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노트르담 사원이 위치한 곳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후 4세기경에 카톨릭이 국교로 지정되면서 이곳에 성당이 만들어졌고 1163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파리 주교에 의하여 본격적인 개축이 시작되면서 길이 130m, 폭 48m, 높이 35m의 전형적인 고딕양식 건물이 만들어 졌다. 많은 건축가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참여해 무려 170년 동안 건설됐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에 첨탑이 파괴되기도 했고 한때 포도주 창고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세기 비올레르 뒤크(Viollet-le-Duc)에 의해 재건됐다.
원래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말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이며 성모마리아를 지칭한다. 정면에 보이는 두개의 종탑과 장미창이 있으며 입구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정면에서 왼쪽 문이 ‘성모마리아의 문’, 가운데가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최후의 심판의 문’, 그리고 우측에는 ‘성녀 안나의 문’이다. 이 문들 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상징하는 28개의 입상이 나열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화려한 장관을 볼 수 있다. 좌우에는 각각 인류의 시초인 아담과 이브의 조각이 있다.
성당 내부는 무려 9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3개의 장미창과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장미창은 직경이 13m에 이르며 햇빛의 각도와 강약의 변화에 따라 창의 모습도 시시각각 변하게 돼 ‘신비의 색깔’이라고도 칭해진다. 3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세느강과 파리의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노트르담 사원의 또다른 특징 중의 하나라면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앞면 보다는 뒷면이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는 점이다. 노트르담 사원은 그간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심판, 나폴레옹 대관식, 드골 장군의 장례식, 그리고 미테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등이 치러져 프랑스인들에게는 유서 깊은 현장이자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원으로 깊이 각인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방문하면 4명의 연주자에 의해서 연주되는 파이프 오르간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연주 소리를 듣다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위대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이곳을 배경으로 종지기 콰지모도의 사랑과 자유를 담은 소설 <노틀담의 곱추>를 쓰기도 했다.
1876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1919년에 완공된 샤크레케르 대성당은 건축가 우트리오(Utrillo)와 몽마르뜨에 살고 있던 1백여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이 합심해서 지은 성당이다.
파리의 대주교 기베르에 의해서 건축이 추진된 이 성당은 당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카톨릭의 숭고한 신앙심을 일깨울 목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지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프랑스인들은 자국 예술의 위대성을 자랑해 자존심을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신앙심을 더욱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건축비는 신자들에 의해서 충당되었는데, 그들의 기부금만 4천만 프랑에 달했다. 당시 모금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애초에 이 성당은 온통 하얀색이었고 이러한 외양이 기존 파리의 건축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다. 특히 인근의 개선문과 에펠탑 등과 그 건축 양식에서 닮은 부분이 없고 지나치게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건축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한번은 들르는 유명한 건축물이 됐다. 특히 중앙의 3개의 돔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는 ‘성심성당’, 즉 ‘성스러운 마음’의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중앙에 가장 큰 대사원이 있으며 종탑의 높이는 91m에 달한다. 종탑 안에 있는 종은 유럽에서 가장 크기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의 현관문에는 현란한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고 80m에 달하는 중앙 돔에 오르면 파리 외곽 50km까지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개선문, 에펠탑, 불로뉴 숲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콩코르드 광장과 센 강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 꼭대기까지는 수많은 계단이 있으며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이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보고 있으며 특히 내부 천정에 그려져 있는 예수와 천사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성당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는 옛날 몽마르뜨 화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명화가들이 관광객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있으며 근처에는 유명한 작가와 음악가들이 묻혀있는 묘지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며 장장 20만점이라는 대량의 소장품 덕에 관람 기간만 일주일이 넘게 걸릴 정도라고 한다.
