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의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Ignatius)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Ursula)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 김대건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고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교우 집안이었다. 성 김대건의 증조부인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이다. 신앙 깊은 순교자 집안에서 성장한 성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나(羅) 베드로(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Javier)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듬해 말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해 사제품 받을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기에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성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조선에 들어갈 메스트르 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올라 1842년 2월 중순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성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1839년의 기해박해로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렀다. 성 김대건은 그해 12월 29일 혼자서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했으나 하였으나 중도에 신분이 발각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성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페레올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와서 조선교회의 밀사들과 만났다. 그러나 아직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성 김대건 부제 혼자만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말에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라파엘호로 명명한 작은 배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출항했다. 어렵게 상해에 도착한 성 김대건은 그해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성 안(安)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1845년 8월 31일 성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에서 출발했다. 도중에 제주도에 표착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845년 10월 12일에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 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과 그 인근의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페레올 주교는 그에게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성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 영입을 위한 안전한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1846년 6월 5일 밤 체포되었다.
체포된 성 김대건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이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 회의를 열고 그를 서울포도청으로 압송하도록 명했다. 일부 대신들은 성 김대건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해 그를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고자 했다. 그래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성 김대건 신부가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결국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성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는 순교 후 한강 변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다. 40일 뒤 용감한 신자 이민식 빈첸시오가 순교를 각오하고 몰래 유해를 수습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에 모셨다. 그 후 1901년 5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Mutel)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 제대 밑에 안치되었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포함한 유해 대부분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는 미리내 성지를 비롯해 전국 여러 곳으로 분배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축일은 일반적으로 그가 순교한 날로 정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에 시성된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전례적으로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16일 목록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대해 기록하면서 9월 20일 전례 안에서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축일을 7월 5일에 별도로 기념해왔다. 7월 5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포함한 한국 순교자 79위를 복자품에 올린 날이다. 한국 교회는 전례력 안에서 그날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로 경축해왔다. 그런데 2018년 전례력부터 동일 성인에 대한 대축일 중복을 피하고자 7월 5일 대축일을 폐지하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 따라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경우 9월 20일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기념해온 7월 5일에도 그 축일을 기념할 수 있다.♧
굿뉴스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