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진행순서
회중중에 평신도로 보이는 분이 창세기 18;1-10절을 봉독합니다.(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받습니다)
회답송으로 우리의 교독문 양식으로 진행됩니다. (주님,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또다른 평신도 한 분이 나와서 콜로세서 1장 24-28절을 봉독합니다.(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풍성)
복음 화답송
다른 분이 복음(루카10;38-42,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그리고 영성체송을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강론이 이어집니다. 우리의 설교처럼 자유로운 내용입니다.
헌금은 모두 자리에 일어나 앞으로 나와서 헌금함에 넣는 형식입니다.(우리의 특별헌금과 비슷)
기도는 우리의 대표기도와는 달리 서너분이 나와서 짧게 자기의 기도를 돌아가면서 합니다. (30-40자 정도 간결함)
헌금기도도 이 바쳐진 헌금이 인류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빵을 떼는 성찬을 하는데 모두 앞으로 나와서 받는다.
-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는 God-fearing을 느끼게 한다.
- 평신도의 예배 참여가 많다. 성가, 안내, 신부보좌,기도,성경봉독 등등 예배자의 참여를 많이 한다.(기도의 중언부언이 없다)
- 성서번역이 아주 쉬운 말을 쓴다. 성서는 어려워야 하는가? 세종의 백성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늘 본문에 대한 안 규도 도미니코 신부님의 주보에 기재된 도움의 말씀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잘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예수님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구체적 지침까지 내 놓았습니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자신이 누구이고,그런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망각한 마르타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뜻인 양 여기는 것이죠!
하느님 앞에 두려움을 상실한 믿는 자들의 모습,하느님 앞에 먼저 무릅을 꿇고 완전히 굴복할 줄 모르는 오만함.
예수님 위에 올라서서 하느님께 대해서도 무의식중에 판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눈멀음. 이런 것이 바로 마르타의 영혼입니다.
마르타는 바쁘게 사는 현대인, 특히 한국사람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바쁜 것이 자신의 존재인 듯이 사는 삶은 어리석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엿세 일 하고 하루를 하나님 안에 쉴 수 없는 영혼은 하느님을 짓밟고 하느님의 축복을 걷어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기는 했으나 정작 딴짓만을 하는 믿는 자의 모습이 바로 마르타의 모습이며,우리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그분을 모셔 들였으나 그분 앞에 머물 줄 모르며 그분과 단 한 순간도 깊은 사랑의 눈을 마주치고 그분의 그윽한 사랑의 숨결을 나눌 줄 모르는 이의 모습이 바로 마르타입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일과 사람입니다. 정작 그분을 집에 모시지만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모시지는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작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 됨이며 바로 어둠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 발치 앞에 있을 때 언니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판단하는 것을 몰랐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니가 자기를 미워하고 판단하고 싫어함을 겪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 귀울여 듣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삶은 결국 또한 우리 마음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돈을 쓰는 일, 내 시간을 쓰는 일, 내 능력을 쓰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쓰도록 하는 내 마음을 쓰는 일에 나는 무엇을 제일 중요한 몫으로 선택하고 있나요?
시편 16편 5절의 말씀처럼 "주님은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시니....."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