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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즉 이 시기에 한반도의 남부 지역을 경략한 기사는 『일본서기』진구황후(神功皇后) 49년 조의 기사밖에는 없습
니다. 그 내용은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에게 명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인데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
아니고 이 시기의 야마토 왕조도 실체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이 시기의 한반도 남부 및 열도의 경략을 한
사람은 바로 '근초고왕-근구수왕'이라는 사실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3세기 후반(266년)부터 5세기 초(413년) 까지 신뢰할만한 사서에는 일본 열도에 대한 역사
적 기록이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 역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일정한 정도의 틀을 갖춘 고대국가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 후반 즉 4세기경에 규슈부터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기나이(畿內) 등에 걸쳐 전방후원분(前方
後圓墳)이라는 묘제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4세기에서 7세기까지를 고분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기록이 없으므로 고분으로 역사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해야 하는 형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분시대는 크게 전기와 중기, 후기로 나눠지는데 전기는 3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소국 연맹체, 5세기
후반~7세기 말까지는 초기 고대국가로 보고 있습니다.3)
다만 여기서 말하는 소국들 가운데는 부여계와 같이 이미 고대국가의 틀을 완성한 민족 이동도 있었다는 사실입
니다. 이들이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이 야마토 왕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세기 후반 가야지역의 유적과 유물들 가운데 김해 대성동 13호분과 2호분의 것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수준이 가장 높은 것이며 여기에서 출토된 왜계(倭系) 유물들은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4)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3세기 후반 또는 늦어도 4세기 초에 일본 열도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공유하는
연합정권이 성립되었으며 이를 전방후원분체제(前方後圓墳體制)라고 하기도 합니다.
전방후원분의 분포 상황이나 규모를 볼 때, 오사카(大阪) 평야나 나라(奈良) 분지가 중심이고 그 주변지대에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전방후원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5)
그러나 『송서』에 나타난 왜왕의 상표문을 토대로 본다면, 왜는 대체로 5세기 즉 430여년 경부터 460여년 경에
야마토 왕조에 의해 간사이(關西) - 규슈(九州) 지역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의 반도부여(백제)는 비류왕 - 개로왕이 다스리는 시기입니다.
그 동안 열도(일본)의 연구에 따르면, 5세기 왜국은 각 지역의 수장들에 의해 공립(共立)된 연합정권으로서 그
범위는 규슈 중부로부터 간토(關東) 지역에 이르며 왜왕은 바로 이 연합정권을 대표하는 대수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5세기까지 열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소국들이 있는 가운데 야마토
정권이 비교적 우위에 있는 형태라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면 기나이(畿內)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 정권은 점차 초월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
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반도부여에서는 개로왕이 피살되고 반도부여(백제)는 멸망(475)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도부여가 열도의 지원으로 국가를 재건을 하는 것으로 봐서 열도에도 상당한 부여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의문의 인물로 개로왕의 아드님인 곤지왕자입니다.
곤지왕자는 가장 많은 의문과 비밀을 가진 인물로 이 곤지왕자를 잘 분석하면 부여의 역사는 절반을 풀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앞으로 상세히 분석해드립니다).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해, 홍윤기 선생의 견해를 인용하여 곤지왕의 손자들이 반도부여(무령왕)와 열도
부여의 왕(게이타이)으로 등극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제 연구의 결과는 곤지왕의 아드님들이 반도부여와 열도부여의 나라님(임금)으로 등극하는 것으로 나타
났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충분히 고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열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 제26대)을 현재 일본 천황가의 시조로 보고 있습니다.
즉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는 일본의 황실은 만세일계가 아니라 세 번째 왕조이며 현재의 천황가는 게이타이 천황
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삼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즉 미즈노 유 교수는 스진천황(崇神天皇 : 제 10대) - 닌도쿠 천황(仁德 天皇 : 제16대) - 게이타이 천황으로 세
번의 왕조가 교체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곤지왕자편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이 시기 왜왕들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는 사서는 『송서(宋書)』입니다.
