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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선물의 경제학으로서 구약의 ‘땅 신학’(신 15:11)
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국’과 ‘국민’의 의미
1997~1998년 IMF 사태 이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년 4월 16일 세월호 갑오참변 이후, 우리사회는 대한민국을 공화국으로 정의한 헌법 제1조의 의미를 심각하게 성찰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공화국이 되려면 그 주권을 행사할 최소한 조건을 갖춘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중심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막강한 통치대권을 위임한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공화국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약 20년 전의 IMF 경제위기는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이, 그리고 견고해 보이는 대기업과 은행 등 대기업들이 국민을 지키는 데 얼마나 무력한지를 전격적으로 폭로했고, 작년 4월의 세월호 사건은 국가와 그 공화국적 국가이념의 화신인 대통령이 국민을 지킬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전무후무한 참변이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근거로 징병권, 징세권, 국가형벌소추권, 사법권, 입법권 등을 가지며 이 권한을 집행하는 대의민주주의제 하의 통치자들과 공무원들을 거느린다.
이러한 국가는 그 구성원이 되는,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는 국민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권력주체이지 맹목적인 경외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국가는 국민 혹은 준국민적 지위를 갖는 사회구성원들이 공화국을 떠받치는 책임구성원으로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사회정치적 보장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헌법의 기본규정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적 국체를 지키려면 “국민”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국민은 노예적 대우와 신분을 강요당해서는 안 되는 자유시민이어야 한다. 헌법 제1조, 23조, 그리고 119조 1항과 2항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됨의 요건을 이렇게 규정한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23조 ①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②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③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특히 제119조 2항은 국가는 적정한 소득분배를 유지하면서 경제주체인 가계·기업·정부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이룰 의무를 지니며 이 과정에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공화국은 시장의 전횡과 범람을 억제할 공적 질서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주체들의 적정한 소득분배는 우리 헌법이 지극히 예민한 관심을 기울인 명문조항으로써 국가의 공적 책무를 규정하는 맥락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적 대동맥인 대기업과 국가에는 돈과 자금이 충분히 공급되는데 비하여 모세혈관에 해당되는 가계, 국민 개인들, 특히 청년들의 구매력은 빈혈을 일으킬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 낮은 월급, 높은 주거비, 치솟는 사교육비, 막대한 결혼비용, 각종 보험료 등은 경제적 하층국민들, 특히 정규직에 진입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위협한다. 국민 대다수가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모멸적 근로조건에 속박당한 채 서서히 비인간화의 심해로 가라앉고 있다.
세월호 수장사건 이후 국가는 아직도 부재중이다. 아무리 울고 호소해도 꿈쩍하지 않는 정부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국가의 부재를 의미한다. 작년 세월호 사건에서 이미 보았듯이 국민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국가의 모든 공조직은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시장의 전일적 국민 지배로 인해 돈의 위력이 국가 헌법보다 더 직접적으로 국민의 생활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공화국의 실종은, 공평과 정의의 붕괴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국민들에게 비국민 대우를 강요한다.
물론 시장의 국가 예속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이제 권력은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공리로 출범했고, MB정부와 현 정부는 헌법이 경제민주화를 위해 설정한 각종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국가민영화’를 부단히 시도해오고 있다. 국가민영화는 국가로부터 승인받은 도둑떼들의 활무대를 의미한다. 현재 MB정권의 비정(秕政)으로 거론되는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 비리는 국가민영화를 시도했던 자들의 흑심을 잘 보여준다. 국가민영화주의자들은 공화국 파괴주의자들로서 천문학적 국가예산을 국민적 합의도 안 된 사기성 농후한 사업들에 투자하여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것은 물론, 방위산업 비리 같은 악행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의 악행과 탐욕이, 기업 혹은 사업이라고 하는 거짓된 대의명분을 뒤집어쓰고 공화국의 토대를 일순간에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에 나타난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화국론’
로마제국 시대의 공화주의자였던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그리고 키케로 등은 공화국이 자유시민들의 상호부조와 상호결속적 유대로 성립된다는 점을 설파했다. 《하나님의 도성》 제19권 21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위대한 공화주의자 스키피오가 정의한 것과 같은(키케로의 《대화》 《공화국》 등에 소개) 로마공화국이 로마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참된 공화국은 참된 하나님 예배가 실현되는 곳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대화》 《공화국》 등에서 키케로는 로마공화국의 타락과 부패를 포에니 전쟁의 두 영웅인 스키피오와 아프리카누스의 입을 빌어 비판하고 개탄한다. 키케로의 책에서 스키피오는 공화국의 정의는 시민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시민은 온갖 종류의 모임이나 군중이 아니라 법에 관한 공동의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해 연합된 결사체라고 정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정의에 따르면 이런 의미의 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공화국은 실제 로마의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단언한다(《하나님의 도성》,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157쪽). 공화국을 국민 복지라고 간단히 정의했던 스키피오(또한 키케로)의 이 정의가 옳다면, 로마 사람들 사이에서 국민 복지를 얻은 일이 없으므로 로마공화국은 존재한 적이 없다. 진정한 공의가 없는 곳에서는 권리를 서로 인정함으로써 뭉친 사람들의 집단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스키피오나 키케로가 정의한 국민이 있을 수 없다. 또한 국민이 없으면 국민의 복지도 있을 수 없고, 있는 것은 국민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잡동사니 군중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결론은, 공의가 없는 곳에는 공화국도 없다는 것이다(949쪽).
