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섬 그리고 광장 ― 파블로 네루다의 시학

[조영미]

고독한 섬 그리고 광장 ― 파블로 네루다의 시학

김 은 중

1. 들어가는 말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서 하위직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1950년 여름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파리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를 만난다. 그들에게는 그 때가 첫 상면이었다. “무엇이든지 만져보고싶어 하고 알고싶어 하는 격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멕시코 젊은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기민한 태도로 쉬지않고 질문을 던지고 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강한 전기 충격을 받은 것같은 그의 격렬한 욕구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배출로 출구를 찾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색 머리칼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넓은 이마에 강인해 보이는 턱을 가진 26살의 멕시코의 청년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의 첫 만남을 파스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뒤 22년이 흐른 뒤에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멕시코 학술원 회원에 임명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파스는 그의 문학적 궤적을 두 개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푸엔테스의 질문은 대지 위의 인간의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관계―이것도 수수께끼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에 대한 의미와 본질에 대한 것이다. 보편적 문학의 주제는 두 개 뿐이다. 하나는 인간과 우주와의 대화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대화이다. 푸엔테스의 질문은 두 번째 주제의 영역안에서 열리고 닫히며 또 다시 열린다. 실상 그것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온 몸으로 현실에 부딪히는 것이며 그것은 때로는 전투가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에로틱한 포옹이 되기도 한다. 멕시코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상상력의 책들의 저자인 푸엔테스의 작품을 규정짓는 두 개의 극단적 특질은 에로티시즘과 정치이다. 사회적 유대들과 에로티즘을 통한 유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와해되고 다시 만들어지는가? 침실과 광장, 한 쌍의 연인과 군중, 자신의 방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와 자신의 근거지에서 붙잡히는 독재자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그를 끌어당기는 이중의 매혹은 욕망과 권력, 사랑과 혁명이다.

     네루다의 작품세계를 언급하기 전에 다소 장황스럽게 느껴지는 곁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네루다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이중의 특질 역시 사랑과 혁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네루다와 푸엔테스를 갈라놓는 사 반세기의 시차 때문에 위에 언급한 이중의 특질이 네루다에게 있어서 더욱 절실한 실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파스의 지적을 이 글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파스가 푸엔테스의 작품에 결여되어 있다고 보는 ‘대지 위의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 즉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가 네루다의 작품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역사와의 관계는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와 역사 혹은 시와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2. 자연 속에 표류하는 고독한 섬

     네루다는 최소한 둘이다. 하나는 『지상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의 저자로서의 네루다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나머지 작품들의 저자로서의 네루다이다. 다시 말해, 시적 열정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작품의 저자이며 사회적 열정을 통하여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광범위한 작품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네루다는 지나치게 다작이었다” 혹은 “네루다는 자기비판이 부족했다” 혹은 “네루다는 너무 일찍 시를 포기하고 팜플렛에 치중했다” 등의 언급들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중남미 시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평서들 중의 하나인 『가면과 투명성』(La máscara y la transparencia)을 쓴 베네수엘라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기예르모 수크레(Guillermo Sucre)는 자신의 책에 네루다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시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통하여 세계에 대한 비평을 제안하는 서정적 시의 영역에 네루다의 작품은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지상에서의 거주』를 제외하고.

