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산간 지방을 거쳐 북으로 약 134Km 지점, 텔아비브에서 동북쪽으로 약 105Km, 하이파에서는 동남쪽으로 약 35Km 되는 지역에 있다. 나사렛은 갈릴리 산간 지방에 속하며 산들이 둘러 서 있는 산간의 분지로 해발 약 375m 이고, 현재는 아랍인이 사는 동네로 기독교인과 회교인들이 섞여 살고 있고, 유대인은 산등성이에 새로이 정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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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은 천사 가브리엘이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계시해 준(눅1:26-38) 곳으로 동네 중심에 수태고지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같은 울타리 안에 성 요셉 교회가 있고, 수태고지 교회에서 동북쪽으로 약 600m지점에 희랍 정교회 소속의 가브리엘 교회가 있으며, 가브리엘 교회 근처에 마리아의 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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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교회
나사렛의 중심은 성 수태 고지 교회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 탄생을 예고해 준 장소에 세워진 카톨릭 프랜시스컨 교회이다.
이 교회는 이 장소에서 세워진 5번째 교회가 되는 것으로 19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969년 완성 되었다. 현재 성지에 있는 교회로서는 최대의 규모이며 이태리의 건축가 죠반니 무치오(Giovanni Muzio)가 설계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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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 안에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성화가 진열 되어 있다. 현재 교회의 지하층에는 예수 수태 고지 동굴(Grotto of the Annunciation)이 보존되어 있다. 교회 구내에는 요셉교회(Church of St. Joseph)가 별도로 세워져 있다. 이 교회는 요셉의 목공소가 있던 자리라고 추정 되는 곳에 세워진 프랜시스컨 교회로서 현재의 교회는 1914년에 봉헌된 것이다. 이 교회의 지하층에는 예수님 당시까지 소급되는 시대의 물 탱크(Cistern), 곡식 저장소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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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카렘
새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서북쪽으로 국립중앙의료원(핫닷사)을 향하여 3Km쯤 가면 오른쪽으로 깊숙이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 있다. '아인 카렘'은 '포도원의 샘'이라는 뜻이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후 예루살렘 행정구역 에 편입되었다. 세례요한이 이곳에서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방문 하여 문안하였을 때 아이(세례 요한)가 뱃속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
마리아 방문교회 제단 중앙에 마리아의 초상이 있고 양옆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입상이 있다.아치형 기둥과 푸른빛의 모자이크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인 카렘 마을 감람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포도원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오른쪽 앞에 종탑이 솟은 마리아 방문기념 교회 가 보이고, 저멀리 옥상에 9가지 촛대가 붙은 빌딩은 히브리대학 부속병원인 하다샤 메디컬 센터이다. 국내에는 유대 교 회당이 있다. |
베들레헴 (Bethlehem)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지니며, 아랍어로는 '푸줏간'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그것은 목축업이 활발했던 것과 양을 잡는 날에 행해지던 잔치 (삼상 25: )에 그 기원이 있다. 또한 '에브라다'와 함께 병용하여 사용 (미 5:2) 되기도 하였고 '에브랏' (창 35:16, 19, 48:7) 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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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다윗 왕의 고향 (롯, 삼상 16: )이기도 하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 (삼상 16:1)이며, 다윗의 우물 (삼하 23:13 ~ 17)이 있던 곳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미가의 개인 제사장 레위 인의 고향 (사 17:7 ~ 13), 사무엘은 왕에게 베들레헴을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성지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
르호보암 왕 때는 이곳에 요새가 쌓아졌고 (대하 11:6), 한때 블레셋에 의해 점령되었 고 (삼하 23:14), 예수님의 탄생지로 예언되었고, 그 예언이 성취된 곳 (미 5:2, 눅 2:1 ~ 5, 마 2:1~18, 요 7:41~42) 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 Km 떨어진 곳에 있다. 특히 감람나무가 많은 해발 700여 m 높이의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
예수님탄생교회 (Church of the Nativity)
주후 135년 로마 황제 하드리안은 제2차 유태인 반란을 진압한 후 기독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예수님 탄생 동굴 위에 아도니스 신전을 만들어 세워 놓는다. 그 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는 이 아도니스 신전을 철거하고 이곳에 예수님 탄생 교회를 건립한다. (주후 325년)이 교회는 주후 529년 비잔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던 사마리아 인들에 의하여 크게 손상을 입게 되지만 곧 이어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서 복원된다.(주후 5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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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건물은 십자군 시대의 예배당 모양을 보존하여 수리한 것이다. 탄생의 동굴은 성탄교회 내부 지하에 있다. 예배당의 모양은 십자가 모양의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십자군 당시 교회를 보수할 때 입구의 높이를 1.2 m 정도로 낮추고 그 폭도 좁게 만들어 놓았다. 머리를 굽히고서야 교회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약탈자들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교회에 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방어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자세를 낮추고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주후 1100년 성탄절 날 볼드윈 1세는 십자군 시대의 예루살렘 왕으로서 그 즉위식을 이곳에서 가졌다. 주후 386년 제롬은 예수님 탄생교회 바로 옆에 있는 동굴에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때 번역한 불게이트 (Vulgate) 성경이 지금까지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다. |
아기예수피난교회 / St. Sergius Church |
AD 303년의 로마 황제 맥시밀리안 때에 시리아의 알라사파에서 순교한 서지우스(Sergius)와 바쿠스(Bacchus)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며, 매년 6월 1일에는 이들 성인의 축일을 지키고 있다. 길이 17m, 폭 15m, 높이 3m 의 현재 건물은 AD 10~11세기에 재건한 것이다.
이 교회의 위치는 예수님 일행이 1개월간 피난 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져 있으며, 이집트의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장소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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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서 넓은 회중석과 2개의 긴 복도(통로)를 가지고 있다.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서 사용하였으며 원주 부분이 검게 그슬린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기둥 중의 화강암으로 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하였던 동굴(the Crypt)은 현재 물에 잠겨 있으며, 그 들어가는 입구는 예배당 맨 왼쪽의 성소 안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6월 1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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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과 유대광야
이스라엘에서 가장 길고 큰 강으로서 대협곡 (the Great Syro-African Rift)의 시작인 헬몬산 남쪽 기슭으로부터 훌라 계곡을 따라 갈릴리 호수로 이어지는 상부 요단강 (upper Jordan River)과 갈릴리 호수 남쪽 하구를 통과하여 요르단 골짜기 (Jordan Valley)를 따라 사해에 이르는 하부 요단강 (lower Jordan River)로 나누어 진다. 이 강의 길이는 약 500 Km, 북쪽의 해발 900 m 로부터 해발 -210 m 의 갈릴리 호수, 그리고 -400 m 의 사해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흐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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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알려진 사해 북쪽 여리고 가까운 곳의 요단강에는 현재 알렌비 (Allenby Bridge) 가 있어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오가는 국경 통과소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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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리고와 종려나무
고대 제라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도시를 가지고 있는 여리고는 사해 북동 쪽 13 ㎞ 지점 유다 광야에 자리잡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여리고는 예로부터 키가 10 m 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많아 '종려의 성읍' (신 34:3, 삿 3:13) 으로 불리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첫 발을 디디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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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의 샘 물이 귀한 사막 한 가운데 물이 솟아나오는 여러 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주변의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유다 광야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천연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여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한다. 요르단 골짜기 (해발 -225 m )에 위치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매우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다. 헤롯 대왕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도시에 자신의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으며, 그의 삶도 여기서 끝이 났다. |
여리고 성경의 여리고는 구약과 신약의 각각 다른 두 곳이 있다.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당한 최초의 도시 여리고는 Tell es-Sultan 이라고 불려지는 곳이며 (수 5~6 장), 가나안 점령의 교두보였다. (헤롯의 궁궐터) 예로부터 이 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로서 물과 음식을 얻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시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여리고 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도 하였다. 이 길 사이는 유다 광야가 놓여 있어 일반적으로 위험한 길이었다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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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부른 사건 때문에 (요 12:12, 13)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종려나무 (히브리어 '타마르' 영어 'Date Palm')에 호감을 가지는 듯하다. 목재가 귀했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나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데 종려나무를 이용했으나 현대는 그 열매만을 사용한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더운 요르단 계곡, 사해 주변, 아라바 계곡 등에서 종려나무를 많이 기르고 있다 (사해 가까이 여리고가 종려의 성읍으로 불리웠다. 신 34:3 대하 28:15). |
*쿰란과 수도원
사해사본을 발견한 장소이다. 사해의 북서쪽에 있는 쿰란은 사해사본을 기록한 엣센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의 발견은 1951-1956년의 최근일이며 폐허속의 주건물은 폭 27m 길이 44m정도로서 석고가 거칠게 발라져 있는 큰돌로 만들어졌다. 북쪽에는 수비탑이 있으며 부엌과 붙어있는 식당 에서는 1,000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주건물주변에는 옹기장이집, 방앗간, 염색집, 7개의 저수탱크등이 발견되었으며, 의자, 책상, 말라버린 잉크가 담겨진 잉크스텐드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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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실이 발견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쿰란 주변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이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고, 이들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 쿰란공동체의 규율집들로써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리루그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이다. 사해구약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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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혼인잔치와 갈릴리 호수
예수께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곳으로 더 잘 알려진 갈릴리 지방의 가나는 매우 작은 마을이다. 나사렛에서 북동쪽 8Km에 위치한 이곳 가나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어 초대되신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는 즛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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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그의 첫 기적으로 결혼식장에서 포도주를 만든 것일까? 예수는 과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눅 7:34) 이었는가? 예수의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예수를 태초부터 계신 이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실현된 것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가나 혼인 잔치를 천상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6 ~ 10)의 선험적인 사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갈릴리 지방은 해수면보다 210 m 낮은 곳에 위치한 갈릴리 바다 (혹은 호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요단강 계곡의 평야화 이즈르엘 평원 (yizreel Valley)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각종 산업과 어업이 발달하였으며 다른 지방에 비해 천연적인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다. 그러나 정치적, 종교적 배경으로 볼 때는 구약시대의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종교의 변방으로서 실상 "멸시를 당하던 스블론과 납달리 땅 " (사 9:1) 이었으며, 솔로몬 왕때는 성전을 짓기 위해 수입한 백향목, 잣나무 값으로 인하여 진 부채를 값지 못해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떼어 주었으나, 그의 눈에는 들지 않았다 (왕상 9:10 ~ 14). 갈릴리 북부의 대부분은 산지로서 크게 유용하지 못하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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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어교회와 고라신
4개의 복음서에 모두 보도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가운데 하나인 오병이어 사건 (마 14:13 ~ 21, 막 6:30 ~ 44, 눅 9:10 ~ 17, 요 6:1 ~ 14) 의 현장에 세워진 기념교회로 희랍어로는 'heptapegon'(일곱 개의 샘)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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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이라는 숫자인 hepta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히브리어 명칭의 'Ein Sheva'는 일곱 개의 샘이라는 뜻으로 역시 일곱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께서 산에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눅 6:17) 여러 지방에서 온 무리들에게 여러 내용으로 가르치신 후 '빈 들' (눅 9:12)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의 백성을 먹이셨다. 현재 이 사건을 기념하여 세워져 있는 기념교회는 팔복산으로부터 바다로 경사를 내려와 바닷가에 세워져 있으며, 5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위에 1936년에 다시 세워진 카톨릭 성당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남은 모자이크 가운데 오병이어의 모자이크는 매우 유명하며, 갈릴리 호수 주변의 생물들을 새겨놓은 모자이크는 당시의 생태계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값진 자료가 된다. |
베드로 수위권교회 이 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시 오셔서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와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던 곳 (요 21:1 ~ 23)으로 작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4게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해변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주께서 베드로와 함께 잡은 고기를 구워 잡수시면서 대화를 나누시던 바위 (Mensa Christi)가 보존되어 있어, 주님과의 사랑 - 강요된 사랑이 아닌 -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묵상과 기도처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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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과 거라사
가버나움 (Capernaum)
예수의 갈릴리 선교 본부로서 3년 동안의 공생애 활동의 가장 중요한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마 4:12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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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이 도시를 '그의 고향' (his own city), 혹은 '그의 도시'라 부르고 있다. (마 9:1, 막 2:1) 이곳은 고대로부터 '해변의 길' (Via Maris, 사 9:1) 이라는 남북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
헤롯 빌립과 안티파스의 경계로 많은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 - 군인, 상인, 여행자 등 - 이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곳이라 여겨진다. 예수의 사역 중에도 로마의 백부장과의 만남이 보도되고 있다. (마 8:5 ~ 13) 이 사실은 BC 135년 하드리안 황제때의 이정표가 발견되어, 가버나움 옛 도시 안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베드로 장모 집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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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안과 나사로
사마리아인 (The samaritans)
인구 400(나불루스에 240명, 홀론에 160명)의 사마리아인 들은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종족이면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다. 한때 강력한 힘을 지녔던 사마리아인 들은 2,500년간 순수한 혈통을 간직하고 있다. 같은 핏줄이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 들이 서로 분리된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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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주민들은 당시 추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복자인 앗시리아인들과 혈통적으로 혼합되었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이 그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에 따라 사마리아인 들도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독자적으로 유대인들과는 상반되는 제단을 쌓게 되었다. |
나사로의무덤 베다니(Bethany)는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로, 현재의 아랍 지명은 엘 아자리야(el Azariya)이며,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Lazarus)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 있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자주 들르셨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한 지 나흘 되던 날, 예수께서 오셔서 그를 부활시켰는데, 이 기적은 장차 주님의 부활을 예시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4세기 말엽 비잔틴 교회가 마르다의 집터에 세워졌고, 16세기에는 나사로의 무덤 위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으며, 그후 이스람이 크리스천 순례자를 위해 무덤 출입구를 만들었다. 입구를 들어서서 계단을 내려가면 무덤에 이른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곳이라 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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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성과 신약시대성전
오랫동안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이라 불리고 있는 이 성벽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전 서쪽벽을 일컫는다.
