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동화, 色은 꽃이다
폭설 속 대관령 양떼목장을 걷다
2023.1.15.(일), 아침 일찍 사진동호인들과 대관령 출사에 나섰다. 대관령, 선자령, 능경봉 등은 겨울에는 바닷바람이 넘어오는 지역이라 춥고 적설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사진 역시 평범한 날엔 좋은 사진을 얻기가 쉽지않다. 태풍이나 폭설이 몰아치는 날 등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메고 나가야 뭔가 색다른 작품을 얻을 수 있다. 비가 오거나 안개 자욱한 날도 마찬가지다. 영하15-20도까지 떨어지면 상고대를 찍으러 덕유산 향적봉(1,614m) 등 고산이나 춘천 소양5교에 가기도 한다.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이나 두루미 촬영도 추울수록 좋다. 역설적인 삶이다. 필자의 일생에서 암벽등반과 사진취미를 가지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남들보다 모험심이 조금 많은 편이어서 50대 중반에 늦깎이로 암벽등반을 시작하기도 했었다.
양떼목장을 방문한 날 강원산간지역에는 적설량이 50cm 이상이라는 일기예보가 나왔다. 필자는 오래전 능경봉과 선자령 산행 때도 폭설이 25cm 이상 내리고 있을 때 바로 몇미터 앞이 보이지않을 만큼 극심한 눈보라를 헤치면서 산행한 적이 있다.
등산용어에서 ‘러셀(Russel)’이라는 말이 있다. 폭설 속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등산로를 정강이와 무릅으로 헤쳐가며 후진들을 위해 눈길을 내며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산행대장이 오늘 ‘럿셀’을 해야할지 모르니 등산경험이 많은 산우가 선두를 서야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다른 산악회에서 우리보다 먼저 눈길을 개척해줘 러셀은 필요없었지만 암튼 잊지못할 설경산행으로 기억된다. 러셀이란 말은 미국에서 눈이 많은 지역의 기차운행을 위해 제설차를 고안한 미국인의 이름인데, 그가 고안한 제설차가 일본에 도입되어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을 본 일본인들이 '눈길을 내는 행동'에 제설차 발명가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각설하고, 올해도 눈이 많이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적시타이밍이다. 급히 출사신청을 하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대관령에 도착해보니 폭설이 장난이 아니다. 일기예보에서 날씨는 많이 춥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해 깜빡 잊고 털모자를 준비해오지 못했다. 눈보라 때문에 걷기도 불편할 정도다. 버스에서 내려 대관령 휴게소까지 몇 분 정도 왔는데도 머리는 물에 빠진 쥐 모습이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임기응변격으로 대관령휴게소 매점에서 15,000원 짜리 싸구려 털모자를 샀다. 우산도 없어 5,000원 짜리 비닐비옷을 구해 입었다.
처음엔 2천원 짜리 비닐비옷을 샀는데 입는 과정에서 찢어졌다. 너무 약하다. 주인아주머니가 5천원 짜리를 추천해줬다. 역시 값이 조금 비싸니 튼튼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DSLR카메라가 눈에 젖어 수건으로 카메라 닦으며 찍느라 번거롭기 그지없었는데 찢어진 비닐비옷 양팔을 잘라 카메라 본체와 렌즈를 덮고 고무줄을 얻어 떨어지지않도록 동여매니 카메라 보호에 최고다. 집에 카메라용 Rain Cover가 있는데 서두르다 보니 이것 또한 챙기지못했는데 다행이다. Snow Cover에 보온까지...와, 베리 굿! '궁즉통'이라고나 할까?
양떼목장은 역시 설경이 장관이었다. 온 천지가 White 일색이다. 양들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펜스들이 하얀색 대지에 멋진 곡선조형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다. 구도를 맞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모든 풍경이 작품이 될 것만 같다. 양떼목장 능선 역시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치 ‘누드화’를 연상시킨다.
양떼목장은 10여 년 전부터 몇번 출사 온 적이 있지만 폭설 속 출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눈이 내릴 때는 눈 내리는 풍경 나름으로 운치가 있지만 하늘 역시 뿌였게 흐린 게 단점이다. 폭설 후 눈이 녹기 전 맑은 날 오면 하얀 대지와 파란 하늘이 대조를 이뤄 한층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다.
폭설예보가 나오자 마자 급번개로 출사나온 것이어서 현장 역시 일반여행객보다는 사진작가나 사진동호인들이 많은 것 같다. 저 마다 다양한 칼러의 복장과 색우산을 준비하고 나왔다. 설경에 어울리는 색깔은 역시 노랑, 분홍, 적색 옷들이다. 우산 역시 노랑색과 붉은 색 우산이 많이 눈에 띈다. 사진의 보색관계를 잘 알고 준비해온 사람들이다. 힌색 바탕에는 검정색도 어울릴 것 같지만 그렇지않다. 설경 속에서 검정색은 너무 칙칙해보인다. 흑백사진을 만들고자 할 경우에는 당연히 검정색이나 파란색 옷도 상관은 없겠다.
필자는 아는 사람 전혀 없이 혼자 사진동호회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지인들과 함께 온 것 같다. 서로 모델도 서주고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그냥 경치 만 담기가 조금 아쉬워서 괜찮은 구도일 경우 필자 역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람 뒷모습 또는 옆모습 포즈를 찍어본다. 그런 사진 만 찍어도 적지않은 사진을 건질 것 같다.
하얀 설경 속 칼러풀한 사람들 모습은 그 자체가 ‘꽃’이다. 다양한 색들이 함께 하면 금상첨화다. 겨울 꽃은 ‘상고대’가 대표적이지만 사람 또한 ‘살아있는 꽃’이다. 한편의 아름다운 '겨울동화'를 읽은 느낌이다.(글,사진/임윤식)
2023.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