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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박꽃은 지고
박찬란
오늘 아침에도 인기 절정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던 어떤 연예인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했다. 현재의 우리 삶이 생과 사를 끝없이 반복한다.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아주 정확한 법칙(윤회와 인과법칙) 안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은 그 법칙을 정녕 모르고 그곳에서 아주 멀리 동떨어진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과 미망 속에 살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의 예기치 않은 부음을 듣게 되면,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듯 생의 이치를 하나, 둘 깨닫게 된다. 바로 삶과 죽음은 종이 앞뒷 면과 같다는 이치 말이다.
하나의 죽음 이면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주검은 삶의 마지막 결과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성공하고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할까? 거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의 뿌리를 가진 생명체가 죽었을 때는 치명적인 삶의 결함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강한 태풍이 불어 뿌리가 통채로 뽑혔거나 이미 치유할 수 없는 병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현충일 아침, 당숙모의 부고(訃告)를 들었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고향마을의 풍부한 자연환경과 집안 어르신들의 올곧은 가르침과 훈훈한 사랑의 힘이 적다 아니 할 수 없다. 내 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고, 하늘은 기복의 대상처럼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비밀궁전 같은 표현 못 할 그 무엇이 존재 하였다. 거기에다 1급 물맛처럼 인심 또한 한없이 넓고 깊어 뿌리 깊은 나무로 자라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봄이면 너도나도 자신의 텃밭 가꾸기와 동네 품앗이로 해가 저무도록 일을 하는 농촌 마을이다. 여름이면 그 농작물이 행군하는 장병처럼 들고 일어섰다. 잡초는 곡식보다 힘이 더 세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항상 들판의 판관(判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했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도록 겨울 한 철을 빼고는 어머니가 다니신 직장은 사래 긴 밭에 적을 둔 연중무휴 종업원과 다름없다. 그럴 때면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자 윗마을 아지매(아줌마의 경상도 사투리) 집으로 곧장 달려간다. 아지매는 농토가 많지 않고 한두 곳 있어도 집 가까운 데 있기에 찾기가 수월하였다. 그럴 때마다 요기와 일상사를 얘기하다가 저녁을 먹고 오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께 가벼운 꾸중을 들은 적이 많다. 하지만 하얀 꾸중이었기에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 아지매를 내 심중에 친구처럼 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아지매는 고향의 정서를 상징하는 박꽃이기 때문이다.
박꽃은 덩굴 한해살이풀로서 박과 식물이다. 꽃은 희며 꽃말은 기다림이다. 모든 꽃은 밤이 되면 지지만 박꽃만은 어둠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일명 월하미인(月下美人)이라고도 한다. 박꽃은 우리 겨레 마음의 텃밭에서 덩굴을 뻗어나가 가을 들판에서 피어나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대변하는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묵히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사회와 나라를 위하는 현명한 내조임을 삶으로 보여주는 이 땅의 어머니 삶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꽃이다. 그런 이름과 의미를 가진 박꽃이기에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꽃과 열매가 아니던가.정겨운 농촌을 지키는 고향 마을에는 박꽃으로 인해 더욱 그리움이 배가 된다.
가을에는 지붕 위나 우물가에는 어김 없이 여인의 속살처럼 순백의 박꽃이 피어 조롱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마당에는 갓 따온 고추를 멍석에 흰 수건을 두르고 말리는 모습은 내게 더 할 수없는 유년의 평안이고 아름다운 마음정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늦서리가 내릴 즈음, 하루는 마음먹고 박을 따서 그 모양에 따라 그릇의 용도를 쓰지 않았던가. 더러는 물바가지로, 색깔 좋고 잘 생긴 박은 그림을 그려 방안의 장식용으로 자리 잡는다. 그 중 하나는 박 씨를 담아 내년에 씨앗을 하기 위에 툇마루 지붕 위에 메달아 놓는다. 종족 보전을 위한 현명한 농부의 지혜이다.
