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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말하다___
사진은 예술의 적인가
오강석
구텐베르크는 교황청에 면죄부를 찍어주고, 성서를 인쇄하여 기독교인들에게 파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의 ‘금속활자’를 벤치마킹해 ‘활판인쇄술’을 발명했다. 구텐베르크는 기대했던 것만큼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가 찍어낸 성서는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한 잡지는 ‘성서 인쇄’를 지난 천 년간 인류 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았다. ‘필요’는 발명의 선행 요건이다. 그러면 니에프스와 다게르는 무엇에 쓰려고 사진을 발명했던 걸까?
인간은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 ‘본다’라는 행위는 ‘안다’라는 인식 작용으로 이어진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라는 말은 눈의 기능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 눈은 감각 수용기의 70퍼센트가 모여 있는 ‘감각의 제국’이지만 불행히도 가장 불완전한 감각 기관이다. 진화론자 중에는 눈을 창조론을 부정하는 증거로 제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망막 한가운데에는 시세포가 없어 상이 맺히지 않는 맹점盲點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를 떨어져야 하고, 조금만 어두워져도 식별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다 갖가지 착시현상까지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시각에 집착하는 것은 단시간에 다량의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카메라 렌즈는 간단한 장치로 인체의 눈과 같은 기능을 한다. 눈의 동공이 빛의 양을 조절하듯 렌즈에는 같은 기능을 하는 조리개가 붙어 있다. 근원적인 차이는 ‘인식의 지속’에 있다. 눈은 빛을 모아들여 망막에 상이 맺히게 한다. 그 효과는 한시적 불확정적이어서 시선을 거두는 순간 실체는 기억의 심연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렌즈는 맺힌 상을 고착시켜 두고두고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19세기 중반에 달리는 말의 다리가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던 화가들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한 것도 렌즈라 불리는 카메라아이camera eye였다.
보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카메라아이와 시인의 눈 사이에, 또는 사진가와 시인의 인식 사이에 현실 또는 현실의 표상을 인식하는 방법과 결과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실fact을 인식하는 주체의 추체험이 결과하는 리얼리티의 문제이기도 하다. 뉴욕현대미술관의 사진 담당 큐레이터로서 1962년에 ‘사진가의 눈’이란 기획사진전을 열고 이어 같은 이름의 책을 펴낸 존 자코우스키는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사진에 찍히는 순간, 더 이상 괘종시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진은 대상을 재현하는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자코우스키는 현실의 리얼리티와 사진의 리얼리티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진은 사진가가 현실을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라는 것. ‘선택’이라는 단어를 ‘인식’으로 교체하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선택’은 사진가가 현실의 표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며 추체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화가는 중심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고, 사진가는 테두리에서 표현을 시작한다”고 했다.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 프레임에 포함시킬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사진가의 원초적 표현 수단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에게 서술을 위한 사진 고유의 문법 체계는 당연히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당시의 화가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는 그리려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선택’한 대상을 캔버스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작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화가들은 디오라마(그리려는 대상을 반사광선이나 투명광선을 이용하여 반투명한 캔버스에 비치게 하는 장치)라는 보조 장치를 이용했다. 그러나 디오라마는 화상이 거꾸로 맺히는데다 그림의 크기와 맞지 않는 등의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프랑스의 무대 장치를 그리는 화가였던 다게르는 니에프스라는 화가가 디오라마를 대체할 수 있는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 : 태양광선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으로 순간을 고착시킨 최초의 사진)를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니에프스를 찾아가 화상이 맺히는데 8시간이나 걸리는 헬리오그라피의 노출 시간을 단축시키는 연구를 공동으로 하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받았다. 연구 중에 니에프스가 사망하자 다게르는 혼자 연구를 진행시켜 1839년 1월 9일 노출 시간을 20~30분으로 단축시킨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라는 은판사진술의 발명을 공표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진술이 발명되었다는 공인을 받았다. 그로 인해 사진술의 발명가라는 명예는 다게르가 차지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안경사 조안 리퍼시가 발명한 망원경을 저명한 물리학자요 천문학자였던 갈릴레이가 조금 업그레이드시켜 과학적으로 사용(인간의 시각을 확산시켜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감소시킴)함으로써 망원경의 발명가로 인식된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정리하면, 사진은 니에프스라는 화가가 풍경화를 쉽게 그리기 위한 장치로 발명하였으며, 다게르라는 화가가 동일한 목적으로 이를 개량하여 발명가를 자처했다는 거다. 굳이 사진의 족보를 되짚어보는 것은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장 과정에서 세운 화려한 공적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이다.
