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頂鶴이 춤추는 듯한 형상의 舞鶴山을 주산으로
양 날개로 왼쪽에 대곡산, 오른쪽에 봉화산을 끼고 몸체인 학봉에 연하여 부리인
趨山으로 내 달리다 合浦의 푸른 물에 잠겨 산맥이 끝을 접습니다.
그야말로 背山臨水 명당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서원골은 바위와 물이 맑고
감천은 물맛이 달며, 선재봉산들의 우거진 숲으로 공기가 맑으며, 바다와 들에서
나는 물산도 풍족하여 그속에 사는 인심도 좋아서 서울 안 가고 여기서도 얼마든
지 山淸 水淸 人淸의 삼청동(三淸洞)을 이루어 사는 고장입니다.
공기 좋아 물이 좋아 요양시설이 많은 요양과 치유의 도시
그래서 결핵 앓는 창백한 인텔리겐챠들이 머물던 여인숙의 땅
고려정의 샘물로 빚은 맛 좋은 명품 몽고간장의 고장
온생이샘*의 물로 빚은 일본술 正宗으로 이름났던 술의 고장
한국전쟁후 한때 예술가들로 르네상스를 구가하던 문화-예술의 도시
노산과 김동진의 가곡중의 왕가곡 가고파의 산실인 그 남쪽바다 마산
北浦 원산과 西浦 강경과 더불어 아득한 옛날 골포시대부터 우리나라 3대항중의
하나였던 골포항 南浦 마산은 8세기에 합포로 바뀌었다가 고려 충렬왕때 회원으
로 불렀습니다. 1663년(현종 4)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낙동강 일대의 조공미
를 서울로 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현재의 남성동에 설치되었고, 그때부터 용마산
(龍馬山)에서 유래한 마산포(馬山浦)라 하여 오늘날 마산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먼 옛날에 신라의 孤雲 최치원선생이 쇠망해 가는 신라의 서글픈 그림자를 月影
臺로 세우고 또 마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라비린토스의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것처럼 돝섬의 괴물 황금돼지를 물리치는 유사한 전설을 남기고 있습니다.
황금돼지가 제거된 돝섬은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옛날의 돼지같다던 그 섬의
윤곽은 온데 간데 없고 이젠 가을이면 국화향기가 가득한 국화제가 열려 여가를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을 이리로 모우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려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전초기지 征東行省을 세우고
두차례에 걸쳐 정벌에 나섰지만 천기가 안 좋아 실패하였는데, 이를 일본쪽에서
는 신이 도와 주는 폭풍(神風 가미가제)이 불어 주었다고 고마워 합니다. 그 즈음
병정과 군마가 마실 고려정을 팠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판 몽고정이라 잘못 알려
진 샘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실패로 돌아간뒤 후환을 막기위하여 추산 一名
환주산에 자산성을 축조하면서 판 우물이기 때문에 고려정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때 이를 몽고정이라 하여 우리민족을 늘 지배받는 열등민족으로
비하하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삼았습니다. 그 즈음에 자산성밖에 해자를 설치하
였는데 이것이 城濠(湖)洞의 유래일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됩니다.
조선조 선조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포성에서 왜군을 막았는데 용마산에 그
잔재로 일본왜성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운동은 3월3일 창신과 의신 학생들에 의하여 만세와
독립선언서의 낭독으로 이어지고 4월 3일 인근의 삼진연합의거로 확산되었습니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의 소식을 이듬해에 들은 이정문등 마산의 청년들이 이
소식을 등사하여 온천지에 뿌리고 다니다 체포되어 감옥을 살고 나와서는 또
만세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이와 같은 항거의 전통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에 항의하여 시민 학생이 궐기한 3-15의거 기념탑에 고스란히 담겨졌고 경향의
각지로 파급되어 서울의 4-19 혁명으로 이어져 자유당의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
고 새로운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무능한 민주당정권은 혼란의 와중에서 5-16군사혁명의 철퇴를 맞고, 반공을 국시
로 삼고 민생고의 해결을 위한 혁명구호에 따라 경제개발계획으로 국내 최대의
마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되고 수출자유지역공단이 들어서며 인근 창원에도 대규모
중공업단지가 유치되어 급속한 산업화의 폐해로 공기오염, 바다오염이 심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마산도 더 이상 공기 좋고, 물 좋은 여건에서 요양병원
과 휴양시설의 천국을 자부하던 마산이 아니게 된 것이 아쉽습니다.