『송서』에는 왜왕이 송나라 황제에 보낸 상표문이 실려있는데 여기에는 왜왕들이 "동으로 정벌하고(東征), 서쪽
지역을 복속시켰으며(西服), 바다 건너 북쪽까지 평정(渡平海北)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야마토
왕조가 규슈 중부로부터 간토(關東)에 이르는 지역의 연합정권을 대표하는 대수장의 지위에서 명실공히 왜왕의
지위를 구축해간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왜왕의 휘(왕의 이름)는 진(珍)과 제(濟)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은 일본 고대사 연구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인데 앞으로 충분히 검토하고 분석해 갈 것입
니다.
참고로 위에서 말하는 바다건너 북쪽 즉 해북(海北)이라는 표현을 두고 일본측에서는 한반도로 보고 있고,
한국측에서는 규슈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왜 5왕 편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다시 4세기 초로 돌아가서 부여계의 제 3차 남하 부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시기는 부여가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입니다.6)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봐야합니다.
즉 부여계의 3차에 걸친 이동을 이해하기에 앞서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정세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당시의 국제정세가 어떤 방식으로 부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봐야만 할 것입니다.
먼저 부여계의 이동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모용부(일반적으로 선비족)에 대해 살펴보고 모용부와 고구려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부여의 입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필자 주
(1)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권(해냄 : 2006) 48~90쪽.
(2)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102쪽.
(3) 노중국「5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234쪽.
(4)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푸른 역사 : 2002) 137~144쪽.
(5)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27쪽.
(6) 『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
험난한 부여의 여정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후한서』에는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부 즉 모용씨는 선비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민족명이 아니라 다만
선비산(鮮卑山)에 살고 있어서 선비족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민족명이 아니죠. 선비산에 산다고 해서 선비족으로 부른 것을 정상적인 민족명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비란 한족의 사가들이 임의로 부른 말인데 계보적으로 본다면, 몽골 쥬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반도 사학계
의 용어로 쓴다면 동호(東胡)에 해당합니다.
또는 후에 이들이 스스로 '쉬', '쉬웨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예(濊)에 가까운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고조선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 점을 좀 보고 넘어갑시다.
동호계(東胡系)는 선비·오환(오랑) 이후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飁),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인데7), 이 한자(漢字) 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iron, sun, bird, east)]에 가깝게
납니다.
즉 해(奚)는 쉬[xī], 습(飁)은 [xí], 실위(室韋)는 [shìweí] 등으로 소리가 나서 범한국인을 의미하는 예(濊 [쉬])
또는 예맥(濊貊 : [쉬모])과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물론 이 발음들이 그 당시에 어떻게 불리었는 지를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고대의 운서(韻書)를 보더라도 그것
을 해설한 발음을 오늘날에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민족을 지칭 하는 말들이 하나의 공통된 발음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수렴의 정도를 토대로 이
민족을 부르는 말들을 추정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랑캐로 알고 있는 말갈(靺鞨)도 실제 발음은 [모쉬] 또는 [모허]로 나타나 예맥을 거꾸로 부른 말로
추정됩니다. 즉 말갈도 맥예(貊濊)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는 "해(奚)는 본래 흉노(匈奴)의 별종", 『북사(北史)』는 "해(奚)는 그 선조가 동호(東胡)의
우문(宇文)의 별종"이라고 합니다.
선비족은 2세기경 영걸 텡스퀘이(檀石槐)에 의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가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 모용부
(慕容部), 탁발부(拓拔部) 등의 4개 부족으로 재편되었는데 이 가운데 모용부와 우문부가 주도권 쟁탈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란은 이 선비족 가운데 우문부의 후예들입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이 후에 거란으로 불렸습니다.
즉 『위서(魏書)』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는 동류로 고막해의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되어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송막지간은 시라무렌 이남과 조양(朝陽) 이북의 사이로 현재의 내몽골 지역입니다.