모방이 예술 활동의 출발점이며 풍경의 재현이 창의적 작업이라고 굳게 믿었던 화가들은 사진의 완벽한 재현 기능에 경악했다. 에드가 드가는 발 빠르게 화가와 사진가를 겸업하여 <무대 위의 발레리나> <발레 수업> 등을 모델을 쓰지 않고 스냅사진의 한 장면처럼 역동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사진의 복제 기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많은 화가들은 “회화는 죽었다”고 자탄하며 붓을 놓았다. 그 대목에서 프랑스 상징시의 선구자 보들레르가 “사진은 예술의 적”이라고 한마디 거들었지만 실의에 빠진 화가들에게는 별 위안이 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런데 몬드리안이라는 화가가 발상의 전환을 했다. 이제 풍경의 ‘복제’는 사진에 맡기고, 화가들은 ‘사진과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캔버스 위에서 대상은 점차 단순화되다가 종내는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검은 차가운 사각형들만 남게 되었다. 한국의 한 평론가가 “몬드리안의 위대성은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선을 반듯하게 그은 것”이라고 한 농담이 실감나는 회화사상 유래 없는 돌연변이였다. 사진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이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주의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거장을 탄생시킨 것이다. 사진의 복제 기능이 아이러니하게도 화가들을 ‘현실의 복제’에서 해방시켜 ‘내면의 탐구’로 눈을 돌리게 했으며 현대미술의 영광이 거기서 비롯되었으니 사진의 공이 작지 않다. 현대미술사의 서막에 사진이 카메오cameo로 출현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보들레르가 백 년만 더 살았다면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고 크게 사죄했을 것이다.
반면 표현 양식의 다양화로 예술적 위상이 급속히 추락한 사진은 미술계에서 추방당해 다큐멘터리사진과 증명사진으로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했다.
신이 인간의 얼굴을 저마다 다르게 창조한 것은 사진에게는 축복이었다. 인간의 외모가 붕어빵처럼 똑같다면 사진은 그쯤에서 용도 폐기되고 말았을 테니까. 사진 발명 이후 가장 많이 촬영된 사진은 단연 인물사진(기념사진)이다. 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한 것은 사진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었다. 정체성의 시발점은 ‘다름’이다. 인간은 서로 다른 개체임을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사용해왔다. 그것은 대단히 효율적이었지만 혼선과 잡음 또한 적지 않았다. 성서에는 많은 동명이인이 등장한다. 이는 당시의 문명사회에서조차 이름이 구성원의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시몬’이라는 이름만 해도 예수의 열두 제자, 다른 예수의 열두 제자, 예수의 형제, 베다니의 문둥병자,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 가롯 유다의 아버지, 피장이, 마술사 등 여덟 명이나 된다. ‘시몬 베드로’ ‘구레네 시몬’의 ‘베드로’나 ‘구레네’들은 ‘시몬’이라는 이름의 헛갈림 방지 장치인 것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인류의 상당수가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했거나 ‘개똥’이나 ‘워커walker’ 같은 명사를 이름으로 공유했으니 자연 변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심판의 순간 식별을 위한 신의 경이로운 작업의 결과 인간의 얼굴은 저마다 고유의 코드를 탑재하고 있다. 나르시스가 수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시점을 기준으로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방법을 일별하면, 전대에는 돌거울, 후대에는 구리거울이나 유리거울을 사용했다. 초상화라는 것이 있었지만 역사책에 수록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소수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이 도입될 때만 해도 인물사진을 촬영하는데 벼 한 가마 값을 치러야 했지만 오래지 않아 보리 한 되 값으로 떨어지며 확실한 범용성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라도 가장의 인물사진이나 가족사진을 방문 위에 턱하니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었으니, 니에프스나 다게르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민들의 사진 사랑은 그때 이미 예견 된 것이었다.