     보르헤스나 옥타비오 파스의 유년시절과 네루다의 유년시절을 비교해 볼 때 금방 눈에 띄는 차이점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 무척 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년의 우주의 모습은 그들의 문학세계를 가름짓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보르헤스와 파스의 우주가 서가에 가득 꽂혀있는 책들의 우주였다면 네루다의 우주는 원시적 자연의 모습을 띤 우주였다.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으며 돈키호테를 영역본으로 읽은 보르헤스의 유년의 경험이나 할아버지의 도서관에서 그 당시에는 희귀한 스페인과 프랑스의 소설과 시 그리고 역사책들을 읽기 시작한 파스의 유년의 경험과 비교한다면 13-14세에 시를 쓰기 시작한 네루다의 상상력은 테무코(Temuco)의 원시적 자연의 압도적인 생명력이 보여주는 문학이전의 신화적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네루다에게는 시와 자연은 하나이다. 양자 사이의 동일성 혹은 혈연관계는 특히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칠레의 밀림과 깊은 관계가 있다. 태어난지 한 달만에 어머니를 사별하고 아버지와 함께 이주한 칠레 남부에 위치한 테무코라는 산촌지방의 풍경은 네루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첫 번째의 강력한 경험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일어서 있거나 혹은 쓰러져 있고 파묻힌 나무들, 몇 달씩 지속되는 겨울비와 격렬한 바람,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태어나고 죽는 순환적인 생명력의 세계. 테무코의 거칠고 투박한 자연은 네루다의 상상력의 가장 근원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내가 처음 본 것은
나무들, 아름다운 야생의 꽃들로 수놓아진
절벽들, 습한 대지, 불붙은 숲
그리고 세상의 저 편으로 범람하는
겨울이었다.
나의 유년은 젖은 신발, 밀림에 쓰러져
칡넝쿨과 딱정벌레에 먹히는
썩은 나무의 몸통, 귀리밭의 달콤한 날들,
장엄한 철길을 만들기 위하여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황금빛 턱수염이다.

―「나는」(Yo soy)

     장래의 네루다가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야생적 아름다움」」을 알기 시작하고 그 속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시의 기원은 테무코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그의 시는 기원에로의 돌아감, 즉 시작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고향과의 유대를 표현하기 위하여 확연한 지역색 혹은 지역적 채색주의를 벗어버리고 지리적 표시를 하지 않고도 뿌리깊은 토착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네루다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관습 혹은 문학적 학파에 의해 침해를 받지 않은 채, 살아있는 생명―나무며 곤충들―에 이름을 붙이는 탐험가처럼 자연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았던 테무코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무언가 내 영혼 속에 뛰는 게 있었어,
열기 혹은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나는 내 방식대로 해 보았지,
혼자 그 불에 탄 자국을
해독하며
나는 애매한 첫 줄을 썼지
형체도 없이 애매한, 순전히
바보짓이었지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지
풀어져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숲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구부러진 밤, 우주를.

―「詩」(La poesía)

     자연은 언제나 네루다를 매혹시키고 도취시켰으며 사물을 포획하는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 만들어주었다. 대지 위의 물질들을 관능적으로 점유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감상적으로 내맡기게 자극한 것도 자연이었다. 그 중에서도 비(물)에 대한 이미지는 네루다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방울져 떨어지는 낙수소리는 그의 “유년의 피아노” 소리였으며 “그 소리의 음계는 그의 가슴과 시 위에 떨어지며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네루다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책 『나의 인생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에서 비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 유년의 날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유일한 등장인물은 비였다. 극지방의 폭포처럼 쏟아지던 남쪽 지방의 엄청난 비. 내 조국의 변경 지방에서 나는 생명과 대지와 시와 비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 몇 달씩, 몇 년씩 비가 내렸다. 비는 길다란 유리침처럼 줄지어 내렸고 지붕 위에 부딪혀 깨지거나 혹은 창문을 때리는 투명한 파도 높이에 이르렀고 집들은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겨울바다의 배였다. 이 남아메리카의 차가운 비는 채찍처럼 후려치고 금새 푸른 하늘을 보여주는 충동적인 돌풍을 동반하는 더운 지방의 후끈한 비가 아니었다. 반대로, 남쪽지방의 비는 잿빛 하늘에서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끈기를 가지고 있었다.

