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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삼청동 저택, 밤
한 선비가 조상궁 안내 받아 미로와 같은 복도를 굽이굽이 지난다.
문 열고 방안에 들어서 선비 자리한다.
정면으로 나아가는 조상궁 좌우로 겹겹이 펼쳐진 사잇문들 사이사이 내려진 발들.
하나씩 불이 켜지며 뒤에 앉은 그림자들 나타난다.
정면 가운데 발 뒤로 그림자 나타나면, 선비 절한다.
정면의 그림자 붓을 들어 먹물을 묻혀 화선지에 쓴다.
한 획 한 획 따라가면 완성되는 ‘구국(救國)’. 연이어 ‘이(而)’를 쓴다.
조상궁, 화선지 받아 방을 가로질러 다시 선비에게로 가 건넨다.
경건한 예로써 받는 선비.
선비 빨간 물감 묻힌 붓을 들어 쓴다. 한 획 한 획 따라가면 ‘살(殺)’.
조상궁, 화선지 들어 모두에게 보인다. ‘살이구국(殺而救國)’
S#2. 초가집 방, 밤
침통에서 대침을 꺼내 진열하는 손이 희고 곱다.
두루마리를 펼치면 종류별로 가지런히 꽂힌 침들.
소매 걷어 올려 묶으면 손목 감은 띠에 가지런히 꽂힌 아주 가는 금침들.
잘게 썬 약재를 저울 한쪽에 올리고 다른 쪽에 추를 올려 무게를 재는 손,
눈금이 새겨진 대나무관에 가루 약재를 담아 양을 잰다.
김이 오르는 약탕기에 두 약재를 넣고 젓는다.
저고리 앞섶에서 수첩(손바닥 길이에 손가락 두 마디 너비)꺼내 펼치면 여러 겹 접힌 곳곳에 한자와 언문 메모가 빼곡하다.
붓을 들어 수첩에 기록하는 손.
지켜보는 다른 시선.
탕약그릇 쟁반에 받쳐 드는 뒷모습은 남자다.
희고 고운 목선 너머 상반신 벗고 누운 왈패1 보이고, 다가갈수록 촘촘히 몸을 뒤덮은 온갖 침들이 선명히 드러난다.
왈패1 두려움에 몸을 움직이려 하지만, 침들이 작게 흔들릴 뿐 꼼짝할 수 없다.
탕약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면, 입을 꽉 다물고 거부하는 왈패1.
이나영 손목에서 머리카락만큼 가는 금침을 뽑는다.
왈패1의 귀 밑을 파고드는 세침, 공포로 확대된 왈패1의 동공.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마는 탕약.
시계를 들어 올려 시각을 재는 손. 눈이 풀리며 떨리는 왈패1.
시계의 초침과 분침. 눈이 뒤집어지고 축 늘어지는 왈패1.
순간 시계에 가 박히는 시선 둘.
수첩을 한 겹 펼쳐 약효와 사망 과정을 기록하는 남장한 이나영과 황집사의 얼굴 비로소 드러난다.
S#3. 초가집 근처, 밤
포졸 1,2,3과 함께 잰 걸음으로 가는 박상규.
포졸1 : 퇴계원 어딘 깨구락지가 다시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갔데요. 그 너머엔 가물지두 않는데 보리가 허옇게 말라죽구요.
포졸2 : 어이씨, 세상이 뒤숭숭하니까말이여 청명 지낸지가 언젠데 날이 이리 추워.
우리, 대충 하구 뜨끈한 탕국에 탁주라두 한 잔 쭈욱...
S#4. 초가집 방 + 마당, 밤
입을 벌리고 죽어있는 왈패1, 뒤집어진 두 눈, 침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포졸1 : (끔찍하다는 듯 고개 돌리며) 장리꾼한테 빌붙어 빚 못 갚는 양민 아낙네들을 사노비로 팔아 치우던 왈패랍니다.
사람 판 돈 밑천 삼아 유흥이나 즐기던 몹쓸 놈이지요.
박상규 : (애도하며 눈 감겨준다) 또... 외견상 어디 상한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다.
포졸2 : 며칠 전 수표교 아래서 발견된 놈하고 비슷한 꼴 맞지요? 어쩝니까, 형님?
박상규 : 어쩐다... (일어서는데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노인 본다)
포졸1 : 죽은 놈 애비 되는 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거 보면 뭐...
박상규 : ... 근방에 수상한 자를 본 사람 있나 찾아봐.
포졸2 : 예? 아이, 형님, 지 애비도 안 거들떠보는 자식, 뭘 또 골치 아프게...
박상규 : 포청에 왜 신고했겠어? 개차반 자식이래도 억울한 거야...
포졸1, 2 : (탁주 먹긴 글렀다고 서로 눈짓 손짓하며 나간다)
S#5. 흥인문 근처 다른 초가집 마당, 밤
왈패 둘 노인을 두들겨 패다 투덜거리며 나간다.
노인을 에워싸고 노파와 아이들 넷 울고 있다.
술 취한 척 지나던 선비 둘(임금과 이조판서) 자초지종 묻는다.
노파 : (신세한탄하며 울먹인다) 지난해 돌림병에 애들 아범 먼저 죽고, 살 길 막막해 어멈이 대갓집 노비로 팔려가서,
일년 내내 매질에 골병들어 죽었는데, 이제와 어멈 몸값 돌려내라고 하루걸러 이리 행패요.
이조판서 : 아무리 노비라 하나, 큰 잘못을 하더라도 사사로운 형벌로 죽이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금하고 있거늘
어찌 그 지경이 됐는가?
노파 : 돈 못 갚으면 큰놈, 둘째놈 둘 다 노비로 바치라네요. 잘 먹이지도 못해 비리비리한 우리 애들 보기만 해도
딱해 죽겠는데, 그래도 얘들 둘이 동냥질해오는 걸로 우리 식구 먹고 사는데,
천지신명도 무심하시지,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신음하는 노인과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임금 표정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객, 등에 멘 자루를 펼쳐 조총 두 자루 꺼낸다.
총신 뒤로 번뜩이는 시선. 철환을 총구에 밀어 넣고 화약 채운다.
총구가 선비들을 겨냥한다.
S#6. 초가집 방 + 마당, 밤
포졸1 : 근방에 아무도 수상한 자를 봤다는 사람이 없는데요.
박상규 : (일어서며) 아무래도 한성부로 옮겨야겠어!
포졸1 : 예? 아니, 왜?
박상규 : (노인 보며) 검험해서 왜 죽었나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포졸2 : (울상) 아이씨... 어디 양반 자식이 뒈진 것두 아닌데...
박상규 나가려다 포졸2 보면, 입 다물고 들어가 끙끙 시신을 들쳐 업는다.
그때, 총소리!
박상규, 놀란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간다.
연이어 들리는 총소리, 그리고 곧 한줄기 호각 소리 들려온다.
박상규 따라 나온 포졸 1,2,3과 소리 난 쪽으로 달려간다.
S#7. 흥인문 근처 다른 초가집 마당, 밤
이조판서 호각 부는 임금을 몸으로 가리며 봇짐에서 마상총을 꺼낸다.
이미 조총에 맞은 노파와 큰놈 쓰러져 있다. 울부짖는 아우들을 껴안은 둘째놈.
허리춤에서 화약통을 꺼내 탄환을 장전하는데, 쓰러지는 둘째놈.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새, 임금도 총에 맞아 쓰러진다.
놀란 이조판서 한손으로 임금을 끌어안고, 마상총으로 응사한다.
날아드는 자객에 이조판서 어깨 베인다.
총을 던지고 봇짐에서 칼을 빼는 이조판서.
이조판서와 자객 함께 칼춤 춘다.
쓰러졌던 선비, 몸 일으켜 세우고 다시 호각 불어댄다.
멀리서 가까워오는 또 다른 호각소리. 박상규와 포졸들 호각 불며 달려온다.
자객 달아난다.
임금을 살피는 이조판서.
임금 총에 맞은 가슴 앞섶을 열면 보이는 종이방탄복에 뚫린 구멍, 그 속에서 꺼내어지는 납 탄환.
안심하는 이조판서.
이조판서 : (뛰어오는 박상규들에게) 뭣들 하느냐? 어서 쫓아라.
박상규 : (선비 베인 어깨 쓱 보고, 포졸1에게) 봐드려. (노파를 살핀다)
이조판서 : (포졸1 뿌리치며) 이 놈! 감히 내가 누구인줄 알고, 어서 쫓지 못할까?
임금 : (손짓으로 만류한다)
신음하는 노인과 노파, 쓰러진 큰놈과 둘째놈을 오가며 살피는 박상규.
아이 둘 울고 있다.
근심어린 임금의 표정.
박상규 : (꾸물대는 포졸들에게) 뭐해? 빨리 와서 이 아이들 좀 살펴봐!
포졸들 그제야 우는 아이를 달래며 다친 아이들을 살핀다.
박상규 : (노파에게) 걱정 마세요. 중요한 장기는 피해간 듯싶으니.
(포졸2에게) 흥인문 초소에 가서 숙직 의원 데리고 와. 얼른!
포졸2 가고, 박상규 옷을 찢어 노파 상처를 지혈한다.
비명 지르며 혼절하는 노파, 박상규 맥을 짚고, 옷을 찢어 추가 지혈한다.
박상규 : 차라리 정신을 놓는 편이 고통이 덜할 겝니다.
이마에 땀 훔치며 둘러보면, 사라진 선비 둘. 의아하나 아이들 상처를 돌본다.
S#8. 포청 포도대장 집무실, 아침
총기류와 도검류가 멋스럽게 진열돼 있다. 벽에 한성 지도 걸려있다.
포도대장 : (노발대발) 어제 밤엔 어떻게 된 거야? 온쪽이든 반쪽이든 높은 분 자제시라 이 자리가 쉬워 보여?
누구 죽는 꼴 보고 싶냐고!
박상규 : (담담하게) 사체의 모양이 수표교 아래서 발견된 자와 비슷하여 한성부에 검험을 의뢰했습니다.
포도대장 : (짜증) 지금 반항하냐? 누가 왈패 놈 죽은 거 가지고 이래?
흥인문 근처에서 습격 받은 이가 이판대감이라잖아, 이판대감!
