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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째 장마 소식에도 불구하고 비다운 비는 내리지 않고 후텁지근하기만 했던 날씨가 막상 한국을 떠나려고 하니 그동안 참았던 비를 쏟아내듯 줄기차게 퍼부어 댔다.
미국시각으로 6월 5일 토요일 오후에 이곳 블루밍턴을 출발했다가 바로 어제 7월 2일 밤 자정을 넘겨서 돌아왔으니 이동시간을 포함해서 꼬박 4주동안의 긴 휴가였다. 7년만의 한국방문이라 설레기도 하고 6명의 대가족이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터라 긴장과 걱정도 적잖았지만, 돌이켜보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순적하게 인도해 주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1. 서울도착
지난 1월 29일에 항공편을 예약해 두었는데,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시카고로 떠나는 비행기가 50분이나 일찍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된 줄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시간에 겨우 맞게 도착해서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했다. 시카고 시각으로 새벽 1시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를 기다리는 5시간동안 이미 너무 지쳐버려서 13시간 반정도의 한국까지 비행이 정말 길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인천공항에 새벽 5시에 도착해서 바로 부모님과 정균이를 만나 새벽길을 가르고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서울 공릉동 정균이네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간단한 아침을 마쳤지만, 어머니가 차려주신 맛있는 아침을 거를 수가 없었고 그때부터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하루 세끼 꼬박 챙겨먹으면서 약 2kg을 불려서 미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네 중국음식점에서 시켜먹은 짜장면과 짬뽕은 미국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집들보다 최소 100배는 맛이 있었다. 이후로 4-5번 정도 짜짱면은 실컷 먹고 왔다.
점심을 먹고난 후에는 스타렉스에 온 식구를 태우고 석사때 지도교수를 찾아 뵙고자 신림동으로 향했다. 몰라보게 달라진 주변 풍경들이 너무 낯설었고, 막상 학교에 도착해보니 과사무실과 연구실들이 모두 이사를 하는 바람에 찾아 헤매느라 무더운 날씨에 땀을 비오듯 흘리게 되었다. 회의중이라 잠깐동안만 노태희 교수를 만나 오랫만의 기억을 더듬었고, 마침 학교안에 신한은행이 있어 다음날 있을 미대사관 비자 인터뷰 신청비를 납부하고는 다시 정균네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데이비스에서 교제를 나누었던 윤이네를 만나서 함께 식사하며 그동안 안부를 나누는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는 새침떼던 윤이도 곧 하준이랑 즐겁게 어울렸고, 혜인이도 오랜 만에 보는 지은이랑 정원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하남이는 너무 피곤했는지 밥을 먹는 도중 고꾸라져서 밥상 밑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둘째날 화요일에는 12시 반에 예약되어 있는 비자 인터뷰때문에 오전중에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부모님께 애들을 맡겨 둔채 혜윤이만 데리고 긴 줄에 서서 뙤약볕 아래 30여분 기다린 끝에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다시 줄을 서서 서류를 접수하고 영사에게 5분도 안 되는 짧은 인터뷰를 받고 밖으로 나오니 2시경이 되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에 있는 롯데백화점으로 이동해서 지하 푸드코트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창우네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다음 약속 장소인 고대 앞에 도착해서 20-30분 정도 창우엄마를 기다렸고, 10여분 걸어서 식당에 도착하니 마침 한박사님이 택시를 타고 도착해서 함께 일식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이번에는 하준이가 식사도중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늦어도 7시에는 서울을 떠나 다음 약속 장소인 동탄으로 준호네에 가기로 되었는데, 식사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7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지하철 수원행을 타고 서동탄까지는 제법 멀텐데, 갈까 말까 전화를 걸어 준호엄마랑 상의를 하다가, 오늘 아니면 언제 또 만날지 기약도 없고, 데이비스 시절 하남이 베스트프렌드였던 준호랑 하남이를 한번쯤 만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이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늦은 시각 지하철은 안산, 수원을 지나면서 점점 한산해졌다. 10시쯤에 병점역에 도착하니 준호아빠가 준호와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 2년 이상 시간의 갭때문인지 하남이랑 준호가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 하던것과는 달리 몰라보게 자라고 예뻐진 연재는 연신 하준이한테 영어를 해보라며 금방 우리 애들하고 친해졌다. 그래도 준호는 다음날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와서 짧아서 아쉬운 시간을 하남이와 함께 보냈고, 우리가 떠나고 나서 울었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보니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네에서 1박 2일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나서, 다시 서울에 돌아오려는 계획을 변경해 부모님이 차를 몰고 수원역으로 오셔서, 서울에서 대학동기들과 저녁약속이 잡혀있던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를 픽업해서 전주로 내려가셨다.
