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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리중학교 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파나루(26회 성태기)
심원면 연혁
심원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노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하였으며,삼국시대에는 백제국의 상노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때인 경덕왕16년(757년)에는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屬地)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왔으나 태종 17년에 서해연변의 방위체제 구축을 위해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현으로 통합할때에도 이곳은 줄곧 심원면으로 호칭되었다. 구한말인 고종조때 면소재지가 주산리에 있으면서 한때 대곡면으로 호칭되기도 하였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줄곧 심원면으로 불리어졌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1일에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통합될때에도 일관되게 심원면으로 설치하였다. 이때 면소재지는 월산리로 옮겼으며,조선조때있었던 검당리와 계암리는 구한말에 없어진 마을이 되었다. 2003년 8월 1일 현재 15개 법정리에 43개분리를 관할하였다.
◈궁산리 궁산(弓山)마을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6km지점에 있으며 명칭은 활뫼에서 궁산으로 변천되었다.
옛날 채씨 한 분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새가 좋고 지형이 좋아 정착한 후 금성나씨, 전주이씨, 평산신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지형이 활형국이라며 뒷산은 활대를 앞도로는 활줄을 생각하여 궁산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그후 1930년대에 삼양사의 간척사업으로 마을이 저수지로 수몰되자 이 마을 문씨가 삼양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여 마을주민들의 일부는 타지로 떠나고 일부는 현마을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고 저수지 제방공사는 1937년3월에 착공하였다.
◈주산리 주산(珠山)마을
1950년대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km지점에 설기하였으며 조선조 성종.중종.명종 3대에 걸쳐 二道監査를 지내고 삼조(三曹)의 중요관직을 거쳐 의정부좌삼찬을 지낸 밀성대군 21세손 정해공파 박수량의 손자 박상원이 장성아곡(아치실)에서 이곳을 찾아 어감(漁監)이 풍부함을 알고 정착 하므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은 거미형국으로 주위가 송림으로 아담하게 둘러쌓여 마치 거미(蛛)같다하여 주산(蛛山)으로 불렸는데 거미는 흉측스럽다 하여 구슬주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주산리 죽곡(竹谷)마을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지점에 위치하며, 임진왜란때 김해김씨 한 분이 이곳에 정착하고 이어서 전주이씨,의령옥씨, 전주최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에 시누대(細竹)가 왕성하게 자생하여 촌명을 주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주산리 명동(明洞)마을
1850년대에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정씨가 처음 터를 잡고 이후 언양김씨, 전주이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는데 서쪽 백호등이 닭모랭이(닭머리)형국이라 하였고 닭이 운다고 하여 오동(鳴洞)이라 부르다가 후에 명동으로 불렸다.
◈주산리 구미(龜尾)마을
1941년대에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고향이 진안인 황정현씨는 풍수학자인 전라감사를 지낸 이서구의 비결에 궁천(弓川)사이에 만인(滿人)이 산다는 말을 전해 듣고 궁산과 도천사이인 이곳에 정착했는데 삼양사의 간척지가 있어 농사를 얼마든지 경작할 수 있고 주택도 삼양사에서 무료로 제공하여 주니까 계속 진안,남원,정읍 등지에서 이주하여 옴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형이 남생이꼬리라 하여 구미라했다 한다.
◈주산리 기산(基山)마을
1850년대에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대실에 살던 전주사람 이윤옥이 북쪽 산 넘어 기산에 처음 터를 잡았으며 바로 이어서 김해김씨, 함평이씨, 전주최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전리 고전(高田)마을
1680년대에 면소재지에서 남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김해김씨 목경파 김영하 (전라관찰사 1503년)의 육세손 김관승이 사화에 밀려 피신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설기하였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채씨 할아버지와 주씨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어느 설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서는 이 두분을 主神으로 모시고 음력정월보름달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황학산에서 황학이 높이올라 황학산의 정기가 높은 터전에 뻗쳤다고 하여 고전으로 불렀다고 한다.
◈고전리 진주(眞珠)마을
1850년대에 면소재지에서 남으로 5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광산김씨 한분이 진주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이어서 함평이씨, 청주한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형국이 진주옥반형(珍珠玉盤形)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진주라하고 북쪽옆마을은 옥동(玉洞)이라고 불렀다 한다.