박상규 : 몰랐습니다. 상한 자들을 치료하느라 경황이 없어서...
포도대장 : 야, 박부장! 넌 도대체 뭐가 더 중한지 모르냐? 판단이 안 돼?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 보고도 안하고...
위에서 물어보는데 모르고 있는 내 입장이 뭐가 되냐?
박상규 : (고개 숙인다) ...
포도대장 : (심했나? 걸리니까 염려랍시고) 내가 박부장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만 있을 사람으론 안 보니까 하는 얘기야.
S#9. 의금부 고문실, 아침
벽에 걸린 이조판서 관복, 어깨에 붕대 맨 이조판서가 얼굴에 피를 닦아 낸다.
만신창이의 무관 줄에 매달려 있다.
나장이 물 끼얹자 정신을 차리는 무관.
이조판서 : (나직하게) 흥인문에 간 것을 아는 자는 너 밖에 없다. 그런데도 모른다?
무관 : (신음하며) 소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이조판서 :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붕당정치이다, 헌데... 정견과 주장이 다르다 하여 살수를 쓰는 것은,
구시대부터 내려온 너희 당의 오랜 천성이냐! (나장들 보자)
나장들 몽둥이를 한껏 치켜세워 내리친다.
비명소리 울린다.
이조판서 : 누구냐? 배후를 대라!
금부도사 : (달려오며) 멈추시오, 이판대감!
박인빈 따라 들어온다.
이조판서 고개 숙여 박인빈에게 예를 갖춘다.
금부도사 서둘러 무관을 내린다.
이조판서 보다가 천천히 관복 입는다.
금부도사 무관을 업고 나간다. 나장들 나간다.
박인빈 : 사사로이 형신을 하는 것도 자네 당이 말하는 경장중 하나인가?
이조판서 : (입으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대감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박인빈 : 4백년 조선을 하루아침에 바꾸겠다 설쳐대니 그런 폭도들까지 날뛰는 게야.
이조판서 : (입으며)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그리 말씀하시다니요.
박인빈 : 국가 재정을 쥐어짜 무리한 천도를 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함인가?
이조판서 : (보며) 일굴 땅이 없어 밥을 굶기 일쑵니다. 사대부에 고용돼 십 년을 일해도
식솔들 보살필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습니다. 천도는 일굴 땅과 살 집을 주어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경강 이남의 고른 발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박인빈 : 그걸 꼭 도읍을 옮겨야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돈이면 이판이 말하는 것 열 번은 하고도 남겠네.
이조판서 : 그때그때 밥 한 끼를 베풀고, 공사를 일으켜 임시방편 일자리를 내는 것은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박인빈 : 솔직하시게. 한양 권세가를 내치고 그대들의 권력기반을 찾고 있다 왜 말하지 않는가?
이조판서 : 무학이 태조대왕께 이런 말을 했지요.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
박인빈 : (화를 억누르며) 감히 돼지라? 상놈 피가 섞인 서자라더니, 하는 말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구나.
이조판서 : 조선 백성 절반 이상이 상놈입니다. 제 몸에 그 피가 섞였으니 비로소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피 아닙니까?
박인빈 : (흥분하고 만다) 이 자가 그걸 말이라고...
이조판서 : 궐 밖을 보십시오. 여전히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 짐을 싸들고 몰려드는데,
이미 도성은 굶주린 백성으로 차고 넘칩니다. 양반 피만 흐르니 상놈들은 뵈지도 않는 겝니까? (쏘아보고 간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박인빈, 그 앞에 무관이 흘린 피가 낭자하다.
S#10. 궐문 근처 주막, 낮
사내1 술병 쭉 들이켜고, 상위에 탁 내려놓으면 옆에 엽전 닷 냥 놓여 있다.
사내1 엽전 들고 일어서 도술에게 다가간다.
다른 사내들 상 위에도 술병과 국밥그릇, 엽전 보이고, 옆으로 앉거나 줄지어 서서 엽전 받길 기다리는 무리들.
도술과 일꾼 몇이 엽전 나누어준다.
사내1 : 양반은 열 냥이고 우린 닷 냥? 이런 것마저도 사람 차별하는 거유?
도술 씨익 웃고 일꾼에게 눈짓하면 일꾼 사내1에게 슬쩍 엽전 꾸러미 쥐어준다.
사내1 : (만족스럽다) 아, 뭐해? 밥들 먹었으면 싸게싸게 일을 해야지!
S#11. 궐문 앞, 낮
궐문 앞에는 ‘고(告)’라 써진 깃발을 흔들어대는 백성들이 꽹과리, 징, 북 등을 쳐가며 모여 시위 중이다.
한 쪽에선 유인물을 인쇄해 행인에게 나눠 준다.
궐문 안으로 진입하려는 유림들이 팔짱끼고 막아선 군졸들을 밀며 실랑이한다.
유림1 : 넌 조선 백성 아니야? 사백년 도읍지를 누구 맘대로 옮긴다는 거야?
유림2 : 야 이 자식아, 격쟁은 우리 백성의 당연한 권리인데 왜 막고 지랄이야. 얼른 안 비켜?
* 격쟁(擊錚) :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임금 행차 시에 징, 꽹과리, 북 등으로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의 사연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엽전을 나눠받은 무리들 궐문 앞 격쟁에 합류한다.
사내1 : 그리 매가리 없이 쳐서야 구중궁궐 임금님 귀에 들리기나 하겠어? 쐬가 쪼개지도록 뚜드리란 말이여.
사내1, 꽹과리 빼앗아 미친 듯이 쳐대고, 따라서 커지는 북, 징 소리.
백성들 함성소리 커지고, 유림들 군졸들을 힘으로 밀어붙인다.
밀리는 군졸들.
궐문 열리고 방패를 든 군졸들 우르르 몰려나와 유림들 앞을 막아선다.
유림들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방패 든 군졸들과 실랑이를 펼친다.
유림1 : 어쭈, 해보자 이거지? 오냐, 오늘 날 잡았다, 날 잡았어!
유림2 : 이놈들, 이거, 너넨 애비도 없냐, 이놈들아!
꾀죄죄한 몰골의 아이 뛰어와 멀리 격쟁하는 모습을 보는 사내의 바짓단을 당기고는 손을 쑥 내민다.
보다가 주머니에서 엽전 꺼내 아이 앞에 앉아 손바닥 위에 올려주는 양만오.
머리 쓰다듬어주면 아이 좋아라 소리지르며 다른 아이들에게 뛰어간다.
양만오 : (일어서며) 천도를 한다고 정말 백성들 삶이 나아질까요?
도술 : (다른 이에게도 손 벌리는 아이들 보며) 몇 년간 대풍이 나 대갓집 창고선 쌀이 썩어나는데
굶주리는 자들은 늘어만 가고 있어.
양만오 : 모양 좋은 정책만으로는 절대 저 아이들의 배를 불릴 수 없습니다. (간다)
도술 : (따라가며) 오늘은 우리 선전 도중 30명에, 나머지 5개 시전에서 10명씩, 도합 80명만 우리 패거리이네만,
내일부터는 금난전권을 몰수당한 여덟 시전에서 80명, 육의전과 담합 중인 도고 사상인(私商人) 50명 해서
격쟁 규모가 300명을 넘을 거야.
양만오 : 불법으로 난전을 운영 중인 관리들에게도 우리 육의전이 눈감아 주는 대신
격쟁에 참여토록 압력을 넣어야겠습니다.
도술 : 천두가 제물포를 떠났다고 하네. 곧 도착할 거야.
양만오 : (멈춰 돌아보며) 포청에 다녀오지요.
* 선전(線廛) : 육의전 중에 규모와 자본력이 가장 우세한 수전(首廛), 비단을 취급.
* 도중(都中) : 일종의 동업조합
* 도고(都賈) : 매점(買占)
S#12. 포청 포도대장 집무실, 낮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화려한 가체.
눈이 휘둥그레지는 포도대장.
포도대장 : 여편네가 조참지네 가체를 그리 부러워하던데 어찌 알고...
양만오 : 시집을 가지 않은 계집의 머리카락으로만 만든 것입니다.
주위를 두른 떨잠은 모두 청나라에서 수입한 진귀한 것들입니다.
포도대장 : (짐짓) 어허, 흠... (엄하게) 허나 여인네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하여
임금께서 국법으로까지 금지시킨 것이 가체 아닌가...
양만오 : 해서 더욱 진귀해진, 조선팔도에 하나 뿐인 가체입니다.
저자에 값을 물으시면 능히 북촌 기와집 서너 채는 나올겝니다.
포도대장 : (놀라) 아니, 이게 그 정도인가? 하긴 자네가 귀하다는 것인데 여부가 있겠나만...
양만오 : 사모님께 희귀한 구경이나 시켜드리시라는 게지요. 기뻐하실 것입니다.
포도대장 : 응? 구경? (고이 모셔놓으며) 그래? 구경하는 거야 괜찮겠지, 뭐... 흠... 그래, 요즘 장사는 잘 되고 있지?
양만오 : (미소 짓는다) 저희 도중 배가 한척 들어옵니다, 영감.
S#13. 황집사 집 사랑채, 낮
쌓여있는 약재와 보관함들.
어지러이 널려 있는 의서들과 약탕기, 계량기, 침들.
황집사 노려본다.
소복 입은 이나영 수첩을 보며, 기억을 떠올리며 보고 중이다.
이나영 : 탕약을 음용한 후 일다경이 채 되지 않아 정신을 잃습니다. 맥이 뛰지 않는 것은 정신을 잃는 때와
대략 소요 시간이 같은데, 허나 이것은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황집사 : (문제 내듯) 다른 약재와의 혼합 비율 때문이냐?
이나영 : 흡수를 돕는 생강을 넣을 때가 약간 빠르나 크게 차이난다 할 수 없습니다.
황집사 : 연령에 따른 체력 차이라 보느냐?
이나영 : 아닙니다. 수표교에서 탕약을 먹은 자는 어제 그자보다 젊고 건장하나
오히려 맥박과 숨을 놓는 시간이 모두 짧았습니다.
황집사 : 허면?
이나영 : 표본간의 차이가 크지 않아 속단키는 어려우나...
연령보다는 탕약을 먹은 자들의 체질이 반응 시간을 좌우하는 듯합니다.
