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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대화입니다!
풀턴 J. 쉰 대주교
사람들은 기도를 비행기 조종사에게 낙하산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비상시에는 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 가르치신 기도는 그런 낙하산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실 때 사용하셨던 기도를 살펴봅시다.
주님께서는 네 가지 주제로써 기도를 언급하셨습니다. 특히 주님 생애의 중요한 사건에서 드리신 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고(루카 3, 21),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기도하셨으며(루카 6, 12-13),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 전에 기도하셨고(루카 9, 18-21), 거룩하게 변모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으며(루카 9, 28), 겟세마니에서(루카 22, 41-44)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루카 23, 34)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사건 외에도 주님께서 공생활 중에 기도하신 것이 여러 번 복음에 언급됩니다. 성전의 지도자들과 큰 충돌을 앞두었을 때,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루카 11, 1), 그리스인들이 찾아왔을 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 전에(마태 14, 19)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하실 때(루카 5, 15-16),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에(마태 14, 23),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실 때(마르 7, 34),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기 전에도(요한 11, 41-42)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열한 제자를 위해 기도하셨고(요한 17, 9),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으며(요한 17, 20),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고(루카 23, 34), 특별히 베드로를 위해서도(루카 22, 32)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대화다. 인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침묵을 깨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와 하느님과 대화할 때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우리가 인격체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화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큰 계명을 성취한다. 성경을 펼쳐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반대로 하느님께 귀 기울인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성경은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대화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하느님과의 대화를 원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대화를 갈망하지만, 때로는 피하려고 한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너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카인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다. 모세는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 우리는 하느님과 어떻게 대화할까?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 내용은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 또는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라고 권유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하나는 짓누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가져온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화 중 하나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오로와 부활하신 주님 간의 대화(사도 9, 1-9)이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 이후로 바오로가 쓴 모든 것은 그와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난 대화이며, 하느님의 대답은 항상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2코린 12, 9)였다.
기도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 지금 나는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기도는 감각과 감정, 느낌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기도는 위장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아니며, 배가 아플 때와 같은 아픔도 아니다. 기도는 변덕스러운 감정도 아니고, 우리에게 내적인 만족을 주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호르몬 분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동물적 본능과도 무관하다. 기도는 지성, 의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며, 그 사랑은 의지의 행위를 통해 점점 자라나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기도하고 싶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기도가 하기 싫을 때 오히려 더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 줌의 고독은 한 바가지의 위로보다 더 가치 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우리가 주님께 안겨 있다면, 주님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안다. 기도는 창조되지 않은 영인 하느님과 창조된 영혼인 우리의 상호작용이다. 기도는 교제이며, 대화이고, 경배이며, 참회이다. 기도는 행복이며, 일이면서 휴식이고, 요청이며 순종이다.
어떻게 기도할까?
기도의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것은 초보자에게 알맞고, 어떤 것은 위대한 성인들에게 적합하다.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있고, 사색이나 상상과 같은 묵상으로 기도할 수 있다.
성인들은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합일에 이르는 관상기도를 한다. 소리 내어 기도할 때는 걸어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묵상할 때는 말을 타고 하느님께 나아가며, 관상기도에서는 제트 비행기를 타고 하느님께 나아간다.
여러분은 "왜 기도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왜 숨을 쉬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쁜 공기를 내보내야 한다. 새 힘을 받아들이고 낡은 결함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관현악단과 같아서 항상 조율이 필요하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충전해야 하듯이, 우리도 영적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 5) 우리는 먹고 마시고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초자연적인 공로와 천국을 위해서라면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어떤 조건에 따라 일어나며, 우리도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우리에게 특정한 결과가 일어난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은총이 비단 줄에 매달려 있다. 기도는 그 줄을 끊어내는 칼이다. 우리의 진정한 힘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깥에서 온다. 빛은 태양에 있지, 눈 안에 있지 않다. 소리는 귀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있다. 태양은 눈을 사용하고 음악은 귀를 사용하며, 하느님은 기도 속에서 우리를 사용하신다.
기도할 때 우리는 새로운 환경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다.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와, 집과 입을 옷과 먹을 음식도 없이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의 차이와 비슷하다.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는 전자의 경우와 같은 사랑의 환경 안에 있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게 되며, 그렇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축복을 받게 된다. 이 점은 가정생활에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녀를 키우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여 그분께 양육을 의탁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 이들이 받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
나는 기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안하고 싶다. 기도할 때 모든 말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한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러 가서는 혼자서 증상을 재잘거리며 말한 다음 곧바로 진료실을 나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영어를 어떻게 배웠는가? 말하는 법을 들으면서 익혔을 것이다. 과학자는 자연법칙을 어떻게 배울까? 과학자가 자연에 법칙을 강요함으로써 배웠을까? 그렇지 않다. 자연 앞에 앉아 “이제 너의 비밀을 나에게 드러내다오."라고 말한다. 그러니 기도할 때 끊임없이 떠들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 9)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주님, 들으십시오. 당신의 종이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기도는 양방통행이다. 기도에서 우리는 말하고 들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방적인 청원기도보다 묵상 속에서 우리에게 더 많이 말씀하신다.
