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원인과 배경]
한민족은 오랜 역사와 문화적전통을 지닌 통일 민족국가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주변 강대국들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 하여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하면서 한반도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38도선을 경계로 남북간은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되었고 북한의 소련당국은 공산화통일이 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하면서 정치적분단을 강요 했습니다
1948. 5. 10 남한 단독 정부 총선거
1947년에 미국과 유엔은 단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지만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를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 되습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 정부에서만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에 선포되었습니다.
이어 1948년 9월 9일에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에는 김일성을 내세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내면서 분단된 정부는 수립됩니다.
[6.25전쟁의 과정]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상의 북한군 야포가 남쪽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하고 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 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습니다.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 6.25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6. 25 전쟁의 순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서울은 하루만에 점령당했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북한군은 남한의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38선일대의 국군 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지만 하루전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었었고 주말이라 많은 병력이 부대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남북한 군사력 비교
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 정부가 위태로운 지경이라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군과 유엔군은 참전 계획을 3일간 준비한 후 미국의 육,해,공군과 41개국의 유엔국가가 참전하게 됩니다.
미국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초대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유엔군 작전의 전권을 위임받아 유엔군사령부를 지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의 모습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고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선까지 후퇴합니다. 국토의 약 10%에 불과한 부산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한 선에서 북한군의 전쟁목표인 부산점령을 꺾고 작전의 주도권 전환의 계기가 되었죠.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작전은 세계 공산주의의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을 낙동강일대에서 성공적으로 봉쇄한 작전으로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의 모습
전세 전환의 박차를 가하여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9월 29일 정오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여 우리 국민에게 감격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약 4천여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고 북한군은 사살 1만 4천여명, 포로 7천여명, 전차 손실 50여대에 달아였다 해 이 작전 이후 북한군의 공격능력은 거의 소멸되고 맙니다


전쟁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
그리고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해 한국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중공 인민지원군으로 다시 상황은 역습됩니다. 그리고 중공군이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면 한반도를 포기하겠다는 미국의 주장에 따라 6.25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엔군은 적의 최대의 피해를 가하면서 진지를 방어하되 인력과 물자의 손실을 최대한 피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휴전정책을 통해 전쟁을 종료합니다.
남북한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휴전협정 후에도 크고 작은 도발과 무력적인 충돌이 있었죠. 그렇게 60년동안 전쟁 준비를 지속적으로 해오면서 점점 평화 통일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6.25전쟁의 비극적인 아픔을 후세대에도 이어나가 참전 용사들의 용맹함을 기리고 통일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출된 금액이 전부 회수된겁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