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朝鮮 第25代王 哲宗大王 家系.
조선 제25대왕 철종대왕 李昪이변은
1831年 純祖31年 辛卯年 6月 17日 丁酉日에
한양 경행방 사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도세자 손자인 전계군이고
모친은 증 영의정 염성화의 여식 용성부대부인 용성 염씨이다.
사도세자의 서장자인 은언군이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을 두었고
그 3남 전계군도 회평군 영평군 그리고 서자 덕완군을 두었다
덕완군이 철종대왕이다
철종대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이원범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인 1786年 正祖10年에
부친 전계군이 2세에 일가가 유리 되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도승지 홍국영에 의해
맏형 상계군이 이미 죽은 정조 후궁 원빈 홍씨
(홍국영 여동생)의 양자로 입적 되었으나
곧 홍국영이 즉시 패하고 그 잔당에 의해 반역죄로
모함 받고 억울하게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가 자결했는데
상계군의 부친인 은언군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 쳤다.
욕심 많은 은언군이 자기가 왕이 되고자 아들 상계군을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에 정조대왕이 특별히 배려하여
목숨을 건진 은언군이 가족과 헤어져 강화도로 홀로
이주 하게 되었다. 그 때 어려움에 처한 한양에 남은
그 일가족 중 부인들이 당시 은밀하게 전파 되던
천주교를 접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여전도사 강완숙이 폐궁에 사는 이들에게
접근하여 포교 하였다.
14년 지나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11세의
어린 순조대왕이 즉위하고
英祖 繼妃 貞純王大妃 경주 김씨가
수렴첨정 할 때 반대파 시파에 천주교인이
많은 것을 이용해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적극
색출하여 처단 하였는데 이 때 철종대왕의
조모 진천 송씨 즉 은언군 부인 세례명
마리아와 은언군 며느리 즉 철종의 큰어머니
신씨(죽은 상계군 부인 세례명 마리아 )등이
중국인 주문모 신부로 부터 세례 받은 신자로
들통나 신유년 천주교 박해 사건 때 순교하자
다시 그 집안 가장인 은언군도 처벌 하라는
상소가 빗발쳐 결국은 강화도에 간지 15년 만에
강화 배소에서 사사 되고 말았다.
이때가 純祖1年 辛酉年 1801年으로
전계대원군이 17世 였다.
그로부터 30년 뒤 純祖31年 辛卯年 1831年에
늦동이 철종대왕이 태어났다
1841年 憲宗7年에 부친 전계대원군이 졸하였을 때
철종대왕이 11 世 였고 이미 그 전에 생모 염씨도
잃었으므로 부친 사후엔 전계대원군의 정실인
완양대부인 최씨와 이복 형 둘의 틈바구니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 철종이 14세 되던 해 1844年 憲宗10年
맏형 이원경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급 무부인 민진용
일당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는 사건이 있어 억울하게 사사
되고 말았다.
그 일로 16世된 중형과 함께 이원범 일가족은 교동으로
쫓겨났다 다시 강화도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들은 왕실의 버림을 받고 원조 없이 살다보니
학업은커녕 가난한 농부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며
지냈고 주민들중엔 행패 부리는 자도 있었고
관리는 아량과 재량을 베풀 줄 모르고 법대로
통제하여 설움과 고통을 겪었다.
이원범의 조부인 은언군 즉 정조대왕의
이복 아우는 강화도 유배시 툭하면 한양도
다녀갔다는 등 소문이 나돌 정도로 관리가
느슨 했다. 특별히 거처등을 챙기며 배려하는
정조대왕의 마음을 잘 읽었기 때문에 거의 관리
통제를 안 했기 때문이다.
은언군은 강화도를 탈출 했다 붙들려 재안치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이원범 형제일가가 강화도로 간지 5년 뒤
1849年 6月6日 조선 제24대왕 헌종대왕이 후사
없이 23世로 승하하는 참담한 일이 일어났다.
왕에게 아들이 없을 땐 동생이나 조카도 왕위를
이을 수 있었으나 헌종대왕의 6촌 이내 친족이
한 명도 생존해 있지 않았다.
당시 생존 해 있던 純祖正妃 純元王大妃 安東 金氏가
먼저 강화도에 있는 영조대왕의 혈육 이원범을 찾아내
후사로 지목하였다. 안동 김씨가 먼저 손을 써
철종 14년 재위 내내 다시 안동 김씨
(철종비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세상이 되어
외척의 세도가 극에 달했다.
그 후 절취부심 하던 헌종대왕의 외가 풍양 조씨는
철종이 승하하자 먼저 손을 써 고종을 보위에 올려
안동 김씨시대를 종식 시켰다
그런데 당시 철종은 헌종대왕의 7 촌 뻘 아저씨 였으니
종통은 무너진 거나 다름없어 듣는 백성들이
탄식하며 한심 하게 여겼다
조선에서 왕실의 존엄성과 권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였다
헌종 대왕이 위중해지자 한양을 서둘러 떠난
영의정 정원용 일행이 강화도 이원범의 집에
1849年 6月5日 당도 했다 ( 6월6일승하 )
이원범의 가족은 그들로 부터 난데없이
이원범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고지를 받았다.
