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예찬 / 민태원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心腸)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를 꾸며 내려온 동력(動力)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理性)은 투명(透明)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人間)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萬物)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生命)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 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人生)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希望)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沙漠)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뿐일 것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零落)과 부패(腐敗)뿐이다. 낙원(樂園)을 장식(裝飾)하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豊富)하게 하는 온갖 과실(果實)이 어디 있으랴?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無限)한 가치(價値)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勇敢)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釋迦)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황야(荒野)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孔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天下)를 철환(撤還)하였는가?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美人)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滿天下)의 대중(大衆)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 주며, 그들을 행복(幸福)스럽고 평화(平和)스러운 곳으로 인도(引導)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 싶이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현저(顯著)하여 일월(日月)과 같은 예가 되려니와, 그와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창공(蒼空)에 반짝이는 뭇별과 같이, 산야(山野)에 피어나는 군영(群英)과 같이, 이상은 실로 인간의 부패(腐敗)를 방지하는 소금이라 할지니, 인생에 가치(價値)를 주는 원질(原質)이 되는 것이다.
이상! 빛나는 귀중(貴重)한 이상! 그것은 청춘의 누리는 바 특권(特權)이다. 그들은 순진(純眞)한지라 감동하기 쉽고, 그들은 점염(點染)이 적은지라 죄악(罪惡)에 병들지 아니하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하는 곳이 원대(遠大)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현실에 대한 자신과 용기(勇氣)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皮膚)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生)의 찬미(讚美)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雄大)한 관현악(管絃樂)이며, 미묘한 교향악(交響樂)이다. 뼈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悅樂)의 소리다.
이것은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幼少年)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시들어 가는 노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 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이 황금 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하여, 힘차게 도래하며 힘차게 약동하자.
민태원 선생 소개
민태원 선생은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에서 태어난 언론인이자 문인으로 그 유명한 수필 ‘청춘예찬’의 저자이다. 1894년 부친 민삼형의 5남 1녀중 4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우보(牛步), 16세에 상경하여 경성관립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18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애사'(哀史)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1920년 김억·변영로·남궁벽·염상섭 등과 함께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동아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내면서 화려한 산문체로 언론계에서 이름을 빛냈다. 소설로는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소녀를 통해 가난과 추함을 보여주는 "어느 소녀"(폐허, 1920. 7), 예술가 지망생을 주인공으로 한 "음악회"(폐허, 1921. 1) 외에 "겁화 劫火"(동명, 1922. 9) 등을 발표했다. 1925년 일본 번역서 "오노가츠미 己が罪"를 "부평초"라는 제목으로 번역했고, 1948년에는 포아고베의 "철가면"을 "무쇠탈"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단행본을 펴냈다. 역사서로 "갑신정변과 김옥균"이 있다. 1934년 41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궁정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