최고 14 m 의 길이와 400 t 이나 되는 돌을 비롯하여 평균 1 ~ 3 t 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높이 16 m의 이 성벽은 헤롯 대왕 때의 것으로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 건축이 시작되어 약 60여년 동안 이나 걸려 지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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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롯의 성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지렛대로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뜨렸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당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신성한 도시인 동시에 테러와 전쟁의 피가 끊임없이 흘려진 곳이다. 즉, 칼이 오랜 동안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들의 자손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전쟁을 거쳐왔고, 사람들의 피로 바다를 이룬 적이 수없이 많았었다. 무려 50차례 이상을 포위 공격 당했으며, 36차례에 걸친 정복과 10차례의 심한 파괴를 당했다. <예루살렘 성전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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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산과 다메섹 문
전 37년에 로마제국의 후광하에 왕위에 오른 헤롯왕은 유대 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당시에 현존하던 성전을 헐어 버리고 대규모의 성전과 부속 건물, 주변의 요새 등을 원래 의 크기와 위용대로 재건 하였고, 서기 30년경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부패한 성전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성전을 정화시키려 했으나 실패 로 돌아가고 결국 성전 모독 죄 및 반란죄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서기 638년 이후 이곳을 통치했던 모슬렘들은 성전 산의 큰 바위 위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를 종교적으로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서기 692년 당 시 예루살렘의 통치자 (Caliph) 압둘 말리크는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팔각형의 기단과 돔으로 이루어진 일명 "황금 의 사원"이라고도 불리우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과 은빛 돔 (엘 악사 사원)을 건설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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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론과 흰놈 골짜기
4개의 봉우리를 가진 조그마한 언덕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약 800 m 정도인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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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보다 약 90 m 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AD 1세기 경에 숲이 다 망가져 버렸다. 유대인들은 이 산을 출발점으로 하여 일련의 봉화들을 밝혀두곤 하였는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동족들에게 새로운 달이 시작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죽은자들이 감람산 위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옜부터 이곳 감람산은 무덤 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예루살렘 동편의 산으로 다윗왕이 하나님께 경배 (삼하 15:30 ~ 32) 하였으며, 솔로몬의 산당 (왕상 11:7 ~ 8)이 있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 산을 자주 찾아와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기도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하였으며 부활 후 마침내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시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장소를 베다니 근방 (눅 24:50)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른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이 감람산 꼭대기하고 한다. |
예수님이 체포 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이곳 감람산의 서쪽 기슭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마 21:1 ~ 10, 막 11:1 ~ 11, 눅 19:28 ~ 38, 요 12:12 ~ 19)이 시작되었고, 예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 (막 13, 마 24, 눅 21)하신 곳이기도 하다. |
압살롬의 무덤
기드론 골짜기로부터 감람산 100여 m 까지의 남쪽 산기슭에는 넓은 지역의 유대인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여호사밧의 무덤 (대하 21:1 /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과 압살롬의 기념비는 그리스 통치 시기 이후의 형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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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추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그 시기를 헬레니즘 시기로 추정 하기도 한다. 또한 기드론 골짜기 왼쪽 언덕은 다윗성 (삼하 5:7 /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이 자리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다. |
* 감람산과 눈물교회
주기도문 교회 (Pater Noster)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 말을 따서 교회 이 름을 지었다. Pater Noster라는 말은 '우리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 발이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 르치신 곳이라고 전해 오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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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 말기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관하여 설파하신 곳도 이곳이라고 전해진다. 예수님 의 말씀들은 기리기 위하여 4게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 감람산 위에 처음 기념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 인에 의하여 파괴되 고 12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진 교회 역시 후일 회교도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현재의 교회는 1875년 프랑스에서 카톨릭의 카르멜파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함께 건 립한 것이다. 수녀원 건물 벽에는 한국어를 포함하여 세계 62개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새겨 놓고 있다. |
눈물교회 (Dominus Flevit)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1-42)
감람산 꼭대기로부터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예루살렘 성으로 내겨가는 기슭 중턱에 매우 독특한 작은 예배당이 있다. 교회의 네 면 귀퉁이에 눈물 모양의 돌이 있는 이 교회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예루 살렘을 보며 우신 사건 (눅 19:41, 마 23:37)을 기염하여 세워진 교회로서 라틴어로는 '도미누스 플레빗' (주께서 우셨다) 이라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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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예수께서 생애 가운데 우신 세번의 울음 - 나사로의 죽음을 향한 울음 (요 11:35)과 겟세마네에서의 울음 (히 5:7) - 에 비교할 때 단순히 '흐느낌' 과는 다른 '큰 소리 내어 심히 통곡하심'을 나타내 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환호하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큰 소리를 내시며 통곡'하신 예수의 눈물의 의미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그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충분한 한 단어이다. 5세기의 수도원이 이곳에 세워진 이래 1881년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의 교회는 1955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가 설계, 완공한 것으로서 지붕을 눈물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곳은 또한 예수님이 여리고로 부 터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 마을을 지나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던 길목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 으로 입성하시던 성벽의 동문(황금문)이 기드론 계곡 건너 바로 정면에 보인다. |
* 게세마네와 최후의 만찬
만국교회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후에 기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 네 (Gethsemane, 기름짜는 틀) 라 하는 곳"(막 14:32), 즉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던 곳" (요 18:2)에 잡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기도하시던 동산 (요 18:1, 마 26:36)에 세워진 기념교회로서 1919 ~ 1924 년 세계 12개국의 모금으로 건축 되었다 하여 '만국교회'라 불리운다.
이 장소에는 AD 379 ~ 384 년 사이에 세워 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이 남아 있으며, 744 ~ 745년 지진에 파괴되어 1170년경 십자군에 의해 재건되기까지 폐허로 남 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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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부는 어두컴컴하게 조명되어 있어 언제나 예수께서 기도하시던 밤을 느끼게 해주고 있으며, 전면에 남아있는 넓다란 바위는 두께서 기도하시던 바위로 알려져 있어 예수의 처절하고 고뇌에 찬 기도의 모습을 상기 시켜준다. 주께서 기도하시던 장면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데, 밤에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오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돌 던질만큼 떨어진 곳" (눅 22:41)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담을 자고 있었다. 그렇다 면 아무도 예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자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옯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라고 기도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겟세마네 동굴
만국교회로부터 약간 떨어진 기드론 골짜기 쪽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무덤승천교회 (Church of the Assumption) 와 겟세마네 동굴 (Grotto of Gethsemane)이 있어 초대교회의 전승을 지키고 있다. 마리아 의 죽음과 무덤에 관하여는 성경에 언급이 없으나, 그에 관한 전승 가운데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요한이 에베소 에 모시고 말년을 그곳에서 보낸 후 생애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보다 앞선 초기 전승에 의하면 바로 예루살렘에서 그녀는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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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굴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담들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 다. 이곳에 잠들어 있던 제자들은 예수가 체포되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베드로는 예수를 벌찍이 따라가다가 그를 부인하고 말았다. "너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눅 22:41)
4세기 때부터 비잔틴 교회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1392년 이후 카톨릭이 차지 하 고 있다. 교회 제단 밑에서 잠자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부조(浮彫)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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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칸투와 베데스다
베드로 갈리간투 교회 (St. Peter in Gallicantu)
시온산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아래턱 겟세마네에 이르러 기도하실 때, 대제사장 가야바 (Caiaphas)가 보낸 병사들은 칼과 몽둥이로 예수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를 가야 바의 집으로 끌고 갔다. (마 26:57). 이 집은 시온산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날 밤이 새도록 이곳 감옥에서 심문과 고 문을 당하였으며 (cf .시 88편),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하자 로마의 총독에게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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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와 심문받으시던 예수를 뒤에서 따라온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하리라"(마 26:34)는 예수의 예언대로 그를 부인하게 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마 26:57, 막 14:71, 눅 22:60, 요 28:27). 닭이 우는 시간이 되서야 베드로는 깨달음을 얻고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마 26:75), 그래서 1931년에 세워진 이곳의 기념교회를 '갈리간투' (Gallicantu, 닭이 운다)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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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못 (Pool of Bethesda)
예루살렘의 동쪽 성문 중의 하나인 스테반 문 (일명 사자문)에서 성 내부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이 연못은 예수님 당시에는 성의 북쪽벽 밖 가까운 곳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문 (Sheep Gate, 느 3:1, 요 5:2) 곁에 위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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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 ~110 m, 너비 62 ~ 80 m, 그리고 깊이 7 ~ 8 m, 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 이곳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늘 집합되는 장소였고, 예수께서 38년된 병 자를 고쳐주신 장소로서 성스러운 성지로 지켜져 오는 곳이다 (요 5:2 ~9),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House of Mercy) 이라는 뜻이다. |
* 십자가의 길(비아돌로로사)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
라틴어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 m 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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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 마련된 14개 장소는 18세기에 와서야 확정된 것이며,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 검증되기도 하였다 |
제1지점 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빌라도 법정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 (Praetorium, 마 27:11 ~ 14)으로부터 시작되며 예수께서 사형이 확정된 곳이다. 헤롯 대왕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며,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고교회 (Church of Condemnation)가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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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지점 은 가시관을 씌우고,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하셨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시는 예수를 보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 (Ecce Homo, 요 19:5) 라고 했다. AD 135년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세운 에케호모 아취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
제3지점 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가 서 있다. 십자가의 무게와 모양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제4지점 은 슬퍼하는 성모마리아를 만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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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지점 은 구레네 사람 시몬 (Simon of Cyrene)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이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시몬의 아들들은 '알렉산더와 루포 (막 15:21)로 알려져 있으며,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 " (롬 16:13)라 부르고 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계속되는 비아돌로로사는 비교적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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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지점 은 성베로니카 여인이 물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성베로니카(St. Veronica)가 예수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는데 돌려 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1882년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
제7지점 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1875년에 두 개의 예배실이 세워졌다. 이 곳은 예수 당시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cf 히 13:12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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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지점 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라고 말씀하신 곳이다. |
※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안에 있다.