황집사 : ... 오늘은 마르고 예민하나 강건하고 상체가 발달한 자를 물색해야겠다. (일어선다)
이나영 : 하온데... 약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황집사 : ... 기별을 넣어야겠구나.
S#14. 포청 포도대장 집무실, 낮
탁자 위에 한성 지도 펼쳐 있다.
종사관 : (지도의 마포 가리키며) 첩보에 따르면 여기 마포에 밀수품을 내린 후 밤이 되길 기다려
목멱산을 넘을 거라 합니다.
포도대장 : (엄하게) 다시는 밀수범 따위가 발호치 못하도록 발복색원하시게.
박상규 : (O.L) 하오나 영감.
포도대장 : (분위기 깨졌다) 뭐? 이번엔 또 뭐? 첩보라잖아, 첩보!
박상규 : 어떤 첩보인지는 모르나 포청 군졸들을 마포로 모두 보냈다가 낭패를 치를 수 있습니다.
포도대장 : 왜? 어찌하여 그런가?
박상규 : 보름 전 큰 비로 청계천과 중랑천 수위가 높습니다. 이곳 두모포(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강 연안)에
밀수품을 풀어 작은 배로 중랑천을 거처 청계천을 거슬러 오른다면,
굳이 밤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물건을 옮길 수 있습니다.
포도대장 : 음...
종사관 : (눈치껏 나선다) 확실치 않은 추리만 가지고 어쩌자는 게야? 마포가 맞는다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포도대장 : 됐네! 됐어! (종사관에게) 시전 내부에서 흘러나온 확실한 첩보라 하지 않았나? 늦기 전에 어서 출발하시게.
종사관 예를 갖추고 나간다.
포도대장 일어서며 박상규에게 장부 하나 던져준다.
포도대장 : 자네는 이 일이나 맡지. (나가며) 천한 것들 뒤치다꺼리가 귀찮아지면 그땐 언제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박상규 : (구시렁거리며 장부 들춘다)
S#15. 포청 연무장, 낮
종사관과 군관을 따라 포졸들 일사분란하게 연무장을 빠져나간다.
포졸1 : (부럽다) 우와, 거 위세가 역도라도 토포하러 가는 듯합니다요, 형님.
박상규 : (장부 뒤적이다) 한성부에선 검험 결과 연락 온 거 없어?
포졸1 : 아직 없죠.
박상규 : (장부 보이며) 가자. 우리도 할 일이 있다.
포졸2 : 또 어디 백정이라도 뒈졌답니까?
S#16. 상가집 앞, 낮
도술 문 앞에 서 있다 양만오 오면 고개 숙이고 백립을 건넨다.
양만오 : (쓰며) 대렴(大殮,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시신을 묶어서 입관하는 의식) 준비는 마쳤습니까?
도술 : 그건 그렇네만 상황이 좋지 않네.
행수1,2 짜증스럽다는 듯 나오다 양만오 반긴다.
행수1 : 싸전 홍행수 놈 때문에 아주 죽겠어. 젯밥 처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니까.
행수2 :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그냥 두어서 쓰겄어?
S#17. 상가집 마당, 낮
어린 상주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다.
홍행수 마당에 서서 침 튀겨가며 일장 연설 한다.
홍행수 : 한성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북촌! 이 북촌 집값이 계속 오르면 올랐지 절대 떨어지진 않을 거라 하여
빚을 내어들 집 몇 채씩 사두셨지요? 또 경강상인 잡는다고 배들 사뒀지요? 화산으로 천도합니다?
집값, 배값 다 떨어집니다? 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집을 떠다 매고 갈 겁니까,
배에 바퀴를 달아 끌고 갈 겁니까?
행수들 : (웅성거린다)
홍행수 :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새파랗게 젊은 놈이 차기 총행수라니요.
돌아가신 총행수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올 일 아닙니까?
행수들 : (끄덕이며 웅성거린다)
홍행수 : 이 홍가가 절대 총행수 자리가 탐이 나 이러는 게 아닙니다. 풍전등화! 풍전등화 같은 우리 시전을 살리기 위해서
(가슴 치며)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나 홍가가 오직 하나! 희생정신! 희생정신으로다가 나섰다 이말이에요!
백립 쓴 양만오와 도술, 행수1,2 들어온다.
양만오 어린상주에게 문상한다.
행수1 : 말씀은 참으로 청산유수구만. 벌써 총행수라도 된 듯한 말툴세, 홍행수.
홍행수 : (자신만만하다) 많은 분들의 지지가 있는데 한사코 사양만 한다면, 시전을 걱정하는 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행 수2 : 다들 벌써 잊었어? 지난 통공(通共, 시전의 독점권을 박탈한 정책)에서 그나마 당신들 시전 살아남은 게
다 누구 덕이여? 우리 양행수 덕이여!
행수들 : (웅성거린다)
양만오 : (문상을 마쳤다) 그만들 하시지요. 어린 상주가 보고 있습니다.
행수들 : ...
양만오 : (내려서며) 다음 총행수 자리는 장례 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행수들 보며) 어서들 가시지요. 서둘러 염을 해야겠습니다.
행수1,2 가고, 행수들 하나둘 따라 일어난다.
홍행수 그 모습 못마땅한 듯 보다가, 양만오에게 다가간다.
홍행수 : (나직이) 너 요즘 마포에 자주 간다며?
양만오 : ...
홍행수 : 조심해라. 밀수로 잡히면 장 한 두 대로 안 끝나. (소리내어 웃는다)
양만오 : (팔 잡고 쏘아보며) 해서 되는 것과 아니 되는 것을 구분하셔야지요.
홍행수 : 뭐야?
양만오 : (쏘아보다가 딴청 피우며) 상가에서 그리 크게 웃어서야 되겠습니까?
홍행수 : (뿌리치며) 이 자식이 어디서... 시비냐? 해보자는 거야?
박상규와 포졸1,2 들어선다.
홍행수 반색한다.
홍행수 : 어이구, 좌포청 부장 나리 아니십니까?
박상규 : 네가 시전에서 쌀을 파는 홍이란 자냐?
홍행수 : (분위기가 이상하다) 예... 맞긴 한데... 예 오신 건 저기...
박상규 : (O.L) 같이 좀 가줘야겠다. 얘들아!
포졸들 홍행수 포박한다.
홍행수 : 아니, 이게 아니잖아... 뭔가 착오가...! (양만오 본다)
박상규 : 끌고 가라.
홍행수 : 양만오 이 놈!
박상규 돌아보면, 양만오 공손하게 인사한다.
박상규 그런 양만오 노려본다.
천천히 고개 든 양만오. 눈싸움 한 판.
S#18. 포청 마당, 낮
박상규 포도대장이 준 장부 보는데, 건성이다.
포졸1 압수한 소두(小斗, 닷 되들이 말)들 들고 온다.
포졸1 : (소두 보이며) 그 자식 속일 걸 속여야지. 보십쇼, 형님. (머리에 쑥 얹고는) 이게 원래 쑥 들어가야 하는데,
이게 이렇게...
박상규 : (장부 덮고) 그자가 선전 양만오와 시전 총행수 자릴 놓고 겨루던 자라 했었지?
포졸1 : (소두 머리에 얹은 채)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박상규 : (씁쓸하게) 그랬구만... 홍이란 자가 당한 거야...
포졸2 : (뛰어 들어오며) 형님, 크... 클... 클 났습니다요.
박상규 : ?
포졸2 : 두모포 장서방한테서 기별이 왔는뎁쇼?
박상규 : 정말이냐? 가자! (나서는데)
포졸1, 2 : 허헉! (정지된 듯 울상이다)
박상규 : (돌아보며) 뭐해? 시간이 없다!
포졸1 : 아이고, 형님! 제발! 안됩니다!
포졸2 : 다섯도 안 되는 병력으로 뭘 또 어쩌시려굽쇼...
S#19. 마포나루, 낮
사내들 선박에서 짐 내린다.
종사관과 포졸들 에워싼다.
당황하는 사내들.
종사관 : 네 이놈들! 벌건 대낮에 밀수를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 아니냐? 수색해라!
사내2 : 밀수라니요? (품에서 서류 꺼내 보이며) 분명히 허가를 받고 들여오는 물건들입니다, 나리.
종사관 : (서류 받아보고) 서류가... 맞구나... (포졸들 보면)
포졸들 물건을 조사하나 특별한 게 없다는 표정들이다.
종사관 : ... 분명 이곳 마포나루로 온다 하였다! 샅샅이 뒤져라!
포졸 : (달려와) 종사관 나으리, 두모포로 작은 배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답니다요.
종사관 : 두모포로?
S#20. 저자, 낮
박상규 포졸들 넷과 함께 달려간다.
포졸1 : 형님... 형니임! 이대로 갔다간 맞아죽기 십상입니다요. 밀수꾼들이 기 십명은 된다지 않습니까?
포졸2 : 마포로 전령을 보냈으니 종사관께서 연락이 있으실 거 아뇨? 본대가 온 연후에 나서든가 해야지요. 이게 뭡니까?
포졸1 : 맞습니다요. 뭐 밀수품 좀 들어온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박상규 : (자기도 답답하다) 시끄러워. 누가 그걸 몰라?
포졸2 : 아씨, 미치고 환장하것네.
S#21. 두모포, 낮
몽둥이들을 든 사내들 경계 속에 큰 배에서 짐을 내려 작은 배에 옮겨 싣는다.
천두 : 어서 어서들 내려. 마포로 간 놈들이 언제 몰려올지 몰라.
(상자 하나 가리키며) 그거 이리 줘! 내가 직접 들고 갈 것이니까.
일꾼 : (상자 하나 따로 내려주다가 멈칫한다) !
천두 : 왜? (상자 메고 돌아본다)
박상규와 포졸 넷 달려온다.
놀라는 천두.
박상규 : 멈추어라!
천두 : ... (놀라 정지된 듯)
박상규 : ...
천두 : (피식 웃고 다시 돌아보며 계속한다) 됐다. 어서 내려라!
박상규 : (당황해 포졸들 보며) 뭣들 하는가? 당장 포박하라!
포졸들 머뭇거린다.
일꾼들을 계속 일한다.
천두 돌아서 박상규 본다.