예를 들어 로마제국의 해외영토 정복 자체가 불공정하기에 로마는 바른 공화국이 될 수 없다. 해외영토를 다스리는 로마의 명분이 충족이 되려면, 로마의 통치가 외국인들에게 더 유익하며, 횡행하는 불법을 막아주어야 하고, 정의의 확장이어야 한다. 한 나라의 국민이 식민지 백성 같은 압제를 경험하고 모멸을 당하여 국가권력의 지배를 받는 곳에는 공화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일부 국민이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경제주권도 확보하지 못하는 곳에는 공화국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인에게 공의가 없으면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에 공의(권리의 상호 인정)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평과 정의라는 헌법적 질서가 붕괴되는 순간 공화국은 붕괴되고 인간은 국가를 숭배해야 하는 을(乙)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사람을 다스리시며 영혼이 신체를 다스리고 이성이 정욕과 영혼의 악한 부분을 다스리는 것을 정의라고 규정하면서, 열등하고 악한 존재들은 이성적이고 의로운 자를 섬기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 점에서 만민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나님을 섬길 때 자기 신체를 바로 통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 내부에서는 이성이 정욕과 그밖의 악습들을 바르게 지배하려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950쪽).
《하나님의 도성》 제19권 24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공화국과 국민에 대한 좀더 섬세한 정의를 시도한다. 그는 국민을 사랑할 대상에 대한 합의로 뭉쳐진 개인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의 대상이 고급이면 국민도 고급이 된다. 로마가 한 번도 참된 공화국(카토·키케로·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 등이 정의한 ‘시민적 배려와 우의로 뭉쳐진 공동체’)으로 존재하지 못한 이유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에서는 영혼이 신체에 대하여 지배권을 갖지 못하며 이성이 악습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사랑, 즉 경건함을 잃어버렸다면 ‘진정한 경건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덕성(공동체적 예의범절, 도덕성)도 없다’고 하겠다. 공동체적 예의범절이 상실된 곳에 공화국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돈에 대한 숭배로 뭉친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중심구성원을 이루게 되면, 그것은 맘몬숭배와 인간멸시를 일상화하는 나라로 전락한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대한 사랑으로 뭉쳐진 국민이 나라의 중심구성원이라면, 대한민국은 고상한 민주주의 사회가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돈숭배 사회, 시장권력 절대우위 사회로 전락해가면서 민주공화정의 붕괴를 고통스럽게 대면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임된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공평과 정의를 지키고 집행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오히려 국민을 지배하고 예속시키고 숭배를 요구하는 괴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통치기구는 검찰, 국세청, 헌법재판소, 그리고 통제된 방송과 언론권력 등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공화국적 기상을 국가권력 담당자들이 심각하게 훼손하고 무너뜨리고 있다는 의미다. 국가권력은 거대해져 가고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들은 생존의 벼랑 끝에서 국가가 제공해야 할 공평과 정의의 서비스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생존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국가라는 거대복합 권력기관을 통제하고 감독하려면 자유시민적 지위를 갖는 국민이 깨어있어야 하는데 국민 대다수가 노예 혹은 전쟁에도 나가지 못한 채 아이 생산만 담당하는 무산자(proletariat)로 전락하면 공화국은 위기에 빠진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위기는 공적 질서의 정립과 유지에 관심 쏟을 여유도 없이 강압적 착취적 생계유지노동에 동원된 국민들의 가혹한 노예노동, 혹은 장기간의 생업 수단 박탈을 맛보는 무산자계급의 절대빈곤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은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분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할 책무를 갖고 있으며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이 생산한 부의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를 위해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적극 막아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절대다수 국민이 노예, 농노, 혹은 무산자계급으로 전락하여 공화국 대한민국을 지킬 능력이나 의향을 급격하게 상실하고 있다. 파시즘적 강압정권이 등장하기 좋은 정치심리적 토양이 다져지는 중이다. 장기간의 청년실업률 고조, 자영업자의 몰락, 월급노동자들의 조기은퇴 압박, 급격한 노령화사회 진입으로 노동인구의 감소 등은 대한민국의 공화국 토대를 붕괴시키는 요인들이다.
