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land of planty - India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나라. 아무것도 아닌 나라
우리가 어디론가 무작정 가고 싶어한다면 그곳은 모르긴 해도 이래야 할 것이다.
정신의 고향쯤으로 느껴지는 곳. 살면서 배운 몇 가지 습관과 형식이 일제히
무너지는 곳.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인도다. 위험하다는
정보만큼 마음의 짐을 단단히 꾸릴 것. 돌아올 날짜를 못 박듯 정해놓지 말고 떠날 것.
인도로 가는 사람이 챙겨야 할 몇 가지 덕목은 그렇다.
인도에서는 예약도 쉽지 않고, 약속도 지켜지지 않고, 더군다나 흥정도 불가능하다.
인도에서의 모든 요금은 미리 정해놓아야 한다고 가이드북은 일러주고 있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인도인들은 여행객의 호주머니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데다
그들의 뚱딴지 같은 고집과 딴소리 잘하는 기질은 아마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일 것이다. 시클로를 타기 전 목적지를 말하고 미리부터 가격을
흥정해보지만 내릴 때는 그 두 배쯤 되는 가격을 부른다. 원래 협상된 요금을
지불하고 도망치듯 숙소로 들어가버리지만 자기가 원하는 금액을 받기 위해
늦도록 숙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고집불통의 시클로 기사도 있었다.
택시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길을 요리조리 한참을 돌며 바가지를 씌운다.
나를 만만하게 본 어떤 택시 기사가 조작된 미터기를 부착하고는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난 택시 창문을 내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에게
무조건 "폴리스! 헬프 미, 플리즈"를 외쳤다. 무식엔 무식이 통한다고 운전하던
기사는 미안하단 말을 연발했고 물론 단 1루피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쯤 실컷 당한 다음에야, 몇 번이고 인도를 떠나야겠다고 투덜대는
입장에 처한 다음에야 그 모든 것들은 순연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헤쳐나갈 몇 가지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겨우 그렇게 된 다음, 적당한 수위로
여행자의 소심증이 단련될 즈음 그들의 그런 모든 행동과 욕심들이 어차피
사는 모습의 일부라고 느끼게 된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인도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라가 된다. 무시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간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 되므로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용접하거나 강심장이 되어야 한다. 질서를 지키는 것도
무의미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 자체가 일순 우스꽝스럽고 복잡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다 그 모든 것들이 뒤집어지는 전복의 순간을 만난다. 문득
그곳에서 짐을 풀고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그 며칠 동안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나라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 이병률, <끌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