제9지점 은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곱틱교회가 서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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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지점 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이며, (요 19:23 ~ 24)
제11지점 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이며, (눅 2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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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지점 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곳이며, (마 27:45~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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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지점 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마 27:59)
제14지점에서 그가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 (마 27:60 ~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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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오와 승천
예수 승천교회 (Chapel of the Ascension)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
예수께서는 부활로부터 40일 후 승천하셨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승천에 관하여 유일하게 말하고 있는 누가에 따르면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0 ~ 51)라고 보도하여, 예수의 승천이 감람산인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동시에 누가의 저술인 사도행전에서도 승천 기사를 기록하면서 예수 승천 직후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 1:12) 고 묘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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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는 제한된 거리 (약 1 Km) 만을 걸을 수 있는 율법 규정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부터 승천하신 곳까지의 거리를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이 감람산 꼭대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져 380년 경에 승천을 상징하는 지붕없는 8각형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십자군이 재수축하였으나, 1187년 모슬렘 교도들에 의하여 사원 형태의 돔이 씌워져 기형적인 형태를 갖춘 돔(Dome)이 서 있다. 승천시 밟아 발자국이 남겨진 바위가 사원 둥앙에 보존되어 있으나, 이에 관한 전승은 중세 이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역사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
* 가이사랴와 므깃도
이스라엘의 최북단 헤르몬 산의 발치에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구약 성경에서는 언급된 바 없으며, 헤롯 대왕이 BC 2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 (Augustus)로부터 선물로 얻은 도시로, 희랍시대에는 판 (Pan) 신전이 있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자기의 수도로 정하면서 로마의 황제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더한 가이사랴 빌립보라 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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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물 (초당 20 ㎥)이 이 도시를 적셔줄 뿐만 아니라 요단강을 통하여 갈릴리 호수로 모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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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 16:13 ~ 20, 막 8:27 ~ 30). 예수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하셨다. |
아그립바 2세는 이 도시를 잘 발전시켰으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토 장군은 얼마동안 이 도시에 머물면서 축제를 벌이기도 하였다. 4 ~ 5 세기 경까지 기독교 공동체가 거주하였으나 7세기 아랍의 침공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랍인들은 Paneas 의 헬라어 발음 중 P 발음을 내지 못하여 Banyas 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굳어지게 되었다. |
므깃도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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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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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 (삿 1:27 ~ 28), 아마도 다윗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깃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방 요새가 되었다 (왕상 9:15 ~ 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깃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
BC 609년에 요시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28 ~ 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
* 벳샨과 하솔
벧샨 (Bet Shean)
갈릴리 하구로부터 남쪽으로 약 24 Km 지점에 위치한 벧샨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에서의 전투에서 죽은 사울 왕의 목없는 시체가 '벧샨 성벽에 못박힌' 도시로 유명하다 (삼상 31:7 ~ 13). 다윗의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노래 (삼하 1:17 ~ 27) 또한 유명하다. 본래 이 도시는 이즈르엘 골짜기와 요르단 골짜기의 접경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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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9세기 이집트의 자료에 언급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지배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BC 13세기 이스라엘의 므낫세 지파에게 영토로 분배되었으나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의 이 도시를 정복하지 못하였다. (삿 1:27). BC 10세기 솔로몬이 정복한 이후 (왕상 4:12) BC 3세기 헬라 사람들이 정복하여 스키도폴리스 (Scythopolis) 라 개칭되기까지 이스라엘이 다스리고 있었다. 안디오쿠스 4세 (BC 175 ~ 164) 가 이 도시의 지배자로 등장한 후 한때 이 도시는 닛사 (Nysa)라 불리워졌으며, 헤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John Hyrcanus)는 BC 107년 이곳에 사는 헬라인들을 유대인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AD 66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기도 하였다. |
* 세겜과 요셉의 무덤
세겜 (Shekem)
구약성서에서 세겜은 한 곳의 이름과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한 사람은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 세겜이다(창 33:19, 34:1-31).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했다. 세겜이 나중 에 디나와 결혼하고 싶어하자,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게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했을 경우에" 결혼을 승낙한다고 제안한다(창 34:15). 하몰과 세겜, 그리고 그의 사람들이 할례를 하고 난 다음에 시므온과 레위는 그 상처가 아물기 전에 세겜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다. 다른 한 사람은 므낫세의 손자, 길르앗의 아들 세겜이며(민 26:31, 수 17:2), 또 다른 한명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스미다의 아들의 이름이다(대상 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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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9세기 이집트의 자료에 언급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지배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BC 13세기 이스라엘의 므낫세 지파에게 영토로 분배되었으나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의 이 도시를 정복하지 못하였다. (삿 1:27). BC 10세기 솔로몬이 정복한 이후 (왕상 4:12) BC 3세기 헬라 사람들이 정복하여 스키도폴리스 (Scythopolis) 라 개칭되기까지 이스라엘이 다스리고 있었다. 안디오쿠스 4세 (BC 175 ~ 164) 가 이 도시의 지배자로 등장한 후 한때 이 도시는 닛사 (Nysa)라 불리워졌으며, 헤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John Hyrcanus)는 BC 107년 이곳에 사는 헬라인들을 유대인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AD 66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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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중앙산간 지역의 도시가 세겜이다. 세겜은 "어깨"라는 의미 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세겜이라는 도시가 에발산 산등성이 혹은 "어깨" 쪽에 건설되었던 까닭 에서 유래한 것 같다. 세겜은 고대 도로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세겜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 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요한 도시였던 곳이다. 이 도시는 수세기에 걸쳐서 여러번 파괴되었었고 재건되어진 역사를 갖고있는 도시이다. |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지나가던 여정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언급되어있다. 아브라함이 세 겜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바로 이 땅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게될 땅 이라고 선언한 곳이다(창 12:6-7). 이곳이 바로 아브라함을 불렀던 약속이 성취되었던 곳이다(창 12:1-3). 이에 반응하여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하였던 곳이 다(창 12:7).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에 세겜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 미가 부여되었던 곳이다. 또한 세겜(때때로 수가라고 불리웠음)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났다(요 4 장).
* 야곱의 우물고 모레 상수리
사마리아도 수가성 아스갈 촌에서 서남 반마일 지점.
(1) 세겜에서 동쪽으로 1마일 지점에 있다. 야곱이 하몰의 아들에게서 산 밭을 판 우물인데 광이 9척, 깊이75척이다 (창33:19, 요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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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언덕(Moreh)
이스르엘 계곡 나인 남쪽 약 1.6km 지점의 예벨 나비 다히(Jebel Nabi Dahi)로 동일한 곳으로 추측하고 있다.
[1] 아브라함이 장막을 쳤던 세겜 부근의 모레 상수리 나무로 기록되어 있다 (창12:6, 신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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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디안 사람이 진을 쳤던 모레 산(삿7:1)(때로 잘못알려져서 작은 헬몬 산이라고 부른다.) |
* 사마리아
예루살렘 북쪽 약 67km 지점으로 사마리아 도와 사마리아 성이 있다. 사마리아 성은 세겜 북방 11km 지점 91km 높이의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세바스티에 라는 곳으로 보장것 없는 동내가 되었다. BC 30년에 헤롯은 사마리아 대건설 계획에 착수,새로 건설된 도시를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세바스티아로 개칭했다.도시의 출입문은 서편과 동편에 있었다.북편과 남편에도 성문이 하나씩 더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낙후된 아랍인의 마을에 불과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기였다.
그리심산이 있다. 이 산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산정에는 유적지가 있 다."> 소수민족인, 전통적인 사마리아인은 4백명 뿐으로 그리심산에 살고 있다.사마리아 유적은 2차례 발굴되었는데 1965년 요르단의 고대문물성에 의해서,또 한번은 1968년 예루살렘의 영국고고학회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에 익숙한 도시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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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와 법궤
에브라임 산지 남쪽,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 한 고대 도시로 아랍어 로는 쎄일룬이라고 불리 우는 실로는 벧엘에서 세겜으로 가는 고대 족 장도로에서 동쪽으로 들 어가 있다. (삿 21:19 "벧 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 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 는 큰 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 실로는 이스라 엘이 가나안 땅에 돌아 온 후 처음으로 법궤를 안치하고 중앙 성소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3000여년에 걸쳐 이스라 엘 사람들의 정신적인 고향의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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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는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머문 성스러운 장소이었으나(렘 7:12 "내가 처음 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엘리 제사장의 죄악으로 퇴락의 길을 걸어 주전 722년 앗수르의 왕 사 르곤 에 의해서 파괴된 후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곳 출신의 선지자로서는 여로보암에게 왕이 된다고 예언했던 아히야가 있다(왕 상 11:29; 14:2). 사사 시대 때에는 베냐민 지파의 멸절을 막기 위해 실로 여인들을 선택해 베냐민 지파와 결혼 을 시켰다(삿 21:21). |
*벧엘과 아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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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
벧엘은 예루살렘 북편 세겜 쪽으로 19km, 실로 남방 29km 아이 서편 3km 지점의 동산있어 동네에 좋은 물을 공급하여 옛날에는 마을 남쪽에꼭대기에 서 있는 오늘의 베이틴 동네이다. 우물 넷이 반석을 파고 만든 저수지까지 있었다. 벧엘은 라기스보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점령되었으며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
성경에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곳. 고고학적 발굴로 보면 벧엘에는 그 이웃 아이성이 망한 후 주전 21세기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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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과 일천번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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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Samuel)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옮기는 과도기에 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선지자와 제사장직을 겸한 사람이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거주하는 엘가나의 처 한나가 하나님 에게 간구하여 낳은 아들(삼상1:1, 10:20). 밤에 잘 때에 여호와가 사무엘을 세번이나 불러 그와 같이 하시겠다 하시매 그 말이 하나도 어김 없이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을 여호와가 보낸 선지자인줄 알게 되었다(삼상 3:). |
미스바 언덕 : 오늘날 텔 엔 나스베로 알려 지고 있는 이곳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경제지역에 있던 요새였다. 또한 이곳은 전 이스라엘의 기도와 경배의 장소였다(삿20-21장) 사무엘은 이곳에 온백성을 모이게 하여 민족적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종교개혁을 시도하였다. 온 백성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늘보좌에 상달되었고 하나님의 권능 앞에 블레섹이 패주하는 [에벤에셀]의 기적을 낳았다. 블레셋을 물리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경건하 고 청렴한 삶을 통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런데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의 안정만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무엘은 그의 가정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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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아들들의 타락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서 등을 돌리고 왕을 요구하는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백성들의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엘리의 뒤를 이은 제사장으로서 또한 선지자와 사사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 의 중보자가 된 사무엘은 이스라엘 전역을 두루 다니며 율법을 가르치고 우상숭배로부터 돌아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하나님께로 마음 을 돌이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을 주축으로 미스바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 금식성회를 열어 기도하였다. |
*기브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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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북쪽은 현재의 마을이고 남쪽은 고대의 유적이다. 솔로몬은 즉위 후에 기브온의 성소에서 봉헌하고. 꿈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왕상 3:4-15). 미스바로부토 촬영한 이 사진에는 석회암층이 아름다운 단구 위에 마을이 있다.
(1)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 이 성 위에서 해를 머물게하고 싸워 이겼다 (수10:12-14,사28:) |
(2) 사울이 이 성 사람을 많이 죽인 까 닭에 3년간 기근이 있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왕의 허락을 받아 사울의 자손 7명을 죽임 (삼하21:1-6).
(3) 다윗이 제사장 사독으로 이곳 성막에서 매일 번제를 드리게 함 (대상16:39).
