 : 안국사지석탑(安國寺址石塔) 당진
안국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삼존석불입상(보물 제100호)이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제102호 : 보원사지석조(普願寺址石槽) 서산
서산 보원사터(사적 제316호)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높이 65cm, 길이 348cm, 너비 175cm.)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제103호 : 보원사지당간지주(普願寺址幢竿支柱)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제104호 : 보원사지오층석탑(普願寺址五層石塔)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쇠꼬챙이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제105호 :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
이는 지대석(地臺石)에서 옥개석(屋蓋石)까지 8각(角)의 평면(平面)을 유지하고 있어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부도이다. 하대석(下臺石)의 사자상(獅子像)과 구름의 조각, 상대석(上臺石)의 앙련(仰蓮)과 난간(欄干) 수법(手法) 등이 주목된다. 탑신(塔身)의 문비(門扉)와 사천왕상(四天王像) 및 인물상(人物像), 옥개석의 귀꽃모양 등은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법인국사(法印國師)는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900)에 출생하여 고려(高麗) 광종(光宗) 26년(975)에 입적(入寂)한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으로 이 부도의 건립은 국사가 입적한 때부터 탑비가 건립된 경종(景宗) 3년(978)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106호 :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귀부(龜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이首)를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목이 밭고 입이 긴 머리를 가진 귀부 위에 간단한 비좌를 만들고 그 위에 비신석을 세웠다. 이수는 운룡문(雲龍紋)이 새겨져 있다. 법인국사(法印國師)의 성(姓)은 고씨(高氏), 자(字)는 대오(大悟)이며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900)에 출생하여 고려(高麗) 광종(光宗) 26년(975)에 입적(入寂)하였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한윤(韓允)이 썼다. 이 탑비는 비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景宗)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제107호 :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국립부여박물관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제108호 :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제109호 : 광주서오층석탑(光州西五層石塔)
이 탑은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세워진 이형탑(異型塔)으로서 지대석 위에 큼직한 이중의 받침이 있어 기단중석(基壇中石)을 받치게 되었다. 갑석(甲石)에는 부연(副椽)이 있다. 윗면 중앙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해 각형2단(角形二段)의 받침돌을 신조(新造)하여 삽입하였다. 초층탑신(初層塔身)은 특이한 구조로 전체를 상하 2단으로 연결하되 여러 개의 석재로 결구하여 그 높이가 매우 이례적으로 높게 되었다. 또한 2층 이상의 탑신도 체감률이 작아 대체로 탑신이 높다. 옥개석은 추녀가 넓은 편이고 전각(轉角)은 상하 모두가 반전(反轉)되었다. 그리고 옥개받침은 각층 4단씩이며 정상의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전부 결실되었다. 1961년 해체 보수할 때 2층탑신 상면에서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사리 장엄구가 나왔다. 그리고 1층탑신과 3층탑신은 보수 당시 보충한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初期)로 추정된다. 이 석탑 부근은 성거사지(聖居寺址)라고 전한다.
제110호 : 광주동오층석탑(光州東五層石塔)
광주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구성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고 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을 짜맞추어 구성하였으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1층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간략화되어, 양식상 만들어진 시대가 통일신라 후기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 1955년 해체, 수리할 때 4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광주 전남지방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5층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제111호 :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 전남 담양,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시멘트로 바닥을 짠 다음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제112호 : 중흥산성삼층석탑(中興山城三層石塔) 전남 광양군
중흥산성 서쪽 시냇가에 있는 3층 석탑이다. 중흥산성에는 신라 경문왕 때 도선대사가 창건한 중흥사(中興寺)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의 격전끝에 승병들은 모두 죽고 절은 불에 타버렸다고 전한다. 이 탑은 원래 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과 함께 있었으나, 석등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석탑만이 남아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위층기단에는 모서리 기둥을 굵직하게 조각하였다. 한 면을 둘씩 나누어서 앞면에는 인왕상(仁王像)을, 양 측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뒷면에는 보살상(菩薩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 몸돌에는 두꺼운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이 석탑은 특히 각 부분의 풍부한 조각들이 눈에 띄는데, 보존상태가 좋고 조각된 상들도 뚜렷하다. 탑신에 비해 밑의 기단부가 너무 커 보이는 경향이 있으나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제113호 : 청도봉기동삼층석탑(淸道鳳岐洞三層石塔)
이 탑은 높이 5.47m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석탑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세워진 방형의 3층탑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典型的) 양식(樣式)을 잘 갖추고 있다. 제1층의 탑신 높이가 약간 높고 지붕돌이 넓으며 지붕돌 받침이 5단이고 추녀끝이 수평으로 되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제114호 : 안동옥동삼층석탑(安東玉洞三層石塔)
이 탑은 높이 5.79m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석탑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을 갖춘 3층석탑으로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옥개석이 넓어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보물 제93호)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어서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거구의 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미련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116호 : 영주석교리석불상(榮州石橋里石佛像) 영주 순흥
이 석불입상은 광배(光背)와 왼팔이 없어졌고 발목 이하는 땅에 묻혀 있다. 둥글고 우아한 얼굴, 세련된 이목구비, 굵직한 나발(螺髮), 큼직한 육계(肉계) 등에 생동감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점은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양감(量感) 있는 다리 등 신체의 묘사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몸에 꼭 붙인 오른팔이나 쳐진 어깨 등에서는 다소 어색하고 해이된 표현도 보이고 있다. 또한 통견(通肩)의 불의(佛衣)가 양 다리에서 각기 동심타원형(同心楕圓形)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삼화령불상(三花嶺佛像)에서부터 가끔 나타난 특징이다. 어쨌든 이 불상은 다소 이완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면도 보이지만 긴장감 넘치고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도 보여주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제117호 : 상주화달리삼층석탑(尙州化達里三層石塔)
이 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3층석탑으로 높이가 6.2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었는데, 옥개석은 넓고 추녀끝은 수평이며 경쾌한 아름다움을 주는 장중한 탑이다. 상층(上層) 기단(基壇) 위에 놓인 머리 없는 1구(軀)의 석불(石佛)은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준다. 이 탑 서쪽에는 전(傳) 사벌국(沙伐國)의 왕릉이 있다.