이원범은 산에 나무하러 가고 없었다
이원범은 산 위에서 끝이 안보이도록 길게 늘어선
행렬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자신을 체포 하러 온 사람들로 알고
산 속으로 숨어서 나오지 않아 시간이 지체 되므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부탁을 받고
그동안 호의를 베푼 양순이라는 처녀가
숨은 곳을 잘 알아 간신히 설득하여 이원범이
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원범에게 영의정을 비롯하여
모두가 큰 절을 올려 예식을 행하고 한 참을 달래고
설득한 끝에 서둘러 강화도를 출발 했다.
이 날 이원범 일가나 강화도민이 겪고 목격한 일은 충격
그 자체 였다.
강화도를 건너 김포 통진나루에 닿은 이원범은
잠시만요 하더니 연에서 내려 강화도를 바라 보고
서서 손을 모아 입에 대고
강화도야 잘 있거라
강화도야 잘 있거라 하고 크게 외쳤다
천둥 같은 피를 토하는 절규가 어찌나 컸던지
가마꾼들의 귀청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아직도 오늘 일어난 일이 생시인지 꿈인지
헷갈려 흩어지지 못하고 건너편에 나루에 서서
구경 하던 강화도 주민들은 그 후 그 절규를 ( 메아리 )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말하곤 했다
憲宗의 양자후보 이원범이 한양으로 오는 도중
그 사이에 6月6日 헌종대왕이 승하 했고
6月8日 창덕궁 희정당에서 덕완군으로 봉영식을 올렸고
헌종대왕의 양자가 되어
6月 9日부터 인정문에서 관례를 올리고 거상에 들어갔다.
그 때 까지 이원범으로 살았고 대궐에 들어와 덕완군
에 봉 되고 곧 바로 즉위식을 치른 것이다.
법도대로 26 일간 공무는 중지하고 거상 한 다음부터는
그 동안 학문을 이룬 것이 없으므로 소학부터 강론 받았다.
그 해 가을 10월28일 景陵에 憲宗大王이 묻혔다.
철종대왕은 기우가 엄정하고
콧대가 우뚝하고 용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둘러
볼때 영채가 번득여 위엄 하게 하지 않아도 근엄하였고
살피지 않아도 다 환하게 알고 있었다.
성품이 특별히 관대하고 어질어 강화도에 살 당시
행패 부린 사람과 당시 관리를 처벌 하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새삼 문제 삼아 죄 줄 까닭이 있는가?
반문 하고오히려 업무에 충실했다고 관리를 칭찬 했다.
대궐 내에서도 어지간한 죄는 문제 삼지 않았고
왕비와 함께 성심을 다 하여 웃전에 효도 하여
화락하게 지냈다
한 때 민간에서 자란 경험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어 검소한 생활을 실천 하며 애민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안동 김씨에 의해 보위에 오른 뒤
재위 내내 외척의 세도가 극에 달했으며
정치에 어두웠던 왕은 무력하여
허수아비 같은 존재에 불과 했다.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발생 했으며 천재지변도 잦았다
고통 받고 동요하는 민간에 천주교가 급속히 전래되고
그에 맞서 동학 남학 등 민족 자생 종교가 발생 되었다.
수렴청정 했던 純祖正妃 純元王大妃 安東 金氏는
哲宗8年 1857年 69世로 세상을 떠났다.
철종대왕은 1863年 哲宗14年 癸亥年 12月8日 庚辰日에
창덕궁 정침에서 승하하니 在位 14년이요
수는 33世 였다. 능호는 睿陵이다.
▸哲宗正妃 哲仁王后 安東 金氏.
憲宗3年 1837年 丁酉年 3月23日 庚子日생으로
왕 보다 6세 적다.
1851年 哲宗2年 辛亥年 15世에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 되었다.
말수가 적고 부덕이 높아 칭송 받았다
1857年 哲宗8年 순조비 순원왕대비 안동 김씨가 졸하고
1858年 哲宗9年 戊午年에 10月17日
창덕궁 대조전에서 낳은 원자가
이듬 해 4월23일에 졸 하였다.
철인 왕후 안동 김씨는 철종대왕이 승하하고 18년 지난
1878年 高宗15年 戊寅年 5月 창경궁 양화당에서
42世로 졸 하였다.
▸철종대왕 후궁
1 >귀인 밀양 박씨가 1854年 哲宗5年 7月10日
왕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2 >숙의 온양 방씨가 1854年 哲宗5年 왕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그 후 왕자 하나를 더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옹주 한 명도 일찍 죽었다
3 >귀인 조씨가 哲宗10年과 哲宗12年에
왕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4 >숙의 김씨는 광산 김씨 김치욱의 여식으로
옹주 하나를 낳았지만 역시 양육하지 못했다
5 >숙의 범씨는 나주 범씨 범원식의 여식으로 궁녀 출신인데
1859年 哲宗10年 영순 옹주를 낳아 길렀다.
1863年 철종이 승하하자 두 모녀는 궐 밖 사가로 나가 살았다
1866年 영혜옹주로 개명하고
1872年 高宗9年 4 월에 금릉위 박영효와 혼인 했으나
7月 옹주는 14世로 졸하고 말았다.
그 밖에
궁인 이씨가 아들을 낳았으나 조졸하고
궁인 김씨와 박씨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