(4) 솔로몬이 이곳에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지혜, 부귀 장수함을 주심 (왕상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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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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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일곱우물-브엘세바
기원전 1900년경,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우르에 살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1~2) |
5천년전 인류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수메르문화의 중심지 우르에서 셈족의 장로인 아버지 데라,형 나홀,동생 하란과 함께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아브람은 이 불가사의한 음성에 이끌려 우르를 떠났다. 오랜 여행끝에 아브람이 닿은 곳이 지금의 이스라엘땅이다.아브람은 그 뒤 하나님으로부터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브라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세겜 헤브론과 브엘세바다.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장막을 친 곳이며,헤브론은 그가 기근을 피해 애굽에 갔다 온 뒤 장막을 치고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다.그러나 이 두지역은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으로 편입돼 외국인의 접근이 통제되고 있다.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브엘세바.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암양 일곱마리를 주고 우물을 확보해 정착한 후 이삭과 야곱 등 3대에 걸쳐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다. 예루살렘을 출발,끝없이 펼쳐지는 황토색의 유대광야를 약 1시간30분간 달려 브엘세바에 도착했다.`일곱 우물,혹은 생명의 물'이란 뜻의 브엘세바는 모래태풍이 부는 네게브사막의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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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인데도 남쪽으로부터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왔다.한번 폭풍이 일면 30m 앞도 보기 힘들다는 강렬한 모래태풍이 취재진을 맞았다.그 옛날 아브라함도 이 모래태풍을 뚫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인구 20여만명의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다.현대식 고층건물과 자동차의 물결이 낙타를 몰며 수천년전의 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베두인의 시장과 혼재,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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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중심부에 아브라함이 정착하기 전,천막을 치고 생활할 때 판 우물 터가 남아 있다.이 우물은 오스만터키시대까지 사용됐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2㎞쯤 가서 정착했다.텔 브엘세바가 바로 그곳이다. 입구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싸우지 않기로 약속하고 판 우물이 있다. 우물은 매우 깊었다.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자 차가운 물이 담겨 올라왔다.4천년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마셨을 물에 손을 담그자 영겁의 세월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브엘세바=글 이승한 / 사진 곽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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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엘쉐바와 아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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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시와는 다른 위치에 세워진 현대의 브엘쉐바는 1900 년 이후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스라엘의 3대도시로 확장되어 있다. 초대 수상을 역임한 벤 구리온 (Ven Gurion) 이 세운 대학이 자리잡고 있어 사막 연구로 유명하다. |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네게브 지역에는 많은 베두인 (Beduin) 들이 있어 역사의 오랜 기간동안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지켜오고 있다. 이들은 가축을 기르며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닌다. 어떠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속박도 용납하지 않은 채 혈연관계의 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엄격한 규율이나 '피의 복수법', 또는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일 등에 관한 습관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의 삶의 형태 (삼하 13장, 창 34장, 창 18장 ) 와 매우 유사하여 중요한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베두인 시장은 관광객의 인상적인 구경거리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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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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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많은 지리적 상황 속에서 이슬람 발생 직전까지 북부 아라비아의 거주민을 지배한 사회관습은 베드윈 부족주의였다. 베드윈 사회에 있어서 최소 구성단위는 개인이 아니고 단체였다. 이 유목민은 낙타나 양떼를 기르면서 항상 물과 풀을 찾아다녔고, 때로 이웃의 정착민을 습격하거나, 아라비아 반도를 대담히 가로질러 가는 대상을 약탈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부족의 정치조직은 아주 미약하여 사이드(sayyid) 혹은 샤이크(shaikh)라 불렀으며 그는 부족에서 선출되었고 그가 가지는 권위는 단순히 동등한 사람 가운데 제일인자, 즉 학급의 반장정도의 권위였다. 사맛에서 베드윈, 낙타 및 야자수는 가장 중요한 3대 요소이며 모래까지 합하면 4대 요소로써 사막에의 생활은 이 네가지 요소의 유기적 관계에서 전개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이들은 아라비야 말로 만국 중에서 가장 고결한 국가라는 자부심과 베드윈 자신들이 야말로 신이 창조한 인간의 극치로 생각하고 있다. 유일신 원리를 가진 중동의 종교와 도덕 이념들은, 후에 예언자 모하메드의 종교적 성공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출생과 사망
아이들이 출생하면 아이의 오른쪽 귀에는 아잔(Azhan)을, 왼쪽 귀에는 이까마(Iqamah) 를 낭송하며 악마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한다. 7일째 되는 날에 아이의 이름을 짓고 그 아이의 머릿털을 자르며 남아일 경우 에는 양 두 마리(혹은 염소), 여아의 경우에는 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친다. 요즈음은 남아의 경우에만 한 마리의 제물을 바치고 여아의 경우에는 생략하기도 한다. 이렇게 잡은 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자른 머릿털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은 자선에 사용된다. 이와같은 제물과 머릿털 자르기 등의 예식을 알-아키카(Al-Aqiqa)라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높은 곳에 올려놓고 3-5차례 세척한 후 남성의 경우 5번, 여성의 경우 3번, 흰 천으로 감는다. 장례식은 3일 이상 치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죽은 사람의 얼굴이 메카를 향하도록 눕힌다. 무덤은 땅높이와 마찬가지로 평평하게 하며 무덤의 표시로써 무덤앞에 푯말을 묻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코란의 구절을 적어 놓는다. 이들이 묻힌 공동묘지는 성인의 보호를 받는다는 신앙심 때문에 대단히 중요시 여긴다. |
가정생활
결혼-니카하(Nikah)는 코란과 하디스에 의한 모든 무슬림 남녀의 의무사항이다. 모하메드는 "너희 젊은이들아, 혼인 지참금이 있는 자는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하나니 결혼은 너희들을 성숙케 하고 너희들의 생식기를 보다 잘 보호하기 때문이니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보통 중매장이가 있어 결혼을 성사시키는데 여기에는 후견인(여자의 아버지나 합법적 보호자)의 청혼의 수락 여부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며 결혼의 성립에는 2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또한 결혼이 성사되기 전에 마흐르(Mahr) 즉 신부의 값을 결정하는 계약이 맺어진다. 이 마흐르는 신랑이나 신랑의 아버지가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불하는 것으로서 현금일 수도 있고 현물일 수도 있다. 간통의 고소에는 4명의 증인이 필요하며 코란에서는 만일 간통 사실이 판명되면 100대의 가죽 태형이 가해지고 죽을 때까지 집안에 가두도록 하고 있으나 이슬람 성법 학자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후 간통을 하면 남녀의 경우 돌로 쳐서 죽이고 노예와 같은 천민의 경우는 태형을 50-100대씩 치고 추방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간통한 여자의 친정 사람들이 여자를 죽이는 것이 상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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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의 선언은 보통 남편만이 할 수 있으며 여성이 선언할 경우 쿨으(khul)라는 보상금을 남편에게 지불해야 한다. 이혼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대체로 잇다.('Iddah)라는 법정기간을 거쳐야 이혼이 성립된다. 이 기간은 보통 3개월이다.
경제관
무슬림이 경제적으로 뭉칠 수 있게 하는 중심 원인은 무슬림들이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데 있다. 따라서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과 경제적 경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 들이는 데는 이의가 없으나 다만 획득과 경쟁에 있어서 정당하게 하도록 강조할 뿐이다. 부자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 중 일년에 2.5%를 가난한 사람들 위해 바치는 희사(자카트)가 있다.
무슬림은 이 희사를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에게 줘야 하는 사회적 책임으로 생각하고 있다. 코란은 희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다. "예배를 잘 드리고 희사를 행하고 머리를 숙여 기도하는 자와 함께 머리를 숙여 기도하라." 또 지난날의 장자에게만 상속하도록 되어 있는 제도를 고쳐서 유산상속을 딸에게도 나누어 주어서 자손들이 다 같이 경제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또 꾸어준 돈은 이자를 붙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무슬림은 한 술의 음식을 자기 입으로 집어 넣을 때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을 받을 만큼 다른 사람들 위하여 충분히 기부를 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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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게디와 사해
엔게디 (En Gedi)
오늘날 사해 주변의 좋은 휴양지의 하나로 자리한 엔게디는 사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샘이 넘쳐 나고 있는 곳이다. 사무엘상 24장 1절에 의하면 다윗은 한때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이곳에 숨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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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할 데이비드 자연보호 구역으로 들어서, 조금 올라가면 다윗의 폭포라 불리는 엔게디 폭포가 나온다. 가던 방향으로 곧장 따라 올라가면 샘 하나를 지나서 동굴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몸을 숨겼다는 동굴이다. 폭포에서 이곳까지 약 40 ~ 50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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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The Dead Sea)
최장 길이 85 Km, 최장 폭 17Km 표면적 약 1,015 평방 Km 인 사해는 그 수면이 지중해보다 398m나 더 낮다. 즉 지구 표면 중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이다. 구약에는 염해(Yam Hamelach = Salt Sea 창 14:3)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생물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에 사해(死海) 라고 불리며 염도가 약 33%로서 세계적으로 염분이 가장 많은 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해에 들어가면 손발을 휘젖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둥둥 떠 있게 된다. 혹시 손발을 휘젖다가 물방울이라도 튀어 눈에 들어 간다면 눈이 쓰라려서 그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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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지역에 위치하였던 도시로는 소돔, 고모라, 아마드, 스보임 (창 10:19) 이 있으며, 이 도시의 왕의 목록도 이어 기록되어 있다 (창 14:2), 소알 (창 13:10) 또한 이 지역의 도시였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이 지역은 "물이 넉넉하여 ..... 여호와의 동산" 같았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 고 해석하고 있다. (창 13:10, 사 1:10, 마 11:23~24) |
* 마사다
마사다 / MASADA (1)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 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 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2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 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 (Jonathan : 주전 160 ~ 143) 이었다. 그 후 유대왕 헤롯 (Herodes) 이 주전 35년에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둘러 난공 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그녀에게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로마에 기대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로마의 배신을 두려위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의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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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이 죽은 뒤, 서기 66년 유대전쟁이 일어나고 , 이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여명의 "열심당원" 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
마사다에는 엄청난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가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들은 신선했고 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롯왕이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 마련되어 있었다.
사막과 다름없는 들판을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열심당원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대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960여명. 로마제국으로 볼 때는 한줌에 지나지 않는 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이들을 쳐부수도록 엄명을 내렸다. 마사다는 끊임없이 로마군 진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기지로 쓰였으며, 그것은 꺼져가는 반란의 불길을 또다시 타오르게 할 염려가 있었다. 또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서기 72년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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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브론과 마무레 상수리나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베들레헴을 지나 35킬로미터쯤 가면 전형적인 아랍인 도시 헤브론이 있다. 헤브론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이 이스라엘 왕권을 쟁취할 때 발판으로 삼았던 도읍이기도 하다. 베냐민 부족 출신인 사올 왕이 갈리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부족 출신인 다윗은 브엘세바 근처 시글락에서 유다 부족 거주지인 헤브론으로 급히 자리를 옮긴다. 거기서 그는 유다 부족의 임금으로 추대된다.(삼하 2:1-4) 다윗은 무려 7년반 가까이 헤브론에서 단지 유다 부족의 임금으로 행세하는 동안 온갖 계략과 술책을 써서 결국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된다.(삼하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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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므레
헤브론을 떠나 북쪽 예루살렘 방향으로 4킬로미터 달리다 보면 아랍인들이 '라맛 열 칼릴(친구의 고지)'이라 부르는 페허가 나온다. 그곳이 마므레 성지이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참나무 아래 천막을 치고 제단을 설치했다고 한다.(창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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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기서 신비스런 길손 세분을 잘 대접한 덕분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1년 안에 이사악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곳이다.(창세 18, 1-15) 길손들이 소둠을 멸하려는 계획을 알려 주자 아브라함이 소둠을 구하려고 흥정을 벌인 곳이기도 한다(창 18:16-33). 헤로데 대왕의 헤브론 족장 묘소에 한 것처럼 마므레에도 돌담을 쳤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 130년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팔레스티나를 방문하여 마므레에 시장을 건설케 하였다. 그후 황제는 제2차 유다 독립전쟁(132-135년)을 진압하고 나서 바로 마므레 시장에서 무수한 유다인들을 노예상등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겼다. 시장 돌담의 규모는 길이 약 65미터, 너비 약 49미터,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모 에우트로피아가 건설한 자그마한 성당 잔해가 남아있다. |
* 야르콘과 욥바
욥바, 텔아비브 (Jaffa, Tel Aviv)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지닌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이집트어와 아카드어로는 야푸 (Yapu), 아랍어로는 야파(Jaffa)로 바뀌었다.
욥바는 해변 길 (Via Maris) 의 주요 항구로 기능하였다. 투트모스 3세에게 점령 당하기도 했으며, 아마르나 문서에도 언급된다. 구약성경에는 단 지파의 땅의 경계 (수 19:46), 솔로몬 왕이 욥바 항구를 통하여 두로 왕 히람이 레바논으로부터 보내오는 백향목을 수입 (대하 2:10 ~ 16) 하였으며,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하여 욥바에서 배 (욘 1:3)를 탔고, 바벨론 귀환 후 새로이 짓는 여호와의 전 건축 자재로서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입해 들어오는 항구 (스 3:7) 의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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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에는 베드로가 욥바에서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죽은 것을 다시 살렸으며 (행 9:36 ~ 43), 피장이 시몬의 집 (행 10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헬레니즘 시대 때 욥바는 대단했던 항구도시였다. 오늘날에는 시몬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베드로가 머물렀던 '피장이 시몬의 집' 과 텔아비브 공원 아래쪽에 자리한 베드로가 다비다 (도르가로도 언급되는)를 살린 것을 기념하는 기념교회와 텔아비브 공원 등의 볼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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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예루살렘 서북쪽 62 Km, 하이파 남서쪽 95 Km, 티베리아 서남쪽 132 Km, 브엘쉐바 북동쪽 113 Km 지점. 구약시대로부터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욥바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롭게 하이파 항구가 발전하면서 서서히 그 기능을 잃는다. 주민들도 비좁은 욥바 시내에서 벗어나서 그 북쪽으로 신시가지를 이루며 옮겨 간다.
