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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스토리 I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의 사각지대로 일컬어진다. 한때 포스트모던 사고는 마치 멋들어진 서구 생활의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고, 젊은이들의 마음에 허무주의의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검정색깔로 손톱 윤내기나 하고, 밤새 언어적 전회만을 소개하다 말 것 같기도 하였다. 사실 포스트모던 사고는 더 이상 근본적인 새로운 범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리오타르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의 지식의 조건을 연구하며 그러한 조건을 포스트모던한 것으로 특징지었던 것도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했던 사상가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미국의 로티와 프랑스의 보드리야르도 2년 전 유명을 달리하였다. 지금 그들이 살아있다 해도 여든 안팎의 노인네들이다. 우리가 이들과 비슷한 나이의 한국 학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돌이켜보면 더 이상 ‘포스트이즘(Post-ism)’이 새롭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풍미했던 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을 간단히 조감하면서 행여 챙길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는 거대담론을 준거로 정당화하려는 어떤 과학을 지칭한다. 리오타르(1929-2007)는 이러한 과학을 제도화된 인식으로,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로 이해하였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모더니티의 객관적인 지식은 대체로 자기타당화를 지향하며 모든 양상의 자연과 삶을 보살피고 통제하는 과업들에 맞춰진 조직합리성의 지배적인 윤리를 강조한다. 문제는 근대적인 사고에서 무자비한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서 수반되고 있는 보편주의적 일원론에 대한 부단한 충동이다. 그런 인식론은 모든 과학의 보편적 언어, 즉 과학적 설명의 보편적 논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모더니티의 맥락에서 사회는 구조기능주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객관적 실재, 즉 통일된 총체성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리오타르 비판의 첫 번째 목표는 과학철학에서 발견되는 가치와 사실의 이원론이다. 사실-논리 실재론의 추구는 대체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실증주의 사회과학의 경향과 일치한다. 그는 비판적, 성찰적 또는 해석학적 접근들에 의거해서 일방적인 사실-논리 실재론을 비판하고 이러한 실재론에서 배제하고 있는 가치와 목적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또한 사회의 계층구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는 통합된 전체가 아니라는 점도 그는 문제 삼고 있다. 나아가서 리오타르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이원론적 경향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지식과 권력을 같은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누가 지식이 무엇인지 결정하며 누가 무엇을 결정할 필요가 있는지를 아는가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어떤 정치적 투쟁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직 과학에 지식을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당화와 검증과정에서 과학이 자본순환의 중요한 측면인 생산력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은 무엇보다 과학자들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격리시키려는 문화가 된다. 반대로 과학적인 지식이 아닌 서사적인 지식은 주류 과학자들에 의해서 후진적이고 소외되며, 원시적인 의견, 관습 및 이데올로기로 생각된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서사적 접근은 현대과학의 사이버네틱스와 기술적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그는 논쟁적인 언어와 사회적 유대의 양자를 모두 강조한다. 여기서 논쟁적이라는 말은 “경쟁한다”를 의미하며 상대방은 특정한 언어행위에게 상이한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세계관들을 가진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방은 단순히 어떤 단어의 수용된 내포개념을 다르게 사용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듯 리오타르는 가장 반토대적인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보편적인 거대담론을 피하기 위하여 자유주의적 계몽사상까지도 포기하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리오타르가 문제 삼은 거대담론, 즉 과학의 보편적 언어를 더욱 철저하게 해체한 사상가가 바로 데리다(1930-2004)이다. 그들에게 있어 공히 진리 개념은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one universal Truth)가 아니라 수정 가능한 진리들(truths)이다. 인식론의 영역에서 실재가 인간의 상징물들로 대변될 수 있고 거기에는 인간의 상징체계(예를 들어, 언어나 수학)와 실재 그 자체를 연결시켜 주는 외연적 토대(the denotative foundation)가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데리다는 어느 누구보다 명쾌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외연적 약속에 대한 그의 비판의 핵심은 한마디로 “현전의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presence)”이다. 그는 글쓰기보다는 말하는 것을 선호하는 서구문화의 태도, 즉 논리중심주의적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의 핵심적인 통찰은 말하기는 면대면(face-to-face)의 현전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글쓰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글쓴이와 읽는 이 사이의 ‘부재(absence)’의 관계라는 점에 있다. 인문성과 같이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현전’이라는 불변의, 자연적이며 실재적인 무엇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해서, 자연과학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현전은 바로 ‘물리적인 실재 그 자체(the physical reality-in-itself)’이다. 실증주의에서 상징의 지위는 바로 이러한 실재를 표상하는 것이다. 즉 ‘사실,’ ‘변수,’ ‘지표’ 내지는 ‘측정’과 같은 용어들이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충실한 외연(denotation)을 약속한다.