제118호 : 상주증촌리석불입상(尙州曾村里石佛立像)
경상북도 상주의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m의 석불입상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단정한 체구에 다소 경직되고 현실적인 면이 강해진 특징을 가진 불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불입상의 경향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제119호 : 상주복용리석불좌상(尙州伏龍里石佛坐像)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읍 복용리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고, 군데군데 돌이 깨져 불완전한 모습이다. 콧날이 약간 손상된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데, 가늘게 뜬 눈, 작고 도톰한 입술 등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어깨는 현저히 좁아졌고, 오른손은 없어졌지만 두 손이 아래위로 겹쳐진 모습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으로 생각된다. 몸 전체를 두껍게 감싼 옷은 양 어깨에서 부채꼴 모양을 이루며 좌우로 대칭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이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부드러우면서 풍만한 모습이지만, 형식화된 옷주름의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제120호 : 상주증촌리석불좌상(尙州曾村里石佛坐像)
경상북도 상주군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높이 1.68m의 석조불상이다. 거의 직사각형의 얼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어깨와 팔, 다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직선적이고 각이 진 모습이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강인하며 경직된 느낌을 준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신체에 밀착하여 얇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 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다. 광배(光背)는 남아 있지 않으며, 대좌는 8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8각의 연꽃무늬 대좌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미소없는 작은 입, 군살 붙은 턱 등의 세부표현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임을 알려준다. 통일신라 중기의 풍만하고 균형있는 표현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형식화되고 경직화되어가는 특색을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제 62호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慶州 西岳洞 磨崖如來三尊立像)
선도산(仙桃山) 산정(山頂) 가까이 대암면(大岩面)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巨軀)의 아미타여래입상(阿彌陀如來立像)을 조각하고 왼쪽에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과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입상(大勢至菩薩立像)을 협시(脇侍)로 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다. 중앙의 본존불(本尊佛)은 손상을 많이 입어 머리는 없어졌고 얼굴도 눈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의 표현에서 자비로운 인상(印象)이 흐르고 웅위한 힘을 느낄 수 있으며, 양보살상(兩菩薩像)에서는 부드럽고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한다. 이 삼존불(三尊佛)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 통일신라(統一新羅) 불상조각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중요한 대작(大作)이다. 본존(本尊) 높이 약 7m,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높이 4.55m, 세지보살상(勢至菩薩像) 높이 4.62m이다.
제 63호 :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慶州 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것이다. 중앙여래상(中央如來像)은 높이 2.66m, 좌우(左右)의 보살상(菩薩像)은 높이 2.3m이다. 특히 조각(彫刻)솜씨가 뛰어나 다정한 얼굴과 몸 등이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인 신비가 풍기고 있다.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간직한 이 석불(石佛)들은 7세기경 신라(新羅) 불상조각(佛像彫刻)의 대표적인 것이다.
제 64호 : 경주보문리석조(慶州普門里石槽)
보문사터로 알려진 곳에 남아 있는 석조이다. ‘보문(普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보문사터로 알려진 이 곳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와 쌍탑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당간지주, 석등받침돌 등이 함께 남아 있다. 이 석조는 절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을 받아 두기 위해 만든 돌물통으로, 지금도 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것이 급수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큰 돌 하나로 내부를 파내어 물을 담도록 하였는데, 윗부분의 가장자리보다 밑부분이 약간 좁아졌고, 아래면은 평평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형태가 크지만 안팎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이 구조는 주변 유물들과 관련지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 65호 : 경주서악리삼층석탑(慶州西岳里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주며 보존상태도 좋지 못하다.
제 66호 :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 67호 : 경주효현리삼층석탑(慶州孝峴里三層石塔)
탑이 세워진 이 터는 신라 법흥왕이 죽기 전까지 승려로서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가 있었던 곳이라 전해오기도 하지만 주변이 논밭으로 변하여 사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사방 네 면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탑신에 비해 과중한 비율을 보이고 있어 무거운 느낌을 준다. 탑신(塔身)은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하늘을 향해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한 곡선을 이룬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이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분의 조각이 가늘고 약하게 나타나 있어 9세기 무렵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제 68호 : 경주황남리효자손시양정려비(慶州皇南里孝子孫時楊旌閭碑)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시대 사람인 손시양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문(旌門)을 설치하게 된 내력을 적고 있다. 손시양은 부모가 돌아가신 뒤 각각 3년간 묘소 옆에 막을 지어놓고 곁을 지켰다 한다. 당시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이 왕에게 그의 효행을 글로 적어 올려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비는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고려시대 명종 12년(1182)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채정이 지었다. 이 정려비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사각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길가에 서있던 것을 1977년 받침을 설치하고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제 69호 : 망덕사지당간지주(望德寺址幢竿支柱)
이 당간지주는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을 두지 않는 대신, 지주 바깥면의 모서리를 윗부분부터 줄어들게 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내었다. 기둥머리는 안쪽 측면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그리며 외부로 6㎝쯤 깎여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다. 각 면에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망덕사는『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된 사찰인데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 70호 : 경주서악리귀부(慶州西岳里龜趺)
이 귀부(龜跌)는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공적을 새겨 놓은 묘비(墓碑)의 대석(臺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부의 크기는 길이 2.81m, 폭 2.14m이며 귀갑(龜甲)무늬를 새긴 거북등에는 비석을 꽂았던 흔적이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귀부는 용두화(龍頭化)되기 이전의 귀두(龜頭)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석비대석의 시원적(始原的) 형식(形式)이라 하겠다. 전체 구성(構成)이 조금 형식화되고 약해 보이는 느낌이 있으나 목을 길게 뽑아 들고 멀리 앞을 바라다보는 기상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 71호 :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 (咸安 大山里 石造三尊像)
한절 즉 대사(大寺)라 전해지고 있는 이 사지(寺址)에는 모두 4구(軀)의 불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의 석불군(石佛群)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완전한 상(像)은 2구(軀)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인데, 형식(形式)이나 양식(樣式)이 흡사하여 입불상(立佛像)의 좌우협시(左右脇侍)로 조성되었음이 분명하다. 두 보살상은 타원형의 부드러운 얼굴이나 아담한 체구, 그리고 8각과 원형의 2단 대좌 등에서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양식(初期樣式)의 전통을 계승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원통형의 높은 관(冠)이나 작달막한 체구, 기하학적인 의문(衣紋), 한복식(韓服式) 옷 등의 표현은 고려(高麗)의 지방양식(地方樣式) 석보살상(石菩薩像)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입불상(立佛像)은 머리가 없지만 양감(量感)이 풍부하고 세련미가 있는 조각으로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며, 파괴가 극심한 머리없는 좌불상은 광배(光背) 부분과 함께 고려(高麗) 불상(佛像)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 72호 : 단속사지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동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은 크기로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쌍탑의 배치와 더불어 주목되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 73호 : 단속사지서삼층석탑(斷俗寺址西三層石塔)
삼층석탑은 신라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갖추고 있다. 특히 기단부(基壇部)가 상·하 2층이며, 하층의 탱주(撑柱)가 2주이고 상층의 탱주가 1주인 점은 신라 중대 이후의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탑은 동탑과 그 규모와 건조(建造)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석재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어 보인다.