공화국은 적어도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시민들의 상호유대, 공유된 가치, 이웃의 복지에 대한 인륜적 관심 공유, 전쟁과 위기시의 참여와 위기분담 등을 통해 형성되었다. 주전 5세기 중엽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에서 객관적인 열세인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막강한 페르시아 침략군을 맞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그리스 도시국가 자유시민 참전군인들의 자유의 가치에 대한 자부심, 그리스 공화정적 국체에 대한 충성심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자유시민’(요즘식으로 말하면, 중산층 곧 생계문제를 해결한 후 공적 정의와 자유 등 공공가치의 실현에 열심을 내는 국민)의 층이 급격히 엷어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동해야 하는 노예적 국민들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기본소득’ 논의 현황
1997~1998년 IMF 경제위기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공화국 국체 붕괴를 염려하는 선각자들(강남훈, 곽노완, 김종철, 최광은) 사이에서 국민소득 논의가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는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의 극악한 발흥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최악의 저임금 노동자들이나 실업자들이 대규모로 등장한 사태를 본 북유럽식 보편복지주의 사상에 익숙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1990년대부터 유럽연합의 선구자적 사상가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퍼졌다. 앙드레 고르, 필리페 반 빠레이스, 브루스 에커만, 앤 알스톳 등 유럽 선진 복지국가의 여러 기본소득 주창자들의 사상이 약 20여 년 전부터 국내의 진보사상가들에게 유입되었고, 2000년도를 전후하여 강남훈, 곽노완, 김종철 등이 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국민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시장이나 선진복지체제도 국가의 하층민의 소득박탈, 빈곤화를 막을 길이 없다는 근본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국민의 소득박탈과 무산자계급화는 국가를 통제할 민주시민들의 결사체인 공화국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본다. 그들은 사회보호형 경제사상가들로서 경제는 공평과 정의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국민기본소득은 시장거래, 부동산, 이자 및 임대노동, 투자금, 임노동 등으로 얻어지는 소득 외에 국가가 공화국적 정체를 지키기 위하여 국민들에게 주는 국민배당금이다. 반 빠레이스, 애커만, 알스톳 등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근로조건부과(work requirement) 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개인 단위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소득을 가리킨다. ‘기본소득’이 종래의 사회복지제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재산이나 건강, 취업 여부 혹은 장차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등 일절 자격심사를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사회성원에게 일정한 돈을 주기적으로 평생 지급한다는 데 있다.
반 빠레이스 등이 쓴 《분배의 재구성》(나눔의집)에서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본소득사상의 맹아 단계를 추적할 수 있지만 유럽역사에서 이 기본소득론이 진지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지는 200년이 되었다고 본다. ‘지역수당’(territorial dividend), ‘국가보너스’(state bonus), ‘데모그란트’(demogrant), ‘시민급여’(citizen’s wage), ‘보편수당’(universal benefit), ‘기본소득’(basic income)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이 기본소득사상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인기를 누리며 대선후보들이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곧 잊혀져갔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이 사상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유럽연합 전역에 걸쳐 대중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이 기본소득제도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급진적인 보편적 복지의 전형인 셈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나라도 기초노령연금, 65세 이상 노인지하철 무료승차권, 장애인수당, 무상보육, 무상급식 등이 시행 중인 보편복지시대에 돌입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빈부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법적 사상적 제도적 안전장치가 전무한 탓에, 사회 중심구성원이 공화국적 충성유대에서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권의식을 갖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공화국의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중 아무도 생계형 노예노동으로 내몰리거나 대한민국의 국부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열외자 취급받는 무산자로의 전락을 막고 국민됨을 누리게 만드는 주식배당금형 소득이 바로 국민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 논리
이 논의에 대한 가장 큰 반대 쟁점은 재원마련 문제 등으로 표현되는 실현불가능성, 국민기본소득 제공시 노동윤리의 와해, 기업의 노동자 고용상의 난점으로 인한 기업도산과 경제엔진 작동중지 등이다. 강남훈과 곽노완의 사상을 이어받아 최광은이 쓴 《국민 모두에게 소득을》과 반 빠레이스 등의 《분배의 재구성》은 이 반대에 대한 답변을 비교적 자세하게 제시한다. 최광은은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실험은 노동윤리의 와해가 아니라 노동의욕의 증가와 생산성 증가를 가져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광은에 따르면, 미국 알래스카 주의 석유기금 이익금 배당이 전형적인 국민기본소득의 사례다. 알래스카 주는 주 소유의 유전개발에서 얻는 이익이 알래스카 주민 모두에게 귀속된다는 전제 아래 1년에 알래스카 주민 1인당 1~2천 달러를 제공한다.
강남훈과 곽노완 등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모든 복지를 국민기본소득으로 총집결시킨다면 1인당 월 30만원 정도의 국민기본소득 제공도 가능하다고 본다. 국민기본소득은 노후에 받을 국민연금 등을 대신하여 생애 내내 앞당겨 받는 국민기본소득이기에 미래에 받기 위해 저축할 필요가 없다. 이 국민기본소득을 실시하면 현재 400조가 넘는 국민연금 기금 등의 운영 부실이나 전용 등의 위험부담을 영구적으로 없애준다. 최근 MB정부 당국자들이 캐나다 하베스트 자원회사 인수 시 국민연금을 전용할 가능성을 고려했다는 신문보도에서도 보듯, 400조 원의 국민연금도 악한 정부가 들어서서 분탕질한다면 순식간에 탕진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저축자산이다.
국민기본소득에 대한 가장 원시적 반대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소득 제도가 노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임금을 지불하는 반이성적 무원칙, 정의배반적 과잉복지라고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단견이다. 노동을 임노동(임금을 받기로 한 고용조건 하의 노동)으로만 한정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반 일리히가 《그림자 노동》(미토)에서 갈파했듯이 주부노동은 임노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식당 조리사의 노동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주부가 자녀를 낳고 키워 사회의 시민으로 진출시키는 것은 어떤 임노동보다 귀하고 소중하지만 임노동이 아니기에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부노동은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되어 경제성장의 생산량 계측에는 전혀 고려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협소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자동차 수출이 가져온 외화생산성보다 자녀를 출산하는 주부들의 출산, 육아노동이 한국 경제성장의 인적 인프라 구축으로 훨씬 더 경제적 가치가 큰 업적이다. 오늘날 임노동자 중심의 노동관에 따르면, 사회가 존속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노동도 경제성장이나 경제가치 창출에 기여하지 않는 활동으로 배제된다.
