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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별 예상 시간 및 보급 계획)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고 험란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순위권 주자들은 출발 신호와 함께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헤드랜턴에서 나오는 불빛, 배낭과 신발에 부착된 형광 물질들이 반짝이면서 마치 반딧불 무리 마냥 장관을 이룬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이 두 가지.
첫번째는, 급수.
평소에도 땀이 많아 급수를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하는 편인데, 한여름에 진행되는 대회이다 보니 더 많은 물통을 가지고 뛰어야 하나 걱정이였다. 지리산 종주 코스는 물보급이 용의한 편이라 500ml 두 병이면 충분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해 보였다. 출발 전까지 고민하다가 비가 내리고 현지 기온이 21도까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앞주머니에 달린 500ml 두 병에만 물을 가득 채웠다. 급수 지점간의 예상 소요 시간이 평균 2시간 정도라 1시간 500ml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고, 마지막 치밭목 ~ 대원사 코스만 1병을 추가로 준비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치밭목 휴게소(?)가 문을 닫아 맨붕이였지만, 장터목에서 예비로 미리 한 병을 더 챙겨온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고 그 외 전 구간에서는 두 병이 적절하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선선했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부족했을 수도.
두번째는, 길찾기.
평생 산이라고는 목마클 들어와서 가본 월출산과 달마산, 승달산이 전부. 도심에서도 방향 감각이 없는 길치인데, 하물며 지리산에서는?? ^^;; 일단 핸드폰에 등산 어플을 깔아 예전 주행 기록들을 다운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시계에도 네비를 깔았지만... 핸드폰은 꺼내보기 귀찮아서, 손목 네비는 계속 경로 이탈이라고만 뜨는 바람에 전혀 도움이 안 됨 ㅋㅋ. 다행히 일반 등산인들이 "고속도로"라고 할 만큼 종주길이 잘 닦여 있었고, 무엇보다 등산객들이 많아 물어 물어 길을 확인. 그것도 모자라 길이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멈춤.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 하지만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힘든 지점에서 결국 "알바"를 ㅠㅜ...
화엄사 입구에서부터 대나무 밭 사이를 지나는 약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노고단까지 7km, 쉼없는 오르막에 너덜바위 지대가 있다고 하니, 속도 보다는 앞 사람만 놓치지 말자 하고 열심히 따라 붙는다. sub-10을 노리는 주자들은 일찌감치 행렬의 선두에 자리잡고 제 속도로 올라가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주자들은 앞선 주자들과 비슷한 속도로 걷기 때문에 노고단 도착 시간의 차이가 많지 않다.
근데, 이 길...
너무 환상적이다...
앞사람 뒷모습만 겨우 보일정도로 시야가 제한되다 보니, 온 몸의 신경이 다른 감각들로 집중된다. 도랑도랑 시냇물 흐르는 소리, 비에 젖은 대나무 와 이름을 알수 없는 허브 향, 구름인지 안개인지 자잘이 부서지는 물방울들이 온 몸을 감싼다. 시간이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지만, 근육의 부담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몽환적인 산길이다.
처음엔 일렬도 가던 주자들이 이제 몇 명씩 그룹이 지어지는데, 앞서가던 세 개의 그룹을 추월했을 때쯤이었나...? 눈에 익은 유니폼이 있길래 고개 들어 보니 조주성군. 몇 마디 농담을 주고 받다 보니 벌써 큰 길과 만나는 무넹기에 도착. 시계를 보니 1시간 43분 소요, 평균 4.1km/h 속도로 올랐다. 분위기 때문이였는지 첫 노고단 코스를 무난히 통과. 노고단 대피소에서 물 보충을 하는데 영은 선배와도 조우. 이제부터는 천왕봉까지 주로가 좋으니 무조건 달려야 한단다. 파워젤과 아미노 하나 먹고 1시간 58분 노고단 출발. (목표 시간 대비 - 2분)
노고단 도착 인증샷 찍을 생각도 못하고, 빠르게 달려가는 앞 주자 뒤를 쫒는다. 그리고 100미터나 갔을까...