박상규 : (천두 노려보며) 국법 알기를 우습게 아는 놈이구나. (포졸들에게) 저놈부터 포박해라.
포졸들 천두에게 창을 겨누며 다가선다.
천두 씨익 웃더니 창 끝 턱 잡아 당겨 포졸1 멱살 잡아 머리로 들이박는다.
포졸들 달려드나 천두를 당해내지 못한다. 바닥에 뒹구는 포졸들.
천두 천천히 박상규에게 다가간다.
박상규 멈칫하는데, 천두의 주먹이 벼락같이 날아와 박상규 안면에 적중한다.
나가떨어지는 박상규.
천두 : (손 털고) 좌포청에 뽑히지도 않는 칼을 들고 다니는 멍청이가 있다더니 바로 너구나?
(배쪽으로 가며) 아, 뭣들 해? 어서 끝내고 투전판이나 가자.
박상규 : 어, 코피? (코피 훔치며 일어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놈.
천두 피식 웃더니 냉큼 날아 박상규의 복부 걷어찬다.
또 나가떨어진다.
신음하며 뒹구는 포졸들 눈치 보며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포졸1, 2 : (뒹굴며) 아이고... 형님... 진즉에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하지...
박상규 : (배 움켜쥐고 신음) 욱... 진짜... 아프다...
천두 : 아 글쎄, 누울 자릴 봐가며 다릴 뻗으라니까.
박상규 :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애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놈. 포청 관리를 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비장하고 멋진 박상규 표정에 어느새 또 날아드는 천두의 발, 여지없이 또 나가떨어진다.
꿈틀거리다가 일어서려는데, 천두 장도 뽑아 든다.
천두 : 또 덤벼봐. 이번엔 아주 발모가질 끊어 줄 테니까.
박상규 : (진짜 고통스럽다) ...
멀리서 보는 시선.
소매만 좁힌 도포 입은 한성부 주부 서주필이다.
서주필 : (멀리서 보며 나직이) 일어서시게...
박상규 : (이정도면 할만큼 했다) ... (털썩 눕고 만다)
천두 : (피식 웃고) 생각 잘 했어. 구차해도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하지.
(창을 쥐어보려는 포졸 걷어차며 일꾼들 향해) 다 실었어?
일꾼들 : 예.
고통스럽고도 허탈한 박상규. 항시 세상은 마음과 다르다.
신음하면서도 하늘을 보고 웃는다. 너무나 맑고 깨끗한 하늘.
천두 : (상자 등에 메고) 출발할까나... ?
서주필 어느새 천두 앞에 서 있다.
천두 미처 어째보지도 못하는 사이 서주필의 주먹이 천두 안면에 적중한다.
바닥을 뒹구는 천두, 서주필 몸을 일으키려는 천두 명치를 다시 한번 가격한다.
움찔움찔하나 일어나지 못하는 천두...
서주필 천두의 머리를 밟고 포위해오는 사내들 쓰윽 보자, 사내들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서주필 : (박상규 보고) 괜찮은가? (천두 툭툭 치며) 걱정마. 안 죽었어.
박상규 : (신음에 섞여) 형님이 어떻게 알고...
서주필 : 우리 한성부에서도 좇던 놈이야.
박상규 : ?
서주필 갑자기 옆에 떨어진 창을 들고 배를 향해 던진다.
우직 소리를 내며 배 옆구리를 관통하는 창, 도망치려다 놀라 얼어붙은 사내 하나.
이어 들리는 함성소리, 종사관이 포도군사 몰고 달려와 모두 검거한다.
박상규 가까스로 몸 일으키는데, 천두가 매려던 상자에서 나온 작은 주머니 보인다.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온 쥐망초 열매.
S#22. 포청 포도대장 집무실, 낮
포도대장 불쾌한 얼굴로 서주필 본다.
박상규 묵묵히 있다.
포도대장 : (흘낏) 한성부에서 밀수범을 조사하겠다?
서주필 : 압수한 밀수품도 인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좌포장 어른.
포도대장 : 음... (쟤네 의도가 뭔가?)
종사관 : (눈치껏 나서며) 그리는 아니 됩니다. 분명 우리 좌포청이 먼저 인지한 사건입니다.
포도대장 : 아무래도 그렇지? 게다가 (갑자기 엄하게) 우리 좌포청 종사관이 일당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왜 한성부에서 그 공을 다 가로채려는 게야?
서주필 : ... 조사를 마치면 분명히 돌려보내겠습니다, 좌포장 어른.
포도대장 : 음...
종사관 : (또 눈치껏 나서며) 그걸 어찌 믿으란 말인가? 게다가 과정에 밀수품이 분실될 우려도 있습니다, 영감.
포도대장 : 분실되면 큰일이지! 한성부가 형조에 수사 보고서 먼저 내버리고 그때 분실했다 하면 우린 뭐가 되는가?
(일어서며) 내 밀수범을 잠시 데려가는 것은 허락하네만, 중요한 증거가 되는 밀수품은 우리가 보관하겠네.
서주필 : ...
S#23. 포청 옥사, 낮
옥 안의 홍행수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노려보면 양만오 다가와 앉는다.
홍행수 : 총행수 자리가 그리도 탐나더냐? (비웃으며) 이놈아, 그렇다고 동패를 고발한 배신자를 누가 믿고 따를 것 같아?
양만오 : 마포로 배를 부린다 밀고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굴 배신자라 욕하시는 겝니까.
홍행수 : ...
양만오 : 더욱이 홍행수께서 자행한 일은 누군가 발고할 일이었습니다.
홍행수 : 이윤 먹자고 됫박 좀 속인 걸 발고하다니, 네 놈은 장사치가 아니더냐?
양만오 :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홍행수 : 뭐야?
양만오 : 비단, 금, 은, 보석에 폭리를 얹어 파는 것은 상관할 바 아닙니다. 돈 많은 양반님네들이 그것을 사 모으기 위해
전답을 내다 판다면야 저로서도 환영할 일이지요. 허나! (매섭게) 곡식은 다릅니다!
가난한 백성 모두 하루를 버티기에 꼭 필요한 것이 곡식 아닙니까!
홍행수 : (비웃으며) 주제를 알아라, 이놈아. 돈만 된다면 난 내 마누라도 팔아치우겠다.
저자거리 굴러봐야 십년도 안 된 애송이가 감히 나랏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가난 운운하다니 우습기만 하구나.
양만오 : 마음껏 웃으십시오. 허나 앞으로 그리 생각하는 장사치는 도성 내에 발붙이기 힘들 것입니다...
홍행수 : 이런 육시를 할 놈...
양만오 빙긋 웃더니 돌아선다.
S#24. 옥사 앞, 낮
양만오 옥사를 나와 포청 문으로 향한다.
천두 온몸이 묶인 채 끌려온다.
양만오 굳은 얼굴로 그 모습 본다.
요란스럽게 저항하며 끌려오던 천두 양만오 보고는 돌연 조용해진다.
양만오 천두가 지나가자, 옥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뒤돌아본다.
S#25. 포청 행랑, 낮.
포졸1, 2 치료차 누운 김에 아예 자고, 앉아 주머니 속 열매 꺼내 보는 박상규.
상처 치료를 위한 고약을 가져오던 의원, 박상규가 내미는 주머니 본다.
천두의 상자에서 나온 주머니 속 열매들.
박상규 : 아까... (상처 가리키며) 엄청 힘들게 압수한 밀수품인데, 어떤 거예요?
포청의원 : (대수롭지 않게) 팔각이잖아.
박상규 : 팔각이면... 소화제잖아요?
포청의원 : (얼굴 상처 봐주며) 복부 팽만감이나 구역질을 완화하고 식욕을 증진한다 하지.
궐에서 쓴다 소문 돌고는 민간에선 금을 줘도 못 구할 지경이여. 임금 드시는 불로초라나 뭐라나
약재상들이 떠벌리는 게 조보(朝報, 조선시대 전근대적 관보 겸 신문)에 나는 통에...
에잉, 뭘 정확히 알고들 떠들어야지...
박상규 : 비싼 거구나! 그래서 청나라 산을 밀수했나? 헌데 팔각은 본시 향이 강한 약재잖아요, 이건 향이 나지 않습니다.
포청의원 : (향 맡아보더니) 그러네? 희안하네?
S#26. 포청 서가, 낮.
등 아래 박상규 서책(본초강목) 뒤지며 열매 살피고 있다.
서주필 : (들어서며) 역시 자넨 책을 보는 것이 어울려.
박상규 : (피식 웃으며 돌아본다) 형님.
서주필 : (다른 서책들 펴보며) 뜻 없이 세월만 보내는 짓은 이제 그만하고 문과에 응시하시게.
자네 정도면 한두 해면 충분해.
박상규 : 서얼 주제에 포청 군관도 감지덕지죠.
서주필 : (똑바로 보며) 우리와 같은 서얼인 이판은 금상을 도와 세상을 바꾸고 있어. 우리도 힘을 보태야하지 않겠나?
박상규 : 세상 바꾼다 조정 간 자들이 어디 한둘이야? ... 난 이 일이 좋아...
서주필 : (회상하듯) 청나라에서 만난 자넨 늘 이루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 보였지.
낡은 정치의 모순과 불합리를 거침없이 따지던 열혈청년을 무엇이 이토록 회의하게 만들었나...
박상규 : 형님은 늘 나를 과대평가하더라...
서주필 : (박상규 두 눈 보며) 내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난 정확하지.
박상규 : (눈 피하며) 이것 때문에 날 찾았어? (주머니 던져 준다)
서주필 : (받아보면 쥐망초 열매, 표정 심각해진다)
박상규 : 검험하느라 바쁘신 한성부 주부께서 왜 밀수품에 관심이 많은 거야?
서주필 : ...
박상규 : 서책을 아무리 뒤져도 없고... 수상해. 뭔가 있지?
서주필 : ... 내일 검험실에 좀 들르겠나?
박상규 : ?
S#27. 저자거리 약방 앞. 낮.
날카로운 눈빛으로 급히 가는 황집사.
남장한 이나영 뒤를 따른다.
약방에서 쫓겨나 팽개쳐지는 노파와 딸.
이나영 지나치다가 멈춘다.