기본소득사상은 이런 편견에 도전한다.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은 저마다 기본적으로 공화국 유지를 위해 노동한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다. 아마도 국민기본소득으로 발생할 가장 큰 충격적 변화는 노동자 친화적인 기업만이 살아남고 잔혹한 이윤추구 집착형 잔혹기업들은 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생계가 보장되는 사람들은 가혹한 조건의 노동이나 비윤리적인 생산품을 생산하는 회사 등에 취업하기를 꺼릴 것이며, 기업과 노동자의 갑을 관계가 갑자기 역전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부 기업인들에게 재앙스러운 소식이겠으나 장기적으로 인간의 윤리와 도덕감을 거스르는 기업들이 퇴출되어 기업환경과 생태계가 건강해지며 그 윤리적 수준도 격상되어 모든 기업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
그러면 이 기본소득을 주창할 수 있는 토대나 근거는 무엇일까? 자연권 사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무상공여 땅소출 향유사상이다.
기본소득의 사상적 배경 : 자연권 사상, 민주주의 시민권의 토대
녹색 사상에 입각한 문명비평가인 김종철은 기본소득의 연원을 자연권 사상에서 찾는다. 18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페인이 만년에 쓴 《토지분배의 정의》(1796년) 속에서 기본소득의 핵심 논리를 찾았는데, 페인은 미국 독립전쟁의 사상적 원동력이었던 《상식》을 쓰기도 했다. 페인은 원래 미경작 상태의 토지는 ‘인류의 공유재산’이라는 ‘논란의 여지 없는 사실’에서 기본소득론을 도출한다. 존 로크의 사상을 따라 페인도 특정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토지를 경작하거나 개량한 부분에만 한정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토지의 절대적 순수사유자로서의 재산권 행사를 주장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기초지대’(ground-rent)를 사회에 지불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나중에 19세기 중반 헨리 조지에게 일부 계승되는 사상이기도 하다.
페인은 그 토지경작자들이 지불한 지대로 ‘국민기금’을 만들어, 토지의 사적 경작제도로 인해 ‘토지에 대한 자연적 상속권’을 잃은 데 대한 보상으로 21세가 되는 청년들에게 정액의 일시금을, 또한 50세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남은 생애 동안 매년 얼마간의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철이 잘 지적했듯, 페인의 이 ‘국민기금’ 구상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공적 부조나 자선 프로그램이 아니라, 토지가치의 만민귀속성을 주창하려던 것이었다. 근대적 토지사유제가 확립된 사회일지라도 그 토지사유제가 토지의 원천적 가치의 절대소유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토지란 만인의 공통재산인 만큼 그 토지로 인한 이익의 상당부분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눠가져야 하며, 따라서 유력자가 열등자에게, 혹은 국가가 인민에게 시혜적으로 베푸는 인위적 공여물이 아니라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려야 할 자연적 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국민기금’을 통해 지급되는 돈은 국가에 의한 생활지원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민 각자가 응당 자신의 몫으로 지급받아야 할 ‘배당금’인 셈이다.
김종철은 토지는 공기와 물, 숲, 바다와 같은 공유지(혹은 공유재)이며 근대적 토지사유제도도 토지공유지 사상을 도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의 연장에서 김종철은 기본소득의 형태로 원천적 공유물인 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는 방법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라고 본다. 이런 자연권 사상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이 구약성경 모세오경의 땅 선물 신학이다.
기본소득의 성서적 토대 : 신명기의 땅 신학
헌법 제119조 2항에 따라 우리나라도 국민연금, 기초노령수당, 무상보육, 무상급식 등 각종 보편복지제도를 실시해서 시민들의 생활안전망 구축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경남진주의료원(도립) 폐쇄, 일방적 무상급식 중단 등을 볼 때 보편복지에 대한 평균시민들의 저항도 예상 외로 크다. ‘왜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까지 무료급식을 줘야 하나?’ ‘부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가난한 자들에게 몰아줘야 되지 않겠느냐?’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무상급식을 반대하고 보편적 복지 때문에 재정이 파탄난다는 보편적 복지 반대자들의 이런 선전을 쉽게 믿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헌법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들의 행복추구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소득분배를 공정하게 관장할 의무를 국가에게 지운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소득을 얻을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 장애수당을 주고,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다자녀가구에게 보육혜택을 주고, 더 이상 현직 생업이 없는 노인들에게 지하철 무료승차권을 공여하는 것 등은 이미 공화국적 국가이념의 부분 실현이다.
공화국은 시민들의 상호의존적 부조, 결속, 유대가 없으면 무너지게 된다. 공화국적인 건전사회질서가 무너진 곳에 경제활동을 통한 이윤추구가 불가능하다. 민주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인 보편복지를 좀더 근원적으로 집행하자는 것이 국민기본소득이다. 그런데 토마스 페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의 국가형성 시초부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선물로 공여받았으며 땅의 사적 소유를 금하고 공적 사용을 하나님의 법으로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나 제후, 국가적 체제에 소속되기 이전에 대지주이신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으로서 땅의 경작권을 향유하며 그 경작된 땅의 소출을 통하여 하나님 예배와 이웃과의 계약적 결속을 유지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농민이었고 저마다 자기의 포도원과 무화과나무를 재배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언약적 결속으로 묶었다(왕상 4:25; 미 4:4).
