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주가 오랜 해외원정에 가 있느라 버려져 있던 소규모 자영농의 농지들이 이들에게 헐값으로 넘어갔으며, 정복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도 자영농의 자립기반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라티푼디움, 대농장이 로마 곳곳에 나타났다. 이 대농장의 소유주는 넓은 토지와 많은 노예들 위에 군림하며 작은 나라의 왕처럼 살았으며, 이들에게 농지를 잃은 참전용사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빈민이 되었다. 그들이나,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불만과 원한이 심각했음은 당연하다.
사치풍조와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검소함과 근면함을 숭상했던 로마 고유의 미덕도 사라졌다. 옛날에 세워진 법질서는 농업 위주의 도시국가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라, 새로운 세상에는 맞지 않았다.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대표가 기원전 134년부터 기원전 122년까지 진행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었다. 이들은 민회를 중심으로 원로원의 보수계층과 신흥 부유층의 기득권을 억제하고 서민들의 복리를 증진하려고 했으나, 둘 다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이 마리우스였는데,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기원전 100년에 집정관이 되고는 ‘병제개혁’을 실시했다. 스스로 군비를 마련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만이 군인이 되는 도시국가의 원칙을 깨고, 도시 빈민들도 군대에 자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정복전쟁으로 얻은 토지가 분배되었다. 이로써 도시 빈민의 살 길을 마련함은 물론 로마의 장기적인 병력 수요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빈민들을 모집, 무장시키고 토지를 분배해 주는 결정권자가 국가가 아닌 개별 장군이었으므로, 이로써 로마 군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개별 장군들의 사병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체제에 따라 마리우스, 술라, 그리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등 거대한 군벌이 나타났고, 이들은 차츰 황제의 지위를 꿈꾸게 된다.
이렇게 공화정이 지나친 번영의 결과 역설적인 몰락의 길을 밟아가고 있을 때, 그나마 서민으로서의 대접도 받지 못했던 자들, 노예들의 반란이 터져나왔다. 그 중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대규모였던 것은 세 차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기원전 135년에 에우누스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는 기원전 104년에 역시 시칠리아에서 아테니온과 트리폰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정말로 로마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전쟁은 기원전 73년, 이탈리아 본토에서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었다.
트라키아에서 온 노예 검투사
 문헌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의 생애는 자세하지 않고 문헌마다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은데,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이나 그 소설을 기본으로 해서 1960년에 만들어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는 스파르타쿠스를 대대로 노예였으며 광산에서 일하다가 검투사로 뽑힌 것으로 그렸지만, 문헌에 따르면 그는 로마 군에 소속되었다가 탈영하고, 그 때문에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무예가 뛰어났기에 검투사가 되어, 카푸아 근교에 바티아투스가 소유한 검투사 양성소에서 지내게 된다. 그가 본래는 트라키아의 왕족이었다는 문헌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여느 노예들과는 달리 유식했으며, 냉철하고 신중했다고 전한다.
검투사 경기 역시 로마가 포에니 전쟁 이후 급속도로 번영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하지만(에트루리아의 장례 예식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국민 오락’이 될 정도로 널리 퍼진 것은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찾는 부유층과 불만에 찬 서민층, 그리고 넘칠 만큼 많은 노예들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가나 장군들도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종종 개최했다.
검투사는 오늘날의 프로 격투기 선수라고도 볼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시합의 보수도, 가족도, 생명도 보장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친 검투사는 “나는 기꺼이 채찍으로 맞고, 불에 태워지고, 칼에 찔려 죽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런 영광도 보답도 없는 싸움터로 나갔다. 그래도 검투사가 되면 잘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검투사를 자원하는 노예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동료의 손에 찔려 경기장에서 죽어갈 운명이었다. 일부 용맹한 검투사는 팬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죽고 나면 검투사 전용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매장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