3세기 중반(245)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모용부가 동원되어 고구려와 일전을 하게 되었고,
이후 3세기 후반(293년경)에는 모용부가 독자적으로 군대를 몰아 고구려를 침입합니다.8)
이에 따라 고구려는 우문부와 단부 등 나머지 선비족들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견제합니다.
4세기 초 서진(西晉) 말기에 쥬신 천하(이른바 5호16국 시대)가 개막되어 만주 지역의 쥬신들이 대거 남하함으
로써 고구려는 이를 이용하여 요동 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습니다.
341년 모용부의 모용황은 동진으로부터 연왕(燕王)으로 책봉받게 되어 이 나라를 전연(前燕)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연은 342년 고구려를 침입하였고 이 전쟁에서 고국원왕이 대패하였고, 전연은 고국원왕의 어머님을 사로잡아
돌아갑니다. 성공적으로 고구려를 정벌하여 후환을 없앤 후, 전연은 여세를 몰아 중원으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352년 전연의 모용준(慕容儁)은 스스로 황제에 올라 업(鄴 : 현재의 베이징 서남)을 수도로 하여 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3세기 후반 모용부(전연)의 성장은 부여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부여는 천년의 숙적 고구려의 압박과 모용부의 공격으로 국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됩니다.
초기에 위나라 - 공손연의 갈등이 부여계의 2차 남하를 촉진했다면 고구려 - 모용부의 압박은 부여계의 3차 남하
를 초래한 것입니다.
즉 285년 모용부는 부여를 침략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 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근거지를 서쪽으로 옮겼지만, 346년 전연의 모용황의 군대가 침입하여 왕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
사실상 궤멸되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494년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됩니다.
지금까지 본대로 3세기말에서 4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은 부여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
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도 모용부의 세력에 밀리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부여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의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이 부여계의 3차 남하의 주요 내용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가진 의문은 왜 근초고왕 계열이 남으로 쫓겨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한반도 중남부는
물론 고구려까지 정벌할 정도의 세력을 가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동호계의 선비의 움직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4세기에는 동호계의 선비가 강성해지면서 만주에서 고구려, 부여 모두 큰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근초고왕 계열이 남하한 것이죠. 만주에서 쫓겨 온 근초고왕계가 신속하게 정벌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
에는 고구려의 약화가 큰 원인입니다.
고구려는 요동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의 충돌이 불가피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320년 선비(鮮卑)의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 등과 연합하여 전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화북의 후조(後趙)와 화친하여 전연을 견제하다가 모용황(慕容皝)의 공격(342)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의
어머니와 수만의 남녀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에 고국원왕은 평양성으로 피신(343)하여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체체 정비를 도모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는 필연적으로 만주에서 피신한 한강 유역의 부여계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고국원왕은 군사 2만으로 남부여계(백제)를 정벌(369)하다가 오히려 황해도 치양(雉壤)에서 패퇴하여 평양성
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이 같이 근초고왕 당시의 고구려는 극심한 외환에 시달려 국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근초고왕 - 근구수왕
계는 그 틈새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만주에서 이동한 부여계와 한강유역의 부여계의 연합세력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 때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근초고왕 전후로 급격한 변화들이 감지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한반도 중부에서 느닷없이 출현하였고 근초고왕 이후 고이왕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夫餘氏)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백제의 왕성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부여씨로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분은 바로 근초고왕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진서(晉書)』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휘(임금의 이름)는 부여영(夫餘暎)입니다.
반도부여는 근초고왕대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뒤, 동진에 사신을 파견(372)하여 진동장군(鎭東將軍) 령낙랑태수(領樂浪太守)를 책봉받고 이 시기
를 전후로 하여 박사 고흥(高興)에게 국사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이 책은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책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이후
나타나는 왜왕들의 행태와 대단히 유사합니다.
마치 할아버지의 모범들을 후손들이 그대로 따르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 주
(7) 『新五代史』卷74 「契丹」; 『北史』卷94 「奚」.