제 74호 : 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동남쪽 약 4㎞지점에 거친 자연석면 그대로 서있다. 이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국장생이라는 명칭은 나라의 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이다. 장생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장생은 경계표와 보호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제작된 것으로,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다는 글이 이두문이 섞인 금석문으로 새겨져 있어 국가와 사찰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 75호 :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
이 불상은 큰 암석에 높게 부조(浮彫)된 마애불(磨崖佛)로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살이 올라 풍만한 얼굴과 넓은 어깨,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가 안정감 있는 자세를 이루고 있다. 둥근 얼굴에 소발(素髮)의 머리와 낮고 펑퍼짐한 육계(肉계), 길게 내려온 귀 등 전체적으로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체구 역시 인간적인 모습이지만 형식적인 면이 나타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이나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 흐름 등에서는 긴장감이 줄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末期) 불상(佛像)들의 양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 76호 : 춘천근화동당간지주(春川槿花洞幢竿支柱)
춘천시내에서 의암호를 따라 춘천역으로 돌아가는 도로 옆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꾸밈새가 없는 간결한 형태이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는 2단으로 이루어진 당간의 받침돌이 놓여져 있는데, 아랫단은 둥근조각이 있고, 윗단은 16잎의 연꽃조각이 돌려져 있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형을 이루고 있고,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켰던 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을 다듬은 기법이나 연꽃잎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제 77호 : 춘천칠층석탑(春川七層石塔)
이 칠층석탑은 화강암(花崗岩)으로 건조(建造)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基壇)이 넓어서 안정감이 있으며 넓은 갑석(甲石) 중앙에 방형(方形)의 연화판석(蓮華板石)의 괴임대를 놓아 탑신부(塔身部)를 받게 한 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부근에 많은 사찰(寺刹)이 있었다 하며 조선(朝鮮) 인조(仁祖)(1623∼1649, 재위) 때 충원현감(忠原縣監) 유정립(柳鼎立) 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파직(罷職)당하고 낙향(落鄕)하여 석등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지층에서 발견한 불기(佛器)에 충원사명(忠圓寺銘)이 있었다 한다. 이 탑도 충원사에 속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 78호 :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거돈사터에서 동쪽으로 약 11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제 79호 : 홍천희망리삼층석탑(洪川希望里三層石塔)
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3층석탑으로, 원래는 홍천초등학교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군청으로 옮겨 놓았다. 보수를 하여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이미 지붕돌은 깨어졌다. 현재 모습은 시멘트로 다져진 높은 바닥돌 위에 널찍한 돌 2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이다. 기단 가운뎃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 윗돌은 윗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끝부분의 치켜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제 80호 : 홍천희망리당간지주(洪川希望里幢竿支柱)
이 당간지주는 원 위치에 70㎝의 간격을 두고 동서< 東西 >로 마주 서 있는데, 각면< 各面 >의 돌을 다룬 기법이나 조식< 彫飾 >이 간결한 것 등으로 보나 정교하지 않은 작품이다. 정상< 頂上 >은 사분원< 四分圓 >의 호선< 弧線 > 모양으로 처리하고, 간구< 杆溝 >는 한곳에만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겉모습은 춘천< 春川 > 근화동< 槿花洞 > 당간지주< 幢竿支柱 >, 천흥사지< 天興寺址 > 당간지주< 幢竿支柱 >와 유사하다. 주변의 삼층석탑과 기타 석조물 등과 비교하여 볼 때, 거의 같은 시대의 조법< 彫法 >을 나타내고 있어 고려< 高麗 > 중기< 中期 >에 제작 건립< 建立 >된 작품으로 본다. 또한 이 일대는 현재도 무수한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 81호 :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江陵 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
강릉에 있던 한송사가 폐사된 후 명주군 구정면 어단리에 있던 것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보살상이지만, 입체감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왼팔은 안으로 꺾어 왼다리에 얹었으며, 오른팔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져서 알 수 없다. 앉은 자세는 왼다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오른다리를 밖으로 내어 발을 그냥 바닥에 놓고 있다. 이런 자세는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아마 어느 본존불을 모시던 협시보살이었을것으로 여겨진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천의(天衣)는 아주 가벼운 느낌을 주며, 목걸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아름답다. 이 보살상은 특이한 자세와 더불어 사실적이며 활달한 조각수법으로 특이할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조각수법이 흡사한 고려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제 82호 : 강릉대창리당간지주(江陵大昌里幢竿支柱)
이 당간지주는 원래의 자리에 1m 사이를 두고 남북(南北)으로 마주 서 있다. 두 지주의 안팎 측면과 앞뒤 측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간결한 솜씨를 보이고 있으나, 다만 바깥면의 양모서리의 모를 죽여서 약간의 장식(裝飾) 의장(意匠)을 보이고 있다. 지주 정상은 유려한 사분원(四分圓)의 호선(弧線)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은 상단 한곳에만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마련하였다. 현재 기단부(基壇部)는 땅속에 묻혀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겉모습으로 볼 때, 의장수법과 돌을 다룬 솜씨 등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말기(末期)의 양식을 계승한 듯한 것으로 건립년대(建立年代)도 통일신라시대 말기로 본다.