     장시적 형태와 풍부한 리듬을 곧 잘 사용하는 경향 때문에 네루다를 강의 시인 혹은 대양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네루다에게 일약 전국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ción desesperada)의 창작 배경에 대한 설명에서도 “내가 이 시를 사랑하는 이유는 심각한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실존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책을 쓰도록 도와준 것은 임페리알 강(el río Imperial)과 그 강의 어귀였다. 『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는 산티아고에서의 로맨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남쪽의 물과 나무의 파노라마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때로는 비에 대한 경험은 개인적 삶과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어 측정할 수 없는 신비로 이끌고 가는 종교적인 계시로 경험되기도 한다. “...나는 남쪽지방의 가난한 한 조각의 대지에 속해 있지만 내 행동들은 먼 시간으로부터 왔다. 마치 숲이 우거지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그 땅이 내가 모르고 있고, 모르지만 알아야하는, 나무들과 비에 잠겨 긴 강을 조사하다 길을 잃은 채 눈을 감고 찾고 있는 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네루다의 초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 원시성이며 이러한 특성은 점차적으로 가장 적절한 표현의 도구가 된다. 보들레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자발적 원시성은 현대시에 있어서 가장 지속적인 갈망 중의 하나를 미리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갈망은 과도하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문화적이고 문학적 전통의 짐을 벗어버리고 유럽의 인본주의가 내세우는 절제와 명백한 조화를 탈피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는 산업사회가 시작하면서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는 부르조아지 사회에서 무정부주의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기술이 진보할수록 문명에 의해 때묻지 않은 자연적 인간의 상냥스러움을 동경하는 것은 일반적인 추세가 되고 있었지만 네루다만큼 그렇게 철저하게 자연으로의 몰입을 보여주는 예는 드물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원시성을 통한 자연에의 몰입은 자연과의 교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의 고독을 의미한다. 시는 이러한 고독 속에서 쏟아내는 외로운 투쟁의 수단이다.

     1927년에 미얀마의 랭군 주재 명예직 영사로 임명되어 이후 콜롬보와 자바의 영사 생활의 기간에 쓰여진 시들을 모은 『지상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도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시집은 네루다의 작품 중에 초현실주의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 오늘날 초현실주의적이란 단어는 현실의 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지시체를 구하지 않는 모든 시에 걸려있는 오명이다. 시편이 비스듬히 지시체를 언급할 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때, 무엇을 지시하는지 모를 때, 그것은 의심할 바없이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지상에서의 거주』는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네루다는 낭만주의의 시적 자아를 비롯하여 어떠한 미학적 교훈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이 책의 문제는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존 케이지(John Cage)가 “나는 여기 있고/ 나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고/ 말할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시이다”라고 말했다면, 네루다는 ‘나는 여기 있고/ 나는 말할 것이 많고/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를지라도/ 나는 그것을 말한다/ 이것이 시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상에서의 거주』는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시적 불능의 상태는 자연히 세계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지시체를 관계 맺는 일이 비스듬하고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상에서의 거주』는 시적인 것의 한복판에 떨어진 시인의 작업과 투쟁을 증언하고 있지만 그러한 현실이 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나는 여전히 뿌리인 것이 싫다.
대지의 축축한 지층에서, 밑으로 밑으로
뻗어 내리며 안절부절 꿈에 떠는 뿌리,
날마다 빨아들이고 생각하고 먹으면서.

나는 그 많은 불행이 싫다.
홀로 지하에 갇혀 시체밖에 없는 술창고에서
떨며 고통에 죽어 가는
여전히 뿌리와 무덤의 신세가 되는 게 싫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모습으로 도착하는 나를 보고
월요일은 油井처럼 불탄다,
상처 입은 바퀴처럼 울부짖으며 지나간다,
밤을 향해 뜨거운 피의 발걸음을 옮긴다.

―「배회」(Walking around)

     이 시는 시인이 놓여있는 긴장, 즉 시적 경험이 자리잡은 어두운 영역의 집요함과 그 어두움을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단단히 비끄러매려는 시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니 더 나아가 네루다가 선택할 길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 네루다를 자기 자신의 심연으로 인도할 ‘시적 현실’과 평온한 대안으로 등장하는 ‘객관적 현실’ 사이에서 네루다는 ‘객관적 현실’을 선택한다. 세상과의 직접적 관계의 결여는 그를 침묵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네루다가 아직 너무 젊고 그를 둘러싼 고독은 너무 완강했다. 그러한 예증은 네루다가 아시아에 머물렀던 5년동안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네루다와 파스의 시작품에 있어서 인도의 영향을 언급한 네루 대학의 교수인 수스니그드하 데이(Susnigdha Dey)는 이렇게 적고 있다.