원래 루브르 박물관은 1190년 필리프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군사시설이었지만 1300년대 프랑스 군주였던 샤를르 5세는 이를 저택으로 사용했다. 그 후 프랑수와 1세는 군사적인 냄새가 나는 권위적인 외형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롭게 변형시켰고 이후 300년에 걸쳐 궁전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시기에 루브르 궁전은 끊임없는 개축과 증축을 한 뒤에 결국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루브르 궁전에는 원래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 역대 왕들이 수집해놓은 미술품이 있었다.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조성하면서 더 이상 루브르가 궁전의 역할을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 나폴레옹 시대에 이곳을 일시적으로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시물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왕실의 보석과 귀금속류가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왕실의 보물을 공개하기로 결정해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얻었으며 그때부터 온전히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브르가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박물관으로 탄생하는 데에는 또 한번의 대대적인 공사가 뒤따랐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은 이른바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인 개축을 시도했고 이때 모든 전시실로 연결되는 중앙 뜰 가운데의 유리 피라미드도 건설했다. 이는 당시 매우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았으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됐다. 피라미드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안내소와 주차장, 그리고 각종 상점이 있는 새로운 지하공간인 ‘까루젤 뒤 루브르(Carrousel du Louvre)’를 만날 수 있으며, 세개의 전시관인 쉴리(Sully), 드농(Denon), 리슐리유(Richelieu)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전 세계 미술가와 미술연구가들이 찾고 있을 뿐 아니라 관광객들 역시 반드시 거치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특히 젊은 화가나 조각가들은 이곳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창작열정을 불태우기도 한다. 보관되어 있는 작품은 고대에서부터 19세기까지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연대, 지역별로 분류되어 각 건물에 배치되어 있다. 세잔, 고흐, 르누아르, 모네 등 거장의 작품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만국 박람회장에 위치한 높이 984피트(약320m), 무게 7000톤의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시공자인 프랑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으로 불리고 있다. 1887년부터 약 300여명의 철강기술자가 동원되어 2년 동안 공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변형을 거쳐왔다. 이제까지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연평균 6백만명으로 총 2억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파리지앤(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각종 행사를 이곳 근처에서 치루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에펠탑은 애초에는 특별한 송수신 기능이 없게 만들어졌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55피트의 안테나가 덧붙여져 TV송신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1930년까지 약 40년간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이 탑이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세느강 근처 땅은 모래가 섞인 연약한 지반이라는 점과 높이가 300m를 넘어가면 바람이 건물을 미는 힘인 횡력이 급격하게 높아진다는 점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미 파나마 운하의 수문건설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 건설에 참여했던 에펠의 뛰어난 건축능력은 이런 한계점을 극복했고, 이 탑은 11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다. 에펠탑은 건설 당시에도 파리 시민들의 숱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파리의 건물들이 보통 5~6층 높이인데 비해 에펠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 조화되는 도시미’를 강조하던 파리 사람들이 ‘오만할 정도로’ 높은 에펠탑을 묵과하기도 힘들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인 모파상, 에밀 졸라, 뒤마 등 3백여명이 탄원서를 제출할 정도로 반대는 격렬했다. 특히 에펠탑 건설에 가장 많은 반대를 했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완공된 후 내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곳이 흉물스런 에펠탑을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파리의 유일한 곳’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에펠탑에 오르면 파리시 전체는 물론, 바로 옆 세느 강에서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유람선을 감상할 수 있다. 내부에는 세군데의 테라스를 비롯해 레스토랑, 카페, 영화관이 들어서 있으며 리셉션,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귀스타브 에펠 홀도 있다. 에펠탑은 그간 자연적인 변화를 겪기도 했는데, 기온으로 인해 높이가 15cm상승하고 바람 때문에 12cm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탑 전체를 휘감고 있는 조명은 어두워진 후부터 새벽까지 매 시간마다 10분간 화려하게 빛난다.
프랑스 파리 드골 광장에 건축된 '에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 시대에 건축된 대표적인 개선문이다.
개선문
Arch of Triumph
프랑스 파리 드골 광장
1806년-1836년
전쟁승리 기념
나폴레옹 시대
J.F.샬그랭, 페르시에
개선문이란 보통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아치 형태의 건축물을 말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많이 세워져 왔으며 현대의 개선문이라고 한다면 프랑스 파리의 드골 광장에 세워져 있는 ‘에투알 개선문’을 지칭한다.
1805년 오스터리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너희들은 개선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6년부터 J.F.샬그랭이 설계한 개선문의 건축이 시작됐다. 그러나 샬그랭이 얼마 있지 않아 사망하게 되고 나폴레옹 자신도 실각을 했기 때문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후 건축사 페르시에가 제출한 변경안을 토대로 건축이 이어졌고 30년만인 1836년에 겨우 완공됐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나폴레옹 자신도 사망한 이후였다.
높이 49m, 너비 45m의 에투알 개선문은 고대 로마 개선문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근세 고전주의는 ‘조화와 명석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사조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부활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진 예술의 한 경향이다.
아치의 중앙 밑부분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싸우며 죽어갔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우측 기둥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도인 ‘라 마르세예즈(‘진군’이라는 의미)’가 유명하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지역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어 나폴레옹 시대 당시 프랑스 군대의 위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개선문은 지금도 매년 국경일 축하 행사때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개선문 내부에는 프랑스 고문서들이 보관된 박물관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선문 위로 올라가면 파리 시내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선문은 특히 프랑스 시내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데, 이를 기점으로 12개의 대로가 방사선 형태로 뻗어져 있다.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 방향으로는 콩코르드 광장, 튈르리 공원, 루브르 박물관 등이 이어져 있다. 샹젤리제 거리 오른 편 끝이나 샹젤리제에서 개선문 뒷 쪽으로 있는 그랑드 아르메 거리에서 지하계단을 이용하면 개선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상제리제 거리는 고급 상점과 카페,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어 세계에서 가장 귀족적인 거리라는 정평을 얻고 있다.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독립문도 바로 이 에투알 개선문을 본 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 국회의사당 : 1843년 화재가 발생해 모두 타버리고 48년 만인 1888년에 가서야 현재의 국회의사당으로 재탄생했다.
