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도 시름도 눈길에 ‘차곡차곡’
떠들던 아줌마들이 잠잠해졌다.
북한강변을 달리던 열차 안 조명은 모두 꺼졌다. 어슴푸레 촛불 하나 밝혀졌고 태백선 열차는 숨막히는 강변 야경을 배경삼아 달렸다. “웬 아이 드림 (When I dream∼).” 스피커에서 영화 ‘쉬리’의 주제곡인 캐럴 키드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강원도 산골마을을 오가는 ‘환상선 눈꽃열차’는 이렇듯 추억을 적시며 덜컹거렸다.
눈으로 뒤덮인 꿈 같은 기차역들이 있다고 했다. 흰 눈 소복한 철로에 나서면 발목까지 함박눈이 쌓이고 인적이 드문 곳. 청량리에서 눈꽃유람을 위해 마련된 환상선 눈꽃열차는 외딴 역인 승부역 추전역으로 떠나기 전 새벽 어둠속에서 숨을 골랐다.
동틀 무렵 설레는 마음으로 눈꽃열차에 올랐다. 출발과 함께 따뜻한 멘트가 흘러 나왔다. “코코아 한잔이 생각되는 겨울,추억속으로 여행을 떠나시죠.”
양평 원주 단양을 더듬은 눈꽃열차는 경북 봉화군에 접어들어 첫 번째 꿈을 만들어 냈다. 승부역. 낙동강의 발원지를 앞에 두고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곳. 콘크리트 담장,가시덤불 대신 맑은 냇가가 기차역의 경계선이 됐다. 역 앞 굴통소 건너 용관재에는 흰 꽃이 하얗게 피었다. 역 앞에는 난전이 열렸다. 시루떡,감자,호박죽 잔치가 펼쳐졌다. 산골 오지의 승부역에도 전설이 서렸다. 조선시대 승부로 귀양가던 절충장군이 재를 넘기 전 꿈속에서 용이 나타나 고갯마루를 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장군은 결국 목숨을 건졌고 그 후 승부역 앞에 위치한 큰 바위에는 용관바위,언덕에는 용관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냇가,징검다리,용관재로 뻗은 오솔길이 모두 ‘눈꽃 세상’이었다.
열차는 승부역을 떠나 강원도 태백시 추전역을 향해 달렸다. 눈산과 하얀 들판이 창밖에 펼쳐졌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듯한 착각이 피어 올랐다.
추전역은 우리나라 가장 높은 곳에 인연을 만들었다. 역 앞에는 해발 855m를 알리는 이정표만이 덩그러니 놓였다. 추전역에는 하루에 열차가 단 두 번 정차했다. 추전역 직원은 “두 차례 열차가 서는 것도 출퇴근 하는 역무원을 태우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오전 9시1분 영주행. 오후 8시21분 제천행. 역 뒤의 설산과 역 앞의 꼬마열차,시구 한 구절만이 역사를 외롭게 지켰다.
희망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자리했다/우리나라 제일 높은/해발 팔백오십오미터 추전역//서민의 애환 덜컹이는 태백선 완행열차/그 화력 좋던 석탄 실어보내고/가슴 비운 사람끼리 꿈을 안고 찾아드는 태백의 관문(후략·정연수 추전역)
예전 추전역은 석탄을 나르던 화물열차가 서던 간이역이었다. 검디 검어야할 추전역이 흰색으로 변했다. 발목이 빠지도록 눈이 주변 정경을 ‘동화속 세상’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언 손을 녹이며 참두릅,취나물,좁쌀술을 팔았다.
외딴 역에서 눈꽃을 품었던 열차는 설경 너머 석양을 벗삼아 달렸다. 흰 눈 사이로 거뭇거뭇한 산골마을에는 흰 연기가 추억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승부역 추전역으로 떠나는 ‘환상선 눈꽃열차’는 소박한 꿈을 담고 있다. 객차 안에는 흰머리 희끗희끗한 노부부들도 ‘싱 어롱’이벤트에 맞춰 춤을 췄다. ‘여고시절’을 따라 부르던 아줌마들은 수학여행을 온 듯 웃음을 뿜었다.
겨울밤 불을 끈 채 강가를 달리고 있는 이상한 기차를 발견한다면 입가에 미소를 지어도 좋다. 그 열차는 ‘환상선 눈꽃열차’이고 아름다운 사랑과 추억을 싣고 떠나고 있으므로.
■ 여행 메모
환상선 눈꽃열차는 연인들끼리 추억을 담아내기에 좋다.2일∼2월7일,2월16∼28일 매일 오전 7시45분에 청량리에서 출발해 단양·승부·추전역을 둘러본다.단양역에는 얼음놀이터가,승부역에는 눈길 산책 코스가 준비됐으며 추전역에서는 눈썰매도 즐길 수 있다.중앙·영동·태백선 코스를 경유한 열차는 오후 8시56분 다시 청량리에 도착한다.
열차 내에는 '도우미'들이 진행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따사롭다.객실에서 통기타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꼬마들에게 풍선도 나눠준다.열차 내 카페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린다.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불꺼진 객차에서 진행되는 북한강 야경 감상은 열차여행의 백미.승부역 추전역에서 양미리 구이,피데기 오징어,감자떡 등을 맛볼 수 있다.이미 예매가 끝난 표는 청량리에서 출발 5∼10분 전에 반환되는 표를 챙길 수 있다.
'겨울 기차여행'은 정동진,추진해변을 둘러보는 '환상의 해안선 여행'(2월28일까지),간월도 신두리사구를 유람한 뒤 유람선을 타고 가의도에서 달맞이를 즐기는 '달빛 소나타 여행'(매월 보름 전후,1월26·27일) 등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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