하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실증주의적 언어의 구성에는 형이상학적 계기들로 가득 차 있다. 언어구성은 외연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단어들을 철저하게 재구성하면서 거기서 단어들은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단어들은 다소 외연적이라고 가정된다. 예컨대, “결혼반지”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반지”라는 단어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는 말하자면 부부간의 사랑을 대표한다. 이것은 단어들에 대한 주류 표상적 견해이다. 그러나 데리다에게 있어서 단어는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단어는 그 외연에 전혀 부재한 것을 관여한다. 단어는 반표상적이다. “결혼반지”라는 용어는 편의상의 문제이며 우리는 결혼반지에 관해 글을 쓰면서 독자에게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마치 어떤 대상에 대한 언급이 대상들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타자의 의도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비록 모든 종류의 코기토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주관적 관념론자들에는 불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의미는 반드시 화자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올바른 대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있을지 모른다. 선다형 텍스트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데리다는 모든 텍스트가 여러 상이한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믿는다. 심지어 화자까지도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요컨대 우리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단어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언표들일 뿐이다. 그 적실성은 맥락에 의해서 결정되고 추상으로서의 단어는 그 자체의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반복의 가능성에 의존할 뿐이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단어들은 사물자체로 오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빈번히 반복되는 단어들은 변치 않는 사물들로 생각될 경우가 흔히 발생하지만 사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상황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궁극적으로 정확한 해석은 있을 수 없다.
한편 푸코(1926-1984)에게 있어서 비판의 대상은 과학이 아니라 ‘지식’또는 ‘담론(discourse)’이다. 그의 비판의 목적은 어떤 특정한 시대적 성향(disposition), 즉 담론의 배열 질서에서 구체적으로 획득된 규범성(normativity)을 드러내려는 것에 있다. 그의 고고학적 주장에 따르면, 모든 담론에 미리 존재하는 주제나 대상과 같은 것은 없다. 반대로 대상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이 담론이다. 즉 규칙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특정한 시기에 ‘대상’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인간 역시 결코 중심에 있지 않는 피륙의 한 올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고고학적 맥락에서 심지어 푸코는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문화적 맥락에서 주체가 되는 다양한 양식들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 그는 자신의 고고학적 접근 방법을 통해서 오늘날 주체가 어떻게 통제나 양식에 예속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 주체의 주체성(subjectivity)은 예속화(subjugation)의 이념과 무관하지 않다. 푸코가 사물의 질서나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문법에서의 변이, 이른바 단락, 단절, 전회 등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사실 ‘고고학’이라는 부를 수 있는 지적 활동의 대상은 담론 안에 있는 어떤 질서를 가리키는 ‘에피스테메(epistémé; 객관적 인식)’이다. 푸코는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가 특정한 시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구조화 하는 영역을 포착하고자 고대 그리스어 ‘에피스테메’를 차용한다. 이 구조화된 영역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는 단순한 의견인 ‘독사(doxa)’도, 정교한 과학도 아닌 지식의 역사적-선험적 영역, 즉 지식의 비형식적인 영역이다. 문제는 바로 이 에피스테메가 특정한 시대에 모든 지식이 가능한 조건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어떤 “실증성의 체계(system of positivities)” 또는 “동시성의 체계(system of simultaneity)”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물들은 특정한 시대에 어떤 질서의 담론으로 편입된다. 