제 83호 : 강릉수문리당간지주(江陵水門里幢竿支柱)
이 당간지주는 원래의 자리에 1m의 간격을 두고 동서(東西)로 마주 서 있으나 앞뒤 면과 안팎 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간결한 솜씨로 되어 있다. 지주의 정상부만은 유려한 사분원(四分圓)의 호선(弧線) 형태를 이루고 있고, 한곳에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설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겉모습으로 볼 때, 돌을 다룬 솜씨나 조식기법(彫飾技法)이 간결한 것으로 미루어 나말여초(羅末麗初) 때 작품으로 보인다. 동쪽 지주 남쪽면에 조선(朝鮮) 순조(純祖) 17년(1817)에 다시 세웠다는 해서체(楷書體)의 음각명문(陰刻銘文)이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원 위치에 유존되어 오던 당간지주임을 알 수 있다.
제 84호 :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江陵 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처음 세웠다.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앞의 공양보살상과 유사한 것으로 같은 지방 계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제 85호 : 굴산사지부도(掘山寺址浮屠) 강릉
이 부도는 굴산사를 세운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굴산사터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변형된 수법을 보인다. 사리를 모시는 몸돌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받침부분이 놓이고, 위로는 지붕돌과 꼭대기장식이 놓였다. 꼭대기장식으로는 상륜받침과 보개(寶蓋), 연꽃봉오리 모양의 구슬장식이 놓여 있다. 한 돌로 된 바닥돌은 8각의 평면이며, 위에는 접시 모양의 받침돌이 있다. 2단으로 된 8각의 괴임돌이 있는 아래받침돌은, 평면이 원형이며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제 86호 : 굴산사지당간지주(掘山寺址幢竿支柱)
이 당간지주는 굴산사지< 屈山寺址 >에서 좀 떨어진 남쪽 언덕 넓은 벌판에 세워져 있다. 거대한 석재< 石材 >로 조성< 造成 >하였는데 전체 높이 5.4m로서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지주에 속할 것이다. 양지주의 4면은 아무 조각이 없는 민면인데, 아랫도리에는 돌을 다듬을 때에 생긴 잡다한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두 지주는 네모나게 다듬어 올라가다가 정상부< 頂上部 >에 이르러서는 안팎 양쪽에서 차츰 둥글게 깎아 곡선< 曲線 >을 이루고 있다.
정상은 뾰족한 형태인데, 현재 남쪽에 있는 지주의 첨단< 尖端 >이 약간 파손되었다. 지주 위쪽 가까이에 둥근홈을 파서 간< 杆 >을 시설< 施設 >하였고 아래에서 3분의 1쯤 되는 곳에 둥근 구멍을 관통시켜 간< 杆 >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제 87호 : 신복사지삼층석탑(神福寺址三層石塔)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앞쪽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보살석상(보물 제84호)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강원도 내의 월정사팔각9층석탑(국보 제48호)과 비슷하여 이 지방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이다.
제 88호 : 탑산사명 동종(塔山寺銘 銅鍾) 해남군 대흥사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종 꼭대기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매다는 곳인 용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부분에는 연꽃으로 띠를 둘렀고, 그 아래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사각형의 유곽 안에는 가운데가 돌출된 연꽃을 9개 두었는데, 신라 때의 유두보다 훨씬 납작해진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 있는 글과 양식으로 보아 종의 제작시기는 고려 명종 3년(1173)이나 고려 고종 20년(1223)으로 추정된다.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제 89호 :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靈巖 道岬寺 石造如來坐像)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제 90호 : 대반열반경소 권 9-10 (大般涅槃經疏 券九-十)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열반을 다루고 있는 경전으로, 중생들에게 열반을 종교적·철학적으로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담무참(曇無嘴)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당나라 법보(法寶)가 주석을 붙인 것으로, 권9와 10이 한 책으로 되어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세로 35.5㎝, 가로 32.7㎝이다.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긴 것인데, 교장(敎藏)은 고려 숙종 4년(1099)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 온 불경을 흥왕사에서 간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이 교장(敎藏)이 아니고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겼다는 사실은 체재가 두루마리 형식을 따르나 책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종이의 질이 조선 초기의 것이란 점이다. 또한 같은 절에 보관되어 온『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끝에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어 그 확증을 굳혀 준다. 원본 맨 뒤에 있는 기록을 보면 장모(蔣모)가 목판의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으며, 글씨는 당시 유행한 구양순의 서풍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만큼 원판 못지않게 정성들여 불경을 새겼으며, 불교경전으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판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만복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석좌는 절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넓어지고,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 32호 :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만복사터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지주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래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생략화·단순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제 33호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제 34호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
석비 상부의 이수(이首) 중앙에는 '능가보월탑기(楞伽普月塔記)'라 전자(篆字)로 새기고, 그 위에 쌍룡이 구슬을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높이는 2.9m이다. 수철화상(817∼893)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제자로서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이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한 수철화상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出生), 수계(受戒), 득도(得道), 세속 교화, 입적, 조탑(造塔)에 이르는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제 35호 : 실상사석등(實相寺石燈)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제 36호 : 실상사부도(實相寺浮屠)
이 부도(浮屠)는 통일신라(統一新羅) 팔각부도(八角浮屠)의 양식(樣式)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高麗時代) 부도이다. 하대(下臺)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되었고 팔각중대(八角中臺)는 무늬없이 간소하게 다듬었다. 상대(上臺)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은 팔각인데 한 면에만 문(門)을 조각하고 다른 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옥개석(屋蓋石)은 지붕면의 경사가 급하고 기와골은 조각하지 않았으며 팔각의 추녀 끝에 귀꽃이 장식되었다. 옥개석 상부에는 꽃무늬를 새긴 원형 석재가 있고 그 위에 보주석(寶珠石)이 놓여 있다. 전체 높이는 3.2m이다.