산행 초보에게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였는지 바로 알려주는 일이 생긴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헤드랜턴 불빛만으로 발 밑 장애물(나무뿌리, 돌, 물웅덩이)들을 피하고 달리다 보니, 모든 신경을 발끝에 쏟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머리에 통증. 그리고 주변이 깜깜해졌다. 머리 앞으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보지 못하고 이마를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다행히 랜턴이 있던 부분이라 부상은 없었지만, 혹시나 했던 랜턴에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ㅠㅜ (나중에 보니 고장난 건 아니고 부딪히면서 건전지 하나가 빠져버렸다.) 앞뒤 주자가 다 지나가니 주로는 커녕 코 앞도 보이질 않는다. 아 어떡하지? 수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는데, 저 뒤에서 주성이가 달려온다.
" 주성아, 랜턴에 불이 안들어 온다...."
" 그러게 예비용도 가져왔어야지... 내꺼 써! "
두 번 생각 않고 자기가 쓰던 헤드랜턴을 벗어 주고는 자신은 손전등만으로 달려간다. 어찌나 고맙던지...^^
주성이가 준 헤드랜턴은 머리에 쓰고 않고 손에 들고 다시 출발한다. 확실히 손전등이 반응하기 빠르고 밝다.
조심조심 한참을 가다보니, 한 무리의 그룹이 달리고 있길래 꼬리에 붙었다. 내 앞 주자는 자그막한 키의 여성 주자인데 들고 있는 손전등이 엄청 밝아 내 길까지 훤히 밝혀주니 더없이 편하다. 자전거에서 하는 드래프팅이 이런 기분인가? ㅋㅋ 근데, 이 여성 주자... 그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고 간다. (나중에는 기분이 업되었는지 팔을 쭉 펴고 비행기 놀이도 하고 가더라...) 포항에서 왔단다. 같이 동행하던 남자가 하는 얘기가 이 분 작년 여성 우승자였다나? ^^;; 오늘은 작년보다 많이 늦은 편인데, 10시간 30분이 목표란다. ^^;; 삼도봉 못 미쳐서 너덜바위 지대에서 본 것을 마지막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새벽빛 어슴프레 주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부터였다.
원래 급수하기로 했던 임걸령은 언제 지났는지도 모른체, 출발후 3시간 01분만에 삼도봉 도착.
삼도봉에서 바라본 노고단.
천왕봉 방면 일출과 운해
처음 봤다.
산 위에서 해가 뜨는 것도... 운해라는 것도...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아, 이 맛에 산에 오는구나...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10분이 지났네..;; 포도당 캔디 하나와 양갱 하나 먹고 출발.
1차 보급 및 급수 장소인 연하천까지 가기 위해선 화개재까지 내려갔다 토끼봉과 명선봉, 두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제 제법 날이 밝아 랜턴 없이 가는데, 그렇게 편할 수 없다. 화개재를 거의 다온 지점이였나, 돌 하나를 잘 못 밟았는데 오른쪽 발에 극심한 통증이 온다. 승달산때 조금 흔들렸던 네번째 발톱이 반 쯤 들린 느낌이다. ;;; 신발을 벗어볼 용기도, 시간도 없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착지를 한다. 다행히 오르막에서는 통증이 덜 하다.
이번에도 또 한 번 느낀 것이 산악 달리기의 관건은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다. 지금껏 날 추월해가는 주자들은 다 내리막에서 , 내가 추월할 때는 대부분 오르막에서 였다. 내리막을 잘 달리기 위해서는 다리 힘도 좋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눈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필요한 것 같다. 몸은 앞서가는데 눈이 착지 지점을 찾지 못하고 어떻게 밟을 것인지 결정을 못하니, 미끄러지거나 부상을 입는다. 다 경험과 연습 부족인거 같다. 산길을 더 많이 달려 봤어야 했는데...
출발한지 4시간 26분만에 연하천 도착. (아침 6시 58분) (목표 시간 대비 + 6분)
원래 계획보다는 6분 늦었지만, 삼도봉에서 지체한 것을 고려해 보면 선방한 것. 삼도봉~연하천은 조금 더 빠른 4.7km 속도 왔다. 그러고 보니 구간별 예상 시간을 짜면서 휴식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다. ^^;; 이 곳에 도착해서 보니 물을 뜰려면 줄을 서야 하고, (물을 살 수 있다는 건 나중에 앎 ㅎ) 준비한 떡과 파워젤, 아미노를 하나씩 까먹고 화장실까지 다녀오니 금방 15분이 지나간다. 열심히 달려온 보람이 없네...ㅎㅎ
그래도 물도 양껏 마시고, 배도 든든하니 다시 힘이 난다. 4시간 41분에 출발.