왕이나 전제군주가 함부로 압제해서도 안 되고 강제로 징집해서도 안 되는 이 자유로운 농민들, 즉 오로지 하나님께 가장 우선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백성을 구약성경은 야웨의 백성, 혹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른다. 이 거룩한 백성, 야웨의 백성은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수확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소작인들로서 자신의 경작을 통해 십계명과 부대조항을 지키는 데 투신했다(사 5:1~7). 이것이 모세오경의 하나님의 땅 신학이다. 창세기, 레위기, 신명기 등이 주장하는 땅 신학은 네 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첫째,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둘째, 모든 이스라엘 자유농민은 땅의 소작인이며 그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칠 소작료는 공평과 정의, 1/10조를 통한 사회부조,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하나님 예배, 이웃사랑의 실천이다. 셋째, 이스라엘 땅의 소출은 경작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무산자 성직자)에게까지 향유되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땅의 소출향유권을 보편적으로 누리도록 규정한다. 레위기 25:23(땅은 하나님의 것!)과 신명기 15:11(어느 누구도 땅의 소출 향유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은 성경의 기본소득사상 대헌장이다.
신약성도들과 초대교회는 구약성경 39권을 그대로 정경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런 하나님의 땅 신학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구약성경은 토지의 절대적 사적 소유를 바알제도라고 비판하며 희년사상과 땅 소출 보편향유사상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선포한다. 따라서 토지의 근대적 사적소유제도를 절대화하여 땅의 소출을 소유자가 배타적으로 향유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모세오경의 하나님 땅 신학과 크게 충돌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기되었기에 구약의 율법을 따라 정치, 경제 등을 논하는 것 자체를 신학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신약성경만이 성경이고 구약의 최고 사명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런 구약폐기론은 정통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마르시온적 이단이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 39권을 유대교로부터 정경으로 받았고 주후 4세기말에 신약의 정경 결정과 더불어 구약성경 39권을 총망라해 66권의 성경을 확정지었다. 구약성경의 성전중심의 제사법들과 의식법들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창조적으로 폐기되었지만 구약성경의 십계명, 시민법 특히 십일조법, 토지법 등 주요 공동체 규약법은 신약의 성도들과 교회에 고스란히(한편으로는 더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어) 이월되었다.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은 훨씬 더 급진적으로 수정증보되어 신약의 성도와 교회로 이월되었고 희년법이나 십일조 부조법 등은 동시에 고스란히 이월되었다. 그래서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이전까지 모든 교부들은 구약성경의 경제율법을 특별히 강조하여 교회공동체의 급진적 사랑, 이웃봉사, 사회봉사 등을 실천했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은 토지절대사유금지와 토지공유제를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가나안 땅이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속했듯이,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사도행전 2:43~47, 4:32~37에서 희년적 부조사회를 이루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꺼이 공여했고 희사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같은 교회가 착한 삶이라는 빛을 사방에 비추어 외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성경이 지지하는 경제학
성경은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땅에서 얻어지는 소출을 향유하는 데서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신 15:11). 성경은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생존을 위한 경제구조를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유농민이 하나님의 율법 순종을 통해 가나안 땅을 영속적으로 차지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제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학의 대전제는 모든 토지가 하나님께 속해 있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경작권이 분여(分與)되어 있다는 사상이다(레 25:23). 이것은 땅에서 발생한 소출은 모든 사람에게 나눠져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세오경의 율법, 예언자들, 시편과 잠언서 등 모든 구약성경이 그리는 이상사회는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인 은총 위에 세워진 계약공동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된 자들이 실천하는 이웃사랑과 공생의 모듬살이다. 이 계약공동체주의의 대전제는 생산수단인 토지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하사하신 선물[基業]이라는 사상이다.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계약공동체 구성원들은 모두 땅의 소출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공동체적 돌봄(헤세드=인애)이 중심이 되는 경제활동이 되는 사회였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바로 공동체 존속과 번영을 위한 자원의 배분과 활용을 통한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위한 살림살이를 가리켰다. 영어 이코노미(economy)의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는 집안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청지기를 가리키는 말(οἴκος[집]+νέμω[분배하다, 경영하다])에서 유래했다. 동근어인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는 가정살림살이(household management)를 의미했다. 대가족 전체의 결속을 위한 살림살이를 의미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특정 기업이나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 결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부격차가 생긴다면 그것은 반(反)경제다. 성경적인 경제는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해치는 특정 집단의 무한정한 이윤 추구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의 주요 관심은 불의한 사회구조, 법, 관습, 그리고 강한 자들의 탐욕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이었다. 메시아에게 임한 거룩한 성령이 하시는 첫째 과업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채무자들에게 빚 탕감을 선언하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었다(눅 4:18~20).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경제활동은 이스라엘 계약공동체로서는 사활적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 모든 예언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소멸되지 않도록 각별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대변했다. 오늘날의 의미로 말하면, 사회 구성원들에게 삶의 토대를 이룰 일거리를 나누고, 일거리를 갖지 못하는 경우에는 실업수당, 복지장애 수당을 지급함으로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긍심을 고취해주는 일에 앞장섰다는 말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몫의 경작지를 가지도록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것이 예언활동의 중심축이었다. 이처럼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 잔존이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배려를 강조하는 구약성경 구절들이 빈번히 발견된다.