무엇을 청할까?
청원기도가 매우 유효한 기도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기도를 청원의 형태로만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서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여자가 상대 남자에게 끊임없이 “이 밍크코트 사줘요. 이 반지 사줘요. 이 꽃을 보내줘요!"라고 한다면, 그 남자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여러분은 사랑할 때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원하나?”라는 질문을 받으면 부끄럽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할수록 더 적게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 특별한 은혜를 청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청원은 기도에 본질적이지만, 다만 완벽한 기도가 아닐 뿐이다.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의 기도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를 꺼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구걸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길 건너에 있는 걸인을 보고는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를 닫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랑이 많은 아버지시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같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바치라고 하셨다. 이 기도에는 일곱 가지의 청원이 들어 있다. (마태 6, 9-15)
기도에는 전례 기도가 있고 개인 신심 기도가 있다. 여러분은 이 두 형태의 기도를 항상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신심 기도에서는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기도를 상투적으로 바치지 말아야 한다. 상투적인 편지를 받으면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가? 그러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자. 여러분 마음의 문제와 걱정, 희망과 고통, 두려움, 여러분의 결점은 세상에서 오직 여러분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가진 고유한 것이 여러분의 기도 내용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특별한 개인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강도를 돌아보시고 2인칭 단수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여러분의 기도를 고유하고 유일한 기도가 되게 하고, 전례 기도와 신심 기도를 드릴 때도 하느님께 집중하라. 하느님을 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그분께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형식이 정해진 기도를 드릴 때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자.
기도의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자.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분의 기도는 습관처럼 변하고 너무 익숙해져서 열정이 사라질 수 있다. "좋아, 이 밀림에서 빠져 나가겠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여러분에게 화내지 않으실 것이며, 이런 태도는 여러분의 기도를 새롭게 하고 더 진정성 있게 만들 것이다.
기도의 동기는 사랑!
기도의 동기 혹은 계기는 언제나 사랑이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본 사람을 나에게 데려오라. 그러면 나는 그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겠다.”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당신도 하느님께 말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연인이 애인을 대하듯이 하느님을 대하자. 모든 기도가 생기 있도록 마음과 사랑의 영감으로 기도하자. 그러면 그 기도는 4세기의 시인인 아우소니우스가 쓴 이 글과 비슷해질 것이다. “여보, 우리가 살아왔던 그대로 살고. 첫날 밤의 은혜 속에서 서로를 불렀던 우리의 작은 이름을 결코 잃지 맙시다.”
결혼이 성공하려면 많이 노력해야 하고, 결혼 생활이 사랑의 싱그러움을 유지하려면 살면서 희생을 뿌려야 한다. 사랑이 일상처럼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 그 사랑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더 높은 사랑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낮은 사랑을 버려야 한다.
모든 기도를 설계 도면처럼 바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 도면을 가져와서 결재 도장만 찍어달라고 요청하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운 분이시니, 나를 위한 그분의 계획은 내가 생각하는 계획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떼를 쓰고 울어도 엄마는 사탕을 주지 않는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총을 달라고 조르면 아빠는 단호히 “안 돼."라고 말하며 거부할 것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때때로 부정적일 수 있다.
어느 어린 소녀가 크리스마스에 인형을 1,000개나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받지 못하자 믿음이 없는 아버지가 그랬다. “하느님이 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네. 그렇지?" 그러자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뇨, 하느님은 '안 돼.'라고 하셨어요!"
무엇을 청하며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해보자. “주님, 제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저의 구원에 도움이 되고 주님 영광을 위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아마 저에게 좋은 것이 아니기에 주님께서 주시지 않은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혹시 제가 다시 청하기를 기다리신 것이라면 다시 청하겠습니다. 주님은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마지막으로, 특별한 기도 두 가지를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바로 묵주기도와 침묵 기도이다. 묵주기도는 음악이 있는 말과 같다. 묵주기도는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굴리는 물리적인 측면과, 주님과 성모님의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는 정신적인 측면, 그리고 입술로 기도 문을 외는 음성적인 차원이 결합되어 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여성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묵주기도는 단조로운 것 같아요. 하느님은 우리가 단조로운 기도를 드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자매님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입니까?"
"제 약혼자입니다."
"그를 사랑합니까?"
"네."
"그걸 이분이 어떻게 아나요?"
"제가 '사랑해'라고 말했어요."
"언제요?"
"어젯밤에요."
"그전에 말한 적이 또 있습니까?"
"네, 여러 번 말했어요."
"약혼자분이 자매님의 말에 질리지 않았을까요? 단조롭지 않았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이 말을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장소에서 반복하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도 마찬가지다. 한편, 침묵 기도도 있다. 하루에 최소한 30분은 여러분을 뛰어넘어 살면서 내면으로 들어가 살아보라, 내적인 고요의 상태에서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실천해보라. “그 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사도 바오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 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여러분도 베르나르도 성인이 에우제니오 교황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Tuus esto ubique." 즉 "어디서든 당신을 당신 것으로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느님의 소유가 됩니다."
<Love One Another! no. 62>에서 박규희 옮김
(마리아지 2025년 3•4월호 통권 25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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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처 : 아베마리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