딸 : 제발 살려주세요. 며칠째 일어서지도 못하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습니다.
일꾼 대꾸도 않고 약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황집사 이나영을 보고 고개를 젓는다.
이나영 : 아직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황집사 : ...
딸 : (행인들에게) 저희 어머니 좀 살려주십시오. 닷 냥이면 치료를 해준다는데, 저흰 돈이 없습니다...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이나영 : (노파 옆에 가 앉으며) 이리 앉히시게.
딸 : (영문 모르지만)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나영 딸을 도와 노파를 기댄어 앉히고 치마 들추면 무릎이 심하게 부었다.
마지못한 황집사 다가와 선다.
이나영 : (황집사에게) 관절염입니다.
황집사 : (고개를 끄덕인다)
딸 : 예, 맞습니다, 의원님.
이나영 : 고름이 차 썩은 듯합니다.
황집사 : (역시 끄덕이며) 맞다. 위급한 상황이다. 어찌 하겠느냐?
이나영 침통에서 침을 꺼내 부은 곳을 찌르자, 검붉은 피고름이 베어 나온다.
부은 곳을 눌러 피고름을 빼다가,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낸다.
딸은 놀라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주변으로는 구경꾼 몰려든다.
이나영 : (고름을 빠진 무릎 주변에 침을 놓고는) 북한산에 가면 오갈피나무를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네.
그 뿌리를 달여 모친께 드리면 상처를 치유하는데 좋을 것이야.
딸 : (감동해 눈물 흘리며)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황집사 가고, 이나영 얼른 뒤를 따른다.
이나영 : (바짝 따라붙어) 증상이 심해 생각보다 지체되었습니다. 서두르겠습니다.
황집사 : (빠른 걸음으로 가며 무섭게) 얼굴이 알려지는 건, 네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명심해라, 사사로운 감정을 보아 넘기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S#28. 박상규 집 사랑채, 밤
양만오 서안에 비단으로 쌓인 문서들을 올려놓는다.
양만오 : 객주와 상인간의 거래를 구속하는 주인권이라는 문서입니다.
박인빈 : ...
양만오 : 자체로도 액면가보다 비싸게 거래되고, 객주로부터 이익의 일정비율을 거둬들일 권리를 표시합니다.
무기명으로 매매와 양도가 가능하지요. 큰일을 위해 써 주십시오.
박인빈 : 경장이란 허울 좋은 말로 금상의 눈을 흐리고 국력을 소모하는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거늘...
장사치이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들보다 낫구나!
양만오 : 내일 밤 우암 선생 제자들의 회합이 있다 들었습니다.
박인빈 : ... 자네를 반기지 않는 자들이 있을 터인데?
양만오 :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조아린다)
박인빈 : 그래... 물건은 어찌 되었느냐?
양만오 : 물건을 들여오던 자가 좌포청에 검거되었습니다.
박인빈 : (표정 굳으며) 말썽이 생기면 네 목이 날아갈 것이다.
양만오 : 틀림없이! 물건은 보내드릴 터이니 심려 놓으십시오.
S#29. 박상규 집 대문 밖, 밤
박상규 솟을 대문을 올려다본다.
위압감마저 드는 높은 대문, 박상규는 쉽게 대문을 열지 못한다.
문 열리고 나오는 양만오, 허리 숙여 인사하고 지나친다.
박상규 : 또 누굴 잡아넣어 달라 야밤에 관리의 집을 찾으시는가?
양만오 : (멈춘다) ...
박상규 :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시전 우두머리가 되었으면 이미 충분히 배를 채우지 않으셨는가?
양만오 : 제 배 하나라면 오래전에 가득 채웠습니다.
박상규 : 자네가 다른 사람 배도 채워 주고 다니는가?
양만오 : ... (돌아보며) 아씨께서 아끼시던 자들의 배입니다, 군관나리.
박상규 : (그제야 돌아보며 노려본다)
양만오 : (인사하고 간다)
박상규 : ... 아씨라 했나...
대문 천천히 민다.
S#30. 박상규 집 대문 안, 회상, 낮
요란한 문소리 나고 인사불성의 박상규 하인들에게 끌려온다.
대청에 앉아 간간히 웃으며 담소하던 박인빈과 이참판 돌아본다.
박인빈 : (찌푸리며) 어디서 찾았느냐?
하인 : 혜정교 아래 개천가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박인빈 : (혀를 차며) 뒤뜰에 묶어두고 물 이외에는 일절 주지 말거라.
(민망하여) 서얼 팔자라고 저리 파락호가 되어 집안을 시끄럽게 하니... 쯧쯧...
이참판 : (끌려가는 박상규 보며) 자제분 글재주가 비상하다하여 제 여식이 무척이나 부러워하더이다.
박인빈 : 저 역시 그 점을 신통히 여겼으나, 스스로 울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못난 녀석이 무에 쓸모 있습니까...
S#31. 박상규 집 뒤뜰, 회상, 낮
나무에 묶여 있는 박상규, 앞에 놓인 물그릇에 닿으려 애쓰는데 누군가 와 선다.
보면 해맑게 웃는 이나영, 앉으며 물그릇을 슬쩍 밀어준다.
박상규 히죽 웃으며 애써보지만 그래도 닿지 않자 이나영보고 헤헤거린다.
이나영 물그릇 들어 입에 대준다.
박상규 몸을 일으켜 물그릇에 입을 대려는데, 이나영 슬쩍 옆으로 움직인다.
박상규 술기운인지, 장난이 재미있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따라서 움직인다.
계속해서 비켜나는 이나영, 따라가는 박상규.
어찌보면 연인끼리의 장난인 듯...
박상규 : (눙치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오.
이나영 : (당돌하게) 재미있지 않습니까?
박상규 : (계속 눙친다) 무엇이요?
이나영 : 보십시오. 한 길도 넘던 끈이 이제는 한 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박상규 : (보면 어느새 나무를 한 바퀴 돌았다. 설마 이 낭자가... 진지하게 변하며) 지금 나한테... 설교를 하고 싶으신 게요?
이나영 빙그레 웃으며 물그릇을 입에 대준다.
박상규 볼 뿐 마시지 않는다.
이나영 : (물그릇 놓고) 서얼의 설움이 깊을까요? 계집의 설움이 더할까요?
박상규 : 무슨 소릴 하고 싶으신 게요?
이나영 : (천연덕스럽게) 그대로는 눕지도 앉지도 못하실 걸요? 도령께서 살고 계신 세상은 고만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박상규 : (피식 웃으며) 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오.
이나영 : 스스로를 얽매고 자신을 핍박하는 장부는 계집이 보기에도 옳지 않아 보인다는 말씀을 드리는 겝니다.
박상규 : ...
이나영 : (장난스럽게) 칼을 가져와 끈을 끊어야 하나?
S#32. 박상규 집 뒤뜰, 밤
박상규 나무에 가만히 손 대며 나직이 한숨 쉬는데, 물 끼얹는 소리.
돌아보면 엄씨 물 흠뻑 뒤집어쓰고 서 있다.
여노비 : 강정 만들 찹쌀 홀랑 술 사 먹었으니, 어쩔 거야, 이년아?
박상규 : !
엄씨 : (취했다) 미안하다, 이년아. 그래도 이년아, 내가 너보고 술을 사 달랬어, 밥을 사 달랬어? 왠 참견이야?
나 혼자 술도 다 먹고 욕도 다 먹으면 되잖아, 이년아!
박상규 : ...
여노비 : (가슴 치며) 내가 미쳐. 어유, 저 웬수뎅이...
팩 돌아서 부엌으로 들어가면, 엄씨 히죽 웃고 돌아선다.
박상규 : 엄마...
엄씨 : (몹시 반기며) 상규야, 아이구 우리 아드님 퇴청하셨네. (비틀거린다)
박상규 : (얼른 부축하며) 엄마, 많이 취했어... 왜 이렇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어요.
엄씨 : 너는 알지? 내가 술 좋아해서 마신 거 아니야.
안마시면 우물물 길을 때, 가마솥 닦을 때, 허리가, 어깨가 너무 아파서 그래...
박상규 : (미소 지으며) 들어가 계세요. 마님 문안 드리고, 한 사발 받아다 드릴게요. 예?
엄씨 : 그래, 그래, 마님... 갈수록 차갑게 지랄 맞은 구석이 늘어서 그렇지... (회상하듯) 마님... 좋은 분이다.
내 대신 너라도 마님께 잘해야 해. 요즘같이 굶어 죽는 사람 천지인 세상에,
내가 너 하나 낳은 걸로 이리 등따숩고 배부르게 지내는데...
(농담인 듯 진담) 도련님, 제발하고 대감마님 뜻에 따라 번듯하게 사세요.
엄씨, 대답을 듣고픈 듯 박상규 얼굴 보고 있지만,
박상규 대꾸 않고 엄씨 부축해 간다.
S#33. 장리꾼 점방 안, 밤
이나영 약탕기에 쥐망초 열매 넣는다.
황집사가 두 눈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앉아 있다.
한부자 : 삼일 안에 원리금을 다 갚지 못하면 솜털이 막 송송한 네 딸년을 내 대신 거두겠다, 이 놈.
(손짓하면 왈패2, 3 사내를 끌어낸다)
S#34. 장리꾼 점방 마당, 밤
패대기치고 짓밟는 왈패2, 3. 대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들어선다.
S#35. 장리꾼 점방 안, 밤
왈패2, 3 들어서는데,
황집사 흔들던 몸 멈추고, 감았던 눈 뜬다.
이나영 대침 들고 천천히 일어선다.
한부자 고개 갸웃하고, 왈패2 그런 한부자 시선 따라 옆을 보면,
이나영 무표정한 얼굴로 왈패3의 목에서 대침 뽑아낸다.
스르르 스러지는 왈패3, 왈패2 황당한 얼굴...
그러나 미처 손을 써보기도 전에 이미 대침이 왈패2 목 아래를 파고든다.
S#36. 박상규 집 사랑채 앞 뜰, 밤
박인빈 : (주인권 건넨다) 이것이면 식솔 걱정은 덜 수 있을 것이네.
강재순 : (받고) 고맙습니다, 대감. (인사하고 돌아간다)
박상규 오다가 강재순과 목례 나누며 스친다.
