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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7일(토) 서울 한양도성길 트레킹하면서 낙산공원 아랫마을 이화 벽화마을에 들렸다가 마을에 “잘살기기념관”이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기념관내 사진들을 살펴 보다가 “옹동의 숨결” “상두산”이라는 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곳에 내 고향 단어가 있다??? 혹, “잘살기기념관“ 마대복 관장님이 내 고향 (정읍시)옹동사람? 한양도성 트레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사실여부를 확인하고자 인터넷 일일이 검색해봤더니 사실이였다~~~ 정읍 옹동면에서 출생한 마대복 관장님.... 대단하시고.... 존경심이 저절로 나온다~~~ 내 고향 출신 훌륭한 분을 소개하고자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을 토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화동 벽화마을 “잘살기기념관” →마대복관장님은 1940년 전북 정읍시 옹동면 상도산 자락에서 태어나 너무나 가난하여 용호 초등학교(용호분교,1994.3.1.옹동초등학교와 통폐합) 5학년을 중퇴하고. 3년동안 나무장사, 숯장사, 농사일만 하다. 친구들보다 3년 늦게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 복학 졸업하고. 익산 남성중학교 다니다가 집안 형편으로 중2때 중퇴하고 모친과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에서 구두딱기, 공장직공, 공사판일, 은단장사, 신문배달등 온갖 어려움속에서 야간학교를 다니며 꿈을 키웠다, 마대복은 구두닦이 하면서 한영고등학교 야간과정에 진학했고, 경희대학교에 들어갔다(경희대 국문학과, 동교육대학원 졸업) 대학 등록금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공장직공, 신문배달,은단장사 등을 하며 겨우 겨우 메울 수 있었다. →마대복은 1965년 5월 6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창공민학교를 몇번 찾아간 끝에 장소 사용을 허락받아 '잘살기학원'을 개원했다.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이름이다. 2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 시작된 잘살기학원은 3개월만에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동창공민학교가 폐교되어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어려움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창신동 가로등 밑에서 수업은 계속됐다. 동네 주민들이 시끄럽다 항의하자 그는 자신의 집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일찍 온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서, 늦게 온 아이들은 문 밖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아이들은 밤마다 대복의 집 앞에 모였다.
장소도 문제였지만 학교운영자금이 문제였다. 학생들이 워낙 가난해 책과 노트도 사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 대복은 다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눈물 겨운 노력과 헌신이 계속되면서 그의 뜻에 동참하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희대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학교 본관에서 교복을 입고 구두닦이를 하던 대복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총장 눈에 띄게 되었다. 그의 사연을 알게 된 총장은 자선음악회를 열어 모금을 해주었다.
딱한 소식을 접한 동사무소에서는 2층 회의실을 마련해주었다. 구두닦이를 만류하던 학교 친구들도 구두닦이에 동참하고, 야학 선생으로 자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차곡 차곡 쌓이면서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서 잘살기학원이 보도되자 어느날 청와대에서 민원비서관이 찾아왔다.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를 초청해 자신의 친필로 쓴 현판과 현금 20만원을 전달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서는 관리부지인 종로구 이화동에 교실을 마련하도록 260평의 땅을 제공했고, 경희대에서는 전 교직원 봉급의 5%를 모아 전달해 주기도 했다. 그는 학생, 교사들과 함께 직접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건축하고 5개 교실을 마련했다
▶1987년 폐교할때까지 22년동안 배출한 학생들이 3,600여명으로 지금은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40여년을 불우청소년을 위해 잘살기중학원 대명고등공민학교를 설립 교육에 헌신하고 정희여고 은일여교의 교장으로 은퇴하셨다
■다음은 노벨사이언스 (스웨덴 노벨재단에서 인정한 과학기술지) “제2집 원로 문인에게 듣는다”에 실린 마대복 관장님을 대담한 내용중 저작권 문제로 일부만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 대담 : 김 노 (소설가. 한중문화예술콘텐츠협회 이사) 김노 : 마대복 관장님 이력사항에는 특별하게도 ‘구두닦이’부터 시작하여 많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잘살기 기념관을 세워 잘 살기 운동을 펼쳐 오고 계시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마대복 관장 : 우선 이렇게 <잘살기 기년관>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6.25사변 직후에 정읍 옹동면의 상도산이라는 산 밑의 험한 산골동네에서 살았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11살 나이에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매일 같이 10리(4km) 거리에 있는 깊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기도하고 주로는 숯을 받아다가 20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파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나이에 나뭇짐이 너무 무거워 고된 육체노동을 잊기 위해 형들이 가르쳐준 대로 형들이 건넨 삼잎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만들어 몰래 피웠습니다. 