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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하워드 제독, 프로비셔 장군, 호킨스 장군 그리고 스페인 함대의 지휘자이자 스페인의 왕이였던 필립 2세
*배 그림 설명; 왼쪽이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스페인 함대를 급습하는 영국함대를 지도 위에 그린 것이고 오른쪽에 두개의 그림이 급습 당시의 화(불)선이 돌격하는 모습과 무참히 무너지고 있는 무적함대의 모습입니다.
1. 전투의 전개
양국의 교전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는데, 1단계는 해협에서의 전투이며, 2단계는 Calais 앞바다에서의 해전, 3단계는 Gravelines 앞바다에서의 해전이다.
1-1. 1차 교전 : 해협에서의 전투
스페인 함대가 7월 19일 리자드 곶에 집결하여 해협으로 나아가자, 7월 20일 플리머스 항를 출항하려던 영국 함대는 맞바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영국 함대는 21일 오전 1시경 스페인 함대를 발견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이동하여 해가 뜨자마자 스페인 함대의 후방 우익을 지나면서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스페인 함선들은 이에 당황하여 시도니아 함대 쪽으로 몰려들었다. 스페인의 한 전대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 때를 노려 드레이크와 호킨스, 프로비셔 등이 집중 공격을 하였다. 시도니아와 발데스가 이 전대를 구하기 위해 다가왔으나, 이미 무력해진 상태였다. 이 와중에 스페인 함대의 금고를 싣고 있던 San Salvador 호가 불에 타 전열에서 이탈했다. 후에 시도니아는 “영국 함대가 속력이 빠르고 조종이 용이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적었다.
영국 함대는 7월 21일 밤 하워드의 기함 Ark Royal 호에서 함상회의를 열고, 스페인 함대가 와이트 섬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드레이크의 기함인 Revenge 호를 선도함으로 하여 스페인 함대를 추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Neustra Senora del Rosario 호가 표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나포하기 위해 함미등을 끈 채 항해하다가 아침에 나포하였다. 그러나 유도등인 함미등을 켜지 않고 항해했기 때문에 리벤지 호를 뒤따르던 영국 함대는 혼란에 빠져 7월 22일까지 재집결할 수 없었다.
7월 23일 새벽 동풍이 불어 풍상에 위치하게 된 시도니아는 전 함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때 프로비셔의 기함인 Triumph 호가 상선 5척과 함께 전열에서 낙오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시도니아는 갈레아스 사령관에게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워드는 이를 간파하고 갈레온선을 선두로 하여 수 척의 함선을 이끌고 Triumph 호를 지원하려고 하였고, 시도니아는 이를 막기 위해 진형의 앞에 위치하고 있던 갈레온 16척을 이끌고 접근해 왔다. 시도니아는 도중에 비스케이 전대의 기함인 Santa Ana 호가 영국 함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구하기 위해 항로를 바꾸었으나, 자신의 기함인 San Martin 호마저 하워드의 아크 로얄 호를 중심으로 한 영국 함선 50척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당하였다. 시도니아는 지원부대가 제때에 도착하여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산 마르틴 호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7월 25일에는 Santa Ana 호를 둘러싼 전투가 발생했다. 산타 아나 호가 피해를 입고 항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하워드는 호킨스에게 나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스페인 함대에서는 갈레아스 3척을 보냈고, 영국 함대에서는 아크 로얄 호와 Golden Lion 호를 내보냈다. 양측의 격렬한 포격전 끝에 산타 아나 호는 나포를 피할 수 있었다.
1-2. 2차 교전 : Calais 해전
스페인 함대는 7월 27일 밤 깔레 앞바다에 정박하여 파르마 공작과 합류하여 군수품을 보급받은 뒤 파르마 휘하의 3만 5000명의 지상군과 함께 템즈강 하구에 상륙하려고 했다. 그러나 파르마 공작은 헨리 세이무어가 지휘하는 함대와 네덜란드 전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시도니아의 연락선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파르마는 삼엄한 감시 때문에 2주일 이내에 출항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시도니아는 영국 함대가 풍상 쪽에 닻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깔레에 정박하는 순간부터 火攻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시도니아는 소형선과 보트를 함대의 전면에 배치시켜 영국 함대가 불배로 공격할 경우 충돌하도록 하는 한편, 유사시 닻을 버리고 탈주할 수 있도록 비상시 닻을 끊고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러나 영국 함대가 보낸 불배는 소형선이 아니라 150-200톤급의 8척이었다. 당황한 스페인 함대는 닻줄을 끊고 출항하였고, 시도니아는 깔레에서 재집결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화선 공격이 끝이 나고, 시도니아가 깔레에 산 마르틴 호의 예비닻을 내렸을 때 몇 척을 제외하고는 예비닻마저 없어 북동쪽으로 표류하였다. 결국 시도니아는 재집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닻을 올려 표류하는 함대에 합류하였다.