사물들을 표상하는 단어들은 결국 ‘자립하게 되며(autonomous),’ 여기서 담론은 ‘표상된 표상(a representation represented)’이다. 표상들의 상호 연관된 체계로서 언어는 반드시 ‘현실(realities)’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결국 언어가 세계나 인간의 사고보다는 언어를 표상한다면 이러한 이동은 사고로부터 명제로의 전이가 될 것이다. 전이의 과정으로서 에피스테메는 더 이상 이성과 감성의 맥락에서 파악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감성의 맥락이 한 시대를 지배하는 에피스테메의 한 양식(modality)이 된다. 결국 푸코에게 있어서 지식은 모든 종류의 표상(representations)에 예속되기 마련이라서 이는 문화적 구조 내의 한 변수에 지나지 않게 된다. 푸코는 이러한 문화적 구조의 네트워크를 ‘담론의 질서’라 부른다. 표상에 입각한 사물의 질서 또한 담론의 질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처럼 푸코는 우리의 생각과 경험이 사실은 담론 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밝혔다. 담론은 사고하고, 인식하며, 말하는 주체가 화려하게 펼쳐나가는 것보다는 주체의 분산과 자기 자신과의 단절이 결정될지 모르는 총체성과 상관이 있다. 그의 비판의 목적은 자연히 한 특정한 시대적 성향을 드러내려는 것을 넘어서 담론의 배열질서가 어떻게 지식의 체계가 되고 모두 권력의 체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지식이 곧 제도적 규칙들에 의해서 구성이 된다면, 이는 어떤 사람들을 대화로부터 배제하거나 포함하는 규칙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사회 전체가 감시를 받고 있는, 말 잘 듣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가고 있음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여성들은 그 실존적 시선으로 감시를 받는다. 학생들도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감시를 받는다. 노동자들도 감시를 받는다. 정치가들의 성생활도 감시를 받는다. 할리우드의 명사들은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감시를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는 그 자체의 교도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로티가 논의하고 있는 믿음으로서의 지식형성 과정과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 나아가서 이를 토대로 한 이디오그래프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디오그래프는 일종의 사회적 구성물로서 언어적 체계 내에서 어떤 이념을 표상하는 상징체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판타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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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쾌한 글 잘 읽었습니다. 읽는 중 의문이 있다면 데리다가 서구인들에게 말이 글이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왜 논리중심주의와 같은지 이해 할 수가 없군요. 글은 말에 비해 그 시대나 맥락에 의해서 의미가 모호해진다는 뜻인지 아니면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의 문제인지 의문이 드는 군요. 여유가 있다면 데리다 씨의 책도 이해 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데리다가 "로고스 = 현전(presence) = 목소리(voice)"으로 본데서 비롯됩니다. 데리다의 주요한 철학과제가 바로 이 연쇄를 깨뜨리거나 탈구성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로고센트리즘은 내부-외부, 현전-부재, 의식-무의식이라는 대립의 체계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서구의 형이상학이 지나치게 전자의 연결고리를 강조한데 있다 봅니다. 하지만 모든 구술성이 데리다가 비판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에 저촉되지는 않겠죠?
먼저 너무 재미있게 읽었구요, 2편 로티에 대한 내용도 기대됩니다. 로티는 아직 접한바가 없어서요. 하지만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데요, 정신병자님 말마따나 로고스중심주의를 논리중심주의라고 하신부분은 적절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로고스중심주의는 음성언어중심주의라고 하심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로고스=말=음성언어라는 것이 기존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그 현전성에서 중시되었고 반면에 문자언어는 그 음성언의의 기표(즉 기표의 기표)라는 의미에서 음성언어에 종속되었으나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 있어서는 더이상 음성중심적 언어관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예를들면 컴퓨터 자판의 * 나 # )
, 즉 목소리 없이 어떤 개념적 실재와 무관한 기호작용(에크리튀르)이 이루어 지는 상황을 데리다는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트라이앵글에 현전(presence)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지요? 다음 기회가 되면 로티의 이야기도 간단히 소개할 생각입니다.
꼭 소개해 주세요.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