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대는 에봇 양 어깨에 부착하는 일종의 장식품과 같은 것입니다. 이 견대는 에봇의 띠와 더불어 에봇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견대는 에봇과 동일한 실로 만들어졌으며 이 견대 위에는 두 개의 기념보석(호마노)을 금태에 물려 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에는 이스라엘의 12 지파 이름을 출생 순서에 따라 한쪽에 여섯 지파의 이름씩 인 새기듯 기록했습니다.(출28:8-11)
2. 어깨 그리고 기념보석의 상징적 의미
하나님께서는 에봇의 양 어깨에 견대를 만들고 금테에 물린 보석을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석에는 12 지파의 이름을 출생순서에 따라 기록하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을 특별히 기념보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어깨가 우리에게 주는 상징적 의미와 기념보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1) 어깨
신체의 일부인 어깨는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깨는 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책임을 부과 받았을 경우 "어깨가 무겁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어깨는 크리스천 리더의 중요한 책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책임감(reponsibility)은 리더의 최고 임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부분에서 책임을 지는 어깨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질 문제들이 발생할 경우 책임전가라는 나쁜 습성들이 교회의 흐름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나 영광을 받는 일들에 대해서는 서로 자리 빼앗기 싸움을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탓' 을 돌려 댑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사람 입니다. 리더는 자신의 말과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서 언제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바른 리더입니다.
2) 기념보석(memorial stones)
견대 위에 두 개의 보석을 성경은 이스라엘 아들들을 향한 기념보석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지카론(zikkaron)입니다. 지카론의 의미는 기념물, 또는 상기시켜 주는 것, 징표, 기록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지카론은 다른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징표하는 물체나 행위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어깨의 견대와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두 개의 보석은 성도들을 향한 리더의 책임을 생각나게 하고 상기시켜 주는 하나의 징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 리더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입니다. 크리스천 리더에게는 성도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징표 즉, 사인을 갖고 있는 표적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리더는 확증된 사람이며 기념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리더는 자신의 행동이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리더는 하나님의 나라에 기념비를 세우고 장차 후세대에 남겨 둘 표적들을 남기기 위해서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책임은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3.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리더
1) 리더는 성도들을 믿음 위에 견고히 세우는 책임의 사람입니다.
크리스천 리더에게는 성도들을 믿음 위에 견고히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을 견대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금을 사용하셨습니다. 금을 이용해서 보석을 세팅하도록 하셨습니다. 금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보석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개의 보석이 12지파를 상징합니다. 12지파를 상징하는 두 개의 보석이 믿음(금)위에 견고하게 세팅되어 어깨의 견대에 부착되었습니다. 금과 같은 믿음의 리더로서 흔들림이 없이 견고하게 서있어야 합니다. 리더가 성도들을 세우기 위하여 훈련을 시키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리더가 굳게 서있는 그 믿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는데 도움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자신이 믿음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것에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리더는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는 책임의 사람입니다.
크리스천 리더에게는 성도들이 기쁨의 신앙생활을 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며 그들을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하도록 돌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견대에 사용된 보석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예복을 디자인하실 때 견대와 흉패를 위해서 보석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특별히 흉패를 디자인 하시는데 12보석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흉패의 12보석에는 12지파의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흉패에 사용된 보석은 그 보석에 새겨진 지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견대를 위해서는 흉패를 위해 사용되었던 12보석 가운데 하나인 쇼함(호마노)이라고 불리는 보석을 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12가지 보석 가운데 특별히 쇼함(shoham/호마노)보석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 견대의 두 보석
12보석들 가운데 양 어깨의 두 견대를 위해서 쇼함(호마노)을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교가 요구되어집니다.
1) 흉패에 사용된 12보석과 그 보석들의 특징
2) 12지파의 근원이 된 야곱의 아들들의 출생 과정과 이름(창 29:21-30:24)
3) 12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창49)
4) 12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신33)
첫 번째, 흉패에 사용된 12보석입니다.
12보석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 호박, 백마노, 자수정,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번역되었습니다(출28:17-20).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번역 자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용된 보석의 종류를 나타내는 히브리어가 정확하게 어떤 보석을 지칭하고 있는지 오늘날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견대에 사용된 보석을 히브리어로 쇼함(shoham)이라고 합니다. 쇼함이 보석의 한 종류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쇼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보석을 지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으로 12보석들을 오늘날 성경에 번역된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연구소에서는 이러한 12보석을 이용해서 흉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보석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흉패에 사용된 12보석과 그 보석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통한 연구에는 아직 어려움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어깨의 견대를 위해서 사용된 보석 자체의 특징에 대한 연구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 할지라도 어깨에 쇼함(호마노)을 사용한 이유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어깨에 사용된 보석의 이름은 쇼함(shoham/호마노) 이었으며 흉패에서 쇼함(호마노)은 아셀 지파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역으로 아셀 지파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 쇼함의 특징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견대에 쇼함(호마노) 보석을 사용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쇼함(shoham)에 기록된 아셀의 출생과정과 이름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야곱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언니 레아와 동생 라헬의 아들 낳기 경쟁은 결국 야곱에게 12명의 자녀를 주었습니다. 아들 낳기 경쟁이란 오늘날 우리사회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동떨어진 양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의 이름에 과거를 넣었으며 미래의 소망과 축복을 그리고 출생과정을 함축적으로 담는 관습이 있습니다.