신 시가지는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아비브라고 새로이 이름지어 진다. 욥바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텔아비브는 순수한 유대인들의 도시로서 야파(욥바)가 편입된 상태로 인구 약 35만명의 이스라엘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 해변 휴양지의 하나이며, 이스라엘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다. |
* 가이사랴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에 의해 BC 22 ~ 10년에 세워진 지중해 해변의 항구 도시이다. 헤롯의 건축물은 아직까지도 잘 보존될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다. 항구와 수로, 원형경기장 및 도로,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신전과 궁전 등은 당시의 모습과 건축 기술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가 남긴 극장은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이곳은 BC 3세기 헬라인들에 의해 항구로 사용되었으며, 페니키아와 이집트를 잇는 Straton's Tower 라 칭하는 항구였다. BC 96년 헤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 (Alexander Jannaeus)가 정복하여 유대 마을을 일으켰으나 헤롯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로마식 도시로 변모하였다. 헤롯 대왕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Casarea Maritima' (후원자 가이사)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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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향하는 팔레스타인의 관문으로써 AD 6년 이후 예수 당시에는 로마의 총독부가 주둔하던 곳이었다. (행 12:19), 이 도시의 고넬료라 하는 이다리야대의 백부장은 베드로 사도를 불러 이방인으로서는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이 되었다 (행 10:1 ~ 43) 아울러 바울 선교 여행의 기지이기도 하였으며 (행 9:30, 18:22, 21:8), 그가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 2년동안 (BC 58 ~ 60) 이 도시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행 24:27), 그 때 로마의 총독 벨릭스와 후임자 베스도, 그리고 유다왕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론을 펴기도 하였다. (행 25 ~ 26). 바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면서 이 항구와 작별하였던 것이다. |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이 도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로서 오리겐 (185 ~ 254년) 과 그의 제자 유세비우스 (260 ~ 340년) 등의 교부 활동의 중심지였다. AD 640년 아랍에 의해 파괴된 이후 1101년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어 재건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십자군은 이 도시를 악고와 욥바와 더불어 중요한 항구로 개발하였으며, 아름다운 성문과 성채를 수축하였으나, 1265년 마므룩 (Mamluk sultal Baybars) 에 의해 점령되면서 십자군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오늘날 에는 옛 항구자리의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십자군 건물을 이용한 식당과 예술품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어 옛 도시의 매력을 남겨 놓고 있다. 텔아비브와 하이파 중간쯤 되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 (水道 : Aqueduct)
해안에서 북쪽으로 아취가 연결된 벽이 있다. 이것은 헤롯 왕이 가이사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갈멜산 남쪽의 샘으로부터 약 19 Km 에 이르는 수도(水道)를 건설 한 것이다. 물의 낙차를 이용한 구조물로서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십자군 시대의 성채
십자군 요새의 문과 벽이 온전히 남아 있다. 성벽의 바깥 쪽에는 깊은 해자를 파 놓아 외적의 침입을 차단 하였고, 성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직각으로 구부러 지게 만들어 적들이 용이하게 진입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요새 안에는 십자군 시대의 도시와 교회 유적, 아우구스토스 신전,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등이 있고 항구 쪽에는 망대 유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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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형 극장 20여 m 정도 높이,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시대의 야외극장이 로마 시대의 성채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구조를 고려하여 거의 신축해 놓은 원형 극장을 볼 수 있다. 유적지의 입구 왼쪽에는 이곳에서 1950년대에 발굴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나타나는 비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터키 이스탄불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 본디오 빌라도, 유대의 수호자, 티베리움을 만들어 아구스도 황제에게 바친다' 라고 되어 있어, 이곳이 빌라도의 거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외에 가이사랴에는 유대인 회당 유적, 비잔틴 시대의 도로 유적 등이 흩어져 있다. 계속적인 발굴이 이루어 지는 이 드넓은 지역은 로마 제국에서 준 수도로 기능했던 거대한 도시 규모를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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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야와 갈멜산
"머리는 갈멜 같고" (아 7:5), "해변의 갈멜같이" (렘 46:18, 사 33:9),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마다 등장하는 해발 482 m의 이 산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머리산' (Holy Headland)이라 불리었다. BC 4 세기의 헬라인들은 이 산을 '거룩한 제우스의 산'이라 불렀으며, AD 1 세기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은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하하였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 (Tacitus)는 이 산을 가리켜 "동상도 신전도 없이 오직 제단과 예배만 있는 산이 있는 곳" 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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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은 이스라엘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하이파 (Haifa) 시가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하이파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즈르엘 골짜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약 25 Km 가량의 산맥으로, 종교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산으로 BC 860년 아합왕때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850명이나 되는 사제들에 의해 이방의 종교는 꽃을 피우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는 이들과 맞대결을 통하여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가름 하였다 (왕상 18:1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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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이 가장 번창하였던 예수 당시의 제사장 숫자가 약 480명 정도였음에 비교한다면 기원전 9세기의 바알 종교가 이스라엘 내에서 얼마나 극성을 부렸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질서를 세웠으며, 종교적 위기로부터 구출하였다.
영국의 신학자 로울리 (H.H. Rowley)는 "모세 없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종교가 태어나지 못하였더라면, 엘리야 없이 그 종교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풍전등화처럼 꺼져가고 있을 때, 등잔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돋아 불꽃을 다시 일으킨 자가 바로 엘리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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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 꼭대기에는 1868년에 세워진 '므흐라카' (Muchlaka, 불의제단)라 불리우는 카르멜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본래 십자군의 성채가 있었던 곳으로 수도원 옥상에 서면 지중해쪽 (서쪽) 뿐 아니라, (왕상 18:43 ~ 44), 이즈르엘 평원 (북동쪽), 사마리아 산지 (남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왕상 18:40, 22:39), 입구의 벽면에 있는 갈멜산 사건의 부조는 눈여겨 관찰해 볼 만하다. 교회 뜰에 세워진 칼을 들고 서 있는 엘리야의 석상은 보는 이들에게 신앙을 재무장 하도록 요청하는 듯하다. |
* 다볼산과 찌포리
변화산상의 교회 (마태복음17:4~5)
다볼산 꼭대기에 있는 변화산상의 교회는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에 의해 지어졌다. 지금의 교회는 3번이나 폐허가 된 이후 1924년 그 때의 자리에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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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포리 문화설 1931년 여름 미국 미시간 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찌포리라 불리는 나사렛 근처의 한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시도했다.당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사마리아,므깃도,벧산 등 유명한 대도시들을 발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초라한 폐허를 택한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신약시대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찌포리가 갈릴리 왕국의 첫번째 수도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워터맨은 2개월여에 걸친 발굴 결과 서기 예수시대에 건설된 4천5백명 수용규모의 로마식 극장과 별장의 흔적들을 발견했다.이를 계기로 신약시대의 나사렛은 문명과는 고립된 촌락이 아닌 대도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가설과 함께 어린 시절 예수의 교육적 문화적 배경을 이 도시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이해가 시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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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청중을 사로잡았던 비유의 말씀들,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율법의 해석, 그리고 심오한 철학적 윤리 등은 보잘 것 없는 나사렛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걷히기 시작했다.하지만 소위 `찌포리 문화설'로 불렸던 이 가설은 중단된 발굴과 함께 얼마 못가서 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1976년 시행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유적조사에서 찌포리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됐고,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과 미국 듀크대학이 공동 추진하는 대규모 발굴작업이 1985년 시작됐다.비록 1930년대에는 신약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복음서의 해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서기 2~5세기의 회당과 귀족의 저택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찌포리는 유대교 중심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시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하게 우뚝 솟은 언덕,수량이 풍부한 샘과 근처를 흐르는 하천,비옥한 농경지,그리고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였다.
어릴때 부터 예수는 하룻길 되는 찌포리의 극장에서 서커스와 연극 등을 구경했을 것이다.그리스 고전에서 `휘포크리테스(hypokrites)'는 `연극배우'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됐는데 복음서에서는 배우라기 보다는 `위선자'의 의미로 쓰였다.아마도 원래 예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이 배우같은 자들아'라고 빚대어 꾸짖었을 것이다.실제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연기하는 찌포리 극장의 배우들을 염두에 둔 예수의 언어적 유희는 로마식 극장이 없었던 나사렛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나사렛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성벽에 둘러싸여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의상 으로 치장한 왕궁의 일상생활도 예수의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다.왕궁에 거하는 고급 의상을 차려입은 자들(마11:8),혼인잔치 를 베푸는 왕(마22:1~14),왕과 왕이 전투를 벌이는 비유(눅14:3),그리고 예수의 후원자들 중의 하나인 헤롯 왕의 재무장관의 아내 요안나(눅8:3) 등은 모두가 찌포리나 티베리아스 같은 왕도와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서기 20년 갈릴리 왕국의 수도가 호수변에 새로 건설된 로마식 도시인 티베리아스로 이전됐다.청년이 된 예수도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다면 이 건설현장에서 일했을 것이다.티베리아스가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후대 랍비들의 해석은 `하맛트'라 불리는 유대인 마을의 묘지를 헐고 그 위에 새도시가 건설되어서 유대인들은 정결율법에 따라 일부러 이 도시를 피했다고 전해준다.찌포리의 시대가 가고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티베리아스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한 예수가 자신의 선교 중심지로 가버나움을 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 예루살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예루살렘 문제의 중요성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3대 유일신 종교의 성지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 모두 특별한 종교적, 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있다.