박인빈 그런 박상규 보며 혀를 찬다.
박인빈 : 밀수범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꼴 좋구나.
박상규 : 송구합니다... 마님.
박인빈 : 언제까지 마님이라 부를 테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야?
박상규 : (마음이 그리 되질 않는다) ...
박인빈 : (다 못마땅하다) 형조에 자리를 봐놓을 터이니 당장 그만 두거라!
서얼이라 하나 엄연한 당상관의 자식이 포청 군관이 뭐냐, 군관이...
박상규 : 저는 그 일이 좋습니다.
박인빈 : 모자란 놈. 정승자리를 넘보는 이판 같은 서얼 놈도 있는데 어찌 그리 허약한 소리만 지껄이는 게야.
내가 천년만년 당상관일 듯 싶으냐? 포청 군관으로 평생 살아 니 천한 에미 술이라도 맘껏 멕일 수 있을 듯 싶어?
박상규 : ...
박인빈 : 에미 닮아 한심하단 소리 듣기 싫거들랑 당장 때려쳐! (들어간다)
박상규, 고개를 떨군다.
S#37. 장리꾼 점방 안, 밤
이나영 한부자 미간 사이에 꽂혀있던 침을 뽑자 한부자 정신을 차린다.
벗겨진 상체 곳곳에 꽂혀있는 침들.
이나영 탕약 옆에 놓여있는 작은 그릇에 담긴 가루약들을 뭉쳐 환약을 만든다.
한부자 : (사태 파악하고) 살려주시게...
황집사 : 그 어떤 풀독도 해독할 수 있는 환약일세. 탕약 후에 입에 넣을 것이니 뱉지나 마시게.
이나영 탕약을 입에 갖다 대자, 한부자 기겁한다.
필사적으로 입을 다무는 한부자,
이나영 귀 밑에 침을 찔러 넣으면, 벌어지는 입.
한부자 : (입 벌어지며 흐느낀다) 나 죽으면 아직 시집도 못 간 우리 딸년들을 누가 돌봅니까... 딸년만 줄줄이 넷입니다...
이나영 : (흔들리는 눈망울)
황집사 : 이 년!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연연하지 말도록 그리 일렀거늘!
다시 무심하고 차가워진 이나영 한부자 혀 밑으로 침 찌른다.
혀까지 굳은 한부자 이나영이 주는 탕약을 비운다.
이나영 곧 환약을 입에 넣는다. 필사적으로 환약을 삼키는 한부자.
황집사는 그런 이나영을 쏘아본다.
S#38. 이나영 옛 집, 밤
도술 : 천두가 한성부로 이송됐어. 포청 사건을 한성부에서 맡아간 것이 영 수상하네.
양만오 : 상천이를 불렀습니다.
도술 : ... 그래야겠지. 어쩔 수 없지.
양만오 : 이 집은 어찌되어가고 있습니까?
도술 : 첩보(소유권 이전을 증명하는 문서)가 곧 나오네.
양만오 : ... (회상하듯) 6년 숙원이었습니다.
도술 : ... 장사치가 역도의 집을 사든 재상의 집을 사든, 집은 아무 상관없어. ... 허나 역도의 식솔을 찾는 건 다른 문제야.
양만오 : ...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도술 : 어련하겠나. (간다)
양만오 우물을 짚고 서서 휘 둘러본다.
S#39. 이나영 옛 집, 낮, 회상
피투성이 양만오 멍석말이 당한다.
양만오부: 이런 정신나간 놈아, 니놈이 뭔 짓을 저지렀는지 아직도 모르겠냐?
이나영 : (다가와) 그만 하세요. 이만하면 양서방도 잘못을 알 거에요.
양만오부: (안절부절 못해) 애기씨...
양만오 :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거들먹거리는 양반 몇 놈 혼내줬습니다. 그게 잘못입니까?
양만오부: 입 다물지 못해! 애기씨, 이놈을 내버려뒀다간 대감마님께 큰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요.
이나영 : 인간만사새옹득실. 누가 될지 득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양만오부: 예?
양만오 : ...
이나영 : (하인들에게) 어서어서 멍석을 풀어주세요. (총총히 사라지고)
S#40. 이나영 옛 집 우물가, 낮, 회상
양만오 얼굴을 씻는다.
이나영 : 양반들을 혼내주니까 속이 시원하던가?
양만오 :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나영 : (끄덕이며) 시원치 않았단 말이지?
양만오 : ....
이나영 : 그자들은 이제 자네가 두려운 나머지 같은 잘못을 다시는 안 할까?
양만오 : (힘없이 고개 젖는다)
이나영 : 그럼 됐네.
양만오 : (답답하다) 되긴 뭐가 됐단 말씀입니까?
이나영 : 주먹을 쓰는 것으론 속이 후련하지도, 두렵게 하지도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그럼 되었다구.
(웃으며 일어서 간다)
양만오 : (소리쳐) 그럼 뭘 어찌해야 합니까?
이나영 : ...
양만오 : (울분에) 가르쳐 주십시요. 뭘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이나영 : (가면서 돌아보면서) 그걸 왜 나한테 묻누? 소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얻을 수 있을까?
(빙그레 웃으며 총총히 사라지고)
양만오 분하다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 본다.
S#41. 이나영 옛 집 우물가, 밤
우물가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는 양만오. 인기척에 눈을 뜬다.
상천 : 상천입니다.
양만오 : 천두가 한성부로 붙들려갔다. 대업을 위한 희생은 불가피한 것!
이제 어릴 적부터 우리와 동고동락했던 천두는 이 세상에 없다!
상천 : ...
S#42. 검험실, 낮
천을 들추고 왈패1 시신의 입을 벌리는 서주필.
쌀 주머니 물려있고, 박상규 애도하며 꺼내면 검게 변해있다.
서주필 : 유일한 사후징후인데... 것도 이틀은 기다려야 쌀이 검어져.
박상규 : 적어도 사후 이틀간은 사인을 밝힐 수 없는 완벽한 독이네.
서주필 : (다른 천을 들추며) 수표교에서 찾은 자라 했지.
박상규 : (끄덕이고 애도하며 물려있는 쌀 주머니 보면 검다) 이자도 역시...
서주필 두 시신의 배위에 팔각과 쥐망초 열매 올려 놓는다.
서주필 : 하나는 어제 자네가 압수한 열매이고 다른 것은 팔각이야. 맞춰봐.
박상규 : (둘 집어 냄새 맡다가 고개 갸웃한다) 둘 다 비슷한 향이 나는데?
서주필 : 잘 살펴봐.
박상규 : (모르겠다) 둘 다 팔각 아니야?
서주필 : (왼 손 가리켜) 그것이 압수한 걸세. 어제 받아서 하루 동안 팔각과 함께 섞어 두니 팔각 향이 묻은 게지.
박상규 : (열매 보며) 도대체 뭐야? 포청의원도 모른다 하고, 본초강목을 아무리 뒤져도 알 수가 없어.
서주필 : ... (심각하게) 쥐망초 열매라는 독이야. 대국 남만에서 나는 것인데 구리개 약방골목에서도 아는 자가 없더군.
박상규 : (쥐망초와 시신들 번갈아 보며) 그럼 이자들 모두 팔각인줄 알고 음용을 했다?
서주필 : (다른 문을 열며) 단순히 그런 사건이라면 좋겠는데... 이것들을 보게.
따라 들어가며 놀라는 박상규.
여러 구의 시신들 하나같이 입에 물려 있는 쌀이 검게 변해 있다.
박상규 : 우포청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더 있었단 말이야?
서주필 : (끄덕이며) 문제는 팔각이 궐에서 주로 쓰이는 귀한 약재란 걸세.
박상규 : (시신들에 애도하다가 놀라) 그럼 궐 안의 팔각에도 쥐망초 열매가 섞여 있단 말입니까?
서주필 : 아직은 아니네만, 만약 쥐망초 열매가 팔각에 섞여 발견되는 날엔 내의원 제조는 살아남지 못하겠지.
임금이 드시는 약재에 독이라니...
박상규 : (바짝 긴장한다) 현재 내의원 제조라면 이판대감 아닙니까?
서주필 : 맞아. 지금 조정에서 가장 주목 받는 분이지. 도읍지 천도, 시전혁파 그리고 군역에 이르는 모든 경장이
이판대감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네. 게다가 금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경장을 반대하는 무리들에겐 눈엣가시 같겠지.
박상규 : 그렇다면 그젯밤 이판을 습격한 자객과 밀수범의 배후가 동패란 말입니까?
서주필 : (심각하게) 아마도... 자네가 날 도와야겠어. 일단 밀수된 열매를 모두 수거해 주게.
이리 가져오기 어렵다면 차라리 불태워버려.
박상규 : 그런 거라면 한성부 판윤대감께 말씀드리면 빠르지 않습니까?
서주필 : (씁쓸한 미소) 그렇지, 헌데... 이 사건을 다룸에 몹시 조심스러운 점이 있어. 시파의 핵심인 이판대감을
노리는 사건 수사에, 판윤대감을 비롯한 도처의 벽파당에게 도움을 청하기 곤란하다는 점일세.
박상규 : 벽파당...
삽입컷) 박인빈 : (E) 밀수범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서주필 : 그러니 자네 역시 벽파당인 좌포장 영감의 시선을 조심해야 할 것이야.
사령1 : (급히 들어와) 주부어른. 연지동에서 또 시신이 발견됐다합니다요.
박상규 : !
S#43. 황집사 집 사랑채, 낮
‘父之讐弗與共戴天’
(부지수불여공대천,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예기(禮記)’에 나온 말. ‘불구대천지원수’와 같은 뜻)
소복 입은 이나영 붓을 놓고 화선지를 밀어 놓으면 이미 같은 글귀 여러 장이다.
이나영 다시 화선지 하나 당겨 놓는데, 황집사 들어선다.
황집사 : 하루에 백번 천번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 글을 써봐야 소용없다.
이나영 : ...
황집사 : 사사로운 감정 하나에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나영 : 명심하고 있습니다.
황집사 웃옷 벗는다.
온몸에 경락을 표시한 점들을 잇는 경락선이 문신되어있다.
