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를 두려워한다.
그 노란 눈, 날카로운 발톱, 얼룩덜룩한 털, 그 요망한 울음.
내 친구 중에 고양이를 지독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숫제 고양이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을 본 후로는 그를 대하기가 서먹서먹해졌다. 나는 그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경외감을 가지게도 되었던 것이다.
고양이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 대해서 나는 거의 비슷하다. 비둘기나 백조같은 새도 날아가면 아쉽지만 내 손으로 만지기는 싫다. 그 뜨끈한 체온에 놀래서 후다닥 던져버릴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아무래도 그들은 나보다 용감하고 자신감과 포용심이 있고 사랑이 풍부할 것이다.
나는 배구, 축구, 럭비공의 그 딱딱하고 흙묻은 큰 모습이 싫다. 초등학교 시절 내 옆에 앉았던 친구, '금지'는 그 작은 팔과 가슴으로 제 머리통보다 두배쯤이나 되는 공을 잘 받았었다. 그 애가 공을 받을 때 '퍽'하는 소리가 두 손과 팔과 가슴에서 울려나곤 했다. 피구, 텃치볼 등 운동경기가 있을 때마다 금지는 영웅처럼 뽑혀 다녔고 나 같은 것은 서로 자기 편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만지고 던지고 요리할 수 있는 공을 찾아냈다. 그것이 하얀 탁구공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구기는 탁구뿐이다.
나는 지루한 변명과 해설이 싫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크게 만들어 조곤조곤 캐고 따지고 한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사람이 싫다. 대개 그런 사람은 똑같은 말을 몇 해 동안이나, 상대방의 옛적 잘못까지 기억하여 억압하려고 한다.
싸울 때 전혀 성을 내지 않고 더욱 울지도 않고 오히려 희죽희죽 웃거나 무표정한 사람들이 무섭다. 잘잘못은 따질 것 없이 '싸움'이란 그 자체가 슬픔이란 것을 그들은 모른다. 집에 돌아가서도 후회하고 '내 잘못이었구나'라고 결코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끝마다 '주여', '주여'하는 사이비 신도를 싫어한다. 남의 험담을 하고 나서도 주여, 라고 부르짖는다. '다 주의 뜻'이라고 한데 묶어 합리화하고 두루뭉슬 넘겨버리려는 사람, 교회 내에서 일등 신도노릇을 하려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저런 사람일까?' 의심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의 일사천리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가 두렵다. 하나님 앞에서 당돌한 그 음성이 두렵다. 그 달면이 두렵고 그 오만이 두렵다. 나는 내 편리할 대로 믿는 내 신앙이 괴롭다. 나의 편견 나의 독선 선민의식.... 나의 믿음은 신앙일까? 신념일까? 자기암시일까? 의심스러울 때가 많고 더좀 아프게 절실하게 깨우쳐지기를 열망한다.
걸핏하면 '신성한 교육자가...', '적어도 교육자의 처지에서..'라고 교육자를 꽁꽁 묶어 억압하려는 언사를 전제해 놓고 자기 맘대로 주무르려드는 무리들이 싫다.
학생을 지도하던 중 손찌검을 두어 번했거나 위협만 했어도 폭력교사 운운하며 교육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자기나름대로 해석하여 교육자를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몰아세운다.
교육자의 궁색과 가난을 뼈속깊이 멸시하면서도 언제까지나 교육자는 그 가난에 묻혀 남모르게 죽어야한다고 , 그래야만 옳은 교육자라고 그들은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런 방법도 대책도 없이 다만 그렇게 판단만 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목적의 신성이요 이상의 신성이요 정신의 신성이다. 교사도 목사도 신부도 그들의 발은 땅을 딛고 있으며 대기를 호흡하고 있으며 결국은 인간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음을 모르는가 보다.
가장 무서운 것 중의 하나는 무지다. 무지하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나밖에 모르는 사람들.
내 집, 내 식구, 내 자식밖에 모른다. 그것은 동물의 본능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 설명을 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고 고집을 부린다. 사회봉사 희생을 믿지 않고 피해만을 두려워한다.
사리판단에 앞서 흥분하며 공것을 즐기고 손을 부비고 앉아 하늘에서 돈비가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쓸데없는 낭비를 멋과 기분이라 하며 제 분수에 맞고 성실하며 검소한 사람을 째째하다고 비웃는 사람.
