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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넘어서
지금까지 서구 사회에서 보수와 급진(혹은 혁명)의 대결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으며 이념적인 면에서 우파와 좌파의 의미도 논의하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갖는 의미, 또한 한국적 보수와 진보의 특성을 살피고 그 문제점도 함께 논의하였다.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사회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다양한 사회적 변화와 국제 사회의 이념적 변화를 잘 따라갈 수 있는 바람직한 구별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특히 우리말의 뉘앙스에 따른 보수와 진보는 의미의 혼동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의 정치적 논쟁은 보수와 진보라는 틀에서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있어서 정책적 논쟁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원화 사회에서 모든 정책은 양분될 수 없으며 이러한 복잡성을 양분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는 논쟁의 핵심을 더욱 복잡하고 애매하게 만들 뿐이다. 이러한 복잡성과 애매성은 일반 국민의 정책적 선택 기준을 어렵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명쾌하지도 않는 구별을 근거로 상대방을 비방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양산함으로써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가적 힘을 필요 없이 소진시키게 할 것이다. 따라서 사안에 따른 구별을 하는 명쾌함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 정책에 있어서 성장 우선을 강조하면, 성장주의자로 그리고 분배 우선을 강조하면 분배주의자로 부르면 된다. 또한 세계화 문제와 관련하여 세계화를 찬성하면 세계화 찬성론자, 그리고 반대하면 반세계화론자라고 부르면 된다. 문화면에 있어서도 외래문화의 개방을 주장하면 문화개방주의자, 그리고 반대하면 반문화개방론자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햇볕정책을 강조하면 말 그대로 햇볕정책론자 그리고 반대하면 상호주의자라고 하면 된다.
외교 정책면에 있어서도 한미동맹을 강조하면, 한미동맹 강조론자, 그리고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면 민족자주론자라고 부르면 된다. 또한 보수나 진보를 떠나 변화의 속도를 강조하면 급진적 변화론자, 점진적 변화를 주장하면 점진적 변화론자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다. 굳이 억지 논리를 세워 모든 정책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시대도 이미 지났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정당 구조도 억지로 보수와 진보 양 진영으로 대별할 필요가 없다. 특히 한국의 정당 구조가 이념 중심으로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야말로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구별이 유효하지 않는 21세기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의미가 없다. 더욱이 다원화 시대에 있어서 국민의 이해가 양분될 수 없는 현실에서 진부한 좌파와 우파의 이념은 정당 구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 정당은 포괄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지 구별 때문에 그 의미마저 애매한 중도 보수 혹은 중도 진보, 그리고 합리적 보수 혹은 건전한 진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차별성도 명쾌하지 않은 정치 세력 간에 권력 투쟁만을 야기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다양한 시민단체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정당의 역할이 감소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정당의 이념적 구별이 아닌 정당의 새로운 역할, 혹은 본질적으로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정치의 위기를 논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 단체의 정치·사회적 역할을 논의하고 정당과 시민단체 간의 협조와 갈등의 문제를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민주 제도의 창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또한 시민단체의 정치 참여가 자기 단체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국민을 선동함으로써 제도권이 무시되고 민중적 집단행동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 등도 새롭게 연구하여 그 해결책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현재와 같은 보수와 진보의 논쟁으로는 21세기의 변화를 분석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벌어지는 현재와 같은 애매한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국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보수와 진보의 진부한 논쟁은 권력 투쟁만을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의 퇴행성을 부추길 뿐이다. 단, 여기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것은 자아이상과 초자아라는 인간 감성의 동적 양상이다. 인간의 무의식적 양대 감성이 존재하는 한 세상을 보는 시각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앞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초자아가 강하면 현실의 변화를 두려워할 것이고 자아이상이 강하면 무엇인가 현실에 불만족을 가지고 변화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념의 갈등과 혁명의 실질적 효력이 감소된 21세기에 있어서 이러한 무의식적 갈등은 '점진적 변화냐 아니면 급진적 변화냐?' 하는 사회 변화의 속도에 따른 갈등으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아이상이 초자아를 완전히 무시했을 때 일어나는 퇴행성이다. 이 경우는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진리로 인식하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진리의 실현이라는 목적에 얽매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퇴행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퇴행성은 현재 우리가 제일의 가치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 된다.