삼 잎을 말아 피웠으니 지금으로 치면 대마초를 피웠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에게 들통이 났고 화가 난 어머니는 저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대나무 뿌리로 된 회초리로 사정없이 저를 내려쳤습니다. "어린 것이 벌써 담배를 배우다니. 어린 아들이지만 너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그러나 나는 용서를 빌기는커녕 어머니에게 막 대들었습니다. " 매일 나무나 하고 학교도 못 다니는데 희망은 무슨 희망이야?" 매를 때리던 어머니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저를 와락 끌어안으시며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 내가 굶어 죽어도 너를 학교에 꼭 보내 주마." 그길로 저는 3년간 피우던 대마초를 끊고 학교에 복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이모님의 도움으로 이리(지금의 익산)남성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중2때 이모님께서 집을 잘못 사는 바람에 광주로 이사를 가버렸고 그 통에 수업료를 석달치 내지 못하자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학구열에 빠진 저를 위해 고민 끝에 함께 상경을 했고 을지로 5가 천막촌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장사를 하셨고 저는 대한극장 주변에서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공장직공, 양철쟁이, 신문배달, 은단장사, 공사판노동, 심지어 창녀들을 상대로 만화가게 등 숱한 밑바닥 일을 전전하면서도 밤이면 야간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유혹을 뿌리치며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한영고등학교야간부를 졸업할 수 있었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지난날 야간학교를 세우고 잘살기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는 물론 어머니의 사랑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덴마크의 교육 얘기였어요.
국어 수업 시간인데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어요. 야간학교라 수업을 할 수 없어 선생님께서 잠이 오는 학생은 자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내 얘기를 들어라 하시면서 어둠 속에서 덴마크의 발전의 이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달가스가 나무심기 운동을 했고, 그룬트비가 정신개조운동을 부르짖으며 각 대학에 다니며 강의를 한 것은 모두 알고 있겠지? 지금 하는 얘기는 책에 안 나온 얘기야. 실은 덴마크 인재의 산실인 국민고등학교를 세운 사람은 달가스도 그룬트비도 아닌 크리스텐 콜이라는 19살 먹은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청소년이란다. 그는 진실한 크리스찬이었는데 구두방을 하던 아버지의 창고를 헐어 20명의 학생들로 학교를 시작했고, 결국 그 학교는 3000명 학교로 성장했단다." 국어선생님의 이야기는 피곤에 지쳐 엎드려 있던 어린 나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크리스텐 콜보다 5년이나 더 공부를 했는데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초라한 구두닦이일 뿐인데... 하지만 나도 어려운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자!' 교육의 중요성을 그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김노 : 그동안 잘 살기 운동을 펼쳐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했으며 주요성과를 말씀해 주시지요. ▶마 관장 : 1964년 군대를 제대한 후 나는 이듬해부터 고등학교 시절 크리스텐 콜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나처럼 불우한 청소년을 위해 배움의 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1964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창공민학교를 몇 번 찾아간 끝에 장소 사용을 허락받아 '잘살기 중학원'을 개원한 것이 그 첫 시작이었습니다.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는 나의 확고한 신념에서 간판이름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불우청소년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습니다. 그때당시 산동네의 많은 불우청소년들의 부모들은 그날그날 막노동과 식모살이로 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쁜 시절이어서 누구하나 자식들의 교육이 우선일수가 없었고 오로지 먹고 사는 일이 급급해 아이들조차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되는 상황이어서 학생 모집에도 애를 먹었습니다. 아무튼 20여명의 학생들을 어렵게 모아 수업을 하기 시작했고 불과 5개월 만에 공민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꿈을 꺾을 수가 없어 창신동 골목 가로등 밑에서 수업을 계속 했습니다. 하지만 시끄럽다는 이유로 주민들로부터 쫓겨나 다시 창신동 산동네 고등학교 때 어머니와 함께 손수 흑벽돌을 찍어 지은 비좁은 집에서 불편한데로 앉고 문밖에 서서 수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장소도 문제지만 학생 모두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책과 노트도 다 사줘야 되는 형편이어서 나는 부득이 다시 구두닦이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경희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나는 학교 본관에서 교복을 입은 채 구두닦이를 하다가 당시 조영식 총장 눈에 띄었고, 사연을 알게 된 조 총장께서 음대 학생들에게 자선음악회를 열게 하고 모금을 해 야학 운영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잘살기 중학원”으로 시작해서 여러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1965년 3월 이화동에 건물을 마련해 <대명중학>을 설립했습니다. 