(8) 『삼국사기』봉상왕 2년, 5년.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3)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부여계가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는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연구는 열도(일본)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거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경우 내물왕(356~402),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
(346~375), 고구려는 태조왕(53~146) 이전은 전설시대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열도(일본) 연구의 큰 흐름은 만주 지역에서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크게 격파된 부여계가 옥저쪽으로 피난 갔다가
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건국했거나 한반도의 한족(韓族)과 연합하여 고대국가 백제를 건설했다는 논리인데
일본에서는 거의 정설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들의 견해와 제 견해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그리고 이들의 분석의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상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부여계의 한반도 남하에 대하여서는 일찌기 이나바 이와끼치(稻葉岩吉)가 지적하였습니다. 이나바 이와끼치에
따르면, 285년 경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부여의 잔여 세력들이 동옥저로 피난하여 정착했다가
4세기초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나바이와끼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위례성(慰禮城)을 들면서 위례라는 말이 만주어의 우라(江城)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추정하였습니다.9)
그런데 이 분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이왕 즉 부여왕 울구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을 무조건 황해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당시는 고이왕(234~286) 말년에 해당하는데 고이왕은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대방 땅에서 요동부여(또는 남부여)를 건설했다가 공손씨(公孫氏)의 몰락과 함께 한반도 쪽으로 남하해
갔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설령 이 때 사용된 대방이 황해도라고 한다면 그것의 원인은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이전에 위나라
명제(明帝)의 명을 받은 사마의와 관구검에 의한 공손씨(公孫氏) 토벌이 그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대쥬신을 찾아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여계의 역사에 대해 가장 주목할만한 견해는 열도 사학계에서 만주사에 대한 토대를 구축했던 시라토리 구라
키치(白鳥庫吉)입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라토리는 4세기 초 동북아시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에서 한족(漢族)을 몰아내었고 전연을 건설한
모용씨(慕容氏)가 크게 성장하여 주변을 압박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가 대이동을 했으며, 이 대이동으로 한반도에서도 씨족제도(clan system)에 기반했던 백제
(伯濟)가 고대국가 백제(百濟)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4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백제를 포함한 삼한은 씨족제도 수준에 불과했는데 부여계의 대이동에
의해 고대국가로 탈바꿈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285년 모용씨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부여왕가의 일족이 옥저(현재의 함흥 지역)
로 피난갔다가 313년 대방군이 축출되자 주변의 예맥과 함께 서진하여 대방을 점령하기 위해 국제전쟁에 참가
하던 가운데 한반도에서 북상한 강력한 세력인 백제의 걸사(乞師)의 요청을 받고 이들을 구원하고 연합하여 통일
국가로 백제를 형성하였다고 시라토리구라키치는 주장합니다.
당시 새로운 국가는 부여족에 의해 장악되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삼한의 한족(韓族)들은 피지배층이 되었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백제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주요한 예가 된다고 합니다.10)
전체적으로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당시 한강유역의 백제(伯濟)를 과대평가했다는 것과 부여
계의 이동을 대방군의 점령이라는 사건과 연계를 시킨 것입니다.
즉 시라토리의 분석의 문제점은 당시 삼한 지역에서 절대강자였던 백제가 부여족과 연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백제라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며 백제가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소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그 이름 또한 백제(伯濟)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11)
그러니까 한반도의 미약한 소국들 가운데 절대 강자는 오히려 만주에서 이동한 부여계입니다.
그들은 한 때 공손연과 더불어 중원을 도모했던 사람들이고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 요동지역
의 부여계는 당시로서는 고대국가로서도 대규모인 2만여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삼국사기』(태조대왕 69)에는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
를 공격하니) 고구려가 대패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라토리구라키치의 분석은 대륙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한반도 남부의 정치세력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본 것도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이왕 계열의 부여계의 남하는 공손연의 몰락과 관계된 것
이지 모용씨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더구나 대방군의 점령(245)과 연계시키는 것도 잘못입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일어난 일이라 맞지 않습니다(제4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봅시다. 모용씨의 타격으로 부여계가 궤멸한 것은 285년으로 이 때는 고이왕(234~286)이 서거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북사』등에는 구태(고이왕)라는 분이 백제의 건국시조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언제
백제를 건국하여 발전시킵니까? 고이왕이 한반도로 내려오기 전에 백제는 없었지요.