야곱은 언니 레아보다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레아의 마음속에는 동생 라헬을 향한 증오심이 일어났습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을 때 레아는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라! 아들이다)라고 통쾌하게 외칩니다. 야곱의 총애를 받지 못한 서러움에 대한 레아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레아가 다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만하면 남편 야곱이 나를 인정하고 나와 연합하겠지 라는 의미로 레위(연합)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레아가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제 여유 만만하게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유다(찬송)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라헬은 비록 야곱의 사랑은 쟁취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넣어 주었습니다. 빌하가 아이를 낳자 라헬은 단(하나님께서 내 억울함을 푸셨다)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빌하가 또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언니 레아는 아들이 넷이고 라헬은 둘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들 낳기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납달리(이제는 경쟁해도 이긴다)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레아는 이 상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레아도 자기의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넣었습니다. 언니와 동생의 자식 경쟁과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한 싸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바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레아는 갓(복되다) 즉, 이만하면 복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실바가 아들을 또 낳았습니다. 이름을 아셀(Asher기쁨/행복) 이라고 지었습니다. 자기는 이제 아들이 6명이 되었고 동생은 둘 밖에 없으니 기쁨이 넘쳤으며 한없는 행복감을 느꼈나 봅니다.
기쁘다, 행복하다를 의미하는 아셀(Asher)의 이름이 쇼함(호마노)위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견대를 위해서 아셀 지파를 대표하는 쇼함(호마노)이 사용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세 번째, 야곱과 모세의 축복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후일에 당할 일을 아들들에게 선포합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창49:1)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셀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라."(창49:20)
모세도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하여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셀지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축복했습니다.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33:24-25)
야곱의 축복과 모세의 축복은 아셀 지파가 기름진 땅에서 풍성한 소출을 얻으며 행복에 겨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그의 이름에 걸맞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셀 지파는 가나안 땅 지중해 해변 시돈에서 두로에 이르는 기름진 땅을 분배받았습니다.(수19:24-31)
결론적으로 흉패에 사용된 12보석들이 각 지파의 특징을 상징하는 보석들이라면 아셀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쇼함(호마노)은 기쁨 그리고 행복을 상징하는 보석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책임을 상징하는 대제사장의 견대를 위해서 12가지 보석 가운데 특별히 행복 그리고 기쁨을 의미하는 보석 쇼함(호마노)을 선택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견대의 보석에 12지파의 이름을 인(사인)을 새기듯 새겼습니다. 이는 모두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어야 할 책임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책임이 대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며 갖가지 송사를 해결해 주었고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견대를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입니다. 또한 크리스천 리더의 책임입니다.
홀메스(Holmes)와 라헤(Rahe)는 사람의 스트레스 수치를 산술적으로 계산했습니다. 배우자가 사망했을 경우 그 스트레스를 100으로 하였습니다. 이혼 73, 징역 63, 질병과 부상 53, 은퇴 43, 성문제 39, 직업전환 36, 상사와 알력 23, 임신 30, 이사 20, 성탄절 20 등 모든 스트레스를 수치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트레스 수치가 200이 넘으면 병들기 시작하여 300이 넘으면 미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탄절(20), 이사(20)를 계획하고 있는 임신(30)한 여자가 아프고(53) 남편을 잃었다면(100)그 여자는 223만큼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여인이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서, 찬양을 통하여 그리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확신과 소망이 넘쳐서 새 힘을 얻고 교회 문을 나설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와 크리스천 리더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면 이 여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쩌면 스트레스 수치가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크리스천 리더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성도들을 기쁨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감을 만끽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즐거움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교회의 특징은 기쁨이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리더는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3) 리더는 모든 성도를 공평하게 대하는 책임의 사람입니다.