성경은 대부분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에 목적을 두는 생존경제(subsistence economy)를 상정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토라준수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대의명분에 종속된 경제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경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시험영역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심판과 저주를 동시에 경험하는 신앙적 진실성의 시금석이었다(신 28:1~19, 20~68).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과 그것의 조항인 토라 준수 여부에 따라 경제적 번영과 몰락을 천명한다. 28:1~14은 하나님의 토라와 언약에 순종했을 때 누리게 되는 경제적 번영을 열거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토라에 순종하는 경우 경제적 번영과 땅에서의 영속적 정착을 보증하신다. 이 단락이 예시한 경제적 번영은 인구증가, 가축의 다산, 농작물 풍년, 호의적인 기후 조건, 금융상의 우위성 확보 등이다.
신명기 28:15~68은 하나님의 토라 준수에 실패했을 때 받게 될 저주와 심판을 다룬다. 이 단락이 상정하는 저주와 심판은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출애굽 구원 이전의 노예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신명기 28장의 결론은 십계명의 준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나안 땅 상실과 열국으로 흩어지는 이산과 유랑이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계명 준수 실패가 가나안 땅 상실을 초래했을까?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자유농민으로 규정하는 하나님 계명을 배척한다는 말은 토지경작권을 가진 자유농민의 권리박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왕과 지배층의 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께만 배타적으로 소속된 자유민이 왕과 지주들의 노예가 되는 순간, 그 땅을 지키고 관리할 언약보존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멸망당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친화적인 중간사회가 필요한 시대, 보편적인 복지가 요청되는 시대
한국교회에 만연한 잘못된 구원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구원은 개인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다.” 몸의 구원에 대한 강조나 물리적 환경, 지구환경 등의 구원에 대한 강조는 이뤄지지 않는다. 개인구원은 사회적 성화나 구조악의 척결 등과 어떤 관계도 없는 순전히 고립적이고 단자적인 경험일 뿐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심각한 오류다.
둘째, “구원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다.” 구원은 육체이탈, 지구이탈을 통한 영적 구원 혹은 혼백 상태의 구원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바울 당시부터 이단으로 이미 정죄된 영지주의 구원교설이다. 영지주의 가짜 복음서들의 특징은 십자가 고난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고난 없이 순간이동식 천국 직행에 치중한다는 데 있다.
셋째, “세상 마지막 날 실현될 천국은 지구를 탈출한 우주적 새 거주처이며 이 지구는 어차피 불타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지구 환경 운동, 생태계 살리기 등은 다 헛된 짓이다.” 이것이 지구멸절론적, 지구탈출적 구원시나리오다. 이 종말시나리오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이 《휴거》라는 책이다. 어스니트 앵글리라는 사람이 쓴 이 소설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새 지상에서 잠적해버린다. 천사들에 의해 공중으로 부양하여 주(主)를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읽을 수는 있는 책이지만, 기독교의 종말교리를 설명하는 책으로서는 부적합하고 심지어 위험하다. 이 책을 고(故)옥한흠 목사가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보고 그 아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옥 목사는 천국의 실재성을 확신하게 하는 데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한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이 책의 가치를 옹호한 일이 있었다. 이 책이 천국의 실재성을 확신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기독교 구원의 종말론적인 양상을 말하는 교리를 설명할 때는 위험하다. 지구탈출적이고 지구멸절적이며 지구포기적인 종말시나리오를 말하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지구보다 더 멋진 새 지구를 신비한 또 다른 은하계나 신 태양계 어디에나 만들어 두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죄많은 이 세상을 놔두고 공중으로 올라가 주를 영접하며 불타는 지구를 바라보며 천국으로 유유히 비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이 세상과 땅에 대한 지극히 무책임한 기독교라는 인상을 심어줄 가능성이 매우 커 전도와 선교의 문을 닫아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롯의 탈출한 소돔성 이야기 등은 확실히 죄많은 세상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 구원의 시나리오로 적합해 보이도록 이끄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말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7은 지구탈출적 구원시나리오(휴거) 옹호자들이 가장 자신 있게 인증하거나 인용하는 성경구절인데,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을 기다리며 자는 자들이니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우 중 죽은 자들도 데리고 오실 것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살아있는 우리보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면 땅에서 죽어 묻힌 자들(즉 주님 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셋째, 살아있는 우리 성도들보다 먼저 부활하여 구름속으로 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 살아있는 자나 주 안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이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핵심은 주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이 휴거론자들에게 휴거를 예고하는 결정적인 구절로 인증된다. 그러나 이 말의 구약성서적 용도와 의미를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둘러싸는 외피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완곡어법이다. 시내산에도, 모세의 성막에도, 솔로몬의 성전에도, 이사야의 환상 속 성전에도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둘러싸는 구름이 있었다. 이동 중인 성막 위에도 구름기둥이 있었듯이 말이다. 다니엘 7:13을 보면 구름 타고 오시는 인자 같은 이가 등장한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이동식 보좌인 메르카바도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결론적으로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에 휩싸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되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공중’은 대기권 너머 우주공간이나 혹은 대기권 최상층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에베소 6:12~14이 말하는 그 공중, 하나님과 인간 중간의 영적 존재들, 정사, 권세, 보좌, 주관세력의 거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굴복하여야 하지만 잠정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질서에서 벗어나 자율왕국을 이루는 반역세력들이 존재하는 영역이 바로 공중이다. 이 공중은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익숙하게 알려진 중간하늘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 제11~12권에서도 자세히 다루는 중간계 피조물인 영적 피조물들의 활동영역이다. 사탄을 “공중 권세잡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천사들과 영적 세력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단죄하는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린 주 예수를 참된 왕으로 영접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말의 헬라어는 아판테시스다. 이 말은 왕의 행사를 의미하는 파루시아와 짝을 이루는 의전 용어다. 이 지상(인간세계)의 통치권을 완벽하게 되찾아 행사하기 위해 자기 땅으로 오는 왕을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사탄적 반역세력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나사렛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는 의식을 한다는 것이다.(파루시아와 아판테시스의 관계를 더 자세히 보려면, 김세윤 교수의 《데살로니가전서 강해》[두란노, 2002] 190~195쪽을 참조)
따라서 이 데살로니가전서 본문은 공중 휴거, 지구포기적 우주천상계로의 잠적이나 증발을 가리키는 본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성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파루시아)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의 공개적이고 우주적인 왕 영접의전을 가리키는 본문이다. 지구탈출적인 구원이 아니라 지구갱신적 구원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는 요한계시록적 창조적 파괴와 해체가 수반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 땅,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땅이 새롭게 되어 주님과 우리 성도의 거처가 되는 것이 창조주 우리 하나님께 지대한 영광이 될 것이다.