◈고전리 옥동(玉洞)마을
1850년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5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함평이씨 현령공파 이주의 11세 손갑담이 예동에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뒷산 형국이 진주옥반형(珍珠玉盤形)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옥동이라하고 남쪽에 있는 마을은 진주라 했다한다.
◈고전리 예동(禮洞)마을
1700년대 함평이씨현령공파 이주의 5세손 이태현이 광주에서 은신처를 찾아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하는데 예의를 매우 숭상하던 집안의 후예들이 모여 산다하여 예동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한다.
◈고전리 염전(鹽田)마을
1940년대 후반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1930년대에 실시된 간척사업에 의해 제방이 막아지고(부로지-신동호에서-만돌까지) 광복이후 삼양사에서 염전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이북피란민들 중에 염전개발에 경험이 있는 인부들이 내려와 염전개발에 참여하면서 삼양사에서 처음에는 염전현장에 막사를 지어주어 현상거주를 하게 되었는데 점차 그 수효가 늘어남에 1965년 3월 주민조직 개편령에 의해 심원고전리에서 분리가 되어 행정리가 형성된 마을이다.
◈만돌리 만돌(萬突)마을
1850년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광산김씨양간공파 김연의 孫이 만돌과 두어사이 신월리에 정착하여 살다가 김연의 20세손인 김맹달이 바다의 높은 등에 막을 치고 생업을 영위하며 살았는데 그뒤 兄任인 지릉참봉 김기달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이주하여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바다에 제방을 쌓아 육지로 만들어 살기 좋은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만돌 마을은 풍수설에 의하면 장차 굴뚝이 만개가 솟을 것 이라는 예언가의 증언이 있었다 한다. 만돌 마을은 불등을 중심으로 남쪽이 난호마을 이라하며 점차 성촌이 되었고 계명은 불등의 서쪽 계명산 밑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마을로서 1990년도에 난호와 계명사이에 물이 흐르는 것을 경계로 하였다 한다. 명칭이 남몰에서 난호로 불리어지다 만돌로 변천되어졌다.
◈만돌리 정동(井洞)마을
1610년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5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밀양박씨 박현의 15세손 박자남이 은거하기 위해 남원에서 이곳에 정착한 후 흥성장씨, 천안전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마을 북쪽에 장군수(將軍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을 마시면 건강에 좋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이름을 정동이라 불렀다 한다.
◈두어리 두어(斗於)마을
1870년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강릉유씨옥천부원군 劉敞의 14세손인 유달중이 1870년대에 심원에 들어와 두어와 만돌사이 신월리에 정착하였는데 마을 형국이 누에머리(蠶頭)와 같다하여 잠두라불렀는데 마을앞 바다속에 검은 가마귀바위가 발견되니 누에는 가마귀에게 먹힌다는 설이있어 두리(斗里)라고 고쳐 불렸다. 이는 마을뒷등이 머리형국이라하여 두리라 했고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하여 두어(斗漁)라고도 하였는데 語音이 좋지않아 두어(斗於)라고 부르게되었다.
◈도천리 담암(淡岩)마을
1590년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km지점에 임진왜란때 함양오씨 한 분이 피난차 이곳에 들어와 설기했는데 뒤이어 고흥유씨등이 정착하므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유씨들은 처음에 효방동에 터를 잡았는데 새터마을과 신기를 차례로 형성해냈다. 이후 남평문씨가 瓢山(표산-쪽방뫼)에 터를 잡게 되었다. 이와같이 산재된 마을들을 통합하여 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속칭 열두담바우라고 호칭했었다 한다.
◈도천리 도천(道川)마을
1590년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언양김씨 18세손 部將公派 祖인 김일동이 임란을 피하기 위해 창평에서 고창에 도착하여 선운산과 심원 화산의 경계인 맞이재에 이르러 인동장씨 장금용과 만나 심원에 같이 입향하여 언양김씨는 두장동에 머물렀다가 도산(陶山)에 정착하고 인동장씨는 도천에 정착하여 마을을 설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도천마을은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선창이 만들어져 배형국이 형성되었다하여 舠(거룻배도),穿(통할천)을 붙여 도천이라 했는데 일제시대에 해리무장으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道川으로 고쳐불렀다 한다.
