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관 송무원(宋婺源)
[생졸년] 1677년(숙종 3)~1736년(영조 12) / 향년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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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 송공 묘지명(敎官宋公墓誌銘)
공의 휘는 무원(婺源), 자는 경휘(景徽)로, 우암(尤菴) 문정(文正) 선생의 증손이다. 조부 휘 기태(基泰)는 동지중추부사이다. 부친 휘 회석(晦錫)은 통덕랑으로, 선생이 늘 그가 어질다고 칭찬하여 “이 아이는 나의 지기(知己)와 같은 손자이다.”라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요절하였다.
당시 공의 나이가 12세였는데, 선생이 어리고 연약한 공을 걱정하여 억지로강계(薑桂)를 권하였으나 울면서 먹지 않았다. 선생이 친히《소학》과《가례》등 여러 책을 가르쳐 주었으며, 공을 두고 성품이 곧아 가망이 있다고 하였다.
기사년(己巳年,1689, 숙종 15)에 재앙이 일어나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길에 올랐는데,편지를 남겨 공의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이는 청음(淸陰) 김 선생(金先生)이 선생에게 주었던 시에 있는 말이었다. 이어 도학(道學)으로 권면하고, 또 재앙을 만난 본말을 하나하나 서술하여 말하기를 “ 이 일은 네가 몰라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외재(畏齋) 상국(相國) 이단하(李端夏)가 지협[砥峽,지평(砥平)]에 살고 있어 공이 모친을 모시고 그에게 의지하였으니, 외재공은 모친의 아버지였다. 얼마 뒤에 외재공이 세상을 떠나고 우암 선생이 사약을 받았다. 공은 외롭고 너무나도 원통하여 스스로 살 수 없을 듯하였으나, 오히려 유훈(遺訓)을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1694, 숙종 20)에 다시 정국이 바뀌자 선생이 가장 먼저 신원되었으나, 공은 세상의 도가 아직 다 깨끗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고 이때부터 가학(家學)에 전념하였다. 병술년(丙戌年,1706, 숙종 32)에 성상이금단(禁壇대보단)에서 직접 명나라의 두 황제를 제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마침 병이 들어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최석정(崔錫鼎)이 영의정의 신분으로 섭행(攝行)하게 되었다.
공이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최석정의 집안은 대대로 오랑캐에게 아첨을 하였으니, 그가 제사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성상이 최석정을 위로하고자 하여 공을 강진(康津)으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재상에게 대신하도록 하였으니, 사론(士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당시에 동추공이 영동(永同)에 있었는데, 공이 남쪽으로 떠나면서 집안사람을 시켜 모친을 모시고 그곳으로 가게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동추공이 살던 집과는 10리 정도 거리여서 날마다 반드시 오가며 안부를 여쭈었다. 동추공의 당시 나이가 여든이었는데, 공이 직접 나물을 캐고 물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올렸으며, 여가에는 반드시 그 곁에서 문정 선생의 유문을 읽었다. 동추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여강(驪江)의 강가로 거처를 옮겼다.
병신년(丙申年,1716, 숙종 42)에 사문(斯文)의 시비가 비로소 크게 정해지자,2년 뒤에 선공감 감역관에 제수되었다. 공은 연로한 모친의 봉양을 위해 억지로 관직에 나아갔지만 곧바로 작은 혐의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얼마 뒤에 경녕전 참봉(敬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제용감 부봉사로 자리를 옮겼다.
신축년(辛丑年,1721, 경종 1)에 재앙이 일어났을 때,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지평으로 들어갔다. 을사년(乙巳年,1725, 영조 1)에 모친의 상을 당하고, 상기(喪期)를 마치고나서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시사(時事)가 한번 바뀌자 또 관직을 버렸다.
공이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마침역적의 난리가 일어나성문이 낮에 닫히자 사대부들은 대부분 황급하게 피난을 갔다.
공이 탄식하기를,
“나는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의 신하이니, 의리상 임금을 뒤로 할 수 없다. 급박한 상황을 만나면 오직 한 번 죽을 뿐이다.”
하였으며, 난리가 평정되자 떠났다.
처음에 숙종이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공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여 3년 만에 일을 끝마쳤다. 경술년(庚戌年,1730, 영조 6)에《경례문답(經禮問答)》을 이어서 간행하였으며, 2년 뒤에 또 연보를 수정하여 간행해서 반포하였고, 그 후에 또 선생의 묘표를 세웠다.
병진년(丙辰年,1736, 영조 12) 11월 1일에 거처하던 여강(驪江)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0세였다. 이듬해 1월 29일에 수원(水原) 만의리(萬義里)의 무봉산(舞鳳山)에 장사 지냈으니, 우암 선생의 묘소 서쪽 기슭이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과 식견이 깊었으며, 바라보면 의젓하여 비록 친한 사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모친을 섬길 적에는 얼굴 빛과 용모를 온화하게 하여 조금도 모친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모친이 여러 손자들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어렸을 때에 문정공(文正公송시열)께서 효자라 칭찬하던 것을 내가 늙어서도 잊지 않고 있는데, 더욱 그런 줄 알겠다. 너희들은 다만 네 아버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거처할 적에 공경을 다하고 병이 나면 근심을 다하였으며, 제사 지낼 때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거의 옛날의 이른바 효자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일찍이 동추공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숙고조(叔高祖) 전첨공(典籤公)의 묘소를 이장하였으며, 또 조부와 조모의 묘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늘 가슴아파하여 밤낮으로 경영하여 조금씩 재물을 모아 만년에야 합장을 하였다.