현 아리엘 샤론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통일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영원히 유대민족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히브리어 Yerushalaym)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약 3000년 전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그의 수도로 삼고(삼하 5: 6-10),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옮겨온(삼하 6: 1-23) 이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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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솔로몬 왕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창 22: 1-14; 대하 3: 1)에 성전을 건축한 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이후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 또는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인 '시온'이 이스라엘 민족과 신앙적ㆍ정서적으로 일체화되어 왔다. 특히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시편 기자는 137편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5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 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6절)."라고 노래한다. 또한 이사야는 52장에서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 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1절) ...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 지어다. 사로 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2절). ...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 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다(9절)"고 선포한다. 미가 선지자 역시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라"(미 4: 2)고 선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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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지난 2천년동안 나라 없이 이곳 저곳을 유리 방랑하게 되었지만 예루살렘은 늘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속에, 기도 속에 살아있었다. 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면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 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여 왔다. 이스라엘 땅과 함께 예루살렘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에 큰 추진력을 제공했던 시온주의 운동의 하나의 기초가 되었다. |
예루살렘(아랍어 Al-Quds)은 무슬림에게도 중요하다. 예루살렘이 이들에게 메디나, 메카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시작된 처음 16개월은 무슬림 역시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었으나 무함마드의 예언에 의해 메카로 바뀌었다(꾸란 2장: 142-150).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가 된 것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얽힌 전승에서 기원한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밤의 여행'(Al-Isra' w Al Mi'raj)과 관련이 있다. 즉,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전능하신 분(알라)께서 그의 선지자(무함마드)를 밤중에 거룩한 사원(메카)으로 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사원(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Qur'an, Sura 17:1)라는 구절이다. 이 '가장 먼 곳에 위치한'이라는 구절은 아랍어로 '엘-악사'라는 단어인데, 이슬람에서는 이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해석한다. 또한 무함마드의 어록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에 폐허가 된 솔로몬 성전으로 가서 여러 선지자들(아담,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그리고 예수 등)과 함께 기도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져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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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전승과 연관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델 말리크(Abd al-Malik, 685-705)와 그의 후계자인 알-왈리드(Al-Waleed)에 의해 황금돔 사원(691)과 엘-악사 사원(Al-Aqsa Mosque, 709-715)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두 사원의 건축으로 그 이전까지 추상적으로 꾸란에서 다루어지던 무함마드의 여행이 구체성을 띠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로 역사화 된 것이다. 오늘날 무슬림은 무함마드가 밤에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 최영철 박사 (Ph D)의 글 일부 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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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오의마을 ' 이집트민속촌
이집트 기독교의 그 오랜 흔적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올드 카이로 (Old Cairo : 마스를 아디이마) 이다. 이곳에는 1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집트 고대 초대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당시에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별된 장소였었다. 심지어는 무슬림이 다수가 된 시대에도 수만명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밀집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교회에서는 매주 수,금, 주일 오전 9시 ~ 12시 사이에는 전체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올드 카이로의 모든 콥틱 건축물들은 코린트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움마이야드 왕조 (시리아에 기반을 둠 : AD 750) 때에 칼리프 마라완 이븐 무함마드가 그의 적인 압바스 왕조 (이라크에 중심을 둠 : AD 750 ~868, 이 시기는 콥틱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여 기독교인들이 빈번하게 폭동을 일으킴)에 패배한 다음에 750년 도성 알푸스타 트 전 지역 (지금의 올드 카이로)이 소실되었다. 이후 AD 1168년 11월 에는 예루살렘 왕 아말릭 1세에 저항하면서 이 지역을 파괴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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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심벨과 룩소르
아부 심벨(Abu Simbel)
아부 심벨의 유적은 아스완 남쪽 250km 지점에 람세스 2세가 건설한 거대한 두 개의 암굴 신전이다. 이 두 신전은 각각 람세스와 그의 부인 네페르타리의 것으로 불리며 람세스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성소에는 아문-라, 라-라크테, 프타, 그리고 람세스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다. 해마다 람세스의 생일인 2월 21일과 대관식 기념일인 10월 21일에는 아침해 의 첫 햇살이 길이 50m에 이르는 암굴 통로를 따라 이 석상들을 비치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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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최고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가 일반적인 마을도 없는 아부 심벨에 이러한 거대한 규모 의 신전을 건립한 이유는 아마도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누비아, 즉 금, 상아, 흑단목, 노예 등이 풍부했던 지역의 정복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1960년대 아스완 댐의 완공으로 수몰 위기에 처했을 때 유네스코에서는 엄청난 재원을 들여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문화재 이전 공사를 시행하여 이 신전을 안전하게 60m 높은 곳으로 이전시켰다. |
룩소르(Luxor)
카이로 남쪽 670km 지점에는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나오는 테베-백개의 문', 룩소르가 위치해 있다. 룩소르는 예전에는 '테베'라고 불리던 곳으로 중왕국, 신왕국의 수도로 번성하던 곳이다. 현재의 룩소르는 나일 강의 동편과 서편, 두 곳으로 나뉘어진다. 룩소르는 이집트 건축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곳으로, 신왕조 500년동안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에도 이집트의 정신적 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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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룩소르는 이곳의 모든 유적들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나일강 동편에는 룩소르 신전과 카르낙 신전, 그리고 이것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룩소르 박물관등이 있다. 강 서편에는 왕들의 골짜기와 왕비들의 골짜기 그리고 데어 엘 메디나에는 신전들과 무덤들을 건설했던 장인들의 골짜기가 있다. |
* 고센땅
헤브론 남서쪽 약 19.2km 지점으로 애굽의 동북부 카이로 동북 50키로 지점 벨레스 부근으로 추측. 이 지역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살아온 지역이며, 그들이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미 350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라암셋 2세의 문장이 새겨진 돌들과 볏짚을 섞어 만든 벽돌의 흔적을 완연히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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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대 동북의 한 지역이다. 이 고센은 요셉이야기 (창37:39,50:)의 무대로서 유명하다. 여기서 야곱은 20여년만에 사랑하는 그의 아들 요셉과 다시 만났다. 아버지의 편애를 시기한 요셉의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후에 바로의 총애를 얻게 되어 출세한다. 요셉은 긴 여행으로 지치고 연로한 아버지의 목을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울었다. 그 장소가 바로 고센이다. 바로는 목축에 알맞은 이 고센땅에 그들을 거하게 하였다. |
비돔(Pithom)
뜻: 아툼의 집 이집트 동편 텔타지역 라암셋 남동쪽 12.8km 지점 현재의 텔엘 마스쿠타. 아람셋 2세가 하 애굽 고센에 이스라엘을 시켜 세웠던 국고성의 하나(출1:11). 나일강 운하 언덕에 사방을 토성으로 두르고 그 안에 아툼 신당을 세우고 크고 작은 지하실이 있어 곡식을 저장했다. 성벽은 짚 섞인 벽돌로 쌓았고 짚없는 벽공도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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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광야와 오아시스
시내광야
시내광야는 시내산 동쪽에 있는 에르 라하 (er Raha) 평원 지역으로 해발고도 800m 로서 현재 성 캐더린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시내산의 한 줄기이다. 시내광야 주변의 지형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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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산 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 (2,285m), 캐더린산(2,642m), 세발산, 세일산 등으로 해발 2000 m 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뿐이다.
이들 산악과 평야는 화강암, 편마암, 섬록암이 그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성산 (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 경에 세워졌던 조그만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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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은 가데스에서 11일 길(신 1:2)이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7장 30절, 38절, 갈라디아서 4장 24~25절 등 4번 언급되고 있다. 모세 일행은 출애굽 1년 3월 15일에 이곳에 도달한다. 이곳의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은 '산/ 앞에 장막을 치고 거주한다. 이 평원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기간 체류하였다. |
오윤무사 '모세의 우물'이라고 부른다. 수에즈에서 54 Km, 터널에서 홍해변으로 남쪽 26 Km 지점에 있다. 한때 10여개의 우물(샘)과 500여 그루의 종려나무가 자리했던 이곳에는 현재 거의 말라가는 우물 하나가 시멘트로 단장된 가운데 있고, 주위에는 많은 야자수 (성경에는 종려나무로 기록되어 있다) 들이 있다. 그리고 이 종려나무 외의 다른 수종의 나무가 보이는데 이 나무는 상수리과에 해당하는 에셀 나무이다. 초기 여행자들의 기록에는 야자수 숲과 연중 마르지 않는 10여개의 샘이 있는 아름다운 오아시스로 묘사되어 있지만 현재는 그간의 중동전 등으로 파괴되어 그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1798년 12월 하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은 이집트 원정 과정 중 수에즈에 머무는 동안 이곳을 방문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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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에서 시내반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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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하였다.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 Lakes)를 거쳐 부바스티스 (Bubast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백 여년 동안 사용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기되었다. |
1798년 나폴레옹이 그 유적을 발견하고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므로써 훌륭한 통상로를 개척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새 운하의 건설공사는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 에 의해 1859년 시작되었다. 그는 토목기사로서의 교육은 받지 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이 운하건설에 대한 집념을 품어 왔었다. |
시나이 반도
시나이 반도는 6만2천 ㎢ 크기의 삼각형 모양의 대륙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학적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남은 홍해, 동은 아카바만 (평균 깊이 1,850 ㎞). 서는 수에즈만 (평균 깊이 110 m), 북은 지중해로 둘러 쌓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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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는 기후가 온화하며 평균 강우량 150㎜에 이르고, 비옥한 계곡과 오아시스가 많이 있는 남부는 평균 강우량이 60㎜ 정도이다.
현재 시나이 반도에는 25만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약 60%가 아랍계열의 유목민인 베두윈 족이다. 이들 베두윈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좇아 물과 꼴을 찾아서 광야를 이동하고 있으며, 대추야자, 올리브, 귀리등을 재배하여, 식량과 가축들의 사료로 쓰기도 한다. 이들을 규제하는 법은 이집트 국법이라기 보다, 그들만의 부족법이다. 이들은 정착을 위한 농경이나 집을 짓지 않으며, 임시 거주처는 야자수잎 등으로 만들어 지는데 물론 지붕없는 구조로 지어진다. 엘 아이리쉬 지역이나 바란 오아시스 지역의 유목민들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반 유목민 형태를 지니고 있다. 시나이 반도의 여기저기에서 중동전의 전흔을 찾아볼 수 있는데, 수에즈 운하 근처의 높은 모래 둔덕들은 군용 참호를 만들었던 자리들이다. 이 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집트와 터키가 다투었고, 중동전 과정에서는 이스라엘에 점령되기도 했다. 1982년 이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반환하였고, 1988년 이후로 이집트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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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토르신전과 시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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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르
'호루스의 집'이라는 의미의 하트-호루스(Hat-Hor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암소, 또는 '뿔의 관'을 쓴 여성의 모습을 한 사랑의 여신으로, 행복, 무용, 음악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하토르가 일곱이나 나타나 아이의 장래를 정하였습니다.
이 여신은 룩소르의 하쳅수트신전이나 아부심벨의 하토르신전에서처럼 기둥머리의 장식에 도 잘 이용되고 있습니다. '라의 딸', '하늘의 숙녀'등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집트 파라오들의 어머니 신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
시내산(Mt. Sinai)
성경에서 호렙산이라고 하는 시내산은 시나이반도 남쪽의 황량한 사막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화강암의 바위산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밑에서 일년이상 진을 치고 지내면서(출 19:1; 신 4:10)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 시내산은 여러 개의 주봉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주봉 가운데 하나인 '게벨무사' 곧 '모세의 산'은 그 높이가 2244m 이다. 스에즈운하에서 약 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시내산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50여일 동안 여행한 후에 도착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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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세기경부터 게벨무사는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언급한 시내산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전승이 형성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1) 초기 전승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출발지점과 이 산 사이의 적절한 거리 관계; (3) 이 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의 열 하룻길이라는 거리(신 1:2); (4)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시간 거주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내산 북쪽에 위치한 400에이커 규모의 거대한 평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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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내산이 게벨무사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주장들이 그 동안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었다. 유세비유스를 비롯한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시내산이 게벨무사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 에 있는 '게벨 세르발' 이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학자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서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벨 할랄'이 시내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혹은 시내산이 시나이반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홍해 건너편의 사우디아라비아반도 내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시내산 정상에는 4세기경에 처음으로 기념교회가 지어졌다. 현재 시내산 정상에 남아있는 교회건물은 1934년에 재건한 것으로서 일명 '삼위일체 기념교회'라고 부른다. 시내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 중간쯤에는 아론과 장로들이 모세를 기다렸던 곳으로 알려진 장소가 있는데(출 24:1-2), 이곳에서 아합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피신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왕상 19:8-9) |
*성카타린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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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캐더린 수도원
4세기 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되고 순교를 하게 된다.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 |
이 사건 이후 시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 330년에 헬레나 모후가 불붙는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짓는다.
4세기 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고 5세기 중엽에는 시나이 교구가 성립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요새화된 장방형의 수도원을 건설 하였다. 이 수도원이 완성 된 것은 A.D. 557년 이다. 7세기 때 아랍인들이 점령을 해서 수도사들이 30명 까지 줄어들었다가 수도원장이 모하메드에게 수도원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였고 모하메드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십자군들이 등장함에 따라 수도원은 서방세계의 기독교와 아랍 지역의 모슬렘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197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 했을 때도 수도원은 보호 되었다.
이곳은 또한 이콘이라고 불리우는 목판 성화의 보고이며 2000여 개가 넘는 이콘들이 보관 되어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 내에 있는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주후 6세기 중엽에 건설 되었다. 이 교회로 들어가는 나무 장식 문은 건립 당시 만든 문으로써 1400년 이상 된 문이다. 교회 안에는 12기둥이 있으며 이것은 12 달을 의미한다. 기둥 위에는 그 달의 성자 이콘이 있다.