지구탈출적 구원시나리오 vs 지구갱신적 구원시나리오
칼 헨리가 쓴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IVP)은 전천년설적 종말론에 빠진 사람들, 즉 지구탈출론적 구원시나리오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지구와 인간역사를 포기하는 행태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휴거론적인 지구탈출적 종말구원시나리오에 빠져 있지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이 지구를 포기하거나 멸절시켜 버리는 그런 종말론적 구원시나리오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지구갱신론적인 구원시나리오를 말한다. 지구가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곳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보자.
1.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창 1장)
2. 하나님은 육신의 세계로 들어와 영광을 발하신다.(요 1:14)
3.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육신을 덧입는 부활, 즉 공간점유적인 몸을 가진 채 맛보는 구원이다. 영이나 혼백들의 구원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 후에도 생선을 드셨다. 먹고 마시는 구원이다.
4. “아버지 나라,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주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주기도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종국적 기착지가 땅임을 암시한다.(마 6:8~10; 사 11:9; 합 2:14)
5. 다만 이 지구는 갱신되어 다시 하나님 나라의 영토가 된다. 베드로후서 3장에 따르며 하늘과 땅은 불사름을 당한 후, 정화되고 단련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거듭난다. (11~13절)
6. 새 하늘과 새 땅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완전 대체한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다(계 21:1; 사 65:17~19).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은 사람의 장막과 함께하여 하나님의 총체적인 신원하심, 위로사역, 힐링이 일어난다. 땅에서 일어난 모든 악행, 고난, 슬픔을 전제할 때 위로가 되는 위로, 신원사역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의 목적지는 갱신케 된 땅,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계시록 21:4~5은 뭔가를 새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보다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준다. 처음 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사망, 애통, 통곡을 말소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지금의 태양계 대신에 하나님 자신이 친히 빛이 되어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0:20~21 참조)을 창조해 주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롭게 된 하나님 백성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하나님 백성이 주인이 되는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온유한 자가 차지할 그 땅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마 5:5).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비전은 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 비전을 계승한다. 이사야 65:17~25은 지구갱신적인, 세상질서 갱신적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세상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잠 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이런 지구갱신론적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영과 몸 모두의 구원을 즐긴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 직장에 매여 사는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무효화하는 자기착취적 삶이다. 자기파괴적 착취가 지배하는 개인의 삶과 직장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을 능멸한다고 보고 저항한다.
2. 하나님이 주신 하늘상급을 위해 분할된, 미시적 순종을 축적하다가 주님의 재림시 결정적인 변화를 맛본다(빌 3:21). 지상에서 분투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경우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하여 영화롭게 변형되어 사탄을 단죄하듯이 마침내 주님을 공적으로 왕으로 영접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 생태계 전체의 구원과 영화를 지향한다. 세상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닌 성도가 기독교회의 본류를 이룬다. 세계만민의 운명에 책임을 지려고 한다. 경제불의, 빈부격차, 환경파괴, 핵오염, 기후변화 등을 재림 예수에게 맡겨버리고 오로지 내세적인 구원만 기다리는 도피주의적 구원 대신에 세상 변혁적인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한다. 주님의 구원을 즐기는 과정은 인격적 성화과정임과 동시에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선교적 봉사적 삶이다.
