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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누정 정원 스크랩 담양 면앙정(?仰亭)과 송강정(松江亭)
이장희 추천 0 조회 117 14.06.12 2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면앙정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면앙정 표지석이  보인다.

 

 

면앙정에 가기 위해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갔더니 제봉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면앙정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면앙정 안내판과 면앙정 중수기적비

 

 

면앙정기

 

 

면앙정 입구에는 면앙정가비가 세워져 있어 적어본다.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 날개를 펼쳤는 듯

옥천산 용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끊임없이 퍼진 듯이

넓거든 길지나 말지, 푸르거든 희지나 말지

 

 

면앙정(?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이 정자는 송순(宋純, 1493~1582)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것이다.

송순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들과

학문이나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임제(林梯), 정철(鄭澈) 등의 후학을 길러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며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활주(活柱:기둥)가 받치고 있다. 측면과 죄우에  마루를 두고 가운데에 방을 두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차례 보수한 것이며, 1979년과 2004년에는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였다

최초의 모습은 겨우 바람과 비를 피할 정도의 초정이었다 한다.

정자 안에는 이황, 김인후, 임제, 임억령 등의 시편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송순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仰亭), 담양출신 증  이조판서 태(泰)의 아들이다.

151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 세자시강원설서가 되고,

 152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활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면앙정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곧게 뻗은

 수령 200년이나 된 굴참나무 보호수가 시원스럽게 서 있다.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너무 좋았다.

 

 

면앙정에서 내려와 앞을 바라보니 넓게 펼쳐진 들판과

산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면앙정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리다 보니  

송강정 이정표가 발길을 잡아 끈다.

 

 

송강정으로 오르는 길은 면앙정에 비해 완만한 경사길로

 계단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송강정이 바로 보인다.

 

 

송강정은 정자 주변의 소나무 숲이 풍치를 더해 주고 있다.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송강정은 조선 선조(宣祖) 17년(1584)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다 당시의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창평에 내려와

정자를 세운 것이다. 죽록정(竹綠亭)을 고쳐지어 송강정(松江亭)이라 일컬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지붕) 건물이다.

중재실(中齋室)이 있는 구조이며, 전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란 현판이 달려 있다.

 

 

정철은 이곳에 머물면서 식영정(息影亭)을 왕래하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와 가사(歌辭)를 지었다.

《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모하는 심경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사에 비겨

자신의 충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아름다운 가사문학의 정취가 배어나는 글이다.

 

 

송강 정철(1536~159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 문인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으로, 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다.

10세 되던 해에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사위 계림군이 관련돼 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 당하여 곧 아버지만 유배에서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로 요절했다.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어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송강 정철 선생 시비 

 

1560년(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으며, 1580년(선조 13) 45세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1585년(선조 18)에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 동안 은거생활을 할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송강정 위에서 바라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정자 주위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정자 앞으로 흐르는 증암천(甑岩川)은 송강(松江) 또는 죽록천이라고도 한다.

 

 

면앙정과 송강정을 둘러보고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는 한적한 길을 쌩쌩 달리니 기분이 상쾌하다.

 

 

넓은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길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가을이 깊어감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조선 중기 명곡 오희도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집의 정원

 명옥헌 원림(명승 제58호)을 찾아 부지런히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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