이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떨기나무의 기념 에배당이 있고 이곳은 지금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나타낸 교회 전단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왼쪽부터 엘리야, 요한,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 둘레에는 12제자, 12예언자, 건축 당시의 수도원장 롱지너스, 집사 요한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둘러져 있다. 이 교회 근처의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종류로써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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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에서 마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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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Petra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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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
아르논(Arnon)
암만에서 왕의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84㎞ 되는 지점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 이곳은 고대 모압과 아모리인의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던 곳이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을 경유하였으며, 통일 왕국에서 분열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다. 아합왕 이후에 모압은 아르논 이북을 다시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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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아랍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에는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 이라는 의미의 '엘 무집' 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계곡 기슭에는 다리가 놓여 있는데, 다리 서쪽에는 로마시대에 놓았던 다리 흔적이 남아 있다. 폭 4㎞, 깊이 400m~1km 정도의 이 골짜기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내려갈 때는 거의 9㎞ 가까이를, 올라갈 때는 거의 11㎞를 곧바로 올라가는 지형으로 되어 있으며, 지세가 가파르고 골짜기가 깊어 천연적인 경계선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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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바 / Madaba
마다바는 암만에서 30㎞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성경에 메드바로 일컬어지는 도시로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이 정복한 도시였다. (민 21:30, 대하 19:7, 사 15:2)
다윗 왕이 암몬을 정벌할 때에 메드바에서의 전쟁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 있으며, (대상 19:7)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도 9세기 후반에 이 도시가 모압에 속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
그리고 후기 성경 자료에서도 메드바는 모압의 도시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167년 마카비 전쟁 당시 '잠브리의 아들들' 이 성에서 나와 유다 마카비의 형제 요하난과 더불어 전투를 벌여 요하난을 전사케한 사실이 있으며, 후에 이곳은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오랫동안 포위당한 끝에 정복되었다. 이후 알렉산더 야나이의 치세 기간에는 그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그 후 힐카누스 2세는 자기의 형 아리스토불러스와의 전쟁 때 이 도시를 나바테안 왕국의 수도 페트라의 아레타스왕으로 하여금 다시 되찾아 주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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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스본에서 마케루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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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반(Hisban) : 헤스본 (Heshbon)
히스반은 암만에서 19㎞ 떨어진 곳으로, 고대 아모리왕 시혼의 수도였던 헤스본 유적지로 '책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원래 모압의 성읍이었으나,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으로부터 빼앗았다. 오늘날의 자그마한 히스반 마을이 고대 헤스본 도시 지역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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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은 이곳을 요새화 시켰고, 후기 로마시대에는 에스부스(Esbus)라 불리는 번성한 성읍이 되었다가 후에 요르단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에는 주교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로마시대의 유적들은 폐허화된 상태로 마을의 북쪽의 왼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발굴작업은 1967년 여름에 계획되었다가 6일 전쟁의 여파로 연기되었으며, 1968년에 Siegfried H.Horn의 지도하에 진행되었다. 이후에 발굴은 계속되었으며, 발굴 결과의 하나로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아 7:4)에서 언급하는 유적들이 드러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철기 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기도 하였으며, 로마시대를 비롯한 여러 시대의 층이 발굴되었다.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랍시대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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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루스(Machaerus)
이 지역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B.C.)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는 고대 마케루스(Machaerus) 궁전 지역이다. 건축 광으로 알려진 헤롯 대왕에 의하여 그의 여름 궁전으로 재건되었고,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가 이 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에도 헤롯 안디바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주후 41년경에는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후에 그의 머리를 자른 곳으로도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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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나이가 늦도록 아이가 없이 지내는 중에도 주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의롭게 살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들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회개를 선포하며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요단강에서 회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성경에 따르면 헤롯 안디바가 그와 결혼했던 나바테 왕국 아레타스 4세의 딸을 버리고 그의 이복 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다시 결혼을 하자, 세례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의 신앙관에 배치되는 왕의 행동을 혹독하게 비판을 하여, 헤롯 안디바의 미움을 샀을 뿐 아니라, 왕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주후 76년 유대인 반란 이후에 로마는 이곳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죽였고, 이후에 폐허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의 발굴 결과, 헤롯의 궁전 터와 성채의 흔적들이 발굴되었으며, 헤롯 당시에 건설했던 석조 계단의 흔적과 세례 요한이 1년 가까이 갇혀 지냈던 동굴 감옥이 발견되었다. 이 동굴은 꽤 깊은 동굴로 그 입구에는 당시 문을 걸어 잠그던 돌쩌귀를 해 박은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
* 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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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Amman) : 랍바 암만 (Rabbath Amman)
암만은 현대의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까스르 라가단 : Qasr Raghadan)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고대 근동의 주요한 고대도시의 하나이다.
구약시대 '암몬의 랍바 성읍(신 3:11)'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랍바' 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 란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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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랍바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암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였다. 랍바를 중심으로 했던 암몬 왕국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다. 두 나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 4백년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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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은 롯의 후손(창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민 21:24-35, 신 2:19-37) 이 시기에 암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 (민 21 :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갓 자손에게 분배하였다. (수 13: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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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사사시대 동안(1,200 - 1.025 B.C.) 암몬 족속들은 모압의 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
* 사해변과 숙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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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Dead Sea)
아랍어로 '롯의 바다'(Sea of Lot)라고 불리는 사해는 길이 75㎞, 폭 6~16㎞ 정도되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해면하 약 400m)이다. 일반 바다의 염분 함유율이 4~8% 인데 반해 사해바다는 염분 함유율이 28~33%가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성경에서는 '소금바다' 즉 '염해' 로 언급되며, 동쪽의 바다라 하여 '동해', 또는 '아라바해' 로도 불렸다. 동물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사해(Dead Sea)' 라고 불리고 있다. 염화 마그네슘, 나트륨, 칼슘, 포타슘, 브로마이드, 깁슘 등 풍부한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바닷물이 증발하므로 광물질만 농축된다. |
이 광물질을 이용한 사해 화장품은 요르단의 또다른 자랑거리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나타나는 욥의 고향인 '동방'을 이 지역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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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데이르 알라(Tell Deir Allah) - 숙곳 (Succoth)
창세기 33:16,17에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뒤에 쉬었던 장소로, 여호수아에서는 헤스본 왕 시혼의 한 성읍인 숙곳과 사본으로 언급(수 13:27) 되는 지역이다. 또한 사사기 8:4-9에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자 삼백명을 거부한 장소로 숙곳과 브누엘이 등장하고 있다. 해면하 202m되는 곳에 위치하며 바로 옆으로 자르까강 (얍복강) 이 흐르고 있어 토질이 비옥한 삼각주 지역의 특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집(수도원) 언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텔과 가까운 곳에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해 놓은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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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고고학적 탐사 결과 기원전 1600~1200년 사이의 거대한 규모를 지닌 신전이 발굴되기도 하였으며, 금속병용기 시대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중기 청동기 때에는 높이 2.5m에 이르는 흙벽돌 성을 짓고 몇 개의 금물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청동 조각과 신전이 발굴되었고, 이곳에서 '타 우세르트(Ta-Usert, 이집트 왕의 모친의 호칭)'가 새겨진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는 한 창고에서 12개의 직사각형의 서판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역에 있었던 불과 지진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가 마감된 것으로 보인다.
철기 시대 1기의 반세기 동안에는 대장장이들이 이 지역을 사용하였다. 토질의 특성상 주형을 만들기 위한 진흙과 땔감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창고에서 12개의 저장용 항아리가 발견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주거 형태를 보여준다. 철기 시대 제 2기의(기원전 800년경) 대부분의 방에서 여러 가지 토기와 동물들의 배설물이 발견되었다.
몇 개의 벽이 5~7mm 정도의 얇은 석회로 발라져 있었는데, 이중 한 곳에서 '신들의 예언자 브올의 아들 발람'에 관계된 글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종교적 기능을 가졌던 장소로 보이며 기록된 아람어는 지방어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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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엣드라(Bab edh Dhra) : 소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된 유적지로 소돔의 후보 지역이다. 성벽을 갖추었던 전형적인 고대 도시로, 그 건설 시기는 기원전 2600년 경으로 보고 있다. 두터운 진흙 벽돌 및 신전의 자취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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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 누메이라(Tell Numeira) : 고모라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고모라 지역으로 지목받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이다.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던 고대 도시이며 기원전 2350년경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흙 벽돌로 쌓은 성벽의 흔적과 돌 무더기가 남아 있으며 텔의 남쪽 200m지점에는 누메이라 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망대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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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마스커스와 숙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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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시리아의 수도. 인구 약 154만 9천(1994). 아랍어로는 디마시크(Dimashq)라고 한다. 시리아 사막 중앙부에 있는 오아시스에 자리잡고 있다. 안티레바논 산맥 동쪽 기슭, 시리아 고원을 흐르는 바라다강이 형성한 높이 700m의 선상지에 위치한다. 하란이나 여리고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요세푸스는 노아의 손자인 아람의 아들 우스가 처음 건설했다고 하고, 모슬렘들은 니므롯이 아브라함에게 준 종 DEMSCHAK가 건설했다고 한다. |
사도바울교회 (ST. PAUL'S CHAPEL)
바울이 성벽에서 유대인들을 피해 바구니를 타고 탈출했다는 곳에 세운 교회. 성벽을 새로 복원하고 그 성벽에 십자가와 바구니를 표시해 두었으며, 성벽 안에 기념 교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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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미라
"서아시아의 시리아 사막 가운데에 있는 폐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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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서는 타데몰르라는 이름으로 솔로몬왕이 세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도시는 비옥한 삼각지대에 위치한 오아시스의 하나이며, 동서 교통로가 교차하는 교역의 요충지로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파르티아 사산왕조 페르시아시대에는, 그 국경에 가까운 로마제국 내의 시리아의 한 왕국으로서 정치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다. 팔미라의 번영이 지속된 것은 4세기까지이며, 그후는 당시의 세계무역로의 변화와 근동지방의 일반적 쇠망이 작용하여 갑작스럽게 폐허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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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팔미라유적 발굴조사단은 '지중(地中) 레이더'라는 최신기술을 이용한 탐사로 '동남(東南) 묘지'라는 A∼E까지의 5개 지하묘를 발굴하였다. 널방[墓室]의 전체 길이는 약 18m이고, 돌계단을 이용하여 널에 이르는 길이는 30m나 된다. 널방 제일 안쪽에는 이 무덤을 건조한 사람과 그 가족의 돌널 3개가 ㄷ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돌널 뚜껑 위에는 가족의 연회를 나타내는 등신대(等身大)의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무덤은 128년에 건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
* 유프라테스강
아랍어로는 알푸라트(Al-Furt), 터키어로는 피라트(Firat)라고 한다. 길이 2,700km. 티그리스강과 병칭(竝稱)되며, 주로 시리아와 이라크를 흐른다. 소아시아(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산지에서 발원하며, 카라강과 무라트강이 합류하여 유프라테스 본류를 이루고 시리아로 흘러든다. 여기서부터 방향을 남동으로 바꾼 다음 곡 류하면서 시리아 사막의 북부를 횡단하고 이라크에 들어가며, 티그리스강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흐른다. 이라크에서는 이들 강 사이의 길쭉한 지역을 알자지라(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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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라테스강은 바그다드 부근에서 티그리스강과 가장 가까워지며, 거기서부터 다시 거리가 멀어진다. 안나시리아를 지나면서부터 물길은 많은 분류를 형성한 후 광대한 하마르호(湖)에 이른다. 이곳은 갈대가 우거진 얕은 습지대이며, 여기서 빠져나와 쿠르나에서 티그리스강과 합류한 다음 샤트알아랍강이 되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든다. 터키 국경에서 바그다드 부근까지는 낙차가 커서 1년 내내 유속(流速)이 빠르고 다량의 침전물을 나르지만, 그 이남에서는 땅이 매우 저평하고 흐름도 완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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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는 9∼10월에 최저에 이르며, 봄에는 아나톨리아 산지의 눈이 녹아 홍수가 나고 5월에 최고수위에 이른다. 그러나 전체적인 수량은 티그리스강에 비하여 적다.
유프라테스 하곡(河谷)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평야는 고대에는 광범한 관개로 바빌로니아·아시리아·카르디아 등의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이라크에서는 닌디아의 관개공사(1913∼1922)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무사이브 계획(1956) 등을 실시하여 범람의 억제와 경지확장에 힘썼다. 이 강의 물로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는 쌀 ·대추야자 등이 재배되며, 터키에서는 이를 발전용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교통로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나, 히트부터 하류는 작은 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유프라테스강 유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꽃피던 지역인만큼 에르진잔(터키), 라카 ·디르에즈조르(시리아), 안나자프 ·안나시리야(이라크) 등을 비롯하여 고대도시의 유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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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포와 하맛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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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포 [ALLEPO]
알레포는 시리아의 크리스천 센타로서 안디옥의 지위를 물려받아 비록 교세가 미약하다고는 하지만 크리스천 각 교파의 교회 건물들이 모스크와 나란히 서 있는 도시로 안디옥의 대주교로 봉직했던 성 크리소스톰이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리스 정교회의 기본 교의를 마련했던 곳이다. |
5세기 주상 성자 시므온이 알레포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칼라트 사마안에서 높이 60미터 높이의 꼭대기에 만든 작은 방에서 37년간 고행에 정진하여 쌓은 지혜와 신심으로 사해에 이름을 떨치고 갑바도기아 수도원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그의 제자였던 성 제롬은 알레포 인근 칼키스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 꿈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시로 베들레헴 탄생 교회의 지하 서고에 파묻혀 성서의 라틴어 번역에 몰두, 끝내 그 사역을 완수함으로 기독교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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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포의 즈데이다 지역은 지금도 크리스천들이 몰려 사는 지역으로,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카톨릭은 물론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레바논 마로나이트 교회의 건물들이 모스크 숫자보다 더 많고, 사회주의 나라 시리아, 모슬렘의 나라 시리아에서 교회 지붕 위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하마
인구 약 27만 3천(1994). 알레포 남쪽 120km 지점에 있다. 히타이트 시대에 비롯된 옛 도시이며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시리아 농업의 중심지이며 교역 도시이다. 제분 ·양모·면방적 등이 발달하였다. 중세부터 관개에 사용된 거대한 수차(水車)는 특이한 경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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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맛트와 카데슈
시리아 지역의 마지막 유적지로 하맛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거대한 성체인 크락 데 슈발리에 : 십자군 시대의 요새가 보인다. 이 요새는 동쪽의 광야, 지중해로 넘어가는 가운데에 있다. 가장 최근까지 중요한 군주의 요새로 사용됐으며 20~30년 전 까지 사람들이 살았다. 이 성채의 특징은 내성, 외성이 그대로 이어져 있고, 언덕에 있어 물을 가져올 수 없어, 성밖에서 물을 대주는 수로가 있다.