4. 따라서 지구갱신론적 구원시나리오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대망하면서도 구원받은 개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며 살아갈 중간단계 사회가 기독교 친화적으로 변화되도록 분투하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개인 신자가 되었으나 기독교신앙을 유지하고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결론
국민기본소득은 선천적으로 노동 능력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나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주는 장애수당, 아예 일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대한민국 핵심구성원들인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실시하는 공교육 혜택, 그리고 실업자들에게 주는 실업수당 등 보편복지 제도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성경의 땅 신학이나 자연법적 땅 이해에서 나오는 땅 소출 향유사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낯선 개념이 아니라 이미 시행중인 보편 혹은 선별복지제도를 급진적으로 격상하여 온 국민들이 민주공화국의 발전과 융성에 이바지하도록 활성화하자는 제도다. 파라오적 압제자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비국민이나 노예,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장치로서 하나님의 땅에서 파생되는 선물을 향유하는 데 참여시키자는 제도다.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는 개인이나 기업의 이윤추구 자유를 극한으로 존중하는 ‘자기조정적인 시장’보다는 하나님의 주기적 개입과 간섭을 통한 가난한 자 배려와 돌봄에 치중하는 경제를 보여준다. 경제활동의 중심에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 보호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유지를 돕고자 하는 신적 의지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애덤 스미스(1723~1790)가 《국부론》(1776)에서 상정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되는 자기조정적인 시장’을 믿지 않는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존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까지 소위 주류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자기조정적 시장 사상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장주의자들은 개인의 이기적인 활동이 공공선이 되는 그런 시장, 하위단위 경제주체들의 이기적인 활동이 더 넓은 공공선을 창출한다는 이념을 신봉하면서, 국가(또는 사회/공동체)의 역할을 감축하는 데 전력투구해 왔지만, 성경의 경제학은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것을 도와주는 재화와 용역의 공동향유를 의미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칼 마르크스보다 한 세대 앞선 19세기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이었던 앙리 생시몽(1760~1825), 로버트 오웬(1771~1858) 등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부터 시작해서 칼 마르크스의 평등주의적 정치경제학, 그리고 20세기의 칼 폴라니의 시장을 통제하는 “사회” 우선의 “사회보호형 경제학”에 이르는 사회적 지향이 강한 경제학 전통에 가깝다. 성경의 경제는 하나님 앞에 사는 “거룩한 백성”(고이 카도쉬, 출 19:6)의 번영과 유지에 그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백성”은 열방 백성들과는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라는 말이다. 왕이나 제후의 신민(臣民)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지되, 어떤 인간 제왕이나 지배체제 아래 노예화될 수 없는 자경·자영·자작 농민을 가리킨다(왕상 4:25; 비교. 삼 8:11~18). 그들은 야웨 하나님께 언약준수의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땅을 경작하고 그 소출을 먹는 자유를 천부불가양의 선물로 받았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자기 땅을 경작하는 사람만이 자유민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인 땅을 소유한 목적 자체도 생물학적인 존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토라를 구현하고 실천하기 위함이었다(시 105:44~45).
그러므로 성경의 경제는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의 인권과 자유 옹호학이었다. 성경에서 경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유지되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 안에 규제되고 조절되는 사회내적 활동이며 야웨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은 자경·자영·자작 농민들의 공동체 보호활동이었다. 성경의 압도적인 경제적 관심은 가난한 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산업이 거덜 나 이스라엘의 언약공동체로부터 이탈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즉 언약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시켜 가나안 땅을 영구적으로 경작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현재 이스라엘의 애국가이기도 한 시편 133:1(“형제가 연합하며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이 구약성경의 이상적 사회를 노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부터 내리는 은총과 혜택이 가장 밑바닥 구성원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노래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기 스스로 가치를 갖고, 인간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와 용역을 마음대로 사고파는 데 사용되는 신격화된 화폐, 즉 맘몬(마 6:24)을 숭배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요약컨대 하나님 나라 경제학은 공동체의 소속할 자유와 그 터전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들을 공동체 안에 묶어 놓는 데 투신된 경제학이다. 이것은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과 잠언서, 복음서,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공동체 경제학이다. 성경 경제학의 대전제는 공동체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땅으로부터 오는 소출을 누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 다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사는 사회를 궁극적으로 지향했다(왕상 4:25).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땅의 소출로부터 영구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신 15:7~11)가 경제와 반경제의 경계선의 지표석이었다. 특히 신명기 15:11의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고”라는 구절의 의미는 가난한 자가 땅으로부터 끊어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땅의 소출을 향유하는 데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성경 경제학은 무한 성장 경제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과 공동 번영을 위한 경제학으로, 사회의 가장 연약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최대의 관심을 갖는 경제학이다. 경제활동이 ‘인류문명사회’의 기관의 존속과 번영을 위한 윤리적 정치적 고려를 완전히 일탈해서는 안 된다. 경제는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 있고, 연대감 넘치는 통일체를 위한 부분 활동이기 때문이다.
경제활동 자체를 인간의 삶을 위한 대의명분에 종속시키지 않는 한, 즉 경제가 그 자체의 자율적인 원리로 움직이는 자율왕국 영역이 될 때 인류 공동체라는 ‘사회’는 치명상을 입는데도 그들은 공동체 붕괴를 보고서도 태연자약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업의 경제활동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평화로운 모듬살이에 기여하여야 한다. 경제(이코노미, 오이코노미아)는 집, 즉 생존공동체 전체를 위한 살림살이이기 때문에 그 말 안에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취하는 긴밀한 상호적 계약 상태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공동체적 삶이 무너지는 것은 ‘경제’가 무너지는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간의 우애와 협동, 운명공동체적인 유대를 강화시키는 것이 경제활동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특정기업이 수 조원의 순이익을 남겼다면 그 혜택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여될 때 그것이 참된 생산성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경제민주화는 헌법에 명시된 의무를 수행하는 헌법적 결속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이 땅에서 발생한 부와 자본 등의 혜택향유가 보장되는 제도를 안출할 것을 요구한다. 국민기본소득은 신명기 15:11의 원칙을 가장 포괄적으로 적용한 장치다. 모든 국민은 대한민국의 땅의 소출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김회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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