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청빈淸貧
2,000년 가깝게 이어지고 있는 수도 생활 역사 규범인 복음 삼덕 순명, 정결, 특히 가난과 청빈의 의미와 본질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오래전부터 질문해왔는데 아직 명료하지 않음을 제대로 정리되자 않았다는 증거다.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성경과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께 주목해 본다.
창조주 하느님은 세상과 사람의 진정한 주인인 주님이시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 안에 관리자일 뿐이다. 하느님께서 한처음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어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 그리고 가난하게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였다. 그분은 사람에게 완벽한 그 부요함과 충만함을 누리고 가지라고 하셨다. 다만 한 가지만 금하셨다. 에덴동산의 두 나무 선악과와 생명나무만은 손대지 말라고. 그것은 당신과 같아지려고 손대는 날 죽으리라고. 그러나 인간의 교만과 탐욕은 금령을 넘어섰고, 그 결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영적 정신적 기근으로 추락했다. 인간은 가장 크신 분 하느님으로 만족할 따름인데 아이러하하게도 이 기근을 세상적 재물과 세력으로 채우고자 상대방을 제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하느님은 이렇게 붕괴된 세상을 되돌려 놓기 위해 구원자들을 파견하셨다. 카인과 아벨부터 파견된 구원자들은 대부분 재력과 세력을 갖춘 부유한 자들이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자손과 땅의 축복도 허락하셨다. 잠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세상의 재물에 너무 가난하게 가져 도둑질과 원망으로 하느님을 이름을 더럽히지도 말고, 너무 부유하게 가져 배루근 김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라고 욕되게 하지 말 것을 청한다. 잠언의 이 기도는 사실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만유의 주인이신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창조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다 같이 정의롭고 조화롭게 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원죄와 더불어 생겨난 강육강식은 역사는 현재까지 진행중이다. 인류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기조차 원하지 않았다. 일부가 알아들었어도 왜곡과 부조리가 난무하며 발목을 잡았다. 이 왜곡을 바로잡고 하느님의 첫 뜻 의지인 그 부요함과 충만함을 살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필리피 2,1-11절을 통찰한 우리 회헌은 이렇게 설명한다. “천상 영광속에 부유하신 그분은 당신의 가난으로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시고자 육화하셨다.”(ND19).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오신 것은 가난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가난하게 오신 것은 삶의 기준과 척도를 최하향 으로 정해 모두를 아우르기 위한 신의 한 수 기준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복음 삼덕인 순명, 정결, 특히 가난과 청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짐승 우리에서 태어나셨다. 사회적 지위와 배경이 없는 집도 없고 유리(遊離) 걸식하셨고 비주류 순회 랍비였다(루카 9:58). 가난하게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예수는 부를 적대하지 않았으며 부자와 빈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그분 친구 가운데는 상당부분 부자들도 있었다. 아리마태아 요셉(마태 27:57),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루카 7:2), 베타니아 나자로와 마르타 마리아 가정(루카 10:38;요한 11,1),그리고 각자 자기 재산으로 예수를 섬긴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여인들(루카 8:3)등이 대표적이다. 예수는 그들의 도움을 직간접으로 받으며 병자와 사회적 약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부요함과 완전함 안으로 초대하셨다. 부요함과 가난함을 넘나들며 자신의 권능과 가난으로 부요함을 이끌고 가난함을 채워주셨다. 부요함을 가져다 가난함을 채워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과 예수의 마인드며 사명이다. 죽음과 승천 부활을 앞두고는 사람들과 역사에 대해 가난과 청빈에 대해 당신처럼 하라고 당신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모든 사람 인류에게 주어진 선택이 아닌 필수다. 명령이다.
순명 정결 청빈의 복음삼덕은 수도자들에게 불문율의 규범이 되어 이어졌다. 최초의 수도 생활자는 성 안토니오(AD 251-356)이다. 그는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려는 의도 3세기 중엽 이집트 사막에서 독신 은수 생활로 수도역사의 기원을 이루었다.
로마제국은 박해를 일삼다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아예 국교로 삼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와 수도 역사의 발전 대전환을 가져왔다.
은수隱修와 독수獨守 형태의 수도생활은 점차 공동생활로 변화되었다. 그 시작은 파코미우스(289-346)이다. 그러나 수도 공동체 생활의 전형은 베네딕도 수도회이다(480-543/547). 그는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추후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기본 규범서가 되었다. 13세기 이후 세상 속에서 생활하는 수도회들이 대거 생겨나 교회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수도회와 수도자가 급격히 약화 되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동안 복음 삼덕은 모든 수도회 조직과 생활자들의 정체성을 규정 짓는 불문율이었다. 특히 개별 회원이 지켜야 하는 청빈과 가난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소극적 이해와 적용으로 제한되어 그 의미와 가치를 절하한 현실이 오래 계속되어 왔다. 이것은 청빈과 가난의 본 의미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의미와 적용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예수의 모범에서 찾고 살아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질문과 대답의 귀결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정결과 순명이 그렇듯이 가난과 청빈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모든 사람을 한처음 부요함과 충만으로 이끌어야 하며 예수의 모범에서 찾아야 한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5년 2월 16일/20:10분
참조:오상선 신부,수도생활의 간추린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