지천명이 되어서인지 부음을 들을 때마다 내 감정은 모두 다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사람은 죽어 관 뚜껑을 덮고 난 뒤에 그 사람을 평가한다)그렇다.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나누었던 사랑과 덕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율하도록 슬픔이 느껴지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개죽음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다 같은 죽음인데 이처럼 슬픔과 애도를 나누는 강약이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지매의 부음을 들었을 때는 고향별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당숙모의 주위는 항시 박꽃처럼 환했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모이는 곳이면 늘 웃음꽃이 피어나 잡다한 가정사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다리미와 같았다. 또한, 내가 가진 작은 것마저 상대방과 서로 나누지 못해 애태우는 분이셨다. 그런 까닭에 내게는 당숙모가 아니라 작은어머니처럼 오늘까지 마음의 의지처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런 아지매가 귀천하셨다고 하니 그 슬픔의 강물을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자식이 오 남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질고 착한 덕을 지닌 주검을 생장하지 않고, 화장해 버린다니 마음 무겁기 짝이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누가 뭐라 해도 자기마음 부처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럴려면 우선, 내 삶의 현재 위치와 나아갈 길을 정확히 통찰해야 지금 이 순간을 더 잘 살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농부의 딸이다. 사람은 평생 두 가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하나는 종족보존이란 본능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보존이란 큰 과제 안에 우리 삶이 존재하고 있다. 그 위대한 자연의 소명, 세상의 여자로 태어난 숙명이기에 고향을 떠나 남편과 함께 성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모작 인생에 성공하여 나의 꽃과 열매를 위한 자식농사에 충실하고 있다. 자식은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 열매가 없는 꽃은 사람들에게 길게 사랑받지 못한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이것 또한 우주의 자연스런 생명의 법칙이다. 태어나면 죽고 또 다시 태어나는 순환을 거듭하는 것이 자연질서이자 공평한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도 바로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곳, 대지가 인간의 고향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인간의 유전자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5촌 아지매를 유족의 협의로 화장하기로 했단다. 고향의 정서를 대표하던 박씨를 태우려 한다. 평생 농부 아들로 살았으면서도 씨앗을 땅에 묻거나 남기지 않고, 태워 바람에 날려 보내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원에 씨앗이 떨어진 꽃씨는 다음 해에 또다시 싹을 틔운다. 하지만 낙엽과 함께 태워버린 씨앗은 절대로 다음 해에 꽃을 볼 수 없다.그것으로 그 종자의 운명은 종료하는 것이다. 부모는 뿌리이고, 줄기는 아들이고 가지는 딸의 역할 아닌가. 뿌리 없는 아들 딸이 언제까지나 푸르고 싱싱할까?
개인이든 나라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면 소탐대실(小貪大失)하기 마련이다. 내가 겪은 일화 하나 하겠다. 나는 참고로 오 남매를 둔 엄마이다. 1980년 그 당시는 가장 적법한 이념처럼,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 아래 인구 억제책을 쓰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딸만 둘 둔 경우라 아들 하나를 얻기 위해 신념으로 출산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건강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모자보건센터에서 셋째 딸을 낳았다.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하지 않은 대가로 아이를 어렵게 낳아 키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 때 태어난 아이가 우리 부부에게 더할 수 없는 효녀 아닌가. 그동안 세월이 흘러 가치관이나 국가 정책이 많이도 변했다. 2012년인 오늘은 급격한 노령화 사회에 진입하자 다급해진 나라에서는 출산장려정책인 복지 부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 그 중 하나로 이번에 나는 “다자녀부부모범상”을 받았다. 이런 역설이 또 어디 있나.
언제는 나라에서 불이익을 주더니 지금은 표창하여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 아닌가. 어느 정책을 믿을 것인가? 누가 뭐래도 내 삶의 주인인 나만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나다운 삶, 나답게 사는 길이 나의 길 아닌가. 내가 없는 우주는 의미없지 않겠나. 그런데도 나는 나를 바로 알기 위해 노력하는 일보다 타인의 시선에 마음을 뺏기고 사는 일이 종종 있다. 부질없는 짓인지 알면서도 고치기 어려운 허물 중 하나이다.
진리는 변한다고 한다. 위도의 자오선이 3도가 바뀔 때마다 옳고 그름이 바뀌는 상황인데 어디에다 삶의 뿌리를 두고 살 것인가? 바로 우주 질서이며 자연의 일부인 마음의 주인을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뿌리 없는 나무는 결코 오래가지 못해 시들어 죽게 마련이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성급하게 탑을 쌓았거나 남의 눈을 속이고 편법으로 이룬 성공이 그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비록 정상에 올라섰지만, 이제까지 자신이 추구해 오던 삶의 가치가 어느 한 순간 모래성 같이 의미없게 느껴져 허무한 상념이 우울증으로 깊어져 끝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블랙홀 같은 것이다. 이 모두가 물질만 쫓던 현대인에게 나타나는 정신병 중 하나이다.