제 37호 : 실상사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 38호 :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蓼塔)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제 39호 :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實相寺證覺大師凝蓼塔碑)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제 40호 : 실상사백장암석등(實相寺百丈庵石燈)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가 선종9산 중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절 안의 백장암 남쪽 밑으로 울타리를 마련하여 몇 점의 유물을 보호하고 있는데, 석등은 백장암3층석탑(국보 제10호)과 함께 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제 41호 :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제 42호 :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 (南原 龍潭寺址 石造如來立像)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위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여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절 안의 대웅전은 북쪽을 향하여 용담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하나의 돌에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거구의 석불입상으로 높이가 6m에 이른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바위의 손상으로 분명하지는 않으나 힘차고 박력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다. 목에는 형식적으로 새긴 3줄 주름인 삼도(三道)가 있다. 몸은 어깨와 가슴이 떡 벌어져 있고, 다리는 돌기둥처럼 강인해 보인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깨어진 곳이 많아 분명하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불꽃무늬를 조각한 흔적이 남아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타원형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한 거구의 불상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 시대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 43호 :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이 불상은 얼굴, 몸, 옷무늬 등에서 원만하고 부드러운 작풍(作風)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타원형의 양감있는 얼굴, 바로 뜬 눈, 원만한 코, 알맞게 묘사된 입과 함께 특히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있는 표현, 유창하게 구사한 의문선(衣紋線) 등이 자연스러운 작풍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도(三道)나 의문의 형식적인 묘사, 당당하지도 않고 고졸(古拙)하지도 않은 어색하고 위축된 형태 등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만복사는 고려(高麗) 문종(文宗)(1046∼1083, 재위)때 창건된 사찰로서, 이 불상의 양식으로 미루어 만복사 창건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 45호 :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益山 蓮洞里 石造如來坐像)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百濟)때의 석불좌상이다. 불상의 현 신체높이가 156cm나 되는 이 불상은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下體) 등에서 고졸(古拙)한 활력을 나타내고 있지만 손가락을 구부린 두 손과 팔, 각진 무릎 등에서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무척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다소 느끼게 한 점이라든가, 듬성듬성한 凸형의 옷주름, 굽힌 손가락 등은 꽤 세련된 기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이런 점은 거대한 광배나 큼직한 대좌가 장중하고 고졸한 모양이지만 옷자락을 드리운 상현좌(裳懸座)의 주름이나 연꽃무늬나 불꽃무늬 같은 광배무늬 등은 상당히 정교한 것이다. 이처럼 이 석불상은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불상으로 그 의의가 자못 높다.
제 46호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益山 東古都里 石造如來立像)
이 불상은 200여m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二軀)의 석상(石像)인데, 양감(量感)없는 사다리꼴의 석주(石柱)에 얼굴과 손, 옷주름과 대좌(臺座)를 간신히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높은 관(冠)과 방형(方形)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 등의 소략한 모습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이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괴체화(塊體化)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역시 그러한 일련의 작품중의 하나로 무척 친근한 인상을 주고 있다.
제 47호 : 성주사지서삼층석탑(聖住寺址西三層石塔)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제 49호 : 나주동문외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이것은 석당간(石幢竿)과 양지주(兩支柱)까지 완전히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遺物)이다. 하부(下部)를 철띠(鐵帶)로 돌린 당간(幢竿)을 지주(支柱) 안쪽 상단(上端)에 파놓은 간구에 끼워서 고착했다. 당간은 8각(八角)으로 다듬은 5개의 화강암(花崗岩)을 다듬어 연결시켜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옥간석(屋竿石)과 보주(寶珠)를 놓았다. 건조시기(建造時期)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전체 높이 11m이다.
제 50호 : 나주북문외삼층석탑(羅州北門外三層石塔)
원래 나주 북문 밖에 있었던 것을 나주 군청 안으로 옮겨 놓은 탑으로, 상 ·하 2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면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기단에는 모서리에만 두고, 윗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각각 조각을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는데, 위층으로 갈수록 몸돌의 비율이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날렵한 느낌을 준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데, 밑면마다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지붕돌의 처마끝에 이르러 살짝 들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심하고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단정한 품위를 잃지 않았고 각 부의 비례도 아름답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 51호 : 문경내화리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
이 탑은 높이 4.26m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석탑으로 허물어졌던 것을 1960년 9월에 복원한 것이다. 단층기단(單層基壇)의 삼층석탑으로 이형(異型)에 속한다. 지대석(地臺石)은 크기가 같지 않은 4매(枚)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다. 탑신부(塔身部)의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에 우주형(隅柱形)이 모각(模刻)되어 있다. 옥개석 받침은 각층 4단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3층 옥개석 윗면에 붙여 하나의 돌로 된 노반(露盤)이 조각(彫刻)되어 있다.
제 52호 : 봉화서동리삼층석탑(奉化西洞里三層石塔)
이 삼층석탑(三層石塔)은 동서(東西) 탑(塔)의 쌍탑형식인데 이곳은 신라고찰(新羅古刹)이었던 남화사(覽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5)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6km 지점에 있는 춘양면(春陽面) 석현리(石峴里)의 현(現) 각화사(覺華寺)를 창건(創建)하면서 남화사를 폐하였다고 전한다. 이 탑은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서 상·하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형성하였는데, 각부의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신라(新羅) 하대(下代)인 9세기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1962년 이 석탑을 해체복원(解體復元)하였는데 당시 서탑은 사리함(舍利函)을 넣었던 사리공(舍利孔)만 남아 있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舍利甁)과 함께 99개의 작은 모양의 토탑(土塔)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에 진열 보관되어 있다.