그대로 묘소 아래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절을 하며 시마복을 입는 달을 채웠는데,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의 효성은 실로 이보다 더 위대한 점이 있다. 문정 선생이 몸소 대의(大義)를 자임하고계왕개래(繼往開來)의 공이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망극한 은혜를 입지 않았겠는가.
공은 늘 선생의 기일이 되면 밤새도록 슬피 울며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들의 축에 끼게 된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인가.”
하였으니, 이는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친척을 친애하는 의리를 겸하여 소유한 것이다.
선생의 문집과 연보가 간행된 뒤로 선생의 언행이 온 나라에 가득하게 되었다. 선생의 도가 비록 지금 행해지지 않지만 앞으로 천하후세를 기다릴 수 있으니, 이는 공이 지성으로 발휘한 공로이다. 공은 스스로 어린 나이에 중한 부탁을 받았다고 여겨 유념하고 삼가서 잠시라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 가지 말과 행동에서부터 음식과 기거의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말하기를 “선조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곤경을 당하여 떠돌거나 온갖 어려운 일을 겪어도 편안히 대처하였으며, 제사와 봉양하는 일 이외에는 어떤 일에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비록 낮은 관직과 적은 녹봉에도 관직에 나아가면 반드시 자신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떠나야 할 때면 관직을 버리고 떠나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음양과 선악의 분별에는 논의가 준엄하여 마치 단 칼에 두 동강을 낸듯한 통쾌하였다. 비록 눈앞에서 생사와 화복이 결정되더라도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
이는 모두 선생의 우뚝한 유풍(遺風)이니, 그 어렴풋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다만 공은 평소 성품이 강직하여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지 않았으니, 곤궁하게 생을 마쳐 타고난 자질을 만에 하나도 펼쳐보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의리가 가려지고 인심이 매몰되었으니, 가령 공이 지금 세상에 살아있다면 한 가닥 올바른 논의가 오히려 퇴폐한 풍속을 진작시킬 수 있을 터인데, 하늘이 또 공의 수명을 연장해주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 슬프도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할 적에는 마땅히 실제 행실에 힘써야 하니, 실제가 없고 명성만 있으면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절대로 학문으로 자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늘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본래 정대(正大)한 법칙이 있으니, 어찌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여, 평생 동안 강습하고 실천하였다. 묵묵히 자신을 수양하고 법도(法度)를 지킴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집안 내에서도 볼 만한 법도가 있었다.
날마다 보는 행실에 드러난 것이 학문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를 어찌 남들이 알 수 있겠는가. 공은 자호를 ‘염수(念修)’라고 하였으니, 훗날에 공을 아는 자는 마땅히 여기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의 부인 김씨(金氏)는 판서 진귀(鎭龜)의 딸로, 사계(沙溪) 선생의 5세손이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술상(述相), 학상(學相), 덕상(德相)이고 막내는 요절하였다. 사위는 사인 강주립(姜柱立)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넉 자 되는 무덤 / 四尺之封
만의리 언덕에 있네 / 萬山之原
나의 명이 부끄럽지 않으니 / 我銘不愧
우암의 증손이라네 / 尤翁之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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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교관 송공 묘지:
이 글은 송무원(宋婺源, 1677~1736)의 묘지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경휘(景徽), 호는 염수와(念修窩)이다.
[주02] 강계(薑桂):
생강과 계피로, 상주(喪主)가 병약할 때 보양제로 먹었다.
[주03] 편지를 …… 주었으니:
편지는 송시열이 1689년 2월 15일에 쓴〈무원에게 보내다[寄婺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주자(朱子)의 고향인 무원으로 이름을
지으며 이로써 도학(道學)에 힘쓰기를 권면한 내용이 보인다.《宋子大全 卷128 寄婺源》
[주04] 이는 …… 말이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지평 송시열의 시에 차운하다[次宋持平時烈韻]〉시에 “무원의 정맥을 따른다.[婺源追正脈.]”라는 시구
를 말한 것이다.《淸陰集 卷4》
[주05] 금단(禁壇)에서 …… 하였다:
금단은 1704년(숙종 30)에 창덕궁의 북쪽 담 밖에 세운 대보단(大報壇)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신종(神宗)이 조선을 구원해 준
공을 생각하여 세운 것이다.
1706년에 숙종이 병환으로 황단에 직접 제사하지 못하고, 당시 영의정이던 최석정(崔錫鼎)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사학 유생(四
學儒生)인 송무원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영의정 최석정은 인조 때에 화친을 주장한 사람인 최명길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으니, 황단의 제사를 대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肅宗實錄 32年 3月 3日》
[주06] 병신년에 …… 정해지자: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말한다.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와 송시열(宋時烈) 사이에 벌어진 오랜 시비에 대하여 1716년(숙
종42)에 숙종이 윤선거 문집의 목판을 헐어 버리라고 명함으로써 시비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 노론을 지지한 일을 말한다.《肅宗實
錄 42年 8月 24日》
[주07] 역적의 난리가 일어나: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말한다.
[주08] 계왕개래(繼往開來)의 공:
지난 성인(聖人)의 뒤를 잇고 앞으로 올 후학을 열어주는 학문의 공을 말한다. 주자(朱子)가〈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공자
의 덕을 찬양하면서 “지나간 성인을 잇고 후세에 올 학자를 열어 준 것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堯舜)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繼往聖
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