나는 다시 수원역에서 지하철로 신도림역까지 이동해서 테크노빌딩 중식당에서 대학졸업한 지 15년 만에 동기들과 반갑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재규, 선영이, 정욱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시간이 되어 명재-건성이 가족, 경남이, 신정이, 혜경이, 수연이가 뒤이어 도착했고, 멀리 춘천에서 직접 차를 몰고 딸래미와 함께 희숙이가 왔고, 맨 나중에 도영이가 찾아왔다. 그간 오랜 세월이 흘렀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다.
밤늦게 지하철을 타고 다시 공릉동 정균네로 가서 3-4시간 잠을 잔 뒤 원광대에서 강의해야 하는 정균이를 따라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전주로 향했다. 전주 IC 근처에까지 마중 오신 아버지 차로 바꿔타고 마침내 안덕 부모님 댁에 도착해서 전날 와 있던 가족들과 다시 만났다.
2. 대구
6월 11일 금요일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이동해 다음 주 토요일까지 수성구 범어동 장모님 댁에 머물렀다. 화요일에 비자 인터뷰를 마치고, 목요일 택배로 여권 4개가 무사히 장모님 댁에 도착해 있었다. 토요일에는 혜인엄마가 진찰을 받고 월요일 수술예약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재현이 가정이 찾아와 사진으로만 봐왔던, 처조카들 예담이와 예음이를 만났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처갓집이 아이들로 넘쳐났다. 저녁무렵 롯데백화점으로 쇼핑을 나가서는 재현이가 혜인이 옷을 사 주었고, 서울에서 지민이와 혜선이가 KTX를 타고 내려와 백화점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가족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동대구역 근처 던킨도넛으로 자리를 옮겨 근황을 나눈 뒤 다시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먼길 마다하고 달려와서 데이비스 시절을 회상하며 한국에서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는 애들이 큰 격려가 되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대구제일교회에서 주일예배 후에 교회 내에 있는 사진관에서 11명 대가족사진을 찍고 나서 장인어른 산소가 있는 추풍령으로 향했다. 지난 6월 29일은 장인어른이 타계하신지 12년이 되는 날이었다. 산소주변에 모여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한 뒤 다시 차를 몰아 칠곡에 있는 재현이네 집으로 돌아와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내가 소개해준 내수동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승범이를 통해 사랑하는 후배 곽인섭 목사랑 전화로나마 안부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한번 시간을 내서 내수동교회를 방문해 박지웅 목사님이랑 선후배 동기들에게 간단한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결국 그냥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월요일 아침 2박 3일 일정으로 수술을 위해 자리를 비운 아내를 대신해서 혜윤이를 돌보게 되었는데, 엄마가 없으니 징징거리지도 않고 어찌나 잘 놀던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오니 이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화요일에는 부산에서 민영이가 집으로 찾아와 한국에서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는지를 들려주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보냈고, 목요일에는 서울에서 정현자매가, 그리고 금요일에는 서울에서 부산에 출장중인 한나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대구로 올라와 위로와 격려의 시간을 보냈다. 참 감사한 자매들이다. 데이비스에서 보낸 시간이 의미있었음을 하나님께서 상기시켜 주셨다.
아직 회복이 덜 된 아내와 혜윤이를 남겨두고 혜인, 하남, 하준이만 데리고 토요일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홍콩반점이 물짜장으로 유명하다길래 마중 나오신 아버지와 함께 그 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안덕으로 들어갔다.