네루다의 시에 언급된 인도에 대한 주제는 단지 표피만을 건드리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문명과 완전히 다른 문명을 만났을 때 느끼는 어리둥절함만으로 축소되어 있을 뿐이다. (...) 젊은 나이에 오년의 세월을 아시아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삼천 페이지가 넘는 네루다 전집에서 인도와 아시아에 대한 언급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또한 독자들이 찾아낼 수 있는 인도에 대한 몇 안돼는 언급이 그가 인도를 떠난 뒤에 쓰여졌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 그에게 인도는 “폐쇄된 땅”이었다. 그리고 이십년 후에 다시 인도를 방문했을 때도 동일한 강박관념에 지배되고 있었다. “오래된 빈궁함/ 마을에서 울부짖는/ 기아”. 그는 삶의 가장 표피적인 부분밖에 볼 줄 몰랐고 인도와 같이 광활한 나라의 고유한 특질을 깊이 연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네루다가 동양에 체류했던 기간 동안에 언제나 그를 사로잡고 있던 감정은 테무코나 산티아고에서와 같이 절망스러운 고독이었다. 화해할 수 없고 교감할 수 없는 고독(“나는 울고 있다 황폐 가운데서, 혼란 사이에서/ 차오르는 향기 사이에서, 나는 귀기울인다/ 그저 맴도는 것에, 불어나는 것에/ 방향도 없이 표류하는 것들에/ 쇠사슬과 카네이션를 걸치고 나타나는 것들에 나를 맡긴 채”)은 네루다로 하여금 애매한 지시체를 갖는 시와 시적 기호가 수상쩍은 시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지루하게 내리던 테무코의 비처럼 산만하고 덧없는 네루다의 시적 자아는 올페이즘적 신비를 주장할 수 없었다. 네루다는 건강을 선택했고 그 결과 세계와 언어 사이의 관계가 단일한 미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네루다가 1934년 스페인 주재 칠레 영사로 임명되어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회주의를 지지하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공산주의자 라파엘 알베르티(Rafael Alberti) 그리고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ández)와의 친교는 네루다로 하여금 고독에서 벗어나 민중과의 교감이라는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3. 고독한 섬에서 광장으로

     스페인 내란은 전 세계의 작가들, 특히 중남미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네루다의 초청으로 스페인 내란이 한창이던 1938년 발렌시아에서 개최된 제2회 반파시스트 작가 모임에 참가했던 옥타비오 파스는 스페인 내란은 죽음과 패배 앞에서 형제애를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중해적 뿌리를 확인시켜주는 기회이기도 하였고 그의 적(敵)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또한 『스페인이여, 내게 이 아픔의 잔을 거두어 다오』라고 노래한 세사르 바예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착취와 불평등 그리고 사회적 불의가 팽배해 있던 중남미 사회의 작가 치고 어느 누군들 이 시기에 스페인 내란과 무관할 수 있었을까? 열성과 지속성의 문제에 있어서 다소간 차이를 보일지라도 사회주의에 경도 되지 않았던 작가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특히 네루다에게 스페인 내란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고독의 섬에서 광장으로 나가는 문이 되어주었다.

아, 시 한 방울, 사랑 한 모금으로 세상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투쟁과 단호한 심장뿐이다.

