授記品(수기품) 第六
3. 목건련, 수보리, 마하가전련이 수기를 청하다
이 때 대목건련과 수보리와 마하가전연이 모두 송구스러워하면서
일심으로 합장하고 부처님의 존안(尊顔)을 우러러 뵈옵고
눈을 깜박이지 아니하며 소리를 함께 하여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잘 아시죠.
목건련 사리불과 함께 부처님께 출가하신 아주 뛰어난 제자,
부처님의 오른팔 왼팔과 같은 그런 역할을 한 제자입니다.
또 신통제일이시고, 수보리는 금강경의 부처님과 대화의 상대로
금강경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죠.
해공 제일 수보리,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한 그런 수보리다.
그리고 가전연은 논의 제일 가전연 그렇게 하는데,
잘 따지고 논리적이고 그 논리가 아주 치밀하고
그런 어떤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예요.
우리 불자님들도 스스로 한번쯤 이 부처님 집안에 식구가 된 이상
그런 것들도 욕심 내 볼만 합니다.
이게 십대제자들만의 일이 아니예요.
스스로 한번 그런 생각을 ‘나는 신도지만 불교 안에 이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못 한다.’ 이런 욕심 최소한도 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아주 깊어 질 수도 있고
자기 공부가 아주 크게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세 분이 함께 소리 내어서 게송으로 말하는데.
"위대하시고 훌륭하시고 용맹하신 석가세존(釋迦世尊) 법왕께서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말씀을 일러주십시오.
만약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수기를 주신다면
마치 감로수(甘露水)를 뿌려 열을 식히고 서늘하게 하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흉년이 든 나라에서 온 사람이 홀연히 임금이 주는 음식을 받고도
송구스럽고 의심스러워서 감히 먹지 못하다가
임금의 먹으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저희들도 또한 그와 같아서 늘 소승(小乘)의 과오(過誤)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위없는 부처님의 최상의 지혜를 얻을는지 몰랐습니다.
비록 저희들도 성불(成佛)하리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마음에는 오히려 염려되고 송구스러워 감히 임금님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그 솔직한 마음을 이 세 분이 대신 피력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모두들 우리가 성불한다, 불성이 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실은 알고 보면 우리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야.
그러니 부처로써 살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속으로 그것을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사실 별로 없죠.
그런데 또 알고 보면 사람 외에 부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사람 외에 달리 부처가 없어요.
부처 행동만 하면 그 원래 부처인, 뭐 속에 있는 부처라고 칩시다.
사실 안 밖이 다 부처인데 속에 있는 부처가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걸 저는 ‘일행일불사상(一行一佛思想)’ 이다. 그런 말씀을 해요.
그러니까 사람 내용은 본래로 부처님인데
행동이 부처 행동을 한 번 할 때 한 번 부처님이다. 그것도 방편설입니다.
방편설이지만 그렇게 설명하는데 그것도 일리 있는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서 5분 동안 절름발이 연기를 자기가 했다고 합시다.
그럼 5분간 그 사람은 절름발이예요.
또 5분간 맹인 흉내를 냈다면 그 사람은 5분간 맹인입니다.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5분간의 인생은 이미 지나 갔으니까요.
우리가 5분간 부처님의 흉내를 냈다면 5분간 그 사람은 완전한 부처님입니다.
5분간은 틀림없는 부처님이예요.
그렇듯이 한 가지 행위가 부처님일 때 부처님의 행동일 때
그 사람이 한 가지 행동하는 그 순간은 안 밖으로 다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일행일불사상도 내가 일찍이 주창한 바입니다.
그러나 그 일행일불사상은 참 그럴듯하죠.
상당히 그럴듯하고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 내용은 부처님인데 행동이 그렇지 못 하다.
그럼 행동을 1분 동안에 한 가지만 부처의 행동을 하자.
그러면 그 1분 동안 부처가 아니겠는가?
그것이 시간이 길어지고 잦아지고 이러면
하루에 예를 들어 한 시간 부처이든 것이 어느 날 두 시간
또 자꾸 부처 행동을 늘여 가면 세 시간 부처이고, 네 시간 부처이고,
다섯 시간 부처이고 이렇게 하루 종일 부처가 된다고 하는 거죠.
이런 사상이 일행일불사상입니다.
하나의 행동이 부처일 때 그 사람의 그 순간은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뜻인데
사실은 차원이 낮은 사상이지만 또 상당히 의미 있는 사상이기도 해요.
그런데 내가 말하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인불사상은
앞서 이야기 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 같은 훌륭한 행동을 했을 때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이
일생일불사상이라면 부처님이 24시간 그러면 훌륭한 행동만 하시느냐?
부처님이 화장실도 가시고 피곤해서 쉬시기도 하고 잠도 주무시고
음식도 자시고 또 몸이 아프면 앓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부처님이예요.
앓아도 부처님이고 화장실에 가셔도 그대로 부처님이고
무슨 화장실에 간 게 부처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앞서 말한 일행일불사상과 인불사상과 차이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화장실에 가면 간대로 부처님 아닙니까.
그럼 그대로 부처님이란 뜻이예요.
사람 그대로 가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것이
완전무결한 그런 불교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최첨단 불교 사상이다
이렇게 제가 감히 말씀드리는데.
그래서 화장실에 가셨든 누워 주무시든 음식을 자시든
아파서 무슨 요양을 하시든 간에 그런대로 부처님이예요.
그렇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지 무슨 좋은 일 할 때만 부처님이다 이러면
좀 그럴 듯하지만 상당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차원을 잘 이해 해주시고
그러나 일행일불사상도 대단한 사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불사상은 더욱 발전된 사상이다, 완전한 사상이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 무슨 조건 무슨 조건 달아서 삼아승지의 세월이 흘러야 되고
뭘 어떻게 해야 되고 하는 그런 조건이 붙은 성불은 방편이고
저급한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본래로 부처인데 성불하리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송구스럽다.
그럼 내 이야기는 더 송구스럽죠.
그렇게 치면 나중에 성불한다는 말이 송구스럽다면
일행일불사상도 송구스러운 것이고 인불사상은 더욱 더 송구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법화경을 설하든 때는 2000년 전입니다.
그 때 사람들의 인지와 오늘날 사람들의 인지,
오늘날 삶들이 어떤 경험과 지식과 그 모든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
이것을 비추어 본다면 법화경에서 이런 이야기는
크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사실은 겁낼 일도 송구스러울 일도 전혀 아니라는 거죠.
"만일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면 비로소 기쁘고 편안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위대하시고 훌륭하시고 용맹하신 세존께서 세간의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시니
원컨대 저희들에게 수기를 주신다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 왕의 음식을 먹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가 말씀드린 인불사상이나 일행일불사상은 아주 발전된 사상이고
여기 법화경에 쓰여 진 액면 그대로 우리가 이해하기로 한다면
이것도 아주 대단한 것이고 아주 황송한 것이고
그야말로 거지에게 왕의 음식을 차려주고
그 왕이 직접 그 음식을 먹게 했다라고 했을 때
그 영광, 그 위대함, 그 감동, 그 감격이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가 또 그렇게 이해해도 좋죠.
사실은 그게 법화경을 순수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뭐 깊이 까지는 이해를 못 했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소박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는 명상(名相)여래가 되리라. 드디어 수기를 내리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