제 53호 :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예천
이 탑은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창건된 개심사에 부속되었던 탑으로 높이가 4.3m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상층기단(上層基壇) 갑석(甲石) 밑에 새겨진 '통화(統和) 27(二十七) 경술년(庚戌年)'이라는 석탑기에 의하여 이 탑이 고려 현종(顯宗) 원년(1010)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밑기단 각면에는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고, 윗기단 각면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기단 갑석을 한 장의 판석(板石)으로 덮고 그 위에 연화문(蓮華紋)이 조각된 탑신괴임석을 끼워 놓았다. 탑신부의 체감률(遞減率)이 매우 안정되어 좋은 비례(比例)를 이루고 있는 등 고려시대의 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제 54호 : 고령지산동당간지주(高靈池山洞幢竿支柱)
이것은 본래의 위치에 동서(東西)로 상대(相對)하여 서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외면(外面)은 양 옆 모서리를 죽이고 종문대(縱文帶)를 조각하여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의장수법을 보이고 있다. 지주의 정상부는 첨형(尖形)으로 하고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3단(三段)의 굴곡을 이루게하여 호선(弧線)으로 처리하였다. 지주(支柱)의 안쪽에는 간공(竿孔) 2개가 있는데 이들은 장방형(長方形)의 형태로 구멍을 뚫어 간(竿)을 끼우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는 화려 단아한 조각이나 만든 솜씨로 보아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중기(中期)인 8세기경에 건조된 우수한 당간지주의 하나라 하겠다.
제 55호 : 결번 <봉정사대웅전(鳳停寺大雄殿) 2009.6.30 국보 제311호로 승격>
제 56호 : 안동동부동오층전탑(安東東部洞五層塼塔)
안동역 구내에 있는 탑으로, 전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안동 지방에는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전탑이 다소 있는데,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른다. 탑은 무늬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다. 몸돌에는 층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했고 특히 2층 남쪽면에는 2구의 인왕상(仁王像)을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사용한 것에서 오는 제약때문에 처마 너비가 일반 석탑에 비해 매우 짧다. 밑면의 받침수는 1층부터 차례로 10단·8단·6단·4단·3단으로 줄어들었고 처마끝에는 기와골을 받기 위해 총총한 나무를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혀 놓았다. 이러한 지붕모양은 탑신의 감실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이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동국여지승람』이나『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법림사(法林寺)의 전탑으로 추정된다.『영가지』에 법림사전탑이 7층이라는 점,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는 점, 탑의 머리장식은 법흥사탑(法興寺塔)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 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 57호 : 안동조탑동오층전탑(安東造塔洞五層塼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基壇)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5∼6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塔身)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이 탑의 체감 비율은 지붕보다 몸돌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점과 5층 몸돌이 너무 큰 것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 58호 : 안동 안기동 석조여래좌상 (安東 安寄洞 石造如來坐像)
현재 불상의 머리는 후대에 새롭게 붙여 놓은 것으로 발견 당시에는 몸통과 대좌만 있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역시 원래 불상과 같이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원래의 모습이 많이 없어지고 보존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나 세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하고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옷은 소매 하나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짤막하게 이어진 옷주름 역시 활달한 모습이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비록 불상의 신체만 남아 있지만 균형 잡힌 자세나 둥글게 처리된 어깨,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 힘있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이 작품이 통일신라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제 59호 :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영주시 순흥면
절에서 의식(儀式)을 행할 때 절마당에 부처와 보살(菩薩)의 행적을 그린 당번(幢幡)을 높은 깃대에 다는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지줏돌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원 위치에 원 모습대로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 면은 중앙에 세로띠를 새겼다. 이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또한 꼭대기 안쪽 면에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파 놓았으며, 바깥 면은 둥글게 경사졌다. 원래는 당간을 받치는 지대석(地臺石)이 있었으나 현재는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초기(初期)의 창건(創建)으로 추정되는 숙수사의 터로 각종 석물부재(石物部材)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953년에 이 당간지주의 북쪽 150m 지점에서 금동불상(金銅佛像) 25구(軀)가 출토(出土)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제 60호 :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榮州 榮州洞 石造如來立像)
이 불상은 큼직한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를 등에 지고 당당하게 서 있는 돌로 만든 보살상(菩薩像)으로 박력 있는 인상이 특히 눈에 띈다. 소박한 삼산보관(三山寶冠), 힘차고 네모진 얼굴, 떡 벌어진 오른손은 가슴께에 올리고 왼손은 천의(天衣)자락 잡고 서 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무릎 밑까지 U자 모양을 그리며 흘러내린 두터운 통견의(通肩衣)와 왼쪽 겨드랑이의 지그재그식의 의문(衣紋)은 고식(古式)의 수법(手法)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형거신광의 광배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두광(頭光)·꽃무늬가 장식된 두신광(頭身光)의 돌출윤곽선·불꽃무늬가 새겨진 외연부(外緣部)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힘차고 박력 있게 표현된 이 보살상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 석불상(石佛像) 연구에 귀중한 작품이라 하겠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이 않으리라. ...........유 한준.