이 유적 밖에는 카데쉬 : 텔 네비 멘트가 있다. 서기전 1280년 경, 이집트의 람세스와 힛타이트가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카데스 전투는 이집트 신전벽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시리아의 십자군 시대의 중요한 요새로 잘 알려져 있다.
* 바그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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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인구는 440만 명(1996)이다. 시가지는 굽이져 흐르는 티그리스강 (江) 연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강 양안에 걸친 시가지 중 좌안(동안)쪽이 중심부를 이룬다. 라시드가로(街路)는 전통적인 상업중심지로 이라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그 동쪽을 거의 병행하여 뻗은 가지가로는 바자르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그 부근을 중심으로 하여 파이살교(橋) 북쪽은 구시가, 남쪽은 신시가의 양상을 보인다. |
북부에는 옛 왕궁, 이라크박물관, 바그다드대학 및 카지마인의 회교 대사원 등이 있고 남부에는 민족해방 모뉴먼트, 유럽풍의 레스토랑·호텔, 신주택가 등이 있다. 우안(서안)은 인구는 적으나 공항·서부역(驛)·방송국·관청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종래 융단·모직물·견직물(絹織物) 등 직물공업과 약간의 소규모 공업이 운영되었으나, 공업의 근대화에 주력하여 연간 100만 t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정유공장이 세워졌다. 국내 철도교통의 기점이자 요충이고, 또 북부의 모술을 거쳐 시리아·터키에 이르는 바그다드 철도의 요지이다. 또 요르단·시리아·이란을 잇는 간선도로의 결절점(結節點)이고, 카이로·베이루트와 더불어 중근동(中近東)을 통과하는 국제항공로의 중계지이기도 하다. |
* 바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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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성 발굴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벨론 성이 현대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1899년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간 로버트 콜더베이 (Robert Koldewey)교수는 독일 동방학회의 사업으로 바벨론 성을 발굴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13:20-21, 14:1; 렘 51:37)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
"오직 들짐승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며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사 13: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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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결과 바벨론 성의 규모는 내외 전장(全長)이 15마일 정도이고, 느부갓네살 이후의 전 도성의 둘레는 하궁에서 옛 왕궁까지 유프라테스강 전면을 포함해서 10마일 정도였다. 강 동편의 내성을 두른 2중 성벽은 바깥 것이 22피트, 안의 것은 12피트였다. 바벨론 전 성읍을 바깥으로 두른 성벽 역시 2중 성벽인데 바깥 것은 26피트, 안의 것은 24피트였다. 폐허 중에 제일 높은 부분이 이슈타 게이트로서 48피트 가량이다. 본래 성안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은 300피트 가량의 신전 탑 '에테메난키'(Etemenanki)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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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폐허에서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직위가 찍혀진 평방 12인 치 반의 벽돌이 발굴되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주문(主門)인 이슈타 게이트인데 그 성문의 벽돌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용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뒷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이 문각되어 있어 다니엘 7장의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다니엘의 세 동무가 던져졌던 풀무는 벽돌 굽는 가마였다. 원추형으로 생긴 이 가마속에 진튊 벽돌을 쌓고 원유와 짚 또는 겨를 섞어 연료로 사용했다. 다니엘 3장에서 분노한 왕이 7배나 뜨겁게 하라던 것은 원유가 섞인 연료를 7배만 더 넣으면 된다. 또 우상이 세워졌던 '두라 평지'(단 3:1)는 지금의 힐라 언덕 5마일 아래에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들어가는 한 지류의 입구에 있는 '나르 두라'(Nahr Dura)이다.
다니엘 6장의 사자굴은 고대 제국의 왕들이 스포츠로 사자 사냥을 위하여 사자를 가둬 두었던 곳이다. 이와 같은 사자굴은 앗시리아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사자굴을 인봉할 때는 그 입구를 돌로 맞고 그 둘레를 젖은 석회로 바른 뒤 원통 모양으로 문각된 도장을 굴려서 직사각형의 인상(印象)을 남겨 아무도 뜯지 못하게 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이 마지막 잔치를 했던 큰 홀은 느부갓네살이 지은 남궁에 있다. 그곳 중앙에는 보좌가 있는 넓은 방이 있는데 길이가 173피트, 넓이 57피트, 높이 66피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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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의 남부지역
바스라
인구 약65만(1990). 이라크 제2의 도시이자 첫째가는 무역항이 다. 샤트알아랍강의 서쪽 연안, 페르시아만(灣)의 외항(外港) 파우에서 120km 떨어져 있다. 서쪽 교외에 있는 주바이르읍(邑) 근처는 중세의 바스라가 번창했던 곳이다.
638년경에 제2대 칼리프인 오마르의 명령으로 동방경략(東方經略)의 군사기지로서 건설되었는데, 8~9세기 전반경에 페르시아만의 최대 무역항이 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물자의 대집산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또한 학문과 문예의 중심이 되어, 이슬람문화의 발전을 위해 큰몫을 하였다. 그러나 11세기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14세기 중엽에는 시가의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현재의 바스라 시가는 옛 시가의 동쪽 약 20km 지점에 있다.
오늘날의 바스라는 기름진 농촌지대를 주변에 두고, 세계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대추야자를 비롯하여 보리·목화·양모·피혁 등을 집산·수출한다. 1948년에 주바이르에서 풍부한 유전이 발견되었으며, 3년 후부터는 석유수출도 시작되어 공업도시 ·항구도시로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바스라의 정유소는 이란-이라크전쟁(1980~1988)으로 파괴되고, 시가지의 건물도 이란군의 포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한편 미국과 이라크 간의 걸프전쟁이 한창이던 1991년 2월, 다국적군 제7군단이 이라크 공화국수비대를 대패시킨 곳이기도 하다.
* 이라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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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Baghdad]
인구는 440만 명(1996)이다. 시가지는 굽이져 흐르는 티그리스강 (江) 연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강 양안에 걸친 시가지 중 좌안(동안)쪽이 중심부를 이룬다. 라시드가로(街路)는 전통적인 상업중심지로 이라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그 동쪽을 거의 병행하여 뻗은 가지가로는 바자르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그 부근을 중심으로 하여 파이살교(橋) 북쪽은 구시가, 남쪽은 신시가의 양상을 보인다. |
북부에는 옛 왕궁, 이라크박물관, 바그다드대학 및 카지마인의 회교 대사원 등이 있고 남부에는 민족해방 모뉴먼트, 유럽풍의 레스토랑·호텔, 신주택가 등이 있다. 우안(서안)은 인구는 적으나 공항·서부역(驛)·방송국·관청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종래 융단·모직물·견직물(絹織物) 등 직물공업과 약간의 소규모 공업이 운영되었으나, 공업의 근대화에 주력하여 연간 100만 t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정유공장이 세워졌다. 국내 철도교통의 기점이자 요충이고, 또 북부의 모술을 거쳐 시리아·터키에 이르는 바그다드 철도의 요지이다. 또 요르단·시리아·이란을 잇는 간선도로의 결절점(結節點)이고, 카이로·베이루트와 더불어 중근동(中近東)을 통과하는 국제항공로의 중계지이기도 하다. |
*우르.사마라.앗수르.하트라 바벨론의 동남 225km 지점 유브라데강의 서쪽, 현재의 델엘므갓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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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 - 메소포다미아 갈대아인의 성읍
아브라함이 일시 이곳에서 살다가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정처없이 떠났다(창11:28, 31, 15:7, 느9:7,행7:4, 히11:8). 고대에는 번영한 도시로 달의신 신당이 있었다.
성서에는 갈대아 우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족장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서술되고 있다(창11:28,31,15:7). 우르의 폐허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 있다. 고대 수메르의 도시로 후에는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았다. |
영국인 올리(1880-1960)년경의 본격적인 발굴에 의해, 이곳에서 BC 4000년기에 우바이드 문화가 번창했으며, 그 중기에 대홍수가 있었음이 2.4m에 달하는 점토층에서 나타났다. 평탄한 사막 가운데 우뚝 세워져 있는 지구랏은 신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가 복원 건축한 것이다.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의 원형이었던 바빌로니아의 지구갓도 여기에서 그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최근에 이 지구랏의 계단이 복원되었다.
제1층만이 복원된 우르의 지구랏 정면 계단은 불에 구운 벽돌을 아스팔트로 접착한 것이다. 벽돌색은 빨강,푸른색 계통과 회색 등 여러 색을 내고 있다. 건축 당시의 벽돌이 아직도 남아 있고 우르 남무야와 증축자 나보니두스의 왕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단은 100단으로 사진 정상의 1층 상단에서 좌우의 계단이 만난다. 이 위에 3층의 건물이 있었다. 정면 계단은 신과 왕만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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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 [Assyria]
북부 이라크 티그리스 강 기슭 고대 메소보다미아 왕국들 중의 하나로 남방 왕국인 바벨로니아가 바그다드와 페르샤만 사이의 평지를 차지한 반면에 앗수르는 대체로 서쪽으로 평지를 차지한 반면에 앗수르는 대체로 서쪽으로 시리아 사막과 남쪽으로 베벨로니아와 북쪽과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및 페르샤 산과 접경을 이루었다. |
앗수르는 셈의 아들로(대상 1:17) 족장 시대 이전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벨론 북쪽에 고대 왕국을 세우고 중동 지방에서 정치적인 활약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앗수르의 세력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 시대에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그 후 앗수르는 수도 니느웨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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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던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여 자유를 찾아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재건을 시도한 디글랏 빌레셋 3세와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의 공격으로,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그의 속국이 되었고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왕하 17:6).
앗수르의 세력은 주전 8세기에 황금 시대를 이루었으나 그 후 주전 612년에 신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동시에 멸망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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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라 [Hatra]
1세기경 종교도시로서 발족하여 훗날 군사기지와 대상(隊商)들의 휴식지 역할도 하였으며, 두 번에 걸친 로마군의 포위에도 견디어냈으나, 3세기 중엽 사산왕조의 샤푸르 1세(世)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성지(城址)는 대소(大小) 2중 성벽과 도랑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중앙의 직사각형 성역(聖域)에는 태양신(太陽神) 샤마쉬의 대신전(大神殿) 터가 있다. 또, 성벽의 주변에는 1951년 이래 이라크 고고국(考古局)에 의해 발굴된 9개의 신전 ·묘지 ·거주구(居住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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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드문 절석(切石)으로 구축되어 있고, 아치를 사용한 이반(ivan)형식, 궁륭식(穹式)의 예도 있으며, 많은 대리석과 석회암 조각이 출토 되었다. 건축·조각에서는 고대 오리엔트(파르티아)와 헬레니즘(로마)의 전통이 함께 융합되어 있는 점에서 팔미라 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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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므루드
이라크의 중요한 유적지로 앗시리아의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앗시리아의 두번째 수도이다. 모세에서 부터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함.
니무르드의 앗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은 유서가 깊다. 8천 미터의 궁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있다. 현재는 복원된 이곳은 벽돌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상아조각들이 성서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메소포타미아 유물중 가장 먼저 발견되어 더욱 가치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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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느웨
뜻:여신을 의미한다 앗수르 제국의 최후의 동방 수도로 티그리스 강에서 동쪽으로 0.8km 떨어진곳.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 현재의 바그다드로부터 북으로 약 40km 떨어진 모슬 대안에 있다. 모슬은 티그리스강의 서안에 있는데 니느웨의 유적은 동안에 있다.
니느웨의 주위는 장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길이는 10km가 넘는다. 내부에는 크고 작은 2개의 구릉이 있다. 니느웨는 거대한 성읍으로 그 주위를 도는데만도 3일이 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욘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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