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R. 디한의 성막론이 분량은 적으나 가장 명료하게 진술한
성막론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성막론을
요약하듯 만든 책도 디한의 성막론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 이후에
로마서을 강해하고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를 강해하면서 성막론을 젖혀
두었다가 히브리서를 통해 성막의 실상을 더 분명하게 알고 성막론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우리의 몸의 기능과 역할이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서
오래 묵은 성막론을 다시 펴서 최대한 단거리로 은혜의 보좌에 다다르게
하려고 노력을 해 봤습니다. 미흡한 부분은 성령께서 자세히 설명하실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대속의 복음을 듣고 우리를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자리에서 그리스도 안에 옮겨서 주의 살으심과 연합
곧 그 부활의 능력에 연합이 된 사실을 믿고 회개와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습니다.
누가 뭐래도 베드로가 성령을 받는 방법을 천명한 방법 외에 딴 길은 없습니다(행2:38)
아니면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눈이 빠지라 목이 빠지라 부르짖어도 은사나 표적의
성령의 나타나심만 있을 뿐 성령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성령은 받지 못합니다.
그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이 되는 세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고 난 다음에 예수께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뒤돌아보고 십자가의 도의 의미를 깨닫고 그 십자가를 달게 지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금과옥조로 여겨 주의 죽으심과 연합, 주의 살으심과 연합, 한 떡 한 몸 한 영의
연합을 쉬임 없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영광의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이스라엘이 아니므로 율법과 성막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하심을 알고 그 그림자인 성막을 뒤돌아보고 주의 대속의 은총에 감격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에 스스로 가입한 것처럼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철부지들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작정을 우습게보고 함부로 말하는데
이런 자들은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제단의 부젓가락으로 입이 지져져야죠.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을 겁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말씀이 이루어지듯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성령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집니다.
성경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며 믿음도 아무나의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영광도 그렇습니다.
과거 초보의 신앙일 때에는 성막의 문과 번제단 물두멍, 그리고 금등대, 떡상,
향단, 휘장과 지성소의 법궤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속죄와 중보의 은혜를 따라 곰곰이 생각하며 묵상하고 기도했던 때가 있습니다.
소위 기도 줄이 잡히니 어쩌니 할 때에 기도의 줄을 저는 그렇게 잡았습니다.
결국 주님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면 기도(프로슈케)도
한 길이라는 걸 터득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산 기도를 가서 여기저기서 고함치는
소리를 들으며 별놈의 기도를 하고 있다고 여길 때가 있었는데 제가 옳았음을
먼 후일에 알았습니다. 히브리서가 그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우리를 생명으로 옮기셨음을 압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 묶인 자들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2:11)
그리고 승천하셔서 그 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셨고 우리 고통을
직접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사도이시며 지금은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언제나 중보기도 하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지키면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히3:1-6)
처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께 참예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히3:14)
이렇게 말씀을 듣고 쭉 따라가는 가면 그림자인 성막이 내게 실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안 되는 것은 '말씀은 듣지만, 유익이 안 되는 것은 너희가 믿음의
화합(결부)을 이루지 않기 때문'(히4: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성전 뜰 안에서는 청함만 받고 예수의 피, 십자가, 예수천국을 외치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택함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 밖의 이방인들의 신앙의 장터입니다.
생명이야 어떻던 감정만 고조가 되고 자신의 이성에 맞는 합당한 말이면 아멘 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그들은 숫자도 세지 말라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계11:2)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소 안을 들여다보게 되면 금등대의
불빛에 떡상이 보이듯 활자 속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이 드디어 생명의 떡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며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금등대의 불빛에 향단이 보이듯 참 기도의
길을 알게 되고 왜 휘장을 주님의 몸으로 찢으시고 주님이 그 휘장 자체가 되신 줄
알고 그 피 안에서 주님과 한 몸이 되어 그 몸이신 휘장을 따라 새롭고
산 길 곧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그 앞에서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게 바로 참 예배이며 참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뒤돌아보는 목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의 닻을 이끌고 하늘 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으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새 언약으로 바꾸시고 땅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믿음과 동격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고 있는 분들도 있고 될 듯한 분들도 있으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 이해가 안 된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학교는 낙제는 있어도 퇴학은
제 멋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막의 실체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어 그 기능과 역할을 자신 속에서 발현시키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데 자리에 앉아 가느냐 밖에서 매달려 끌려가느냐
하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다 가긴 가지만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느냐 아니면 욥처럼 죽을 만큼의 고난을 당한 후에야 하늘 문이 열리느냐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고 난 다음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기 위해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주님께서 육체에서 구원을 위해 기도했듯(히5:7)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느냐 그 진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와의 거리가 정해져 그 자격지심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큰 복이 됩니다.
성막론을 완전히 재해석한 히브리서를 따라 아무 거리낌 없이 아버지 앞에 설 수
있고 담대히 그의 품 안에 달려가며 크게 소리쳐 아버지 사랑합니다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를 통해 많은 분들이 이 놀라운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율법을 새언약으로 바꾸시고 땅의 성소가 아닌 하늘의 성소로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오직 주님께서 여기까지 이끌고 오셨습니다
주께 영광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제가 더 염려해 드려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