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알고 있다 최 건 차
오랜 만에 대구에 발을 딛고 보니 지난 일들이 굴뚝의 연기처럼 솔솔 피어오른다. 부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들은 바로는 사과가 많이 나고 여자들이 모두 예쁘다는 것이다. 사과밭 구경도 하고 여자들이 얼마나 예쁜지를 보고 싶어 언제쯤 꼭 가보아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서울로 이사를 하고서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4.19데모에 참여한 후 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1961년 1월 초 육군이등병으로 부대배치를 받기위해 영천에 있다는 병기탄약사령부를 찾아 가려고 일단 대구역에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과 같이 일찍 들어가면 사역이나 할 터이니 대구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저녁때쯤 영천 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대구의 겨울 날씨도 서울에 못지않게 혹독했다. 우선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야겠기에 대구의 토속음식으로 유명하다는 ‘따로국밥집’을 찾았다. 사람들이 많은걸 보야 음식 맛이 괜찮겠다 싶어 국밥을 시켜 먹었는데 얼마나 뜨겁고 매운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일본에서 자라다 나온 탓에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체질이라 맵고 뜨거운 것에 속이 확 뒤집어는 것 같아 찬물을 연신 들이키다 설사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억지로 참으면서 시내를 구경하다 찰떡을 한 봉지씩 사들고 ‘무기여 잘있거라’라는 영화를 제일극장인가 하는데서 관람했다. 떡 한 봉지를 물도 마시지 않고 다 먹은 게 설사와 겹쳐 연방 뒷간을 찾아다니게 됐다.
짧은 겨울해가 지면서 추위가 엄습했다. 속에서는 냄새가 고약한 신트름이 계속 나오고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상태로 난생 처음 영천 행 버스를 탔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게 이럴까 싶을 정도의 심신으로 읍내 외각에 있는 부대를 찾아들어갔다. 일찍 들어오지 않고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다그치며 빤질한 서울내기 이등병 두 놈이 왔다고 하면서 대하는 태도가 저승사자처럼 이었다. 대구에서 놀다 왔다는 말을 숨기고 “먹은 것이 잘못되어 배탈이 나 변소를 찾아다니다가 버스를 놓쳐버려 이렇게 됐습니다” 라고 변명을 하고서 죽은척하고 있었다.
인사과 병장이 근무할 곳이 먼 곳에 따로 있다며 어디로 가고 싶느냐고 물었다. 영천과 해운대 그리고 성환에 부대가 있어 희망하는 대로 갈수 있다며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우리는 서울이 가까운 성환으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준비된 게 있느냐고 묻는다. 대구에서 있는 대로 다 써버리고 왔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성환은 고사하고 영천도 아닌 제일 먼 곳, 내 생전에 이름도 모르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남쪽 바다 가에 있는 부대로 보내진다는 것을 알고 속이 아렸다. 추운 밤을 대기 막사에서 겨우 보내고 아침에 군용트럭에 실려 산길과 바다갓길을 한나절이나 달렸다. 점심 쯤 되어서 어느 해변 소나무섬 같은 곳의 미군용 콘센트막사가 많은 곳에 도착했다.
배탈은 가셨지만 이등병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었다. 부대는 해운대 동백섬 앞에 있는 051병기탄약창이었고 우리 이등병 둘은 미군탄약중대에 배속된 551중대원이 되었다. 어차피 겪게 되는 최 말단 신병생활이었지만 지옥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힘들고 이상한 군대생활이 밤이면 더했다. 지금이야말로 해운대가 천지개벽을 한 것 같지만 그때는 해수욕장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모양새였고 부대 앞은 바로 바다요 뒤에는 갈대로 지붕을 한 운촌이라는 어촌이 있었다. 부산영도에서 중학시절을 보내면서도 해운대를 전혀 몰랐었다.
열악한 군대생활을 주일마다 철길건너 해운대교회에 나가면서 극복해냈다. 하지만 미군부대에 배속된 관계로 미군과 카투사로 인하여 자극을 받아 1964년 하사관으로 미8군 카투사가 되었다. 왜관을 거쳐 1965년 가을부터 대구 캠프핸리에서 군대생활을 원도 한도 없이 화려하게 소신껏 하다가 카투사생활이 끝날 무렵 소위로 임관을 했다. 대구가 떠들썩하도록 역사를 장식했지만 한국군장교로서 역시 전방근무를 마치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대구와는 무슨 인연인지 1971년 대구 동촌비장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군용화물을 접수 관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산격동에 집을 구해 살면서 대구제일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 무렵 손아래 누이동생이 동대구역 앞에서 제법 잘되는 큰 식당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군들과 대구의 동화사와 김천의 직지사 그리고 부산과 포항까지 달려가 보고 밤이면 향촌동을 나들이 하며 즐겁게 지냈다. 이번 2017년 수필의 날 행사를 통해 대구시내 일부와 특히 달성군 명소를 탐방한 게 감동이었고 유익했다. 대구 근교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을 그 때는 왜 몰랐었지. 라는 생각이 스친다. 아무튼 이등병으로, 카투사하사관으로, 육군대위로 수놓아진 추억들이 봇물 터지듯이 밀려든다. 행사를 유치해 주고 수발을 들어준 문인들의 호의와 행사장소를 제공해준 대구시당국과 달성군을 소개해준 뿐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꿈을 영글게 해준 대구, 사랑하는 누이동생이 40대에 암으로 투병하다 아들 형제를 남겨두고 잠들어 있다. 그 시절 알고 지냈던 아가씨들은 모두가 파파할머니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들 지내는지 궁금하다. 내게 많이 살가워지고 싶어 했던 대명동 P양을 대할 면목이 궁색했었지만 이제는 만나 봐도 될 것 같다. 천국에 간 아이들의 엄마가 즐겨 불렀던 “사우”의 청라언덕이 아른거린다. 201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