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Nineveh(지명)
(hwEn]ynI , Nineveh)「합의」
앗수르 제국 최후의 동방(東方) 수도인데, 티그리스 강 동쪽 유셀 강의 합류점에 있는 현재의 모술(Mosul)의 대안에 있었다. 메소보다미아 지방에 있어서최고, 최대의 성읍 중 하나였으나, BC 612년의 함락 이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앗수르어로는 `Ninua' 또는 `Nina'라고 한다.
(1) 성읍의 역사:전통적으로는 니므롯이 창설자이다. 그는 메소보다미아의 다른 고성읍과같이 니느웨를 건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창 10:10-12). 확실히 니느웨의 거주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던 증거가 있다. BC 3000년대 말경의 설형문자(楔形文字) 문서나 함무라비(Hammurabi) 법전(BC 1670년 경)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성읍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BC 8세기에 사르곤 Ⅱ세의 아들 산헤립(BC 705-681 재위)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 되고, 그 후 제국의 전성기를 통하여 수도의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 이전에도 BC 12세기 말 경부터 이미 앗수르의 주요한 도시로 되어 왕궁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이 곳을 제국의 수도라 하고 왕의 상주지로 한 것은 산헤립에 비롯된다(왕하19:36). 이어 에살핫돈(BC 681-669), 앗수르바니발(Asshurbanipal, BC669-633)은 이 성읍에 영광이 있게 하였다. 특히 앗수르바니발의 궁전과 도서관은유명하다. 그러나 BC 612년 메대와 갈대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니느웨는 함락되었다. 이함락과 멸망을 예언한 사람은 나훔과 스바냐이다. 나훔은 번성의 극에 달한 니느웨가 정복된 땅으로부터의 약탈품으로 가득찰 모양을 `사자의 굴'로 말하고, 또 그 속에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 하도다"라고 말하면서 `피 성'이라고 평하였다(나 2:11,3:1). 그리고 그 멸망을 애곡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나 3:7). 스바냐는 니느웨가 멸망하여 황무한 사막처럼 된다고 예언하였다(습 2:13-15). 실제로 니느웨의 궤멸은철저하여 그 폐허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확정하지 못하였다.요나도 니느웨 멸망의 예언을 했지만, 그것은 나훔이나 스바냐처럼 역사적 예언은 아니다.`니느웨 왕'(욘 3:6)이라는 표현이나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욘 3:3)라는 것은, 발굴된 성읍의 크기에 맞지 않는 것, 또 니느웨의 주민이 회개하여 여호와의 예배자로 되었다(욘 3:6-9)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 요나서의 사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요나서의 기록된 제재들이 역사적, 또는 지리적 형편과 부합하고, 또 기록된 근본적 의미나 심리적 현상이 어떤 꾸민 이야기의 성격에 아주 반대되는 사실과, 유대 문헌 중 토빗(Tobit)경도 본서의 말씀이 요나의 것이라 하였고, 마카비서에도 요나에 관련된 사실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였다(마카비 3서 6:8).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친히 요나의 사적을 역사적 사실로 아시고 관설하셨다(마 12:39,40,16:4,눅11:29-32).
(2) 고고학상의 니느웨:1820년 바그다드 주제 영국인 리치(Rich)의 주의 깊은 폐허의 탐사에 의하여 이 고대 니느웨의 유적이라는 결론에 처음으로 도달하였다. 1842년 다시 봇타(P.Botta)에 의해 발굴 되었으나, 곧 그의 활동은 그 곳으로부터 약 16㎞북쪽골사밧(Khorsabad)으로 이동되어 거기서 사르곤의 궁전 일부를 발굴하였다. 1845년과 1850년 사이에 레야드(Layard)는 모술(Mosul)시의 남쪽 29㎞지점에 있는 님룻(Nimrud)에서도 살만에셀 3세의 궁전 일부를 발굴하였다. 또 같은 곳에서 앗수르최후의 세 군주의 궁전의 어떤 부분도 발굴한 것으로서 모술보다 티그리스를 건너 대안을고대 니느웨의 유족과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니느웨의 폐허는 고스르(Khosr) 강에 의하여 분할된 두 방축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 중 하나, 즉 북쪽에 있는 것은 `구윤직'(Kuyunjik)이라 불리우는데, 레야드에 의해 발견되어 산헤립(BC 705-681)의 궁전과 앗술 바니발(BC 668-626)의 궁전이 거기 건립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 즉 남쪽에 있는 것은 `네비유누스'(Nebi Yunus, 선지자요나라는 뜻이며, 그가 여기에 묻혔다는 전설에 기인한 명칭)라 불리우고, 그 곳에는 산헤립, 에살핫돈(BC 681-668)의 궁전이 건립되어 있었다. 이들 궁전은 웅장하였으며,유적으로부터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였던 대 창고가 발굴되어 수천 개의 토판(土版), 원주형의 도장, 흉상, 조상(彫像), 기타 고고학상 흥미있는 진짜 고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성벽에둘러 쌓여 있던 성읍은 길이 5㎞, 넓이 1.6-2.4㎞, 면적 730ha, 여리고 성의 약 250배의넓이로서,고대니느웨의 성곽선(城廓線)의 자리를 정밀하게 더듬을 수가 있다. 산헤립의 8각 프리즘(Eight-sided baked clay prism, 이것은 BC 694년에 기록된 것인데,산헤립의 연대기의 제 4판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프리즘의 No.103,000이다)에 의하면, 니느웨의 성벽에는 남과 동에 7개, 북에 3개, 서에 5개, 도합 15개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각 문에는 각기 의미가 있는 명칭을 붙이고, 또 문을 수호하는 신들에게도 여러 가지 특색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니느웨의 크기와 인구에대한 요나서의 기술(3:3, 4:11)을 고찰해보면, 우리는 저자의 염두에 니느웨 성읍의 교외 성읍, 즉 29㎞ 남쪽의 티그리스 강 동안에 있는 갈라, 레센, 르호봇일 등 창세기 10:11 이하의기록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성읍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 있었다고 하지 않으면, 니느웨의 북쪽 16㎞의 거리에는 거의 갈라만큼 큰 사르곤 2세의 궁전이 서 있었으며, 동쪽 11㎞의지점에는 아직 동일시되고 있지 않은 성읍이 있었다. 이들 제성읍과 그들 교외와 인구를 전부 합친다면, 요나서가 기록한 니느웨의 넓이와 인구에 대한 과대한 표현에 충분히 응할 수있다. 따라서 전술한 의심은 이것으로서도 충분히 풀린다.
출처 : 디럭스 바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