현대미술의 최근 흐름을 보여주는 비엔날레에서 관람자는 사진 또는 사진적 표현을 이용한 작품들을 놀랄만큼 많이 보게 된다. 정통 회화부터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나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사진이 시각예술 전반의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부상한 때문이다. 컬러사진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진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면 디지털시대의 도래는 기폭제가 되었다. IT강국 한국의 경우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세계 유수의 카메라 생산국으로 진출한데 이어 김아타 등 한국의 사진가들이 국제무대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사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소리꾼 장사익은 미국 공연에서 다큐멘터리사진가 김녕만의 사진을 배경으로 사용해 찬사를 받았다. 무용 연극 오페라의 배경에도 사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시각예술에서 발원하여 공연예술을 섭렵한 사진은 이제 문학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설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지퍼가 발명되었을 때 ‘여자 바지에는 절대로 달 수 없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대한민국은 사진 공화국’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히 사진 전성시대다.
사회가 복잡 세분화되고 생활양식이 다양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
고 있다. 다량의 정보를 단시간에 수용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필연적으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고, 연령에 반비례하여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문명에 있어 문학이 모든 예술을 지배하고 그 모든 것 이상으로 역할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진리였던 휘트먼의 말에 ‘오늘’ 선뜻 수긍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문학의 자리에 ‘사진’이나 ‘영상’이라는 말을 놓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많을 터이다. ‘보는 문화’가 ‘읽는 문화’를 급속히 대체하면서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외면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현실의 문제적 국면을 성찰하여 진솔하게 펼쳐내는 진지한 작품일수록 독자의 손길이 가지 않는다. 기존의 작가주의로는 즉흥적 단편적 감각적 충동적인 독자들의 공감을 증폭시킬 서사전략을 구사하기가 어렵다는 게 작가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그리하여 작가의 아우라aura는 출판사의 경제논리에 지리멸렬 패퇴하고 있다. 최근 ‘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게임에 싫증난 젊은 층이 서점으로 발길을 돌리기를 기다리는 작가들이 부쩍 는 느낌이다. 그러나 백여 년 전에도 유포되었던 ‘문학 위기설’은 고대로부터 노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 온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진부하다. 언제 문학이 ‘위기’ 아니었던 때가 있었던가. “최근 십 년간 문학은 방향과 의도와 박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한국의 문학 현실에 딱 들어맞는 이 말은 홉킨스가 백여 년 전에 『전례 없는 일』에서 한 말이다. ‘전례 없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게 마련이다. 필요한 것은 ‘처방전’이다. 로테크lowtech적인 문학의 속성이 하이테크hightech 미디어에 의해 촉발된 문학의 위기에 대한 치유책이 될 지도 모른다. 문학적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독자층을 개발하거나 신세대 문학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서사 전략을 개발하는 것도 방법이다. 문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정부를 설득하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할 때, ‘위기’를 논하거나 어차피 ‘진정한 문학’은 ‘소수의 것’이었다고 자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국민소득 2만불이 되어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것을 보면 증상이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예술계 전반이 불황에 허덕이는 동안 사진은 포식자처럼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예술’ 전반을 잠식하고 있다. 그러나 절정기에서 역으로 사진은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 경제 대국 미국이 세계 경제 위기의 진원지가 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듯 어떤 경로로 사진의 위기가 닥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고도비만의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문화적 퇴행과 퇴폐의 현장에서 사진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신종 사진 플루’가 예술 자체를 고사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술’과 ‘대중’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현상이 가장 심각하다고 진단하는 대한민국의 한 문화평론가가 보들레르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같은 말을 했다. “사진은 예술의 적이다.”
오강석 / 194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신문사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며, 200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여행기 『아! 사하라』, 『다시 가 본 베트남』 등이 있으며 현재 인스쿨갤러리 학예담당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