     광장이 의미하는 것은 신화에서 역사로, 노스탈자적인 기원에서 투쟁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개인주의적 소외에서 집단적인 출정(出征)으로, 고독에서 연대관계에로의 이행이었다. 이것은 또한 고독 속에서 번민하고 머뭇거리던 시적 열정이 광장이 보여주는 사회적 열정에 자리를 내어준 것을 의미한다. 『지상에서의 거주III』에 포함되어 있는 「가슴속의 스페인」(España en el corazón)에서 네루다는 자신의 성실성을 선언하는 웅변적 스타일과 민중의 적들을 처단하는 공격적 언사들을 사용하고 있다.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위태롭고 어두웠던 『지상에서의 거주』는 잉카제국이 남겨놓은 「마추피추의 산정」(Alturas de Macchu Picchu)에서 광장으로 향하는 서사적 편력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난 다른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민중의 벌거숭이 가슴을 만진 거지요. 난 자신 있게 민중 속에 사는 비밀을 실현시키게 된 겁니다. 민중의 힘은 봄보다 더 강하고 콩보다 더 기름지고 물보다 더 낭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실의 숨겨진 힘이지요. 나의 천하고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민중이 그의 영토 속 그 딱딱한 지각에서 꺼내는 진실 말입니다.

어떻든 한 시인이 다른 시인을 위해서 발표하는 곳에서, 그러한 일은 나를 끌지 않고, 나를 매혹하지 않으며, 다만 나를 출판사에서 먼, 인쇄된 책장에서 먼 어떤 바위 앞이나 파도치는 곳, 자연의 숲 속에 스스로를 깊이 파묻히게 할 따름이다... 시는 독자와의 연결을 잃어버렸고, 독자에게 닿지 못했다... 시는 독자를 되찾아야 한다... 시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 녘에나 별이 빛나는 한 밤에 적어도 한 줄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우리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는 『지상에서의 거주 I』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사 이전의 원초적 덩어리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지만 『지상에서의 거주』에서처럼 스스로의 실체 한 가운데에서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그것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 서사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인 1400년의 원주민 문명에서부터 “중간 중간 산맥이 끊어진 아메리카의 지리”같은 중남미의 배반의 역사를 가능한 한 모두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에게 “언어를 주었고 무성한 잎위에 떨어지는 밤비의 음악을 들려주던” 자연은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운명을 예시하는 신탁이 된다. 자연과 역사가 들려주는 신탁은 진보의 원료들이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운명은 노동을 통하여 바람직한 삶을 만들어 가는 인간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숨겨져 있는 의미를 관통하여 자연과 역사가 들려주는 이러한 교훈은 작품 전체에 걸쳐 찾아볼 수 있으나 「마추피추의 산정」에서 가장 강력한 목소리로 나타난다. 수 세기에 걸쳐 신비로운 모습을 안데스의 산정 위에 감추고 있던 잉카문명을 보고 황홀경에 빠진 네루다는 과거에 생명을 불어넣어 돌들로 하여금 위대한 도시를 건설했던 잉카인들에 대해 말하도록 한다. 그는 마추피추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돌아온 후였으나 마추피추는 더 위대했다. 역사책에 나오는 문명들은 앗시리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리아인과 페르시아인에 대해 설명하며 그들의 엄청난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추피추의 유적을 보고 난 후에, 놀라운 고대문화들도 나에게는 하잘것없이 생각되었다. 버려진 잉카의 탑들이 보여주는 고고한 장엄함에 비하면 인도는 더덕더덕 분을 칠한 왜소하고 보잘것없은 신들의 전시장 같았다. 이제 나는 이 위대한 문명과 나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 땅을 밟고 있다면 우리도 아메리카 공동체의 숭고한 노력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고 우리의 무지와 침묵은 죄악일 뿐아니라 패배를 연장시키는 것이다. 귀족주의적 세계주의는 우리와 관계없는 민족의 과거를 존경하게 만들었고 우리자신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 마추피추를 보고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과거의 아메리카인들을 생각했다. 과거의 그들의 투쟁이 지금 우리들의 투쟁과 이어져 있음을 보았다.