한반도에는 수십개의 소국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이름없는 백제(伯濟)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246년(고이왕 12년에 해당) 위나라와 고구려의 요동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후반부에서 고구려는 유격전술과 탁월한 전투
의지로 위군을 결국 몰아냅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전쟁이 종결되어 압록강에서 요하지역까지는 상당한 힘(Power)의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로 내려간 부여계는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시기 부여계의 적은 위나라와 고구려였습니다. 고이왕의 부여계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틈을 최대한 활용한 것
입니다. 또 다른 수혜자는 선비계의 모용씨입니다.
즉 위 - 고구려 전쟁으로 양국이 모두 타격을 받은 사이에 모용씨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부여계는 각종 체제
정비를 하게되는 것입니다.
부여계의 이동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봅시다. 임나일본부 설을 제창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주장한 스에마쓰 카즈요시(末松保和)는 대체로 저의 견해와 흡사합니다. 즉 스에마쓰는 만주에서 크게 침공을 받고
고립된 부여계가 옥저 지역(현재의 함경도 지역)을 거쳐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백제(伯濟) 지역
으로 남하하여 머무르다가 마한을 통일하였고 이 과정에서 350년경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12)
이 견해의 문제점은 부여계의 이동이 3차에 걸쳐서 일어난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북사』,『주서(周書)』,
『수서(隋書)』등에 명백히 구태(仇台)가 백제를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백제 건국에 대한 인식은 주로 만주에서 모용씨(慕容氏)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에 쫓겨서
옥저 지역(함경도)으로 피신하였다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이 주된 논리입니다.
이것은 열도(일본) 사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 백제가 건국된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시기(352년)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시작한 때(372년) 사이에 백제의 건국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13)
그래서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백제의 건국연대는 4세기 전기 근초고왕이 즉위한 346년경이며, 신라의 건국도
356년 경"이라고 주장합니다.14)
열도의 사학계는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그 세력이 남하하면서 생긴 위기감이나 압박이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촉진
하였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되어 늦어도 4세기 중엽에는 백제, 신라
등의 국가가 형성되었다."라고 하고15)
우에다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4세기 초 고구려의 강대화는 조선 남부의 정치세력에도 변동을 주어 제 한국의
지역통합을 자극하여 마한의 통일에 의한 백제왕국의 출현,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신라왕국의 건설 등이 그 구체
화된 현상"이라고 합니다.16)
그리하여 사카모토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는 "370년에 마한에 백제가, 진한에 신라가 대두하였다."라고 합니다.17)
그러나 이상과 같은 열도 사학계의 분석은 반도 사학계와 마찬가지로 관념 속에 탁상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남하는 백제의 건국과정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고구려의 남하는 오히려 열도부여의 건설을 촉진한 것입니다.
반도부여는 부여계의 이동에 의해 생긴 세력이지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을 받아서 생긴 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열도(일본) 사학계 논리의 문제점은
① 백제의 시작을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
② 부여가 한반도와의 연계를 가진 시기를 근초고왕 이후로 보고 있다는 점,
③ 모용씨 이전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으며 고이왕계가 한반도 방면으로 남하해 온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
④ 일본의 건국과 관련하여 백제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사학계의 연구태도의 이상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의 기점을
고이왕으로 보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다는 얘깁니다.
부여계의 남하가 열도부여의 야마토 왕조를 건국한 사실에 대해서 이들은 이미 다 아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백제의 시작을 굳이 근초고왕으로 본다는 것은 열도부여가 반도부여(백제)를 거점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설령 야마토 왕조가 근초고왕 또는 개로왕의 후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궁극적으로 알려
진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열도에 도달한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게되면, 한반도는 부여계가 단지 지나쳐가는
장소에 불과하게된다는 논리지요.