마산이 산업화 도시로 탈바꿈 한것은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5만kw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출 1억불의 위업을 달성한 화섬왕국 한일합섬의 건설과
한국철강과 수출자유지역 공단과 인근 창원의 중공업단지의 조성에 힘입었습니다.
그중 한일합섬의 흥망성쇠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정치적 지원을 받아 출발했던 한일합섬은 정치적 희생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섬유업종을 토대로 성장하던 한일합섬은 우리나라의 산학협동의 모범과 선구
자로 한일여자실업학교를 세워 교육에도 공헌하였으나, 아파트건설에 나섰다가 그
만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한때 마산의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한일합섬은 아픈 흔
적마저도 남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제 무심한 아파트만 빽빽히 들어서 있습니다.
흘러간 우리가요중에 마산의 풍물을 노래한 <오동동타령>과 <산장의 여인>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즉물적인 오동동타령은 야인초가 작사하고 한복남이 작곡하였고
애절한 쪽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라는 말로 시작하는 산장
의 여인을 들으면서 호화별장 산장에 있으면서 무슨 호사스런 복에 겨운 푸념인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장이 마산 국립결핵요양소 등에서 중한 병에 걸린
환자를 격리하는 요막사(療幕舍)인 것을 알고는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마산
출신의 반야월(가수 진방남)이 작사하고 나그네 설음의 이재호가 작곡한 것을 왕년
의 인기여가수 권혜경이 즐겨 불렀는네 이 노랫말처럼 외롭게 투병하다 죽었다하니
가수 송대관의 말처럼 자기는 슬픈 노래는 단연코 부르지 않는다 했는데 이왕이면
우리도 밝고 즐겁고 유쾌하고 희망 찬 노래를 부르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지난날 결핵병은 후진국의 레텔이었고 망국병이었습니다.
마산에 요양시설이 많던 시절에는 "문인들의 직업병"으로 불리던 폐결핵으로
많은 문인들이 마산을 거쳐 갔는데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임화와 지하련은 산호리 2층집에서 살았고, 권환, 백석,
김상옥, 이영도, 구상, 김지하, 천양희, 박정만이 있고 이 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으며 그리고 "이름 모를 소녀"로 70년대
를 풍미하던 요절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합니다.
우리 가곡중의 명가곡 가고파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이 지은 10련의 연시조에
평양 숭실의 학생이던 김동진이 양주동선생의 강의를 듣고 앞의 4련을 작곡하
고 또 41년을 지나서 뒤의 6련을 마저 완성한 것으로 명곡중의 명가곡입니다.
김동진의 고향 안주는 청천강변에 위치하여 가고파의 시상에 들어 맞는 곳으로
전편이 고향 떠난 김동진선생 개인의 향수의 노래라면
후편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노래라고 할수 있습니다.
또 이 가고파는 작곡자의 목숨을 구하여 준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1-4후퇴 당시 월남피난중 검문에 걸려 아무 증명서도 제시하지 못하여 응급결에
가고파를 아느냐 묻고 안다하니 내가 가고파의 작곡자 김동진이요 하고 어려운
고비를 벗어 났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곳곳에서 축제를 행하는데
우리 마산에서도 관광상품으로 부산의 국제영화제에 연계하여
우리 고장출신의 문학가 노산 이은상선생과
누구보다도 남쪽바다 마산을 알려 준 공로자 김동진선생과
노동으로 일하여 예술을 창조하는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선생을
기리는 가고파축제(등과 같은것)를 개최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註] *온생이 샘* : 은상이 샘이 와전된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노산 이은상선생의 출생을 기념하여 창신학교의 설립자 아버지 이승규옹이
집의 안팎에서 같이 이용하도록 판 우물로 북마산 파출소 밑에 있습니다.
첫댓글 제가 중1년때 마산에 왔는데 그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지금까지 <가고파>가 애창곡이었죠. 저는 무학산과 합포만이 넘 좋습니다. 그래서 마산을 못 떠나고 지금까지 살죠. 잠깐 창원에서 3개월을 살았는데 버스타고 마산 가까이만 오면 눈물이 나서 다정스런 골목이 돌고도는 마산으로 짐을 싸서 돌아왔죠. 지금은 창원시가 되었지만 제 맘속에는 마산시입니다.
저의 고향은 경북 군위군입니다만 중학교 3학년때 배운 이은상님의 "가고파"에 반해서 지금까지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20년전 이곳 마산양덕동에서 계속 살고있습니다.반용산을 오르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가고파를 즐겨 부릅니다...마음의 고향~~ 가고파의 고향~ 사랑합니다....
저는 마산태생입니다... 구석구석 추억이 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