따라서 사회는 이러한 퇴행성을 억제시킬 수 있는 구조적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각 집단과 집단, 집단과 정부, 정당과 정당, 그리고 정당과 정부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의 길이 항상 열려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만이 진리라는 환상 속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퇴행성의 출발은 의사소통의 부재로부터 시작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단기 및 중·장기의 목표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형성되는 것도 갈등의 퇴행성을 줄이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구체적인 국가목표에 대한 동의가 부족하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만을 단순히 국가 이익을 위한다는 애매한 가정 아래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각 정당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자기 당이 집권하였을 때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가에 따른 단기 및 중·장기의 국가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표를 의식한 선거 전략일 뿐, 비현실적인 요소가 너무 많은 것이 오늘날 한국적 정치의 모습이다. 따라서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선거 공약과는 별개의 정책이 나오기 일쑤이다.
또한 국민의 동의가 부족한데도 공약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정책을 강행하려 하기 때문에 퇴행적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각 정당은 세계 문명의 변화에 따른 나름대로의 선진화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국민의 동의를 받는 절차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보다 많은 동의를 얻은 목표가 그 유효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동의가 이루어진 국가의 단기 및 중·장기의 목표가 존재한다면 각 집단의 갈등은 그 목표 실현에 따른 방법으로 그 범위가 좁혀질 것이며 또한 그 논쟁들도 보다 합리성을 띠게 될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어떤 병리현상을 치료하는 데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제도를 개선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국민의 의식을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이를 두고 사회 연구에 있어서는 '구조(structure)의 변화냐 혹은 문화(culture)의 변화냐?'라는 문제로 논의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구조를 변화시키면 자연히 문화는 그 구조에 따라 변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구조의 변화를 역설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들은 공산혁명 이후 공산 체제의 구조 변화를 통해 자연히 사회주의 문화는 성립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구조 강조의 입장이다.
그런데 다른 편에서는 구조보다는 문화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 예는 아무리 같은 공산 사회라 할지라도 그 국가의 문화에 따라 그 체제의 속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때 정치학에서는 공산국가 체제의 속성을 비교하는 소위 '비교공산주의 체제'라는 연구 주제가 있기도 하였다. 따지고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도 그 나라의 문화적 속성으로 인해 그 체제의 특성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란 제도의 개선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소위 문화의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로 의존성이란 어떤 제도가 갑자기 변하면 그 이전의 제도에 대한 의존적 힘 때문이 쉽게 정착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다가도 다시 과거의 정책과 혼용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현상 때문인데, 공산혁명 이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서 국가에 따른 전통적 입장을 일시에 무시할 수 없었던 사례가 이러한 경로 의존성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특히 경제 정책의 경우 아무리 그 뜻이 국가목표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그 이전의 정책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게 되면 그 실행에 있어서 많은 저항을 받게 되고 결국은 그 실효성도 떨어지고 마는 경우를 종종 보고 있다.
위의 논리를 염두에 두고 보면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퇴행성을 바로 잡기 위한 방법으로 의사소통 구조의 다양화나 구체적인 국가의 단기 및 중·장기 계획 수립은 어느 면으로 구조개선적 처방일 수 있다. 그런데 문화강조론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소통 구조를 개선하고 구체적 국가목표가 설정된다 해도 문화가 그에 따르지 못하면 문제는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물론 제도 개선이 그에 수반되는 문화를 일부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문화는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문화의 변화는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부터의 장기간에 걸친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주장을 각자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보수나 진보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말하지 말자는 주장은 일면 교육과 홍보가 필요한 문화개선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정신치료'의 방법을 새로운 대안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본다. 정신치료란 정신질환자에게 정신분석학 이론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즉, 환자 자신들이 정신분석 이론을 들으면서 자기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의 문제점을 인식토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진실로 인식하면 바로 고쳐질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방법이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 그것을 바로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마저 알지를 못하면 그 시정은 정말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단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 원인까지를 알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의식 변화의 교육이며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마지막 장에서 보수와 진보의 퇴행성에 대한 원인으로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논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이 왜 나도 모르게 퇴행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 동의를 한다면 바로 그 사람은 자신을 분석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에 퇴행적 요소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사회 갈등의 합리성을 위한 하나의 처방으로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적 퇴행성을 나름대로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따라 또 다른 다양한 처방도 동시에 논의되리라 본다.
더불어 꼭 덧붙일 말이 있는데 이는 한국인에게는 퇴행적 무의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인의 성격(혹은 무의식)에는 다른 나라 국민들이 따를 수 없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장점으로 인해 우리는 그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민주 사회와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합리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전한 토론 문화의 부재, 그리고 사회 갈등의 비민주적 양태를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바로 이러한 퇴행성을 악화시켜 선진 사회로의 도약을 방해하고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첫댓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은 21세기 복잡화된 다원화된 카오스적 세계관에서 적합하지 않다. 오늘날의 복잡계는 그 속도성에서 이념적 정당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어느 누가 빨리 국민들이 살아나갈길을 빨리 찾아내어 정책에 대입하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