다음 급수지인 선비샘까지는 6km 1시간 20분만에 도착해야 한다. 중간에 벽소령 대피소가 있지만 물도 충분히 있고 거리도 가까워 그냥 지나칠 예정. 역시나 오르막에서는 여전히 씽씽한 두 다리가 고맙기만 한데, 내리막 돌길에서는 맥을 못쓴다. 형제봉이였나? 수직으로 선 커다란 바위 사이를 지나는데 바닥이 바둑판처럼 매끈한 암석 지대. 설마하고 착지를 하는 순간 쭉 미끄러져 그대로 대자로 누웠다. 다행히 배낭 덕분에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후론 발걸음이 더욱더 소심해진다. ^^;; 그 때문인지 벽소령까진 시속 3.7km. 속도가 많이 줄었다.
벽소령를 지나면서 주로가 정말 좋아진다.
지리산 오른쪽 능선 자락을 타고 도는데, 주로가 푹신하다 못해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흙길에, 탁트인 주로 오른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지리산 자락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이번 화대 종주에서 가장 행복한 구간이 아니였네 싶다. 그 와중에 길에 떨어진 시계도 하나 주워서 주인 찾아주고 (주인이 미모의...ㅎㅎ) 선비샘까지는 시속 4.7km. 이번 지리산 종주 구간 속도중 가장 빠른 속도. 출발한지 딱 6시간만에 도착했다. 예정 시간(5시간 44분)보다 16분 늦은 셈이니, 연하천에서 쉬느라 까먹은 15분이 많이 아쉬웠다. 선비샘은 이름처럼 얌전하게 생긴 약수터(?)로 물맛도 참 좋았다. 원래는 파워젤과 마그네슘을 먹기로 한 장소이지만, 근육에 별 문제가 없어 정제염 두알로 대신했다.
선비샘을 기준으로 정확히 화대종주의 절반을 달린 셈이다. 6시간, 23.5키로미터. (목표 시간 대비 + 16분)
달리면서 당한 대부분의 부상은 발목 아래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종아리와 허벅지는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었다. 날씨도 선선해 호흡도 좋았고, 보급과 급수도 적당한 듯 속도 든든했다. 이대로 간다면 목표했던 Sub-12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천왕봉까지는 계속 오르막과 그 후 내리막 난코스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선비샘에서 수지 마라톤에서 온 달리미들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늘씬한 모령의 아가씨가 무릎에 작지 않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어찌나 씩씩하게 잘 달리던지... 맑고 명랑한 목소리로 팀원들 화이팅을 해주는데, 한참 앞서 달리는 나까지 힐링이 되는 느낌이... ㅎㅎ (잠시 헤어졌다가 내가 알바하는 사이 천왕봉에서 다시 만났다...ㅋㅋ)
선비샘에서 세석까지는 오르내리막의 경사가 심하다. 속도가 3.2km까지 떨어진다. (목표 시간 대비 + 23분)
7시간 05분에 도착. 목표 시간과 차이가 23분으로 벌어진다. 세석은 주로와 조금 떨어져 있고 3.5km만 더 가면 장터목이 나오므로 패스. 선비샘에서 충분히 급수를 한 탓인지 가지고 있는 물이면 장터목까지 충분할 거 같다.
화대종주 코스에서 가장 멋지다는 세석 평전.
산을 타고 넘는 구름으로 절반쯤은 가렸지만, 산 정상에서 만나는 넖은 꽃밭은 그 이름값을 하는 듯 하다.
갈길 바쁜 와중에도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장터목에 도착했다. 7시간 57분 소요. (목표 시간 대비 + 24분)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대략 목표 시간대로 잘 오고 있다. 혹시나 했는데, 장터목에서 반가운 얼굴 둘을 만난다.
영은형과 주성군. 반가운 마음에 물 한병씩을 사드리고 (사실 매점에서 파는 게 물, 캔커피, 초코파이 정도밖에.. ^^;;) 고맙게 잘 쓴 주성이 랜턴을 돌려 준다. 다음 보급 장소가 치밭목인데 천왕봉을 넘어가는 코스가 힘들다고 하니, 그 동안 운용했던 물 두 병에 한 병을 더 추가로 준비한다.