     잉카 문명이 남겨놓은 산정의 유적에서 시인은 전(全)아메리카를 바라보면서 휘트먼(Whitman)을 생각했을까? 시적 이상(理想)과 역사적 이상(理想) 사이에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던 유일한 근대시인 휘트먼의 시 「나에게 부르는 노래」(Canto a mí mismo)를 생각하고 『우리 모두의 노래』를 구상하였을까? 『우리 모두의 노래』 뒤에 쓰여진 『일상의 것들에 대한 송가』(Odas elementales)에 들어있는 「휘트먼에 대한 송가」(Oda a Walt Whitman)에서 네루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몇 살이었는지도,
어디였는지도,
하지만 습기찬 위대한 남쪽에서
혹은 갈매기의 짧은
외침이 들리던 무서운
해변에서,
나는 손을 만졌다 그 손은
월트 휘트먼의 손이었다.
맨발로
나는 땅을 밟았다,
나는 풀밭 위를,
월트 휘트먼의
단단한 이슬 위를
걸었다.

나의 젊은 시절
내내
그 손은 나와 같이 있었다.

     네루다가 표현하는 풀밭은 휘트먼의 풀잎에서 볼 수 있는 범신론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적이고 생기가 돋는 대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네루다는 구어체와 대화체를 언어를 통하여 휘트먼이 제안했던 프롤레타리아적인 이상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당신의 목소리가
변두리
역에서
노래한다,
당신의 말이
저녁
부두에서
어두운 물
처럼
찰랑거린다,
당신의 종소리는
모든
민중들
처럼
까맣고
하얀
당신의 민중들,
가난한
민중들,
단순한 민중들을
잊지않는다.
당신의 풍요로운 생명의
광대함
아래
노래부르며 모여든다.
대지 위의 형제애의
순수한 자라남을
갈망하면서
당신의 사랑으로 민중 속을 걷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노래』는 많은 균열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네루다는 전근대적인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리와는 달리 사회변혁을 위한 근대적 비판이란 절대적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료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균열은 정확히 그 부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이념적인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기본적인 관념을 수정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의 사회적 열정을 지배하고 있었던 원리는 다분히 흑백 논리적이었다. 이 점에서 1941년에 출판된 스페인․중남미 시선집인 『월계수』(Laurel)에 수록할 작품의 선집과정에서 옥타비오 파스와 얽힌 이야기는 매우 시사적이다.

     네루다와 파스는 1938년부터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발렌시아에서 열렸던 제2회 반파시스트 작가회의에 멕시코 대표의 한 사람으로 파스를 초대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네루다였다. 그때 이미 네루다는 중남미의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파스는 겨우 첫 시집을 냈을 때였다. 파스는 자신의 시집을 네루다에게 보냈고 그에게서 아무런 언급도 받지 못했지만 네루다는 파스에게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의 사후 출판된 책 『추억』(Memorias)에서 네루다는 “그는 두 달 전에 내게 보낸 시집 한 권만을 출판했을 뿐이지만 진정한 싹이 보이는 것같았다. 그렇지만 그 때는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파스도 자신을 인정해준 대시인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월계수』는 스페인에서 알았던 시인 호세 베르가민(José Bergamin)이 제안하여 스페인 시인인 힐-알베르트(Gil-Albert)와 에밀리오 프라도스(Emilio Prados) 그리고 멕시코 시인인 비야우루티아(Villaurrutia)와 파스가 선집위원으로 지명되어 스페인어 근대시 선집을 만들고 있었다. 이때 멕시코 주재 칠레 총영사로 일하고 있었던 네루다는 이미 책이 인쇄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집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베르가민에게 요청했다. 네루다의 요청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미겔 에르난데스의 작품이 선집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 네루다가 주관한 만찬에서 파스가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할 때 네루다는 파스가 입은 흰옷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의식보다 더 순결하군”이라고. 그리고는 선집을 맡은 시인들에 대해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파스가 이를 제지했고 둘은 주먹다짐 일보직전에서 가까스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뒤 파스와 네루다는 25년동안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 당시에 이미 파스는 좌익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반대로 네루다는 전투적인 스탈린주의자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토록 긴 시간동안 두 사람이 재회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4. 고독한 섬과 광장의 화해를 위한 시도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한다. 1968년 이후 세계의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학생사태를 기점으로 진행된 일련의 변화들로부터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를 거치고 다변화된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논의를 거쳐온 지금의 시점에서 네루다의 참여문학을 예외적으로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말의 뜻은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의 긴장의 문제는 단지 네루다에 국한시켜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을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이라는 환원불가능한 개념의 짝으로 바꾸는 것도 이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열정이 바탕에 깔고 있는 사회변혁이론으로서 사회주의적 비판이론이 완전히 시효 상실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전제 또한 깔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런 질문을 해야한다. 네루다의 유년의 고독이 인간존재가 갖는 보편적 고독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고독이 인간됨의 본래적 조건이라면 고독의 문은 광장으로만 열려있었던 것일까? 광장으로 열리는 문이 밖으로 향한 문이라면 안으로 향하는, 안으로 열리는 문은 없었을까?

