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지키는 초병이 되리
현 종 헌
제주 청년들은 대부분 해병대로 군대를 갔다. 우리 마을을 휘젓고 다니던 군인들도 거의가 해병대였다. 그들은 고향의 해안 초소를 지키는 데 투입되었고, 나도 어렸을 적에는 자연스럽게 그들 무리 중의 하나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던 1977년 초에 본적지의 지방 병무청이 있는 서귀포에 가서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난생 처음 가 본 서귀포는 참으로 아름다운 항도(港都)였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그 지역의 명소를 마음껏 구경했다. 50원짜리 정방폭포 입장권과 그때 찍은 칼라 독사진은 지금도 1급 판정을 받은 신검 증거품처럼 남아 내 앨범에 꽂혀 있다.
신검 받고 1년만 지나면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군 입대 영장은 2년이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2학년을 마친 1978년 말에 나는 학교에 무작정 휴학계를 냈다. 설마 했으나 2년 하고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영장을 기다린답시고 고향으로 내려가 문예 작품 습작에 몰두했지만 그 작업도 대여섯 달 지나니까 신물이 났다.
5월 달에 서울 병무청까지 찾아가 육군기술병으로 지원했다. 지원서에 공고 졸업장과 다듬질(기계 조립) 자격증을 첨부했다. 면접시험이 끝나자마자 불합격 판정이 내려졌다. 면접관이 요구했던 ‘애국가’ 4절 노래는 자격이 달린 나를 미역국 먹이기 위한 함정 문제인 듯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치겠다는데 조국은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남들 쉽게 가는 군대를 나는 왜 이리 힘들게 가야 하는가, 하며 한탄했다.
그해 가을, 드디어 해군해병에서 입대하라고 내게 손짓을 했다.
군대 가기 전날 저녁, 나는 혼자서 제주시내 거리를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여인숙 방에 들기 전에 서점에서 소설책 두 권을 샀다.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사회와 오랫동안 격리돼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읽는 내내 내 혼을 쏙 빼앗아 갔다. 이튿날 LST 함정에 몸을 싣고 떠날 때 함정 밑창의 널따란 공간 안에서 읽었던 최인훈의 “광장”은 전날의 소설보다 더 재미있었다.
진해 훈련소에서 며칠간 훈련 받던 중 나는 부대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 걸려 귀향 조치를 당했다. 고향 집의 더러운 골방 속에 갇힌 채 원고 쓰는 데만 골몰했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피부병에 걸렸던 것이다. 함정 안에서 공동 생활해야 하는 해군해병은 피부병 환자의 입대를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귀향증명서’와 여비 1,800원을 받아들고 제주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진해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맸다. 해안가에 묶여 있던 훈련용 검은 고무보트들이 해군해병이 아무나 오는 데인 줄 아느냐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군대 갔다가 쫓겨나는 해괴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게 하필이면 나였고, 그래서 무척 우울했다. 몸 성히 군복무 마치고 오라는 격려와 함께 노잣돈을 쥐어 주던 친척들의 얼굴이 떠올라 고향집이든 인천 본가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앙선 열차를 타고 강원도 원주 근처의 시골구석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네 집을 찾아갔다. 춘천에서 대학 다니고 있던 친구는 본가에 없었다. 혼자 치악산 계곡물에 가 빠가사리를 잡거나 수영을 했고, 그러다 지치면 바위 위에 누워 퍼질러 잤다. 그랑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내가 그곳에서 눌러 산다 한들 뭐라 그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집도 우리만큼이나 가난해서 열흘쯤 무위도식하다 보니 염치가 없어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인천에 오자, 식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버지는 사내놈이 오죽 못났으면 군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외면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눈으로 보는 듯했다.
젊은 사람이 벌집 방 한 귀퉁이에 앉아 놀고먹기가 뭐했다. 막노동판에 나가 겨울을 나기로 했다.
철공장의 인부로 뛰면서, 인천 청천동에 있는 나환자촌을 찾아가 피부병 치료에 전념했다. 문둥병 환자들이 쓰는 피부약은 독하기로 소문났지만 좀만 치료해도 당장 효과를 본다고 했다. 군대 한번 가보겠다는 일념으로 매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 마을길을 거침없이 들락거렸다.
말로만 듣던 나환자들의 집단촌이었다. 일반인들이 문둥병에 전염될세라 기피하는 까닭에 마을은 격리돼 있었다. 음성 환자는 아무렇지 않다면서 대통령 영부인이 그들과 접촉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천형의 병이 옮겨지는 것을 무서워했다.