새로 구입한 물병에 High5 에너지소스와 제로정을 섞어 있는 사이, 영은형과 주성이가 일어선다. 거의 30km 넘게 산길을 달려왔는데,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대단한 사람들. 무사히 완주하고 골인 지점에서 보기로 한다. (이때만 해도 20여분 차이 밖에 나지 않았는데, 최종 기록은 나랑 거의 한 시간 이상 차이 난다. 둘 다 11시간 대. 천왕봉 오르막과 치밭목 내리막에서 나완 다르게 속도가 줄이지 않은 차이인 것 같다.)
장터목은 제법 쌀쌀하다. 얇은 바람막이를 그렇게 요긴하게 쓸 준 몰랐다. ^^
무려 목포 하당에서 지리산 장터목까지 20여시간에 걸쳐 배달해간 맥*** 햄버거. ㅋㅋ
신의 한수였다. 역시 남자는 빵/고기 심이여~! 담에 혹 등산 갈 일 있으면 세트 메뉴로 준비하는 걸로..ㅎㅎ
한 20여분 충분히 먹고 마셨다. 햄버거 하나, 캔커피, 파워젤 하나, 에너지소스까지...
그리고 화대 종주 시작한지 처음으로 스틱을 펴 들었다. 전에 승달산에서도 오르막길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장터목 출발. 8시간 20분 경과. 원래 계획으로라면 벌써 천왕봉을 넘어 갔어야 했는데, 쉬는 시간이 길어 계획보다 50여분이나 늦어졌다. (목표 시간 대비 + 53분)
제석봉에서 천왕봉 가는 길이였나.... 문득 돌아본.... 저 산들을 내가 두 발로 넘어 왔다니...
천왕봉 바로 밑에서 주최측 사진사 분이 멋진 사진 한 장을 찍어준다. 배번을 등 뒤에 붙이고 있는 바람에 모르고 지나갈 뻔 했는데, 용케 알아봐 주시고 붙잡는다. 그럴 줄 알았음 뛰고 있는 (척하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할 걸...ㅎㅎ
그리고 마침내 천왕봉. 출발 후 8시간 55분 소요 (목표 시간 대비 + 55분)
장터목에서 1.6km. 35분 걸렸다.
좁은 산 정상에 사람들이 정말 많다. 다들 정상석 주변에서 사진 찍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듯 줄을 서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언제 또 와 보겠나 싶어 일단 줄을 선다. 한 10여분 기다렸나. 드디어 내 차례. 바로 뒤에 있던 대학생들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는데, 찍고 나서 집에 카톡을 보낼려고 보니 사진이 없네...ㅠㅜ 다시 줄 서기는 불가능할 것 같고, 급한 마음에 정상석 뒷편에서 한 장 찍고 하산 준비를 한다.
정면 사진이 못내 아쉬웠는지, 아님 마음이 급했는지....
이번 종주에서 가장 우려했던 실수를 천왕봉에서 내려오면서 하게 된다. 말로만 듣던 알바. ㅋㅋ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종주 길인줄 알았다.
정말 혹시나 해서 그 계단을 내려가기 전, 한 분께 물었었다. 이 길이 대원사 가는 길이 맞냐고... 맞단다.
거의 수직으로 꺽인 계단 170여개를 뛰다시피 내려왔다. 정말 힘들게 올라오시는 분들께는 미안하면서도 묘한 쾌감?! ㅎㅎ
철계단을 다 내려와, 이제 돌계단을 100여 미터 내려오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주변에 배번 단 사람이 전혀 없다....
다른 분께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길 대원사 가는 길 맞죠?"
"아니, 이건 중산리 가는 길인데?!"
"네???!!! 그럼 대원사는 어디로...?? (제발, 설마, OMG, 다시 올라가야 된다는 말만은.... ㅠㅜ)"
"아까 천왕봉에서 못 보셨어요? 산 뒷편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정표가 있었을 텐데.... 저 위 철계단 끝까지 올라가시면 보일거예요..."
"아...예... 감..사합니다...ㅠㅜ"
너무나 친절하게도 올라가야 하는 계단 갯수까지 알려주신다...