3. 목포
6월 20일 안덕교회에서 주일예배와 오후예배까지 하고 나서 정균이네 가족과 함께 목포에 있는 소연이네 집으로 향했다. 2시간 남짓 차를 타고 목포에 도달했고 최근에 이전한 전남도청 근처에 몇달전에 개척한 물댄동산교회에 도착했다. 미처 정리가 덜 되어 아직도 군데군데 공사중인 구획 안에 깔끔한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본당, 2층은 친교실, 3층은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끔 화상통화로 어색한 만남을 이어왔던 하늘이, 이슬이, 단비 3남매를 만나자 우리 애들과 금방 친해져서 널찍한 친교실을 마음껏 뛰어 다니며 즐거운 첫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아침마다 인근 새벽시장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구입해 오셔서 삼시세끼를 푸짐하게 풍성한 식탁을 준비하시느라 어머니가 고생하셨다. 전복죽, 연포탕, 낙지볶음, 바지락무침, 간장게장, 병치회무침, 병치구이, 조기구이, 갈치구이 등등 배가 꺼질 여유가 거의 없었다.
월요일은 마침 하늘이 아빠가 쉬는 날이라 온 가족을 원래 섬이었는데 이제는 연육교로 연결된 증도로 안내했다. 큰 기대없이 따라 나섰는데, 속시원한 바닷바람에 드넓은 갯벌과 깨끗한 모래사장이 여느 관광지 못지 않은 아주 멋진 곳이었다. 짚으로 지붕을 엮은 파라솔이 늘어서 있는 모래사장은 사진 속의 와이키키 해변을 연상케 했다. 라면과 김밥으로 꿀같은 점심을 먹고 나니 마침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났고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조개와 게잡기에 몰두했다. 아직 방학때가 아니라서 넓은 갯벌을 우리 식구만 차지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바닷게와 조개잡는 일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제법 많은 양의 게와 생합을 잡을 수 있었다. 부드럽고 단단한 갯벌에서 할아버지와 하늘이, 하준이는 축구게임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하준이가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내게 가만히 찾아와 "아빠 오늘은 재미있는 날이야. 또 오고 싶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화요일이 되어서 대구에서 혜인이엄마와 혜윤이가 장모님과 함께 광주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새롭게 개통된 광주-무안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니 광주-목포는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연이네 집에 모인 가족이 모두 17명이 되었다.
수요일에는 간단한 목포 투어를 했고, 목요일 오후 뒤늦게 합류한 장모님과 혜인이 엄마와 함께 온 가족이 증도를 다시 찾았다. 조개잡기 노하우를 제대로 터득한 하남이는 갯벌에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 두번째 방문이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가족과 함께 놀기 좋은 곳이었다.
금요일 오후에는 보성으로 차를 몰고 가서 가끔 영화나 광고에 근사하게 등장하는 녹차밭을 구경했다. 막상 가보니 별게 아니었지만 예쁘게 줄지어 가꾸어진 차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은 뒤 다시 목포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가져갈 다시마와 멸치를 준비할겸 주일예배를 본교회에서 드리고 싶으신 장모님께서 토요일 아침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가시고, 아버지는 오후 내내 소연이네 애들하고 우리 애들에게 약속한 것들을 지키시느라 미니축구장으로 분수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셨다. 나라면 아무리 손주들이 예뻐도 아버지처럼 하기 어려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셨다.
주일예배 후 물댄동산교회 성도들과 함께 양념된 돼지갈비가 들어간 해물탕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짐을 챙겨 안덕으로 일주일만에 돌아왔다.
어릴적 고창에 있는 동호해수욕장에서 부모님과 소연이, 정균이, 그리고 나까지 3남매가 함께 한 지붕 아래서 먹고 자던 시간을 보낸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오랜시간(일주일)을 함께 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공간을 기꺼이 오픈해준 소연이와 김은성 목사에게 고맙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손님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백일된 윤하를 데리고, 이가 아파 수술받고 치료받는 중에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제수씨와 조카들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같이 보내기 위해 애쓴 정균이도 많이 고맙다.
4. 다시 전주 그리고 미국으로
6월 27일 주일 오후 전주에 돌아와서 다음날 변산반도국립공원내 격포에 있는 대명리조트에서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바닷가 특히 갯벌에서 다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길래 한국 떠나기 전 한번 더 바다를 보기로 했다.