(1963.01.21 지정) 제 1호 : 서울흥인지문(서울興仁之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 2호 : 옛 보신각 동종(舊普信閣 銅鍾)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제 3호 :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탑골공원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제 4호 : 중초사지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제 6호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귀부및이수(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龜趺및螭首)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 7호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 8호 :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여주 高達寺址 石造臺座)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제 9호 :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峰寺玄悟國師塔碑) 용인시 수지읍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玄悟國師)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제 10호 : 강화하점면오층석탑(江華河岾面五層石塔)
이 탑은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은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2000.2.15 보물 지정) 조선 현.숙종때의 鑄鐘匠인 사인비구(思印比丘)가 조성한 동종은 모두 8구로 그중 "강화동종"은 1963년 보물 제11호로 이미 지정되어 있고 이번에 나머지 7점이 지정되어 불교공예미를 표출시킨 명장을 기린다. 사인비구는 신라이래 사원세습으로 내려오던 승장(僧匠)의 맥을 이은 마지막 巨匠이며, 전통수법의 재현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불교공예미를 표출함.
제 11호 : 사인비구 제작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크기는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동종’은 종 몸통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부처님 말씀을 새겨 둔 것이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동종’은 8괘를 문양으로 새기고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안성 청룡사동종’과 조선의 종 모습을 보여주는 ‘강화동종’이 있다.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마리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동종’과 ‘의왕 청계산동종’이 있고,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는 ‘문경 김룡사동종’과 ‘홍천 수타산동종’이 있다.
제11-1호 :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浦項 寶鏡寺 瑞雲庵 銅鍾)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둥근 고리가 있다. 어깨 부분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두어 넓은 띠를 형성하였다. 이 띠 아래로는 일반적으로 9개의 돌기가 있는 것에 반해 5개의 돌기를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말씀인 진언(眞言)을 새겨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제11-2호 : 문경 김룡사 동종(聞慶 金龍寺 銅鍾)
이 종은 조선 후기의 종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같은 해 만들어진 홍천 수타사동종(보물 제11-3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제11-3호 : 홍천 수타사 동종(洪川 壽陀寺 銅鍾)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11-4호 : 안성 청룡사 동종(安城 靑龍寺 銅鍾)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제11-5호 : 서울 화계사 동종(서울 華溪寺 銅鍾)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제11-6호 : 통도사 동종(通度寺 銅鍾)
이 종은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유곽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것으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11-7호 : 의왕 청계사 동종(義王 淸溪寺 銅鍾)
종의 높이는 115㎝, 입지름 71㎝이며, 무게가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와 종 입구부분에는 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가 있다. 어깨 띠 아래로는 연꽃모양의 9개의 돌기가 사각형의 유곽 안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들이 서있다. 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글이 남아 있어 만든 사람과 시기를 알 수 있다.
제11-8호 : 강화 동종(江華 銅鍾) 1963.01.21 지정,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내부
이 종은 사인비구가 숙종 37년(1711)에 제조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제 12호 : 광주춘궁리오층석탑(廣州春宮里五層石塔)
경기도 광주 춘궁동에 있는 5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檀)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는데, 남쪽 면이 부서져 있어 그 안쪽으로 커다란 기둥돌이 들여다 보인다. 이 탑의 특징은 탑신부에서 드러난다. 첫층 몸돌이 2단인데, 아랫단을 4개의 네모난 돌로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어놓았다. 이러한 예는 광주서오층석탑(보물 제109호)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을 구성하는 돌 역시 1∼3층은 4장, 4층은 2장, 5층은 1장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5단, 2∼4층은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러한 구성은 탑신부가 위로 갈수록 강하게 체감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지붕돌 아래는 수평을 이루어 반듯하며, 경사는 완만하면서도 네 귀퉁이 선이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이 남아 있다. 구조상 불규칙적인 면이 많지만, 각 부분의 끝맺음마다 규칙성이 느껴지고, 탑신의 비례도 조화로운 우수한 작품이다. 지붕돌 모서리의 치켜올려진 정도나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한 점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양식의 전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붕돌 받침수가 3∼4단으로 줄어든 점이나, 기단의 가운데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 등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 13호 : 광주춘궁리삼층석탑(廣州春宮里三層石塔)
경기도 광주 춘궁동에 있는 3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檀)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의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한돌로 짜여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땅속에 파묻혀 있고, 아래층 기단 맨윗돌 일부가 깨지고 없어졌다. 윗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아래면이 반듯하고 윗면도 완만한 경사를 보이지만, 지붕돌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뚜렷해 경쾌한 느낌이다. 이 탑은 1층 탑신과 2·3층 탑신의 크기가 줄어드는 비율이 따라 지붕돌도 작아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의 세부적인 양식도 신라 후기 석탑의 전형적인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1966년 보수공사를 실시할 때 탑 안에서 곱돌로 만든 소탑(小塔)들이 발견되었다.
제 14호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수원시팔달구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제 15호 : 법주사사천왕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제 16호 :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 충주시
억정사(億政寺)에 전해오는 비(碑)로, 고려의 승려인 대지국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진 단순한 형태로, 몸돌 윗쪽의 양 끝을 사선으로 잘라냈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비몸돌의 네 면에는 해서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대지국사가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태어나 14세에 출가하고 공양왕 2년(1390)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대사의 인품과 학력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비문은 박의중이 짓고, 승려인 선진이 글씨를 썼으며, 혜공이 새겼다. 힘차고 굳센 필체로 짜임도 우수하다. 4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과도기적 작품으로, 조형상 별다른 특색이 없는 간략한 형식이다.