웃으며 내려갔던 철계단 174개를 울면서 다시 올라왔다. 여기서 또 15분 이상을 까먹었나 보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급한 경사를 서둘러 올라왔더니 허벅지에서 경련까지... ^^;; 왜 길을 잘못 드는 걸 "알바"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도 못받고 쫒겨난 불쌍한 알바 심정이 지금 내 심정이랑 비슷한거 같아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ㅎㅎ
자, 이제 "알바" 말고 "정규직" 달리기로...
아까 계단 밑에서 만난 분이 함께 올려오면서 치밭목까지 가는 길을 잘 알려주신다.
"일단 중봉까지 가서, 10여미터 내려가서 오른쪽 길로 가세요...거기서부터는 길이 하나라 쭉 따라 내려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
이제 남은 거리는 치밭목까지 4km, 치밭목에서 유평리 주차장까지는 9.5km. 총 13.5km 남았다. 평지면 1시간이면 가능하겠지만, 경험있는 선배들 얘기론 빨라야 3 시간이란다. 시계를 보니 3시간 안에 주파해야 Sub-12 가 가능하다.
일단, 가는데까진 가보자!
천왕봉에서 중봉으로...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단, 아래 계단으로 쭈~욱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되는게 함정. ㅋㅋ
아까 선비샘에서 만났던 유쾌한 수지 아가씨를 다시 만났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넘치고 제법 농담까지 하는데... (근데, 이 아가씨 다시 보니 산에 오는데 배구복처럼 짧은 숏팬츠를 입고 왔다. 무사 완주 했을라나...^^;;) 그 목소리도 중봉 오르막 구간부터 점점 멀어지더니 중봉 내리막부터는 나 혼자 페이스가 된다.
중봉 정상에서 한 컷. 대원사까지 10.8km 남았다.
중봉에서 치밭목까지...평균 속도가 2.3km/h 까지 떨어진다.
장터목에서 천왕봉 오르는 속도(2.7km/h)보다 더 늦었으니, 이 구간이 얼마나 난코스인가를 말해준다. 계속되는 급경사 내리막에 걷는 것도 힘들어 두손 두발 다 사용해서 엉금엉금 기어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다. 이 와중에서도 뛰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 또한 웃긴 건, 가끔씩 만나는 철제 계단 오르막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 지긋지긋한 계단이 뭐가 반갑냐 할 수 있지만, 날카롭고 미끌거리는 바위 위를 한 시간째 밟고 내려오다 보니, 철제 계단은 에스컬레이터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ㅎㅎ
천왕봉까지는 내가 추월한 사람이 그래도 많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계속 추월을 당한다. 워낙 힘들다 보니 사실 뒤에 누가 붙으면, 먼저 가시라고 양보까지 할 정도이다. ^^;;
드디어 치밭목... 천왕봉에서 거의 한시간 반을 기어 내려왔다. 출발한지 10시간 25분 경과 (목표 시간 대비: + 1시간 6분)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에서 시원한 콜라랑 초코파이 하나로 힘을 좀 내 볼 생각이였는데... 쉼터가 공사중이다. ^^;; 물도 여기서 살 요량으로 거의 다 마셔버렸기 때문에 이래저래 맨붕이다. 마침 쉼터 주인장처럼 보인 분께 물을 좀 구할 때가 없냐 했더니, 쉼터 뒤 100여 미터 내려가 물을 떠 다시 올라오거나, 유평리 하산 방향으로 700여 미터 가면 다리옆 샘터가 하나 있다고 한다. 남은 거리를 줄여도 시원찮을 판에 물 뜨러 200여미터를 추가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마침 장터목에서 비상용으로 사둔 물 한병이 아직 배낭에 있기에 그것만 믿고 유평리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마지막 남은 아미노 바이탈을 입에 털어 넣고, 역시 한 모금 남은 에너지소스로 입을 행궜다. 이제 남은 보급품은 초콜렛바 하나와 파워젤 2개.
치밭목부터 유평리 구간. 실거리는 6km가 채 안되지만, 체감 거리 60km 이다.
