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 놀랍지 않은 기적
2023.12.24.(대림절제4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마태 14:14-19)
들어가는 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병이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수천 배로 늘리신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됩니다. 거기에 더해 제자들에게는 믿음과 그에 따른 능력을 가르치려고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석합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든 결론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됩니다. 오병이어 이야기의 포커스를 기적에서 연대의 정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그러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더불어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요구했었습니다. 요한의 회개는 다가올 하늘나라를 꿈꾸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단호한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행동의 변화를 보여야만 합니다. 회개는 실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간절함을 가지고, 때로는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을 보러 모여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강한 연대의 정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연대의 정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행동을 요구합니다. 제자들은 이 연대의 정에 함께 참여하도록 요구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책임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을 마을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람들과 느꼈던 배고픔의 공감을 연대의 정으로 바꾸십니다. ‘먹을 것을 사먹게 돌려보내라’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공감(sympathy)과 연대의 정(compassion)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공감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지만, 연대의 정에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공감이 연대의 정으로 바뀔 때, 기적은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비범한 능력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연대의 정이 비록 기적의 출발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능력이 실제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그러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여러분에게 연대의 정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연대의 정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수고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죠. 아니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없음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우리에게는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곧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편한 그리스도인의 자기변명인가요? ‘우리는 믿음이 부족해!’ 우리는 이 변명으로 천국만 약속받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17절) 예수님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 제자들이 대답한 말입니다.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다’(only)고 함으로써 그것이 자기들의 양식임을 강조합니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여분의 소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기적에 참여하는 제자들
제자들은 사람들이 제각기 마을로 돌아가면, 예수와 더불어 쉬면서 배를 채울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사람들과의 공감에서 출발해서 자기 연민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기 연민을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으로 돌려놓아야만 했습니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18절)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병이어를 내어놓습니다. 자신들의 끼니를 위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는 것이 타인과 연대하기 위한 첫 번째 행동입니다.’(compassion) 제자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가져다주었다는 묘사조차 없습니다. 제자들의 침묵과 기록의 생략은 소유에 대한 완전한 포기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조그만 기부에도 상대의 조건, 즉 교회 다니는지, 혹은 가난한지 등을 따져가며 생색내기만을 좋아하는 교회들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19절) 제자들이 내려놓았던 것은 이제 예수님에 의해 다시 들려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것은 더 많은 이들을 향한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제자들이 ‘들고’ 즉,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축복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의해 들려진 빵과 물고기는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줍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들의 배를 채울 음식이 타인의 배를 채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소유가 나눔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연대의 정과 기적 사이에 있었던 과정의 핵심입니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마태복음이 특별히 드러내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놀랍지 않은 기적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20-21절) 제자들의 것이 무리의 것이 되자 모두 만족했습니다. 누군가의 소유가 내려놓음과 들려짐을 통해 나눔이 되자 유일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만족입니다. 참된 기적은 빵이 늘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어난 빵에 기적의 초점을 맞추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기만 하면 돼! 그러면 예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실 거야.’ 그러면서 심지어 우리가 가진 여분조차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다고, 그러니 더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라니요? 여러분은 그 빵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샘솟듯이 솟아났는지, 빵이 떼어지는 순간 빵이 다시 커졌는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가지신 능력을 확인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호기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려는 하늘나라의 핵심 가치인 연대의 정에서 눈을 돌리게 할 뿐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 능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놀랍게도 모든 복음서에는 빵과 물고기를 예수님의 능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이 사건의 기록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르침과 치유에 사람들은 늘 놀라움을 표시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왜냐하면 동시에 남자만 오천 명이나 먹이셨기에 놀라운 이 사건에 사람들은 아무도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능력과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연대의 정을 제자들에게 몸으로 보여주시고, 제자들이 깨달아 연대의 정에 참여하도록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네 가지 복음서의 병행구절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이해하곤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파송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막6:31) 마가복음에서 외딴 곳으로 ‘물러남’은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예수님의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한 제자들의 요청은 자신들에게 쉬라고 했던 말씀을 예수님에게 다시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가 한 아이의 소유였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요6:9)에 등장합니다. 이것을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 덧붙여 이해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격입니다. 어쨌든 복음서의 전개 방식은 각기 다릅니다. 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지금까지 저의 해석은 마태복음에 충실한 것임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 되기에 힘써 왔습니다. 기적을 보러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구해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