제 17호 :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이 비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26년(943) 법경대사(法鏡大師)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최언위(崔彦위)가 짓고 글씨는 명필(名筆)로 알려진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법경대사(法鏡大師)는 신라(新羅)·고려시대(高麗時代)의 고승(高僧)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정토사(淨土寺)를 창건(創建)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태조(太祖) 7년(924)에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고 태조(太祖) 24년(941)에 63세로 입적(入寂)하니 시호(諡號)를 법경(法鏡), 탑명(塔名)을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이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제 18호 : 정산서정리구층석탑(定山西亭里九層石塔) 청양
공주에서 청양쪽으로 23㎞ 떨어진 벌판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부근에 고려시대 백곡사(白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주위에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돌려 새겼는데, 바닥선이 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양식상 특징을 드러낸다. 윗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로 알맞은 두께의 돌을 덮어 안정된 모양새를 띠고 있다. 탑신 1층이 큰 점이 특징적인데, 2층부터는 높이가 뚜렷하게 줄어들지만 넓이는 크게 좁아지지 않아 우아한 느낌이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1층은 5단, 나머지 층은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약간씩 치켜올라가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9층이나 되는 층수로 인해 형태가 매우 높아져 안정감이 부족하다. 각 부분의 세부적 조각양식이나 기단의 안상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 19호 : 성주사지오층석탑(聖住寺址五層石塔) 보령시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제 20호 :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
성주사지< 聖住寺址 >에는 금당지< 金堂址 > 전면에 5층석탑 1기, 후면에 3층석탑 3기가 일직선상에 건립되어 있다. 이 탑은 3기 중 중앙에 위치한 3층석탑이다. 나머지 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조성되어 있다. 상하층 기단 면석에는 우주< 隅柱 >와 탱주< 撑柱 >가 모각< 模刻 >되어 있으며, 갑석< 甲石 >은 상하가 동일한 형태이고, 추녀의 양끝과 중앙에 상하로 3개씩 6개의 구멍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갑석 윗면에는 탑신석< 塔身石 >을 받기 위한 별석이 놓여 있는데, 여기에도 1면에 10개씩의 작은 구멍이 한 줄로 뚫려 있는 것이 주목된다. 탑신부< 塔身部 >는 탑신석과 옥개석< 屋蓋石 >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고, 탑신의 1층석은 약간 크며 4면에 우주형이 있으며 남쪽 면에는 서쪽 3층석탑에서와 같이 문짝모양< 門扉形 >과 자물쇠모양, 수환< 獸環 >이 모각되었으나, 정두형< 頂頭形 >은 없다. 옥개석은 탑신에 비해 넓으며, 받침은 각층 5단이고,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각< 轉角 >은 반곡< 反曲 >되어 있으며 윗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상륜부< 相輪部 >에는 노반< 露盤 >이 있는데 상단 둘레에도 작은 구멍이 돌려 있고, 그 위로 복발형< 覆鉢形 >의 석재가 있다. 이 석탑은 서쪽 탑이 장중한 것에 비하여 경쾌하며 조각 수법도 매우 우수하고, 상하의 비례나 결구< 結構 > 수법< 手法 >도 정제된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 석탑이다.
제 21호 :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국립부여박물관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제 22호 : 금산사노주(金山寺露柱) 김제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고려 전기인 935년에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아래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둥근 받침부분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식이다.
제 23호 : 금산사석련대(金山寺石蓮臺)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하대는 엎어놓은 연꽃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다.
제 24호 :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고려(高麗) 숙종(肅宗)(1095∼1105)의 법주(法主)였던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탑비(塔碑)이다. 비문에는 왕사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여 대사(大師)를 법주로 삼았고, 대사 사후에 왕사(王師)로 봉(封)했으며, 시호(諡號)를 혜덕(慧德), 탑명(塔名)을 진응(眞應)이라 했다. 이 비문(碑文)을 쓴 사람은 당대의 명필(名筆)인 정윤(鄭允)이라는 설이 있으며 대사 입적후 15년인 예종(睿宗) 6년(1111)에 해서체(楷書體)로 새긴 비문이다. 현재, 이수는 멸실되어 없으며, 비신 주위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고 양 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나 장식도 없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제 25호 : 금산사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세운 높이 7.2m의 5층석탑이다. 탑의 구조는 통일신라(統一新羅) 석탑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下層基壇)이 협소하고, 옥개석(屋蓋石) 추녀끝이 살짝 들려 있는 등 고려(高麗)시대 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기단부는 10여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조립하였는데,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隅柱)와 중앙에 탱주(撑柱) 1주가 조각되었다. 탑신부는 1층은 여러개의 석재로 조립되고 2층이상은 각각 1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층별 체감비율은 완만한 편이며, 각 옥개석 상면에 1단의 각형 괴임을 하였다.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정상부의 보주까지 온전히 보존되었는데, 노반(露盤)이 크고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형태의 복발(覆鉢)이 있고, 복발 위에 앙련이 새겨진 앙화석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보륜(寶輪)과 보주(寶珠)가 있다.
제 26호 : 금산사방등계단(金山寺方等戒檀)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이 석종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형이 범종과 비슷해서 석종으로 불리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제 27호 : 금산사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인 대적광전 앞의 왼쪽으로 옮겨 왔다.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에는 연꽃조각을 아래위로 장식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보충한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이 놓여 있다.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제 28호 : 금산사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금산사 경내에 있는 이 당간지주는 높이 3.5m로 양쪽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지주의 기단은 한 층인데, 잘 다듬은 6장의 길쭉한 돌로 바닥을 두고, 그 위를 두 장의 돌을 붙여서 마무리했다. 기단 위로는 당간을 세우는 받침을 지주 사이에 둥근 형태로 조각하였고, 받침 주변에는 괴임을 새겨두었을 뿐 별다른 꾸밈은 없다. 양쪽 지주의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는 반면에,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세로띠를 돋을새김하였다. 지주의 꼭대기부분은 안쪽 면에서 바깥쪽 면으로 떨어지는 선을 둥글게 깎았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은 각각 지주의 위·중간·아래의 3곳에 뚫었다. 이처럼 구멍을 3곳에 두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으로, 경주보문리당간지주(보물 제123호), 익산 미륵사지당간지주(보물 제236호)에서도 볼 수 있다.
제 29호 : 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금산사 심원암에서 볼 때 북쪽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탑이다.『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었는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이 절을 창건하여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탑신의 몸돌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각 몸돌을 덮고 있는 3개의 지붕돌은 넓적하며, 낙수면의 경사를 급하게 처리하였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깊은 산중에 있었던 탓인지 탑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제 30호 : 만복사지오층석탑(萬福寺址五層石塔) 남원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만복사의 옛터에 서 있는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훗날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 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