황집사 : 목뒤 머리털이 돋은 경계에서 닷 푼 올라가 우묵한 곳이 아문혈이다. 단전의 기가 처음 거치는 혈로,
한 치를 찌르면 생문이고 세치를 찌르면 사문이다. (장침 하나 꺼내주며) 사문을 찔러라.
이나영 : (놀란다) 어르신을... 죽이라 그 말씀입니까?
황집사 : 이 년! 그새 나에게 연민이라도 생겼더냐?
이나영 : 어르신!
황집사 : 시간이 많지 않다. 사사로움을 일으키는 모든 과거는 우리에겐 사치에 불과하다.
이나영 : ...
황집사 : 관계도 없는 이에 대한 연민 역시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나영 : 그 역시... 제 자신에 대한... 연민과 미련 때문입니다.
황집사 : ... 너에게 남은 연민과 미련 모두 제거하란 뜻이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너도, 나도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는 걸 잊었느냐!
이나영 침 집고 아문혈에 침을 한 치 정도 찌른다.
부릅뜬 황집사의 눈.
이나영... 이어 세치 끝까지 찔러 넣는다.
황집사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해간다.
S#44. 장리꾼 점방 안. 낮
죽은 한부자 벌어진 입에 쌀 주머니를 물리는 서주필.
박상규 왈패2, 3 시신 앞에서 애도한다.
서주필 : 돈이라면 인신매매도 자행하는 장리꾼 패거리들이니 너무 어여뻐 말게.
박상규 : 이자들도 모셔야할 어미아비와 돌봐야할 자식들이 왜 없겠습니까...
서주필 : 불오기인(不惡其人)이나 오기의(惡其意)라... (사람은 미워할 수 없으나 그 죄는 미워하라, 공자의 말을 뒤집은 말)
박상규 : (시신 만지다) 온몸에 경직이 온 것이 사망한 지 하루를 넘긴 듯합니다.
(한부자 벌린 입 보며) 그 자 입은 형님이 열었습니까?
서주필 : 아닐세. 입을 벌린 채 죽어있었는데?
박상규 한부자 입 근처를 살피다 턱 밑에서 뭔가 손에 닿는 것을 느낀다. 뽑아내면 아주 가는 금침.
서주필 다가와 본다.
박상규 : 하악혈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기력이 없는 환자에게 억지로 입을 벌려 약을 먹일 때 찌르는 혈입니다.
서주필 : 그정도 솜씨라면 침만으로도 손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박상규 : 그런데도 굳이 독을, 그것도 다른 독이 아닌 쥐망초 열매를 쓴다는 건,
여럿을 상대로 쥐망초 열매의 독성을 시험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서주필 : 독성을 시험한다?
박상규 : (침 건네며) 지금 당장 그 열매를 처리해야겠습니다!
S#45. 포청 마당, 낮
포졸 1,2 밀수상자들 태운다.
박상규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본다.
박상규 : 다 태워버린 거야? 내게 묻지도 않고 태우면 어떡해? 누가 시켰어?
포졸1 : 갑자기 왜 화를 내요? 포도대장영감께서 직접 지시하신 겁니다요.
박상규 : 이게 우리가 압수한 밀수품 전부야?
포졸2 : 아유, 그런 건 저희야 모릅죠. 쌓아놓고 태우라 하시니까 태우는 거지요.
박상규 타오르는 불길 보다가 께름칙한 얼굴로 돌아서는데,
포도대장 수염 쓰다듬으며 소각하는 것 보다가 들어간다.
박상규 : !
S#46. 황집사 집 사랑채 + 대청, 낮
발 뒤로 앉은 선비에게 절하는 이나영의 비장한 표정.
선비 : (E) 이참판이 돌아가신지 벌써 오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이나영 : ...
선비 : (E) (화선지 들어보며)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좋은 글귀다.
허나 네 일이 단지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항시 명심하여라.
이나영 : (고개 숙인다)
선비 : (E) 처참한 처지에 놓여 삶의 목표를 잃은 너를 일년 전 이리 데려와 보살피게 한 이유!
아녀자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가혹한 훈련을 감당토록 한 이유!
이나영 : (비장하다)
선비 : (E) 그 모두가 자신을 불살라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했던 네 부친의 뜻을 따르기 위함임을 골백번 되새기거라!
이나영 : 뼈에 새기겠습니다.
선비 : (E) 그래, 어떤가?
황집사 : (나영 보며) 방금 전 제 사문을 찔러 저승 문 앞까지 가게 만든 아입니다.
혈을 움직이는 약단이 아니었으면 나리를 뵙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선비 : (E) (흡족해 웃으며) 황집사가 수고가 많았네.
발 밑으로 무언가 내어 놓는 그림자.
기생 한복과 가체다!
선비 : (E) 이제부터가 진정... 네가 해야 할 일이다.
S#47. 한성부 뒤뜰, 낮
천두 형틀에 묶여 있다.
그 앞에 던져지는 쥐망초 열매 주머니.
서주필 : (지친 듯) 네 놈이 들여오던 물건인데도 계속하여 모르겠다 하는 게냐?
천두 : (말하기도 힘든 정도) 그 물건에 제 이름이라도 쓰여 있소이까?
서주필 : 그 놈 질기기가 황소 힘줄과 같구나. 답답한지고. 여봐라, 물 한 잔 다오.
사령1 물사발 가져오면 서주필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천두 본다.
서주필 : 니 놈도 갈증이 나는 게로구나. 이실직고하면 시원한 물로 목욕을 시켜줄 생각도 있다.
천두 : ... 한 사발 주면 생각해 보겠수다.
박상규 마시던 물사발을 들고 가 먹이면, 벌컥벌컥 마시는 천두.
박상규 피식 웃더니 입안에 있던 물을 내뱉는다.
천두 어리둥절해하다 바닥의 쥐망초 열매보고 기겁해 물을 게워내려 한다.
박상규 : (환 꺼내 보이며) 해독단이다. 쥐망초 열매와 같이 산에서 나는 독초에 특효이니라.
천두 : (해독단 먹으려 안간힘 쓰다 닿지 않자 발악한다) 이런 찢어 죽일 놈. 내가 죽으면 누가 사주했는지 어찌 알겠느냐?
박상규 : 조금씩 졸리는 듯 해. 그렇지?
천두 : (정말 잠이 오는 듯 하다, 박상규의 시선 피해 서주필 보고) 살려주시오, 나으리.
서주필 : ? (박상규 힐끗 보고) 그래, 어서 불어라!
천두 : 불면 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습니다요.
서주필 : 걱정마라. 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널 숨겨주겠다. 당분간 먹고 살 양식과 돈도 주겠다.
천두 : 약속하시는 겁니까?
서주필 : 장부가 허언이 말이 되는가?
천두 : ... 제가... 모시는 자는...!
수리검 날아와 천두 목을 뚫는다.
박상규 : !
서주필 : ! 저쪽이다. 잡아라!
사령 차림의 상천, 비호처럼 담을 넘는다.
서주필 사령들과 함께 뒤쫓는다.
사람이 그리 죽어나가더니, 눈앞에서 죽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괴로운 박상규.
숨을 헐떡이며 피를 쏟는 천두를 멍하게 보다 황망히 다가간다.
박상규 : (끌어안고 다급히 지혈하며) 죽지마라. 네가 마신 것은 그냥 물이니라.
천두 :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
박상규 : 말하지 마라. 혈액이 숨구멍을 막으면 큰일이다.
천두 : (끄억끄억 숨 넘어가며) 그 자를...
박상규 : (애절하다) 됐다지 않았느냐? (울먹인다) 죽으면... 안된다...
천두 : (원망스런 눈으로 박상규 본다) 왜 나에게 묻는가...
박상규 : (울먹이다가) !
천두 울컥 피를 토하고 죽는다.
정신이 아득한 박상규...
S#48. 황집사 집 사랑채, 밤
명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이나영. 차가운 표정으로 분을 바른다.
입술을 칠하고, 소복을 벗고, 화려한 한복을 입고, 가체를 올려 떨잠을 꽂는다.
변신한 자신을 명경 통해 보다가 탁 닫는다.
천천히 일어나 나가는 이나영.
S#49. 매향루 기루, 밤
박인빈을 비롯한 신료들 담소를 나누거나 기생들의 춤을 감상한다.
양만오 들어와 큰절하며 박인빈에게 다가간다.
양만오 : (나즈막히) 물건을 확보했습니다.
박인빈 흡족한 듯 춤을 멈추게 하고 기생들 물린다.
박인빈 : 자자, 여긴 시전에서 비단 장사를 하는 양가라 합니다.
오늘 여러 동무들을 뵙겠다 청하여 제가 잠시 들르라 했습니다.
양만오 : (조아린 채) 삼가 말씀으로만 듣던 고귀하신 신료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전 행수 양만오라 하옵니다.
(한번 더 절 한다) 제가 우암 선생의 제자 분들을 모시게 된 영광에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월향과 기생1, 병풍을 들고 들어와 펼친다.
예를 갖추고 나간다.
강극수 : (놀라서) 아니 저 필치는...
양만오 : 우암 선생께서 잠시 낙향하셨을 때 인근 향반들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글이옵니다.
다들 놀란다.
박인빈 역시 기특하다는 표정.
강극수 : 이렇게 귀한 것을 보게 되다니, 참으로 뜻 깊은 자리로다. 그래,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
어디 원하는 것을 한 번 말해 보게.
양만오 : ... 저희 장사치들이 한양에 뿌리내린 것이 조선 역사와 다르지 않사온데,
근간에 천도를 한다하여 감당키 어려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박인빈과 강극수, 홍만기 당연한 듯 끄덕이고,
한두희, 신성두 서로 눈치 본다.
양만오 : 더욱이 태조 대왕께서 명을 내려 만드신 시전까지 혁파한다 하니,
난립하는 난전의 횡포로 민초들의 궁핍이 날로 더하고 있습니다. 감히 소망이라 드릴 말씀은...
이조판서 : (들어오며) 닥쳐라, 이놈!
양만오 : ...
이조판서 : 예가 어딘줄 알고 네놈이 감히 태조대왕 운운하는 것이야?
양만오 : ...
박인빈 : 어허...
이조판서 : 천도와 시전 혁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금상의 뜻이니라.
제 이익만 뒤좇는 장사치 주제에 감히 성심을 더럽히려 들다니!