우울증은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고 눈에 보이는 부와 명예를 좇다가 발생한 당연한 인과법칙이라 하겠다. 우울증의 씨앗은 눈에 보이는 현상(事判)을 쫓아가다 커다란 이판의 벽에 세게 부딪쳐 선채가 바다에서 분해된 타이타닉호라 하겠다. 미처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해 마음이 유리창처럼 한꺼번에 와장창 깨져버린 무서운 병이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병이니 그렇지 않은가. 어디 가서 하소연할 것인가. 주인이 자기집 유리창을 깬 것은 주인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마음공부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좋겠다. 그 마음공부도 격물치지(格物致知)인 이판(理判)을 바르게 알고 행하는 데 그 참된 이치가 있는 것이다. 나를 양생(養生)하여 완성해 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의미이자 가치이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현재 심는 대로 내일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은 만고불변의 공평하고 어김없는 진리 아니던가.
한 해 농사를 짓는 농부도 종자 씨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건만,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일생을 대궐이나 법당을 지을 적송(赤松)같은 꿈과 이치를 심중에 두고 사는 것이 시대를 앞서 가는 나만의 지나친 상념이란 말인가. 개인이나 국가 정책은 적어도 30년 후를 내다보고 판단해야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거늘 현명한 농부라면,한 해 농사가 끝났다고 씨앗(유전자: DNA)을 보관하는 방법으로 불을 놓는 우(愚)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 유전자를 경시하는 것은 나의 영혼을 무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안에 부모 유전자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순간순간 감지하지 못하는가. 나의 언행과 나이듦에 따라 닮아 가는 부정 할 수 없는 부모의 거울을 볼 때 말이다.
내 마음의 따스한 정서를 이루었던 고향별이 하나 둘 사라지니 가슴 속이 텅빈 것처럼 허허롭다. 인간사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지만 그래도 씨앗을 남기고 식사를 해야 않은가. 배고프다고 내일 먹을 양식을 다 먹어버릴 수 없는 이치이거늘 화장만이 가장 깨끗하고 편리한 장묘문화라고 따르는 철학 없는 후손의 선택이 마냥 안타깝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란 말이 나도 앞으로 새록새록 실감 날 것 같다. 정다운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고, 마음을 나누었던 옛동무와 정을 나누던 친척들이 하나 둘 내 곁에서 유성처럼 사라진 이유이리라!
꽃과 사랑의 향기가 사라진 대지는 거칠고 황량한 바람만 불어 고독해서 도저히 살 수 없다. 사람이 어찌 짐승처럼 편리와 먹이로만 산단 말인가. 영혼이 행복하지 않는 삶, 알맹이 없는 껍데기 삶은, 성공해도 수성할 수 없는 진리를 이제까지 주위에서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현자 스피노자가 있었다면, 나는 정신 뿌리가 허약한 현대인에게 꿈과 용기와 위무(慰撫)의 화신(化身)이자 고향의 아름답고 소박한 정서로 다가올 박꽃을 지붕 가득 올리겠다.
박찬란:수필가
월간시사문단에서 정이품송으로 신인상 수상
한국수필가협회. 청주문인협회. 신문예. 등등
국제문학바탕 정지용 문학기행문 최우수상 수상
한국스토리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제10회 황진이문학상 수상
제3회 박화목문학상 수상
수필: <찬란한 아침>외 동인지 다수
첫댓글 7월 신문예 원고입니다. 신작수필을 한 편 보내달라고 해서요.
청주문협 여러분, 나날이 새날입니다.
여한없는 하루하루이시길 기원드립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자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박꽃은 지고 긴글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해박하신 실력으로 풀어나가시는 능력이 남다르신 박선생님 지붕가득 박꽃이 만발하시옵소서~
네, 감사합니다. 이원웅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그래요, 저만 느끼는 감정일까요? 고향 갔다오면 참 쓸쓸한 기분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사람노릇하고 사는 것 고향에서 배운 도둑맞을 수 없는 무형의 재산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자꾸 재산이 줄어드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아요.
어쩌다 고향친구를 만나도 내가 그리던 그 감정이 아니니 말입니다.
선생님, 하지만 늘 건강한 영육으로 씩씩하게 힘내며 삽시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