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칼럼] 초량왜관, 영상으로 되살리자
조선시대에도 부산·동래는 해군의 도시이자 초량왜관의 경제권 속에 자라난 국제무역도시였다
- 문화콘텐츠다
- 영상도시의 특성을 살려
- 이를 복원·활용해야 한다
허생은 한양 최고의 부자인 변 부잣집에 돈을 빌리러 간다. "내가 집이 가난한데, 조금 시험해볼 일이 있어 만 냥을 빌리러 왔소." 변 부자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그럽시다" 하고는 만 냥을 내줬다. 그러자 허생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박지원이 지은 소설 '허생전'의 한 대목이다.
당시 1만 냥은 현재 30억 원이 넘는단다. 박지원은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차용증도 없이 거금을 빌려준 부자가 변승업(卞承業·1623∼1709)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변승업은 조선 인조와 숙종 사이에 걸쳐 활동한 일본어 통역관. 그는 역관 집안에 태어나, 초량왜관 무역을 통해 조선 최고 부자로 성장했다.
초량왜관이 어떻게 '국가대표' 부자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는 먼저 부산에 관한 선입견부터 버려야 한다. 조선시대까지 부산이 변방의 작은 어촌이었다고? 20세기가 돼서야 일제의 계획에 따라 동래를 삼키고, 무역항으로 급성장했다고? 그건 절반의 역사다. 부산 역사에서 초량왜관을 지워버린 역사인 거다.
■부산 역사의 중핵, 왜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부산은 '해군사령부'(좌수영)가 있는 군사도시이며, 국제무역도시였다. 또 초량왜관은 자유무역지구였다. 그럼, 동래는 뭔가. 임진왜란 전까지 동래는 기본적으로 해군사령부 배후도시였다. 그 뒤로 왜관 무역이 커지자 국제무역을 관리하는 행정·주거도시로 발전한다.
한마디로 동래는 왜관 경제권 속에서 자라난 도시인 거다. 이때 왜관은 조선·중국 상품을 일본 은(銀)과 교역하는, 동북아 무역 허브. 조선 정부는 역관에게 정규 보수를 주지 않는 대신 사무역을 허용했다. 일개 역관인 변승업이 조선 대표 부자가 된 이유다. 그만큼 왜관의 무역 규모가 컸다는 얘기다.
문제는 변승업이 서울 사람이란 사실이다. 동래상인은 억울한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부산은 땅만 빌려주고, 돈은 서울 사람이 다 벌어간 셈이니까. 동래상인은 중앙정부의 정치파벌인 '소론'에게 정치자금을 대준다. 소론은 갑술환국(1694년)을 일으키고, 장희빈(1659~1701)을 폐위시킨다.
장희빈과 동래상인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장희빈이 역관 집안 태생이란 것. 또 변승업이 장희빈의 외가 친척이자 인척 관계였다는 사실만 떠올리면 충분할 것 같다. 동래상인은 중앙정치에 개입해 변승업을 밀어내고, 이권을 넓히려 한 거다. 그러니 부산이 변방의 작은 어촌이었단 얘기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나.
■왜관의 문화 콘텐츠
초량왜관의 역할을 살펴보면, 그곳이 부산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왜관은 갖가지 문화 콘텐츠를 지녔다. 숙종 4년(1678년)에 완공한 이곳은 넓이가 10만 평이 넘었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미국 최대의 일본인 거리인 '리틀 도쿄' 면적의 33배가 넘는 셈이다. 그런 곳이 200년 넘게 번창했으니, 얘깃거리가 많을 수밖에.
몇 년 전 '무사 백동수'란 TV 드라마가 있었다. 백동수는 정조 때 군사훈련 매뉴얼인 '무예도보통지'를 지은 인물. 백동수도 초량왜관과 연관이 있다. 그는 검선(劍仙) 김광택(金光澤)에게 검술을 배웠다. 김광택은 숙종 시대 최고 검객인 김체건(金體乾)의 아들. 믿기 어렵지만, 김체건은 바닥에 재를 깔고 칼춤을 춰도,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람이다.
그가 검술을 완성한 곳은 초량왜관. 1680년 무렵, 그는 인부로 위장해 왜관에 들어갔다. 날마다 도장 마룻바닥 아래에 숨어 일본 검술을 몰래 익혔단다. 그 뒤로 김체건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다른 유파 검술까지 익혔다. 그 결실이 백동수로 이어져 '무예도보통지' '왜검' 편에 담겼다. 정조 시대의 대표적 문화 콘텐츠인 '무예도보통지'에 왜관과 통신사의 발자취가 새겨진 거다.
그동안 초량왜관의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자는 얘기가 여러 번 있었다. 필자만 해도 2009년 부산시와 국제신문이 마련한 제1회 '부산걷기축제' 프로그래머를 맡으며, 북항 중앙부두에서 출발해 초량왜관 윤곽을 따라 걷는 것으로 동선을 짰다. 대청로 한국은행 건물 외벽에는 변박의 '왜관도'(1783년)를 걸고, 광일초교 외벽에는 '동래부사접왜사도'의 마지막 폭인 '연향대청' 그림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부산은 왜 아직 초량왜관을 못 살리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곳의 가치를 역사책에서만 찾아온 것 같다. 또 이곳의 재생을 건축 관점으로만 생각해온 것 같기도 하다. 왜관 성곽을 복원하는 건 지난한 일이다. 이곳을 문화 콘텐츠로 접근하고, 문화적 재생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영상 콘텐츠로 되살리자
영상도시 부산에 적합한 방법은 영화, 드라마, 게임으로 왜관을 되살리는 거다. 내친김에 '영화 같은 게임'을 만들어도 좋겠다. 요즘 문화예술계의 대세인 장르 간 융합은 게임과 영화 사이에도 일어난다. 이른바 '시네마 게임'은 이용자가 영화 주인공처럼 게임을 이끌어간다.
일반 게임과 다른 점은 실제 장소와 실제 배우가 나온다는 것. 캐릭터, 장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임 내용을 실사화면으로 만들어 사실감과 몰입도를 높인다. 게임이지만 영화처럼 감상하고, 영화이지만 게임 요소를 갖춘 시네마 게임. 상황에 따라 현재의 거리와 과거의 왜관 모습을 구현한다면, 멋진 작품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