1975년에 강남구 일원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8년에 다시 거여동으로 옮긴 뒤 1987년도 2월을 마지막으로 폐교가 되었습니다. 22년동안 졸업학생들이 무려3600여명이나 되고 가난으로 정식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대학교수, 목사, 소설가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심어준 작은 씨앗들이 큰 열매를 맺어 사회 구석구석을 비추어 주는 모습들이 저의 보람이고 기쁨이지요. ▶김노 : 애로사항도 있을 것이고 아쉬운 점도 있을 것입니다. ▶마 관장 : 청소년! 이름만 불러도 희망이 솟습니다. 청소년 그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청소년은 이미 청소년이 아닙니다. 꿈은 생명입니다. 꿈을 세워놓고 마라톤선수처럼 꾸준히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골인지점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꿈을 생각하는 순간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제자들 가운데 끼니조차 어려워서 배가고파 결석을 한 경우도 있었고 범죄를 저질러서 파출소로부터 호출을 당한적도 있었습니다. 소년원으로 들어간 제자들도 있었고 가족을 대신해서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학교에 나올 수 없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다 아픈 사연들이고 가슴 아팠지만 도저히 혼자만의 힘으로 능력으로는 다 포용할 수가 없어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작년통계에 의하면 1년 교통사망수가 2천여 명이고 자살자 수가 6천명이 넘는다고 하니 자살자수가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청소년 자살자수가 세계1위라니 경제대국이라고 큰소리 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국민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오늘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김노 : 마 관장님께서는 이화동에서 대단한 큰 꿈을 성취하셨습니다. 현재 문학원로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 원로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어렸을 때 장래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마 관장 : 애초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오로지 학구열과 어머니의 사랑으로 나 같은 불우청소년들을 위해 교육자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설립했고 교육에 혼신을 다하고저 노력했습니다. 폐교후에도 정희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감으로 취임했고 정희 여상고 교장으로 취임을 해서 거기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얼마 전 10여 명의 노인들이 기념관을 찾아와서 자기들이 잘살기 학원 졸업생이라며, 선생님 덕분에 가난을 딛고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고 말해서 지난날 겪었던 고생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보람되고 기뻤습니다.
▶김노 : 마 관장님께서는 시인이면서 수필가이신데요. 문단에 등단하신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등단한 계기는 무엇인지요. ▶마 관장 : 문단에 데뷔한지는 약 15년정도 됐습니다. 부모에 대한 시를 쓰기 시작하다가 수필을 쓰게 되였고 내가 겪은 삶의 역경을 글로 남겨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아내의 휴가”를 썼을 때는 뜻하지 않게 주변에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미약하나마 글로써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김노 : 대뷔 이후의 활동사항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마대복 : 개인의 저서 5권외에도 수필집 공저: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 합창하는 세상, 나뭇잎 강물에 띄우고. 그리고 시집, 수필집 공저: 열린문학, 이후문학, 달구벌 수필, 글송아리, 종로문학, 한국문학, 문장, 대구문학, 상록수문학, 문학정신. 이 있습니다.
동인활동으로는 구로문인회 동인, 서울교원문인회 동인, 수원 문학동호회원, 대구남구도서관 시회원, 대구중앙도서관 수필회원, 달구벌 수필회원 등 입니다. ▶김노 : 특히 문학분야에서는 주로 어떤 소재로 시나 수필을 쓰십니까. 그리고 그 동안 책은 몇 권을 내셨는지요. 여러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며 그 사연은 무엇입니까. ▶마 관장 : 주로 제가 그동안 겪은 삶을 소재로 글을 썼습니다. 수기문 “은총의 햇살이여”, 수필집 “삭발의 딸 아빠의 분노”, “사랑꽃 핀 발 자국”, “영호남 한마음 손에 손잡고”, 시집 “해와 달이 함께 산다” 등 총 5권 의 책을 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그래도 첫 작품집인 “은총의 햇살” 수기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기문 중에 ‘삭발의 모정’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출처 : 노벨사이언스> ▶이하 내용은 저작권 문제로 생략~~~ ▶<잘살기기념관>은 비록 외관은 허름해 보이지만 서울 종로구 이화벽화 마을속에 당당히 하나의 명물로 자리하고 있다. 오늘도 마대복 선생님께서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청소년들을 위해 꿈을 키워주는 희망 메시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알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