즉 부여계는 만주에서 열도로 이동하여 일본을 건설을 하였는데 한반도 지역의 반도부여의 거점이나 지원은
불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열도를 장악한 부여계가 군대를 돌려 한반도를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는 논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지요.
하나의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백제가 한강에서 자생하여 거대 제국을 만들었다는 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만큼
이나 한심한 것이 열도쥬신(일본)의 사학계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식민지화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 같습니다. 반도쥬신은 열도를 무조건 백제의 식민지라고 합니다.
반대로 열도쥬신은 반도가 열도의 오랜 식민지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학문적 과오를 극복하고 쥬신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감이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일본의 연구 가운데 고이왕에 주목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기록(구태라는 자가 있어 대방의 고지에
백제를 세웠다)들을 근거로 하여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미천왕은 사마염의 서진(西晉)이 무너
지고 모용씨가 중국의 군현을 압박함으로써 요서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는데 고구려의 미천왕(300~331)
은 이런 정세를 활용하여 낙랑과 대방을 합병합니다.
이후 미천왕은 구태(仇台)라는 인물을 대방의 고지에 파견하여 군사령관으로 삼았는데 구태는 주로 중국인 주민
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342년 전연(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었을 때 구태는 자립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것
입니다.18)
오카다 히데히로의 견해는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구태에 대한 분석이 잘못되었습니다.
즉 오카다히데히로의 견해는
① 구태를 미천왕 당시의 인물로 추정한 점(사실은 부여왕 울구태),
② 구태가 새로운 점령지의 군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근거를 알 수가 없다는 점,
③ 모용씨의 성장으로 요동·요서 지역이 사실상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 와중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에 있어서 구태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억측에 가까운 견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열도의 여러 연구들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여족 남하설'과 '기마민족 신라정복설' 등
으로 더욱 체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여족 남하설의 내용은 부여족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건국했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대성동고분군과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가운데 3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구야국과 독로국의 중심 지역인데19)
3세기 말부터 도질 토기의 출현과 함께 북방의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과 습속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성동 유적과 양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오로도스형 동복(양쪽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이동식 솥)은 부여의 중심
지였던 길림성 북부지역의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가 사실상 와해되고20) 그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현재의
두만강 하류 지역)로 이동했다가 다시 동해안 해로를 통해 김해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의 주된 내용은 3세기말부터 4세기 초 사이에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대이동의 와중
에서 그 일부가 신라 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금관총, 천마총 등)이 유독 경주 분지에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적석목곽분은 주로 중앙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유목민족들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적석목곽분이 4세기 초에서부터 6세기 초까지 느닷없이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고 그 주인공은
왕족과 귀족들이었으며 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 대부분 북방계의 유물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
신라 지역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흉노의 나라, 신라)를 통하여 충분히
검토된 사항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열도쥬신(일본) 사학계의 부여계의 대이동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들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분석들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필자 주
(9) 稻葉岩吉『朝鮮滿洲史』(平凡社 世界歷史大系 11. 1935) 52쪽.
(10) 白鳥庫吉「百濟の 起源について」『白鳥庫吉全集 3』(1970) 485~499쪽.
(11) 『三國志』「東夷傳」
(12) 末松保和「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135쪽.
(13) Gari K. Ledyard, 「Galloping Along with the Horseriders : Looking for the Founding of Japan」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 No.2, 1975 234~235쪽.
(14) 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1967) 175쪽.
(15) 井上光貞『日本古代國家の硏究』(1965) 571쪽.
(16) 上田正昭『日本古代國家硏究』(1968) 119쪽.
(17) 坂元義種『古代東亞細亞の日本と朝鮮』(1978) 333쪽.
(18) 岡田英弘「倭國の時代 - 現代史としての日本古代史」, 1976, 259~260쪽 ; 岡田英弘 『倭國』
(中公新書 : 1977) 120~121쪽.
(19) 『三國志』魏書「東夷傳」弁辰條.
(20) 『通典』 夫餘傳 太康 6年.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