◈연화리 금산(琴山)마을
1670년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km지점에 설기된 마을로 밀양박씨의 은거지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옥녀샘에서 목욕을 한 후 옥녀봉을 오르내리면서 거문고를 퉁겼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금산이라하고 마을에 지금도 산기슭에는 옥녀샘이 남아있어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연화리 연화(蓮花)마을
1700년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5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마치산의 형태가 부처님의 상징인 연꽃의 숫 술 같은 형을 하고 있어 이 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연천,연곡,연화,화산마을이 자리잡아 마치 연꽃잎을 연상시킨다하여 연화리라 불렀다한다. 중앙의 산봉우리를 연화봉이라 했으며 전해오는 전설로는 연화봉 위에 연꽃방죽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원불교 敎祖 小太山의 발상지에 해당되는 곳이라한다. 마을이름에 연꽃연(蓮)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여기에 유래된 것이며 현재는 화산,연천,연곡의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연화리 신기(新基)마을
1730년경에 설기되었으며 1930년경 신작로(국도22호선)이개통되면서 면소재지가 되고 면사무소 경찰파출소 초등학교가 들어오면서 길건너 변에 상가가 생기어 마을을 새터로 부르다가 우체국 보건소가 들어오고 연화리를 행정리로 분리하면서 이쪽을 신기로 개칭하였다.
◈연화리 마산(馬山)마을
1760년에 설기한 마산마을은 면소재지이기도 하다.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중에도 말의 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 형국을 따라서 마산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면소재지가 주산에서 옮겨오고 경찰파출소는 고전에서 옮겨왔다. 1935년도에 초등학교가 설립되고 1964년도에 단위농협이 설립되었다 한다.
◈월산리 월산(月山)마을
1898년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마을뒷산이 마치 반달모양을 하고있다 하여 월산이라고 하는데 마을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된것이다. 월산마을 앞 동남쪽에 있는 욕실들에 월곡 마을이 있었는데 현재는 월산으로 이거하고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며 검단선사가 목욕을 했던 욕실샘터가 있었으나 경지정리로 인하여 농로가 개설되었으며 위치는 월산앞 국도 22호선 승강장에서 큰똥뫼방향 30m전방에 위치하였다 한다.
◈월산리 사등(沙嶝)마을
1898년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사등마을은 옛날에는 냇가의 모래등 이였으나 백제 검단선사의 지도에 의해 570년대에 소금무역항으로 개발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화덕에 불을 붙여 굽던 육염의 생산지요, 무역이 성행하던 포구였다. 이로써 검당마을은 상검,중검,하검이라하여 큰마을을 이루었고 포구와 염전에 의해 번창하였으나 무술년(1898)에 큰 해일로 폐허가 되어 모래등(沙嶝)은 죽림(竹林)으로 이동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행정리명을 사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전리 하전(下田)마을
1636년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2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전주이씨 양도공의 7대손인 이성소가 담양 월산의 세거리에서 정묘, 병자호란을 피해 바다를 즐기는 풍류가 있어 선운산 넘어 어초가 넉넉한 해안가를 찾아 정착한것이 하전마을이다. 이후 양산골(양산동.부응동)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던 사람이 고기잡이를 위해 이곳에 내려와 막을 치고 살게 되면서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아래에 있는 밭이라 하여 하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지금은 이 일대가 어패류양식장이 됨으로서 글자 그대로 밭이 되고있는것이다. 행정리는 西田,東田,下田으로 분리되고 있다.
◈용기리 용기(龍基)마을
백제시대(고인돌속 토기발견)에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4km지점에 설기되었으며 옛날에는 고막이라 하였는데 막을 치고 살며 바다에 어량을 설치해 고기를 잡아 생업을 꾸려왔던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용기마을은 선운산-경수산-안산으로 뻗어온 연맥의 모양이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닮아 용의 형국이라 하여 용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안골의 저수지안에 계곡의 물이 모이는 곳을 용소라 하였으니 용과 관련된 지명이다.
◈용기리 수다동(水多洞)마을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6km지점에 전주이씨가 설기하였으며 방장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장수강과 변산만을 거슬러 올라오는 바닷물이 만나면 마을앞 갯벌에 물이 많이 차오르므로 수다동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마을 안쪽의 산골짜기에 물만골이 있는데 지명과 연관이 있다. 한편 수다동을 수대동이라고 불렀는데 이 장수강이 마을앞 소요산자락을 지나면서 흘러내려 마치 물이 띠를 이룬모습을 하고있기 때문이라한다. 특히 이 마을은 1950년까지 육염을 구어낸 역사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식수용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소금을 구었던 검단선사가 손을 씻어서 물빛이 흐리고 맛이 짜다하여 검정시암이라 부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