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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라곤(시인․전 봉화 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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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기’ 말이 듣기 싫어 동량재의 꿈을 꾸다
나의 첫 공직생활은 까까머리로 인사발령장을 받은 내력만큼이나 싱그러움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공중을 빠른 속도로 지나간 제트기 같기도 한데, 그 비행기 꼬리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연기가 한참동안 하늘에서 남아있듯이 잔상이 되어 나풀거렸다.
그 평온했던 그리움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1970년 10월 21일에 대구시 동구 신천5동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창수면에 근무할 당시 영덕군수를 지내던 분이 대구시 동구청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청장님께 단도직입적으로 한통의 편지를 썼고 그것이 인연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 갑작스레 이루어진 인사라 이사할 준비도 안 되어서 나는 당분간 동사무소 숙직실 신세를 졌고, 식사는 동네 음식점이 없는 관계로 중국음식집에서 대놓고 먹기로 했다. 아침에는 자장밥, 점심때는 자장면이나 우동, 저녁에는 볶음밥 이렇게 먹다가보니까 싫증이 나서 한동안 중국집 부근에는 다가가기조차 싫었다.
동사무소 근무는 시골의 면과는 다르다. 민원인이 많은 관계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주민등록 등초본 떼어주고 전출입 서류 정리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라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구시에 오면서 야간대학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뒤로 미루고 먼저 문학의 길에 정진하리라 마음을 다졌다.
이듬해에 신암1동으로 발령받아 잠시 근무하다가 동촌지역을 흐르는 금호강과 경계하고 있는 효목동으로 인사 이동되었다. 그곳 사무소에 근무하는 직원 중 행정서기보(현재 9급)로는 내가 가장 고참이어서 승진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서였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형태가 반반 섞인 효목동은 논밭도 있고 해서 정감이 가는 지역이었다.
효목동에 근무하던 1972년 이후 2년간은 시인이 되기 위해 내가 대구시내 문학 지망생과 함께 열심히 습작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비록 공직에 몸담고 있었으나 동 행정이 단순 업무이고 근무시간이 끝나면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문학의 취향을 살려 포부를 키워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하여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다시 공부를 했는데 기회가 왔다. 김수학 경북도지사가 일대 혁신적인 인사정책을 발표한바 1975년도부터는 경북도 관할에서 동직원이 구청으로 전입하거나, 시군구에서 도청으로 전보하려면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행정서기(현재 8급)였던 나는 추천을 받아 「제1회 대구시 구청전보시험」에 응시했다. 300명이 응시한 전보시험에서 1등을 하여 동구청 시민과로 발령받아 주민등록사무를 맡게 되었다. 다행히 주민등록업무는 면사무소와 동에서 맡아본 업무라 자신이 있었다.
그해 10월부터 일제히 주민등록증을 경신하기에 이르렀는데 밤늦게까지 주민증을 경신발급하고 접착해주느라고 우리 부서는 정신이 없었다. 그런 시기에 행정계에서 연락이 와서 이틀 후에 대구시 직원 소양고사가 실시되는데 추천했으니 응시해야 한다고 알려왔다.
물론 소양고사 준비는 안 되었지만 일단 경험삼아 시험을 응하기로 결심하고 과목을 물어보니 객관식으로 행정법, 행정학, 경제원론이고 주관식으로는 지방행정, 지방재정, 개발행정이라고 알려주었다. 주관식을 치는 것이 부담스러운데다가 경제원론 같은 과목도 대학 수준으로 출제된다고 하니 그 말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대충 준비를 하여 당일 날 아침, 시험 장소에 가보니 각 구청에서 온 시험선수(?)들이 많았다. 시청 인사과 직원이 나와서 성적우수자 3명은 도에서 치는 소양고사에 나간다고 했다. 객관식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주관식 문제 가운데 개발행정 분야에서 ‘반상회 활성화 방안’이 출제되었는바, 동에서 주민들을 상대한 경험을 사례로 답안을 썼다.
자신이 없었지만 며칠 후 행정계 직원이 내가 2등을 하였다고 축하해주었다. 1975년 12월 31일 종무식에서 시장님으로부터 상장과 함께 상금 만오천원을 받았는데 당시에 이 상금은 필자의 1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