주민들은 닭을 쳐서 먹고 사는지 꼬꼬댁거리는 소리가 요란했고 양계장에서 나오는 오물 냄새는 코를 찔렀다. 세상이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모든 움직임이 둔화되었지만 그곳에는 삶의 활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주민들을 향해 눈썹이 있나 손가락은 짓무르지 않았나 하고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냈다. 마을 끝 산기슭까지 들어가면 영화 “벤허”에서처럼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음산한 동굴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살짝 두려움에 떨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작업화 – 주)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썼다는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이 자꾸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나병 환자의 비애가 담겨 있는 시이다. 정부에서 문둥이들을 잡아 강제로 가두어 놓았던 섬 소록도로 가면서 시인은 발가락이 잘려져 나갈 때마다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치료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피부병이 완쾌돼 갈 무렵, 육군본부로부터 입영 영장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육군은 친절했다. 옴 자국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나 입대하고 나서 나머지 치료를 하라고 했다. 이번에도 또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육군은 따뜻하게 나를 감싸 주었다. 군영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이제 천국에 들어섰다며 한숨을 쉬었다. 천지사방에서 향내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논산 제2훈련소에서 한 달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후반기 교육 없이 바로 자대로 배치되었다. ‘공병’ 주특기를 부여받았다. 공병 부대에 가자마자 남한강에서 벌어진 한미 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에 한 달간 투입되었다. 강안(江岸)과 강안을 잇는 전투용 가교를 놓느라 겨울 강물 속에서 온몸이 굳는 듯했으나 입대하던 과정의 고통에 비하면 댈 게 아니었다. 그 후 두어 달을 질통 매고 공사판 현장을 전전하다가 본부중대 서무계로 발탁되어 행정병으로 나머지 군 생활을 보냈다.
나는 외지에 나가면 고향이 어디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인천이고 어떤 때는 제주도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향을 떠나 딱 절반씩 양쪽에서 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송 부대 소대장인 수송관은 내가 못마땅할 때마다 “야이 제주도 말xx 새꺄.” 하며 욕했다. 돈에 궁색하게 굴면 동료들은 “인천 짠물” 또는 “인천 짠돌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휴가 갈 때는 눈치를 봤다. 행정병, 수송병, 통신병 등이 잡탕처럼 모여 있는 공병대 본부중대는 서무계가 중심을 잡아 주어야 안정감을 이룰 수 있었다. 외출 외박과 공사장으로 지원 나가는 병력 이동이 많아서 내가 자리를 비우면 업무 공백이 컸다. 사수였던 고참 병장은 내가 오자마자 제대했고, 조수로 키우는 후임병은 군대 물정 모르는 새파란 이등병이었다. 양심상 오래 나가 있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외딴섬이 고향인 병사가 휴가를 가면 육지 병사의 10일에 비해 5일을 더 주었고 휴가비도 더 나왔다. 나는 행선지로 제주도를 은근히 바랐으나 인사계는 부모님 계시는 본가로 가라며 인천으로 휴가증을 끊어 주었다.
첫 휴가를 나오니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군대에서 느꼈던 향기가 우리 집까지 퍼져 있는 듯했다. 어머니는 내가 입대한 후 훈련소에서 온 소포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말했다. 소포 속에 든 머리카락과 집에서 입고 간 사복 짐 꾸러미가 어머니를 슬프게 했던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은 내가 군 생활 중에 혹시 시신 없이 죽을세라 그때를 대비한 유품이었다.
나는 제주도에서 살 때 군인들만 보면 속으로 감탄사를 쏟아냈다. 외진 시골 마을에 나타난 군인은 그야말로 멋쟁이 중에 멋쟁이였다. 특히 해병대가 그랬다.
복장만 봐도 화려함이 묻어났다. 깔끔하게 다려 입은 녹색 군복엔 손을 가볍게 갖다 대도 베일 듯한 줄이 가장자리마다 곧게 나 있었다. 어깨를 떡 벌린 채 바른 자세로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바지 밑단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쇳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군인의 모습이라곤 각이 선 팔각모에 빨간 명찰을 단 해병대뿐이었다. 어쩌다 육군을 볼라치면 움직이는 몸놀림부터가 맥아리가 없고 복장도 동네 농부의 작업복 같아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육군이 더 대접 받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보통 제주 출신은 해안선으로 둘러싸인 지역 방위를 위해 해병대로 투입되지만 대학물 먹은 사람들은 육지 가서도 기죽지 않고 지낼 수 있다 하여 육군으로 보내는 경향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육군은 겉으로야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먹물 먹은 인텔리라고 인식되어 마을 사람이나 동네 처자들에게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육군 병장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따금 군가 부를 기회가 생기면 육군 군가인 “멸공의 횃불”에 이어 “해병대 곤조가”도 곁들여 부른다. ‘오늘은 어디 가서 땡깡을 놓고 / 내일은 어디 가서 신세를 지나 / 우리는 해병대 / ROKMC / 헤이빠빠리빠 때리고 부수고 마시고 싸워라 헤이빠빠리빠’ 하는 박력 넘치는 외침이 왠지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진해 훈련소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의도에 의해 해군과 해병이 통합 운영되고 있었던 시기에 나는 잠깐 경험했던 ‘바다 사나이’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가끔가다 회색빛 군함 위에 올라타 있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제주 해안가에서 내 고향 마을의 해안 초소를 지키는 영원한 초병(哨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