     엄밀히 말한다면 네루다의 고독에는 타자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서구의 역사의식 속에서 헤겔과 맑스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에 있어 주체인 ‘나’는 궁극적으로 자기동일적인 존재, 즉 분열되지 않은 통일적 존재이며, 맑스는 19세기 유럽문화의 전통 안에서 타자성을 생각했다. 헤겔은 변증법적 지양을 통한 타자의 동일화를 시도했으며 맑스는 노동계급에서 타자성을 인식하고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모순을 단순히 이러한 생산관계의 타자성에서만 이해했다. 헤겔의 주체개념을 비판한 맑스도 타자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들, 즉 타자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차이와 대립들―농부들, 여성들, 억압받고 있는 국가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인간 등―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시 사회의 다양한 연구의 결과로 레비 스트로스가 도달하고 있는 심오한 결론, 즉 “자연의 상태에서 문화의 상태로 이행하는 단계는 생물학적 관계를 일련의 대비(a series of contrasts)로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하여 특징지워지는데, 이원성(duality), 교체성(alteration), 상극성(opposition), 대칭성(symmetry) 등은, 그것이 매우 구체적 형태로 이든 막연한 형태로 이든, 인간사회의 본질적이고도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소재를 구성한다”는 결론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각자가 타자이며 성(性)도 타자이고 신성을 향한 열망 또한 타자이며 우리가 비합리적이라 부르는 믿음들 역시 타자이다. 요컨대, 예외와 차별성으로 취급되는 모든 영역이 타자성의 세계를 구성한다. 타자성이란 초월적 존재는 아니지만 시간적 현상의 이면으로 늘 실존과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네루다는 이러한 타자성의 시각에서 유년시절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네루다는 1954년 이후 『일상의 것들에게 바치는 송가』(Odas elementales)를 발표한다. 이 시편들은 그의 관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사물의 세계로 이동함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그러나 주의 깊게 바라본다. 이 시편들에서 시인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노래해 주기를 요구하는” 사물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소박한 아름다움을 통하여 세상과 삶의 신비를 단순화시켜 보여주고자 한다. 「칠레의 새들에게 바치는 송가」(Oda a los aves de Chile)를 보자.

바다새들의
비상이
눈 시린 햇살을
흩뿌린다,
만져질 듯 물위를 날아가던
철새들이,
갑자기 날개를
접고
초록빛 체적 위로
화살처럼 꽂힌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초월과는 관계가 먼 일상의 삶 속의 사물들―소금, 양파, 엉겅퀴, 옷 등―이다. 상식의 위반을 통해서 시인은 새로운 경험, 새로운 발견을 보여준다. 무시되었던 인과율이 갑자기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시인은 양파를 이렇게 노래한다.

양파,
반짝이는 목 긴 유리병,
한 잎 또 한 잎
아름다운 자태,
투명한 비늘이 너를 살찌웠구나
비밀스런 대지의 어둠 속에서
너의 말간 배가 둥그래졌다.
대지의
기적
너의 초록빛 줄기가 서툴게
모습을 드러내자
창같은 잎들이
태어났다,
축적된 대지의 힘이 보여주는
속이 비치는 투명함,

―「양파에게 바치는 송가」(Oda a la cebolla)

     때로는 시인의 정신이 가서 머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들도 형상을 부여받아 모습을 드러낸다. 네루다가 「기쁨에게 바치는 송가」(Oda a la alegría)는 이렇다.