리조트 예약을 위해 아버지는 먼저 부안으로 떠나시고, 치아 치료때문에 함께 하기 힘든 제수씨와 윤하는 친정에 남기로 하고 정균이가 차를 몰고 군산을 들러 최근에 개통한 새만금방조제를 따라 부안에 있는 대명 변산 리조트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싸가지고 온 음식으로 점심을 먹은 뒤 3시 무렵에 도착하신 아버지와 함께 발코니 아래 내려다 보이는 아쿠아월드에서 7시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소 입장료가 비쌌지만, 아이들 모두 원없이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저녁식사 이후에는 밤바다를 산책하기도 했고, 이튿날에는 리조트 뒷편 해변에서 채석강까지 걸어 가면서 비경을 감상했다. 바위틈에 숨어 있는 바닷게, 물이 빠져 나간뒤 생긴 조그만 웅덩이에 말미잘, 해변에 널부러진 해파리, 바퀴벌레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갯강구, 해변 한쪽을 까맣게 덮은 홍합 등등 뿐 아니라 켜켜이 쌓아 놓은 듯한 바위의 웅장한 모습이 아름다운 채석강 곳곳의 풍광이 우리를 사로잡아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정오가 되어 숙소에서 첵아웃을 하고 해변도로를 따라 적벽강과 하섬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친뒤 행안면 쪽으로 빠져나와서 부안 시내를 지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아갔다. 하준이가 차 안에서 질문을 한다. "왜 한국에는 풀 안에 죽은 사람이 많아?"
외할아버지 산소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산소를 방문한 뒤 생긴 하준이의 질문이다.
김제로 발길을 돌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벽골제 터를 방문해서 점심을 먹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꾸며 놓긴 했지만, 가족들이 한때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3-4시간 머물면서 사진도 찍고, 연날리기, 제기차기, 새총쏘기 등 아이들이 특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추도예배 인도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와는 전주 근교에서 헤어지고, 이마트에 들러 애들 장난감과 혜윤이 기저귀를 구입한 뒤 꼭 먹어보고 싶었던 베테랑 칼국수를 먹으러 경기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일이었고, 다소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손님이 많았다. 칼국수, 소바, 쫄면, 만두, 팥빙수 등을 골고루 배불리 시켜먹고 나서 안덕 집으로 돌아왔다.
6월 30일 수요일 오전에 마지막으로 병원에 가서 혜인이 엄마 수술경과를 확인한 뒤, 롯데백화점으로 가서 어머니께서 혜인이와 혜인이 엄마 옷을 사주셨다. 미국이 훨씬 싸다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이제 초등학교 졸업한 혜인이를 다큰 처녀처럼 옷을 사주시는게 나만 못마땅하지 나말고는 모두 행복한것 같다.
대구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다시 오신 장모님을 픽업해서 예전에 돌솥밥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던 영진회관으로 갔다. 주인이 바뀌어서 맛은 예전만 못하고, 종업원이나 주인이나 은근 불친절한게 마음이 쓰였는지 미국으로 떠나기 이틀전에 덜컥 체하고 말았다. 윤하 백일 사진을 찍은 정균이가 오후 6시 혜윤이 돌사진을 찍기로 예약을 잡고 우리는 모두 안덕으로 돌아오니 오후 4시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준태기를 잡기 위해 상류로 차를 몰고 가셨다. 정균이가 도착하기 전 한시간 반정도 시간이 남아 따라갔다. 고기병 두개에 미끼로 쓸 된장과 잡은 물고기를 담을 바스켓을 챙겨서 올라갔다. 두 군데에 고기병을 놓아 두고 상류로 좀더 걸어 들어가니 제법 널찍한 곳에 애들이 물놀이 할만한 곳이 나왔다. 하남이 하준이가 발을 담그러 들어가더니 금새 옷을 적신다. 날이 더워 춥지는 않은 모양이다. 시간이 되어 혜인이와 둘이서 걸어 내려왔다.
돌사진 찍는 내내 혜윤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누굴 닮았는지 애교도 있고 붙임성도 있다. 위에 애들하고는 또 다르다. 넷이지만 아이들 하나하나가 비슷한듯 하면서 서로 다른 것이 참 신기하다. 언제 또 먹을 수 있을까 해서 파리바케트에서 생크림 케익을 사가지고 돌아와서 혜윤이 이른 돌 축하를 했다. 체기가 있어도 역시 부드러운 빵과 달콤한 크림은 한국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 같았다.