무조건, 국산품을 무시하며 외국산 물건을 담았던 껍데기라도 국산품의 알맹이보다 좋게 여기면서 그것이 어떤 결과를 빚게 되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딱하다.
한 때 사랑하던 이의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 놓고 다니는 사람이 싫다. 그는 과거가 어리석었으며 시시했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기들의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었고 자기는 피동적이었으며 속았으며 어쩔 수 없었노라고 떠든다. 자기만 아는 상대방의 숨은 결점을 폭로하고 자기만 구제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아직도 그 '어리석은 과거'에서 해방되지 못했음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극장에 가자면 극장, 음식점에 가자면 음식점, 다방, 등산 가자는 대로 따라다니면서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라고 자랑하던 그 시절보다 더 유치하고 가엾어 진 것이다.
나는 싸롱이라는 이름의 미장원이나 양장점 시간과 돈과 마음의 여유가 비교적 많은 여자들이 모이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불안하다. 그들 속에 있으면 나는 심히 둔감한 벙어리와도 같다. 세상을 헛사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바보인 것처럼 느껴진다.
배우 이름을 콩 주어 먹듯이 외우며 그들에게 가끔 펜레터를 보내며 주간지 뒷면에 사귈 벗, 오빠, 애인을 찾는 광고를 내며 사랑, 행복, 인생, 비애, 고독, 허무라는 단어를 남용하며 그것이 문학소녀의 일면인 줄 착각하는 사춘기 학생들.
사랑, 데이트, 애인이라는 말에 아무런 비중도 두지 않고 가볍게 말하는 처녀들.
그리고 그들이 '너 요새 재미본다면서?' 하는 말투.
외상을 좋아하고 후에는 이리저리 졸리우면서도 몸에는 별 양분도 되지 않은 것을 다만 버릇으로 군것질하는 여자들이 이상하다.
이제 사춘기를 갖 지났으면서 성인이 다 된 것처럼 가슴을 내밀고 다니면서 남선생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선생들을 적수로 생각하는 여학생들이 딱하다. 걸핏하면 시시하다, 창피하다고 하면서 '째바리', '쪽팔린다', '웃기시네', '졸려', ' 배꼽이 하품하겠네', '보고만 죽어라' 주로 이런 말을 애용하는 학생들.
지각 결석 조퇴를 버릇처럼 하는 학생, 그는 성인이 되어도 책임감이 없고 나태하며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할 것이다.
한 번 주의 받은 것을 아프게 받아들이고 마음 깊이 사무쳐서 감사하며 반성하는 아이들이 고맙다.
소풍이나 여행을 갔을 때 아무 계산도 없이 사진을 찍어놓고 그것을 찾을 돈이 없어서 찾지 못하고 사진사가 매일 교문 앞에 와서 안 찾아간 사진들을 상품처럼 진열해 놓고 범인을 찾듯이 두리번거리며 탐색하게 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부끄럽다. 그런 학생들은 선생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사진 찍자고 조르던 학생으로 사진은 단 한 장도 갖다 뵈려는 기색이 없다.
분별없이 말을 이리저리 옮기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싸움을 만들고 '내가 언제 그랬니? 얘가 사람잡네', 'A한테가서 물어볼까?'하면서 말을 대러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나는 싫다.
빈곤을 너무 주저없이 발표하며 내세우며 그것을 구실로 삼으려는 젊은이들이 싫다,
젊은이는 자존심이 있어야 하고 고통을 혼자 삭이고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을 때 더 매력이 있다.
나는 내 성격 중 스프링처럼 뜅기는 버릇을 늘 반성한다.
태평양 바다처럼 참고 그 순간을 이기며 감싸는 사람이 우러러 보인다. 남의 잘못을 다 알면서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텐데 나는 아직도 선택에 까다롭고 판단이 너무 날카롭다.
내가 내 발붙일 토질을 힘들여 선택했듯이 나는 어렵게 선택되었다.
내 피조의 원뜻을 얼른 깨닫고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지 알며 열정적으로 살기를 늘 원하고 있다.
이 좁은 땅 높은 하늘 밑에서 내 곡조로 노래하며 유연하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향아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