영국 국회의사당
House of Parliament
영국 런던
1840년-1888년
궁전
윌리엄 왕
찰스 배리
영국 국회의사당은 ‘의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전 세계에 심어놓은 민주주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회의사당의 정식이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The Palace of Westminster)’인데 그 기원은 1066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북부에 있던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를 침입하여 무력으로 정복했고, 이때 왕이 된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시대인 1090년에 완성됐다. 템즈강을 바라보면서 웅장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1500년대 초반까지 헨리8세의 왕궁으로 사용되어져 왔고 정치인들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당시 목조건물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843년 사소한 실수로 인해 화재가 발생, 전체 사원의 3분의 2가 없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서 채택된 수학자이자 유명한 건축가인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의 설계로 1840년에 착공된 후 48년만인 1888년 완공된 것이다. 요크셔지방의 돌을 직접 실어와서 지어졌으며 우아한 고딕양식으로 재탄생,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특히 이 국회의사당은 건축 양식으로 표현할 때 ‘고딕 리바이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즉, 예전 중세 시대에 풍미했던 고딕풍을 현대에 와서 다시 ‘리바이벌(재현)’했다는 의미이다. 빅토리아 왕조시대 최초의 대규모 건축물로 기록되고 있다.
3만 평방미터에 부지에 길이 300m, 1,100여개의 방이 있으며 복도의 총 길이만 3.2km에 이른다. 내부에는 총 100여 곳의 층계가 있으며 남쪽 부분은 하원, 북쪽 부분은 상원이 자리잡고 있다. 의회가 열릴 때는 나름대로의 표시를 하는데, 낮에는 전체 의사당내 가장 높은 건물인 빅토리아 타워에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이 걸리고 밤에는 시계탑인 빅벤에 조명등이 켜진다고 한다.
내부는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어 의원들에게 청렴한 생활을 하도록 암시하고 있다. 의원사무실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면담은 오직 로비에서만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오늘날 ‘로비스트’라는 말의 유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국회의사당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높은 예술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지금은 테러단체 ‘IRA’의 폭탄테러 이후 의사당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방청 형식을 빌어 하원에는 출입할 수 있다.
1886년 공사가 시작되어 8년만인 1894년에 완성된 영국 템즈강의 명물 ‘타워브리지’. 그 쓰임새는 단순한 일반 대교(大橋)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수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성(城)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하다. 강물 위로 배가 지나가게 되면 수압을 이용해 다리가 들어올려지게 되고 한번 열릴 때 총 3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배가 중요한 교통기관이었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40-50회 가량 열렸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2-3회 정도에 그치고 있어 운이 닿지 않으면 이런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총길이 270m, 총중량 1100톤에 달하는 타워브리지는 대영제국의 힘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건립되어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빅토리아풍과 고딕풍이 합쳐진 세련된 멋을 보여주고 있다. 타워브리지는 특히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밤이 되면 주변의 조명이 브리지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준다. 템즈강의 은은한 물결과 그 위의 타워브리지, 그리고 런던탑 등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남긴다. 탑 내부로 들어가면 역사적 자료들과 함께 다리의 구조에 관한 여려가지 사료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다.
타워 브리지는 완공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시기 동안 단 한번도 고장난 적이 없다. 영국 토목기술자와 건축가들의 놀라운 기술력과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타워브리지는 1980년대 이후 전체가 박물관화 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서 기계공학, 토목공학은 물론이고 구조기술, 전기 엔지니어링, 실내 인테리어, 조각 등 예술과 기술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다. 공학자 존 울프 배리, 조각가 호라스 존슨 경이 대표적인 참여자들이며 주탑부는 강철 프레임에 외관을 벽돌로 장식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템즈강에는 타워브리지 이외에도 ‘런던 브리지’라는 다리가 있다. 이름이 비슷해 관광객들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예전에 미국인들이 다리를 사기 위해 런던시와 협상 중이었는데, 미국측 담당자가 타워브리지와 런던브리지를 혼동해 끝내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런던브리지를 샀다는 것이다. 한때 타워브리지는 극심한 생활고나 실연을 당한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 위해 많이 찾기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940년경에는 타워브리지의 예술성을 폄하한 일부 엔지니어와 예술가들에 의해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고딕 양식을 벗겨내고 그 위에 유리 구조물을 입혀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탄생 시켰으며 여전히 전 영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