강극수 : 이판대감... 내가 말해 보라 하였소이다.
이조판서 : 딱도 하십니다. 이런 얄팍한 장사치의 농간에...
박인빈 : (O.L) 그만 두시게. 장사치는 백성이 아닌가? 어찌 자네 말 옳다는 자들만 이 나라 백성이라는 게야.
궐문 앞에 모인 자들은 그럼 다른 나라 백성이란 말인가?
이조판서 : 요란 떨며 격쟁하는 대다수가 제 이익이 사라질까 두려운 장사치나 사대부의 하수인들임을 모르십니까?
여론을 호도치 마십시오, 대감. 호의호식하며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운 자들과
끼니 걱정에 그나마 삶의 터전을 잃을까 두려운 자들을 구별하십시오!
박인빈 : 말 한번 잘했네. 잘 먹고 잘 입으면 죄인인가? 그들 역시 이 나라 백성이고 부자가 되려고 무진 애쓴 자들일세.
헌데 허구한 날 술 마시고 투전판에 세월을 보낸 자들만 백성이라 하니, 이런 언어도단이 어디 있는가?
양만오 : ...
이조판서 : 그 누가 잘 살려 애쓰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을 벗어 날 수 없으니 허망함에 그런 겝니다.
애쓴 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대감!
박인빈 : 어허! 천도를 하고 시전을 없앤다고 그 세상이 올 것 같은가?
세상이 변하고 또 변해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은 필시 있는 법인 게야.
양만오 : ...
홍만기 : 자자 그만들 하세요. 그래도 한 때는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모인 자리 아닙니까?
여봐라, 월향아, 월향이 게 있느냐? 이판대감, 자리하시지요.
박인빈 : (헛기침 하며 입 다문다)
이조판서: (허한 한숨 내쉬며 자리에 앉는다)
한두희 : 선생님 글도 계시고 하니 오랜만에 옛일이나 추억합시다. 논쟁이야 궐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월향 : (들어오며) 부르셨습니까?
신성두 : 뭐하고 있는 게냐. 술이든 계집이든 어서 들여라.
월향 눈짓하자 계집종들이 술상을 들고 들어온다.
이어 기생들 들어와 신료들 사이사이에 앉는다.
월향 : (양만오에게) 계속 계실 참이오?
양만오 자작하는 이조판서를 힐끔 보고 일어서는데 이조판서 옆에 앉는 이나영!
얼어붙은 듯 보고 서 있는 양만오.
월향 : (나직이) 이보시오, 양행수.
양만오 여전히 이나영을 본다.
월향 억지로 양만오의 등을 밀고 나간다.
S#50. 매향루 마당, 밤
양만오 : (다급히) 자리에 든 기생들의 명부를 볼 수 있는가?
월향 : (이상하다) 저희 집 것들이야 있습니다만, 재색을 갖춘 것들만 골라 들이라 하여 도성 안을 뒤져 찾은 것들이외다.
양만오 : 명부는 어디에 있는가?
월향 : 그거야 저희 집사에게 물어보시면 보실 수 있을 겝니다.
양만오 황급히 간다.
월향 고개를 갸웃하는데,
하인1 : (다급히) 마님. 잠시 좀 가보셔야겠습니다.
S#51. 매향루 기루, 밤
다시 논쟁이 벌어지고, 박인빈은 답답한 듯 기생 술잔을 받으며 지켜본다.
이조판서 : 어찌 그리 답답한 말씀을 하십니까? 못 먹고 못사는 것이 그들 잘못입니까?
강극수 : 답답한 건 마찬가지일세. 백성들이 굶주리는 게 왜 우리 사대부들 탓이라고만 하는 겐가?
이조판서 : 죽어라 일을 해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이런 판국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홍만기 : 말씀이 심하네, 이판. 그럼, 합의해 처리해야 할 국사가 쌓여있거늘 경장한다 조정을 들쑤셔 놓으며
엉뚱한 싸움이나 걸어대기만 하는 자네 탓은 왜 아니 하는가? 매사 남 탓만하는 상놈 피가 흘러 그런 겐가?
이조판서 : (일어서며) 저는 더 이상 자리가 불편해서 못 있겠습니다. 그럼...
나가는 이조판서를 따라 일어서 나가는 이나영.
박인빈 : 저, 저, 똑똑하다고 봐줬더니 새파란 후배 놈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요샌 위아래가 없습니다,
이거, 참 말세로다, 말세야.
S#52. 매향루 대문 앞, 밤
관리1 : 감히 우리가 누구인줄 알고 문전 박대인 게냐, 이 놈.
월향 : (하인1에게) 내 분명히 이르지 않았는가? 오늘은 당상관 대감들께서 계시니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거늘.
관리1 : (찔끔해서) 당상관 대감이라 했는가?
월향 : 예, 나리. 예조판서 대감께서도 계신 듯하옵니다만.
관리1 : 그것이 참말이렷다?
월향 : 잠시 나오시라 이를까요?
관리2 : 무엄하다 이년. 퇴기 주제에 감히 누굴 오라가라...
월향 : (관리2 똑바로 본다) ...
관리2 : 아니, 이 년이?
관리1 : (말리며) 이보게, 참으시게. 매향루 월향이 아닌가.
월향 : 조만간 들르시면 섭섭지 않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나리.
관리1 : (데리고 나가며) 내 잘 알아들었네. (간다)
월향 : (하인1에게) 문을 걸고 아예 등을 내려라.
하인1 : 예, 마님.
서주필 : 과연 여걸이로다. 육조 낭관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구나.
월향 돌아보면 서주필 옆에 굳은 얼굴의 박상규 서 있다.
월향 공손하게 인사한다.
월향 :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서주필 : 술 한 잔 하러 왔네. 자리가 있는가?
월향 : 여부가 있습니까. 두 분께서 오셨는데 새로 집을 지어서라도 자리를 봐야지요.
(박상규 보고) 어째 안색이 어두우십니다.
박상규 : (애써 인사인 듯한 표정 지으면)
서주필 : (농으로) 나는 밝아 보이느냐.
월향 : (미소 지으며) 곧 상을 봐 올리겠습니다. 드시지요.
S#53. 매향루 행랑채 마루, 밤
양만오 기생 명부를 뒤진다.
양만오 : (탁 덮고) 다른 기루의 기생들도 왔다했는가?
집사 : 예.
양만오 : 기생들을 데려 온 기둥서방들은 어디에 있는가?
집사 : 뒷문 행랑에 머물고 있을 겝니다.
양만오 벌떡 일어선다.
S#54. 매향루 다른 기방, 밤
이조판서 : 통탄스럽도다... 썩어빠진 생각이 골수에 박힌 자들이 나라를 이끄는 중신들이라니...
내 어찌 감히 금상께 가여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마신다)
이나영 : * 채송화 그 낮은 꽃을 보려면 그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하지요.
이조판서 : (본다) ...
이나영 : (술 따르며) * 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그 낮은 꽃이 잘 보이리까...
이조판서 : (이나영 유심히 본다) ...
병풍 뒤, 황집사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다.
* 박두순 시 ‘삶의 꽃’ 에서 인용.
S#55. 매향루 기루, 밤
양만오 조심스럽게 기방 앞으로 간다.
강극수 : 무슨 일이냐?
양만오 : 부족한 것이 없나 살피러 왔습니다.
강극수 : 부족하면 부를 것이니 물러가라.
양만오 : 예...
힐끔 기방 안을 보면 이조판서와 이나영이 없다.
양만오 : 송구하오나 이판대감께서는...
홍만기 : 이 놈, 물러가라 하지 않았느냐?
양만오 머리 조아리고 물러난다.
S#56. 매향루 뒤채, 밤
서주필 : 내 돌려 말할 성격도 아니고...
박상규 : (술잔 마시다가) ?
서주필 : 천두란 자가 왜 나한테 살려달라고 했지?
박상규 : !
삽입컷) 천두 : 왜 나에게 묻는가...
서주필 : 자네가 가짜 독으로 위협했을 때, 천두는 날 보고 살려달라고 했어. 해독단을 쥐고 있는 것은 자네인데 말이야!
박상규 : ...
삽입컷) 박인빈 : (E) 밀수범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서주필 : (어렵게 말 꺼낸다) 이판대감과 조정에서 알아주는 앙숙 사이가 바로 자네 부친일세.
자네 부친은 평시서 제조를 겸하시니 무역을 하는 장사치들과 평소 왕래가 많을 터이고...
박상규 : (듣기 두렵다) 형님, 지금...
서주필 : 만일에, 만일에 말이야, 천두란 자가 자네 부친의 사주로 밀수를 했다면...
이판대감 습격사건과 쥐망초 독에 의한 연쇄살인의 모든 배후에는...
박상규 : (벌떡 일어서며) 그만 하십시오.
삽입컷) 엄씨 : (E) 마님 좋은 분이야. 너라도 마님께 잘해드려.
서주필 : (본다) 이보게...
박상규 : (괴롭다) 술은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나간다)
서주필 : 상규 이사람!
S#57. 매향루 마당, 밤
땀까지 흘리는 양만오의 얼굴엔 답답함이 가득하다.
양만오 : 아씨...
땀 쓱 훔치고 돌아서다가 멈칫한다.
천천히 돌아서면 별채에서 나오는 이나영이 보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승처럼 서서 그 모습을 보는 양만오.
가채를 벗은 모습은 분명 이나영이다. 이나영 장옷을 들고 뒷문으로 향한다.
양만오 서둘러 이나영에게 다가간다. 인기척에 몸을 숨기는 이나영.
박상규 이나영을 보지 못하고 성큼성큼 지나간다.
이나영 박상규 알아보고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박상규의 뒤를 따라간다.
양만오 거의 이나영 지척까지 다가왔다.
E) 기생1 비명소리.
박상규 돌아보면 별채에서 뛰쳐나오는 기생1.
양만오 역시 급히 돌아본다.
마당에서 혼절하는 기생1의 모습.
‘대감’, ‘사람이 죽었다’, ‘살인이다’ 또 다른 비명소리 소란스럽다.
박상규 놀라 서둘러 별채를 향해 간다.
양만오 의아스럽다, 아차, 아씨! 돌아보면 이나영은 자리에 없다.
*출처 : 대본과시나리오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