기쁨,
창가에 떨어진
초록빛 이파리,
이제 막 태어난
미세한
맑음,
짤랑거리는 코끼리,
반짝이는
동전,
때로는
연약한 섬광,
하지만
오히려
변함없는 빵,
이루어진 희망,
자라나는 의무.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것들에게 바치는 송가에서도 네루다는 시의 시다운 힘이 보여주는 깊은 인간적 의미, 즉 늘 실존과 동행하는 비초월적 신성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 신념 속에 자리잡은 연대의식의 경험이다. 로드리게스 모네갈(Rodríguez Monegal)이 지적하듯이 “송가의 시편들은 정치적 꼬리표를 떼버린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정치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네루다의 보편성이자 영속성”이며 그가 『추억』에서 말하는 것처럼 더욱 진지한 혹은 더욱 절대적인 의무로서의 대항시, 전투시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고상한 추상성을 제거하고 사물 자체를 포획하려는 시도이다. 시인으로서의 네루다의 본질적인 의무는 물화된 단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단일성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의 하나됨을 이루려고 한다. 시를 통하여 고독을 추방하고 분열되지 않는 일치를 이루려는 것이다.

고독은
꽃도 열매도 갖지 못한다.
나의 생명에 모든
생명을 다오,
온 세상의
고통을 모두 내게 다오.
내가 그것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리라.

―「보이지 않는 인간」(El hombre invisible)

5. 맺는 말

     빈곤의 시대에 물질적 풍요의 과도함을 경계할 수 있을까? 혹은 억압의 시대에 자유의 방종함에 대해서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지금 우리가 네루다가 처했던 시대의 사회적 열정과 그의 강박관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와 닿아있다. 만일 역사의 방향이 빈곤에서 풍요로, 억압에서 자유로 이행되는 것이며 이러한 이행을 방해하는 대상이 나의 외부에, 우리의 외부에 실체적으로 엄존하는 대상이라면 이는 안될 말이다. 그러나 그 적이 나의 내부에, 우리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면 타당한 말이 될 수 있다.

     시간을 ‘짧은 주기’와 ‘긴 주기’로 측정했던 마야인들의 방식으로, 프랑스 역사가들은 역사적 과정에 있어 ‘긴 지속’과 ‘짧은 지속’을 구별했다. ‘긴 지속’이란 처음에는 인식하기 어려운 변경을 통해 낡은 구조가 변화되고 새로운 구조가 성장해서 매우 느리지만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큰 리듬―인구 변동, 과학과 기술의 진화 등―을 지칭한다. 반면에 ‘짧은 지속’이란 제국의 흥망, 혁명, 전쟁 등과 같은 사건의 영역을 일컫는다. ‘짧은 지속’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인물들은 되풀이되지 않으며 역사란 끊임없는 창조이고 혁신이며 유일하고 단일한 것들의 왕국으로 인식될 뿐이다. 반복과 단절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리듬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긴 지속’의 관점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변화들은 ‘짧은 지속’에 속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들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긴 지속’과 관계를 맺고 있다.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 사이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양자택일의 관점에서 이 관계를 숙고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절충안을 내세워 양자에게 일정한 몫을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양자를 환원불가능한 실체로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긴 지속’의 관점에서 역사를 통한 인간의 편력이 가져다주는 성찰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유목적 경계의식이다. 유목적 경계의식이란 양자의 진영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뛰어넘어야 할 초월적 혹은 선험적 영토가 아니라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 변화되는 경계 자체에 주의하는 것이다.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경계의 출현”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새로운 경계는 새로운 문제의식의 출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경계와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개체적 결단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은 또 다시 ‘긴 지속’의 역사적 판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