등산로라기보다는 물이 마른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바닥엔 흙이 거의 없고, "과연 건너뛸 수 있을까?" 생각마저 들게 하는 큰 바위들이 가득한 코스이다. 무엇보다 물과 가깝다 보니, 바위 곳곳엔 미끄러운 물이끼가 가득하고, 하늘은 울창한 수림에 덮혀 오후 2시인데도 어둑어둑하다. 치밭목 주인장이 얘기했던 "700 미터 아래 다리옆"은 가도가도 나오질 않으니 죽을 맛이다. 그 곳에서도 뛰는 사람들이 있어 여러명에게 길을 비켜줬다. 이제 Sub-12가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 부상없이 완주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스틱이 좀 도움이 될까 꺼내봤는데, 바위 사이로 자꾸 끼어서 오히려 더 위험하다.
마침내, 무제치기 폭포 바로 전,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는 샘터가 하나 나온다. 거기서 나머지 물통을 꽉 채우고 시원한 계곡물로 세수를 한 번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마지막 초콜렛바 하나를 물고 내려가는데, 마침 천안에서 오셨다는 선배님들 두 분이 정담을 나누시며 내 옆을 지나간다. 딱 봐도 경험 많은 분들이신듯 해서, 무엇보다 중간에 갈림길이 한 번 있다고 했는데 도저히 그 길을 분간해 낼 자신이 없어, 죽자사자 그 분들 꽁무니만 쫒는다. 하....그런데....
이 분들 축지법을 쓰시나 보다.
그 미끄러운 바위들을 평지보다 더 빠르게 지나간다. 잠깐 발을 헛딛어 헤매고 있으면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신다. 이마에서 식은 땀이 나고 호흡이 가파진다. 도저히 못 따라 갈 것 같아 방법을 바꿨다. 내 바로 앞 분 착지를 잘 보고 있다가 그 분이 착지한 부분을 그대로 따라 가는 걸로. 그랬더니 과연 덜 미끄러지고 속도도 붙는 듯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분은 울트라 마라톤 고수, 다른 한 분은 등산만 20여년이란다.
그렇게 그렇게 계곡을 내려와... 그렇게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유평리 마을에 접어들었다. 치밭목부터 6km, 1시간 45분 걸렸다. 시속 3.3km. 그 선배님들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안전하게 내려온 듯하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치밭목 이후 계곡에서 카톡은 커녕 일반 전화도 먹통이라, 계곡 내려오자마자 기다리고 있을 일행들에게 문자부터 남긴다.
유평리에 잘 도착했다고. 그리고 지금부터 뛴다고...^^
유평리에서 대회 골인지점인 대원사 주차장까지...
내 손목 GPS로 정확히 3.96키로, 23분 02초가 찍혔다. 5분 49초 페이스.
중간에 바람막이를 벗느라 시간이 조금 걸린걸 고려하면 실제 이보다 조금 더 빨랐을 거라 믿는다.
첫 화대 종주가 기억에 오래 남을 지 모르겠지만, 이 마지막 3.96km 질주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일생 최초이자 최고의 경험을 하게 해주신, 그리고 함께 무사히 완주해주신 김영은, 이준, 민병관, 김진호, 조윤희, 김영집, 조주성, 이현익, 문덕인 그리고 박정철님께 고맙고 감사합니다. 좋은 숙소 잡아주시고 금일봉까지 전해주신 손동완 형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다시 가게 될까?
종주 후유증으로 묵직해진 허벅지 근육통이 서서히 풀려가는 오늘까지도 대답은 아직 "글쎄..." 다. ^^
화대 종주 통계
화대 종주 초반 코스 (화엄사 ~ 치밭목)
화대종주 후반 코스 (치밭목~대원사 주차장)
첫댓글 김영하 신간 <오직 두사람> 잼나게 보면서 참 글 잘써... 수현씨 후기는 언제나 발걸음을 멈추게 한 후 꼭 댓글을 남기게하는 마력이 있어요. 훗날 필요한 길라잡이가 되겠네요 마지막 글까지 힘내요 수현씨~
ㅋㅋ
읽는데도 한참 걸리네 ^^
잠깐 정신줄 놓고 달리다보믄 지리산 여러번 다닌 고수들도 한번씩 알바도 하고 그런다 하더라고~~
나도 임걸령 바로 근처 피아골쪽으로 갈림길 잇는데 10걸음가다 이길이 아닌가벼 하고 되돌아섯는데
다른고수분은 한참갔다가 되돌아왓다 하시더라고~~~
내년엔 대원사에 1시간정도 일찍 도착해서 요꿀을 한번 먹어봐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