1-3. Grevelines 해전
7월 29일 날이 밝자 스페인 함대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고, 갈레아스선 한 척은 해안에 좌초하였다. 영국의 하워드는 더 없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새벽에 병사들을 깨워 일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공격으로 좌초되었던 갈레아스선은 나포되었고, 스페인의 주력 갈레아스선 San Lorenzo 호도 주돛대를 잃은 채 좌초되어 나포되었다. 영국 함대는 풍상의 맨 끝에 있는 스페인 함선을 차단하고, 그밖의 함선을 풍하 쪽에 있는 사주로 밀어붙이기 위해 캐논포의 포탄을 소모해 버린 스페인 함선에 접근하여 근접사격을 하였다.
시도니아는 산 마르틴 호를 제일 뒤에 위치시키고 나머지 함선을 산타 아나 호를 중심으로 진형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드레이크가 리벤지 호를 이끌고 산 마르틴 호에 100m까지 접근하여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산 마르틴 호도 응사하여 리벤지 호에 대포를 명중시켰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산 마르틴 호 공격을 멈추고 다른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 물러나고, 프로비셔가 대신 산 마르틴 호를 공격하였다.
그레블린 해전은 오전 9시부터 저녘 6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양측은 함포 사격으로 일관하였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 함선 3 척이 침몰되고, 2척이 행방불명되었다. 오후 6시 경 돌풍이 불기 시작하고 포탄이 동이 나자 전투는 중단되었다.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가 영국 본토나 스코틀랜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주력함대로 하여금 스페인 함대를 추격하도록 하는 한편, 네덜란드 함대는 세이머가 지휘하는 함대와 함께 도버를 감시하도록 했다.
29일 저녁부터 30일 아침까지 시도니아측은 1척을 침몰당하고 3척을 강풍으로 좌초되어 잃었다. 이로써 시도니아는 그 동안 함선 16척과 병사 8000여명을 잃었다. 계속된 전투에서 1척도 잃지 않은 영국 함대는 109척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를 56도선까지 추격하였으나, 스페인 함대가 본토에 상륙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회항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철수 도중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병사 8000명을 잃고, 질병으로 1만명을 잃었다. 시도니아가 스페인 북부의 산탄데르와 코루나로 귀환했을 때는 66척만이 남아 있었다. 출전 : 김주식, <서구해전사>(연경출판사, 1997)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료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편집하지 않는것이 좋을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칼레해전은 전쟁사에서 손꼽는 4대 해전 중에 하나입니다. 이 해전으로 인하여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은 해상왕국으로 거듭나게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칼레 해전은 집중적 함포사격이라는 전술을 최초로 도입한 해전으로 전술적으로도 연구가치를 가지고있는 전쟁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이 영국이 승리할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볼수있습니다.
제가 전쟁사에 관심이 많아서 자세히 찾아 보았는데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저에 주관적인 해석을 많이 기술하기 위해서 가장 좋다고 생각 되는 하나만 보시다시피 위에 올렸습니다.
칼레 해전은 영국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주소로 들어가시면 잘 설명 되어있습니다.
http://www.seahistory.or.kr/Menu13/menu13sub09.htm
잠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내요^^ 그렇다면 왜 그 잘나가던 무적함대가 고작해야 상선들을 끌어모아서 어렵게 구성한 영국의 함대에 무참히 깨졌을까요? 스페인 함대의 지휘자가 멍청해서였을까요? 그렇다고는 볼수가 없는 것이 위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스페인의 시도니아를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은 영국의 공격을 예측하고 방비책을 세우는 등 나름대로 전술적인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운이 없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영국 측에서 기상으로 인해 작전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를 종합해보면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유능한 지휘관입니다. 여기에서 좀 아이러니한 점이 있는데 바로 영국함대의 제독이었던 하워드 장군입니다. 이 사람은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서 직접 발탁되었으며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장군이라고합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것은 이사람의 출신입니다. 하워드장군의 전직은 다름아닌 '해적'입니다.^^;; 좀 이상하죠? 신분차이가 엄격했던 유럽에서는 다분히 이래적인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아무튼 전직을 바탕으로(?) 다져진 하워드 장군의 전술이 이 해전에서 어김없이 펼쳐졌습니다.
둘째로 함대의 구성입니다. 영국은 전투를위해 개조된 중,소형의 상선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기동력이 뛰어나고 덩치가 작아서 여간해서는 함포사격에 의해 피탄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대형 전함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전함에 비해 느리고 또한 좋은 표적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한 영국의 집중 함포사격전술은 정확하게 먹혀들어 갔던 것입니다.
셋째로 기술력의 차이입니다. 이것또한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당시 최강을 자부하던 무적함대의 함포사거리가 영국에 비해 짧았다는 것입니다. 약 50~100미터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점을 하워드가 이용한 것입니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영국의 집중적인 잽에 스패인이 넉 다운 된 상황이라고 할수있죠. 이런한 상황을 더욱 뒷받침 해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선박의 숫자입니다. 영국함대는 해군의 수로는 스페인에 반수가 못되는 10000명을 약간 웃도는 정도에 그치는 반면에 선박은 197척(동맹이었던 네덜란드와 합친 수) 으로 스페인에 130척에 비해 많은 수였습니다. 물론 선박의 규모는 스페인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 였지만 함포사격을 위주로 하는 전투에서 해군의 머릿수와 배의 크기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해전의 시작과 끝까지 2~3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단 한척의 배도 잃지 않은 반면에 스패인은 64척의 배와 2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한마디로 대승이죠 이후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
to be continue...트라팔가 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