7월 1일 목요일, 하루 종일 후텁해서 무덥기 그지 없는 날씨에 대전에서 혜인이 엄마 친구가 찾아왔다. 난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우리 카페에 종종 찾아와서 글도 자주 남기는 터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데이비스에 있을 때는 그 남편분을 만난 적도 있었다. 시골 깊숙한 곳까지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자 찾아와준 친구가 고맙기 그지없다.
대우빌딩 부페식당에서 친가와 외가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귀국 및 출국 작별인사를 했다. 고모들 이모들 삼촌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릴 시간이 없어 할 수 없는 방법이긴 했지만, 아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결혼한 종일이 형 형수나 조카들, 연균이 형 조카들을 처음 보는데 이름을 가르쳐 줘도 자꾸 잊어버린다. 키가 187cm가 된 성결이는 도무지 못 알아볼 뻔 했다. 그녀석이 벌써 군대에 간다니. 예은이도 고2라 학교에 있어 볼 수 없었고, 중2가 된 재환이도 간단히 통화만 했다. 그나마 외갓집 사촌들은 소희네 초상집에 들르지 않았으면 성결이 말고는 하나도 못 볼 뻔했다.
소희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소녀같았고, 아들이 하나 있는 은아도 대학생같이 앳되어 보였고, 은총이는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여쁜 처녀가 되었고, 종권이와 영광이는 어릴 때 모습이 아직도 얼굴에 많이 남아 있었다.
밤늦게 돌아와 미국으로 돌아갈 짐을 꾸리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7월 2일 금요일 어머니가 챙겨주신 마지막 아침을 먹고, 스티로폼 박스 한가득 얼린 생선을 담아 주셔서 마지막 짐가방에 챙겨 넣고 10시 반쯤 안덕집을 나섰다. 전주 시내로 나가 롯데백화점 지하에서 피자, 만두, 치킨버거, 케밥, 빵 등 공항가는 길에 점심대신 먹을 요량으로 이것저것 구입해서 12시가 못되어 코아호텔 앞 공항리무진 타는 곳에 도착했다. 인천공항까지 직행하는 리무진이 12시 30분에 전주를 떠나 천안휴게소를 거쳐 오후 4시를 조금 넘겨서 중간중간 내리던 빗속을 뚫고 공항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대구에서 재현이가 미리 와 있었고, 아시아나 데스크에서 수하물을 보내고 보딩패스를 받는 동안 규진씨가 홍준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아장아장 걷던 홍준이는 개구장이 7살이 되어 있었지만 규진씨는 여전히 어려보였다. 뒤이어 민주네 엄마 아빠가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했고, 정균이 가족도 주차를 하고 가족 모두 모인 곳에 찾아왔다.
6시가 조금 못되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가족들과 친구들과 작별을 하는 순간 이제 떠날 시간이라는게 실감이 났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모님도 그동안 2번씩 미국에 찾아 오시기도 했지만 흘러가는 세월 앞에 이젠 예전같지 않으신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시 뵐 때까지 꼭 건강하시기를...
오후 7시 20분에 인천공항을 서서히 출발한 항공기가 13시간을 날아서 시카고 현지 시각 오후 6시 20분이 되어서 O'Hare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를 하고 짐을 찾아 나와서 다시 짐을 부치고 인디애나폴리스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다시 검색대를 통과해 다른 터미널로 이동하니 출발시각 8:40을 한 시간 남짓 남겨두었다.
약 한시간 정도를 비행해 인디애나폴리스에 도착하니 동규아빠가 마중 나와 있었고 밤 11시 20분경이 되어서야 수하물로 보냈던 짐을 모두 찾아 블루밍턴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7월 3일 토요일 새벽이 되었다.
4주간의 시간이 꿈같이 흘러갔다. 가족들과 잊지 못할 순간들을 보냈다. 데이비스에서 함께 신앙생활했던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귀한 교제들을 나누었다.
이제 다시 이곳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세상 어느 곳도 영원한 내 집이 없는 나그네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우리 가족 모두가 나와 함께 순례길을 가고 있음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