크리스천 리더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원칙에 따라 공평함으로 대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견대에 새겨진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기되 연차 즉, 출생 순서에 따라서 각각 여섯 명의 이름을 양쪽에 기록하도록 디자인 하셨습니다.(출28:9-10)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공평하고 원칙과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원칙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당연하고 원칙이었음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사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창48:8-22) 야곱은 우수를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좌수를 장자인 므낫세에게 얹고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기뻐하지 아니 했습니다.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창48:17-19)
그렇다면 출생 순서에 따라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당연하고 원칙과 상식에 부합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실에 주목하고 여기에 특별한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흉패에 기록된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과 순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흉패에 12보석과 12보석 위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기도록 디자인 하셨습니다.(출28:21) 그런데 이 흉패의 보석 위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길 때에는 그 순서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12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에 있어서도 출생 순서는 무시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신33) 그 결과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과 이스라엘 성전 연구소에서는 흉패의 12보석에 새겨진 12지파의 이름은 출생순서가 무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견대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출생순서대로 기록 되었으나 흉패에는 출생순서가 무시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어깨의 견대 위에 새기는 12지파의 이름을 당연하고 공평하며 원칙과 사리에 맞게 기록하도록 디자인하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크리스천 리더는 그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들을 원칙과 공평함으로 대하고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크리스천 리더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사회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다양한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질서를 유지하고 바른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의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무질서하고 무분별하게 된다면 그 교회는 타락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질서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질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합니다. 성경적이고 영적인 기준에 의해서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리더는 교인들을 대하면서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진리의 기준으로 교인들을 다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소외됨과 고립됨을 느끼고 불이익이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부류라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다스려야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게 됩니다. 편견이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판단력으로 균형을 잃는 경우에는 교회의 문제들이 생기게 됩니다.
4) 리더는 모든 성도들을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견대를 디자인 하실 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개의 보석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기도록 했습니다. 12지파는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입니다. 12지파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대표합니다. 그리고 12지파는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12지파는 크리스천 리더에게 맡겨진 모든 구성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2지파의 이름을 마치 인을 새기듯 그들의 이름을 조각하도록 디자인 하셨습니다.(출28:11) 보석 위에 그들의 이름을 페인트나 물감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마치 도장을 새기듯 조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호탐(hotam)입니다. 호탐은 "봉인을 찍다" 또는 "봉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탐(hatam)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이 언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봉인함으로서 그 내용이 확증되거나 완전히 간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12지파의 이름을 인처럼 새긴 것은 구원의 확증과 온전한 간수를 의미합니다. 크리스천 리더는 자기에게 맡겨진 모두를 한 사람도 낙오됨 없이 간수하고 그의 어깨에 메고 끝까지 가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한 예를 예수님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팔레스타인 광야 목자들의 전형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저자 '예레미아스'는 누가복음 15장 비유의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눅15:4)---아랍 유목민의 경우 목축의 규모는 양 20내지 200마리 정도로서 양 100마리의 주인은 중류에 속하며 그는 몸소 양을 치지 품꾼을 고용할 수 없다.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눅15:4)---팔레스틴 목자는 저녁이 되어 양떼를 우리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양떼를 새어 보는 것이 예사였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눅15:4)---팔레스틴 지방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목자가 자기 양떼를 그들의 운명에 내맡겨 둔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다같이 입증하고 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할 경우 그는 양떼를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목자들에게 맡기거나(눅2:8, 요10:4-5) 동굴 속으로 몰아넣고 양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들'이 의미하는 바는 한적한 산지에 있는 우리나 목장이다.
*읽은 것을 찾아간다(눅15:4)---여기에서 잃은 양이란 5절의 상황을 통해서 볼 때 양 무리 가운데 가장 약한 양을 의미한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선 것은 그 양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 양은 자기 것이며 그의 도움이 없으면 그 양은 양떼에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눅15:5)---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메었다. 근동지역에서 날마다 볼 수 있는 생활 습성이다. 양떼에서 낙오되어 광야를 방황한 양은 대개 기진하여 눕고, 더 움직이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하게 된다. 그 양을 운반할 수 밖에 없는데 먼 길이면 그것을 어깨에 메고 즉 목에 걸치고 돌아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목회 현장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때때로 연약함으로 무리 가운데서 이탈하거나 길을 잃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목자처럼 무리에서 떨어진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찾아 나서야 합니다. 나약한 양들도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가야 합니다.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들을 찾는 이유는 함께 가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디자인 하신 크리스천 리더의 모습입니다.
현대 교회는 잃은 양들이 너무 많이 있으며 우리를 벗어나 헤매고 있으며 이리 떼들에게 먹히는 양들이 즐비합니다. 이미 지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이 나뒹굴고 있는 양들도 많이 있습니다. 영혼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린 양들도 많습니다. 리더는 선한목자이신 주님처럼 그들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진실로 쉼이 있고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인 교회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리더는 양들을 사랑하는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고 그들이 왜 지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100대 1의 법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영적 리더를 찾고 있는 울부짖는 양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열어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주님의 품안으로 인도하는 진실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