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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통치 | 1-2 1 ①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2 ②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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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내외적인
공격 | 3-4 3 ③ 여호와여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 ④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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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 5 5 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⑥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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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3편, 메시아왕국의 비전
요절 : 1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 하도다.
93편의 주제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 한다”는데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통치(統治)하신다”는 말이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후의 시편들을 신정(神政) 시(詩)라고 말합니다. 중심에는 “보좌”(寶座)가 있고, 핵심은 보좌에 좌정하셔서 통치하시는 “여호와”(1, 3, 5) 하나님이십니다. 이보다 중요한 주제란 달리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언제 되어질 말씀인가?
성경 마지막 책,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하는 말씀함을 듣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이루었도다”(계 21:6) 하고 선언하실 메시아왕국에 대한 비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전체가 다섯 절에 불과하지만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2) 여호와의 통치하심
둘째 단원(3-4) 대내외적인 공격
셋째 단원(5) 확실한 주의 증거
첫째 단원(1-2) 여호와의 통치하심
첫째 단원의 중심점은 단연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統治)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행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첫째는 누구를 믿는가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한낱 지적인 승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통치하심에 순복한다는데 까지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 신앙의 기형적인 현상은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 그 분의 다스리심에 순복하는 통치개념이 없다는 점입니다.
①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1상) 합니다.
㉠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왕이 통치하기 위해서는 “권위와,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은 누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입으셨도다”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하십니다.
㉡ 이처럼 “스스로 권위와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 하도다”(1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지금도 “세계가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관(主管)하심과, 통치(統治)하심”을 구별하여 생각함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점을 히브리서에서는,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 합니다.
② 이점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2) 한 말씀과 충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는 점입니다.
㉠ 주님은 사탄을 가리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2:31, 16:11) 하고, “이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겼다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하나님은 예로부터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만치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주재(主宰)권, 즉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점을 근원적(根源的)으로 고찰해 보기 위해서는 “선악과”에 대한 바른 인식부터 선행이 되어야만 합니다. 선악과는 왜 만드셔서, 그것도 “동산 가운데” 두셨단 말인가 하고 불확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요건에는, “왕, 백성, 법”이 있어야 합니다. 왕은 백성들을 법을 통해서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통치(統治)에 복종하는 여부를 무엇으로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맥락에서 선악과를 언약이었다(호 6:7)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는 언약을 어겼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拒否)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은, 하나님중심에서 자기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현대판 선악과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불러 (예수여, 예수여가 아니라) 주여, 주여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 하셨습니다. “주여” 하면서 순복하지 않는 것은 모순 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 성경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6:19-20, 10:31),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하고 말씀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삶인 것입니다.
㉣ 이점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하나님의 통치를 노예적인 예속(隸屬)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보호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 슬하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생수를 공급해주셨는가? 자기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사 4:6) 하시는가? 구속하여 자기 백성을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통치하심”입니다.
㉤ 이처럼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통치하심”을 구분을 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됩니다.
㉮ 하나님의 최초의 통치 영역은 에덴동산이었고,
㉯ 홍수심판 당시는 “방주 안”이었고,
㉰ 출애굽 당시는 유월절 양의 피가 뿌려진 집 안이었고,
㉱ 구약시대는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하신,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었습니다.
㉲ 그리고 신약시대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하신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점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대 주재(主宰)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시요”(행 4:24) 한, 만물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 주재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2:3) 하고, 통치를 거역하고 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거역은 인류의 시조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이런 거역이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 열 족장의 불순종 등을 유발했습니다. 심각한 것은,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렘 11:9) 한 선민 이스라엘의 반역입니다. 급기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고 있는가 하고 묻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통치하심”입니다.
둘째 단원(3-4) 대내외적인 공격
둘째 단원의 중심점은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큰물”이란 원수의 세력 곧 대적의 세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다”는 것입니다.
③ “여호와여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3) 합니다.
㉠ 무엇에 대한 대적인가? 첫 절에서 말씀한 “여호와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건설에 대한 반항인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계 13:1) 합니다. 요동하는 바다를 사탄의 처소(處所)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3) 하고, 파상(波狀)적으로 공격해 오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또한 “높였고, 높였고” 하고 과거(過去)에도 그러했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하고 현재(現在)에도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로 말씀하시길,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에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 되시며 환난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사 25:4) 하고, 대적자의 기세가 어떠한가를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합니다.
④ 그러나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4) 합니다.
㉠ “여호와의 능력은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다”(4)는 것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46:3), 하나님의 능력은 그보다도 더욱 크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하신 “능력”(能力)이라는 차원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복음에 능력이 없다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히 2:15)를 어떻게 구원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한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때에 역사하신 능력을,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엡 1:19), 즉 최상급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2:1-4),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33:10-11), 제아무리 대적한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건설은 완성하시고야 만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대적자의 파상공격”입니다.
셋째 단원(5) 확실한 주의 증거
셋째 단원의 핵심은 “주의 증거”에 있습니다. “주의 증거”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19:7)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5) 합니다. “여호와의 능력(대적 자의)은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다”(4)는 말씀에 이어서, “주의 증거”를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는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인다”(3) 하여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구원계획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다”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임기응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합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언약, 예언, 예표, 그림자, 모형 등으로 미리 말씀하셨던 것이 실체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증거는 확실하다”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주의 증거”를 전해주어야만 신앙이 견고해질 수가 있습니다.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나의 구주가 되심을 어디에 근거하여 믿게 되었습니까? 체험에 의해서입니까? 누구의 간증을 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험천만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근거가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하신, “주의 증거” 위에 믿음을 건설해야만 안전한 것입니다.
⑥ 둘째는,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永久)하리이다”(5하) 하는 말씀입니다.
㉠ 여기서 “주의 집”이라 하심은 1-2절에서 말씀한, “하나님의 통치, 권위, 능력, 보좌”가 있는 곳인데, 곧 하나님의 통치 영역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입니다.
이점에서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3) 한, “큰물”을 박해(迫害)로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를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다”(5) 한, “거룩”과 결부시키면, 인본주의, 쾌락주의, 세속주의의 거센 물결로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한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하고 시작이 된 93편은,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5) 하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는데, 이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집” 곧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의 표지(標識), 즉 “여호와의 통치”가 시행이 되고 있는 여부를 점검케 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됩니다.
㉮ “주의 증거”(5) 곧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느냐 여부와,
㉯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5) 한, 성별(聖別)됨입니다. 현대교회가 이 두 가지 요점을 보수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城)과 곽(廓)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信)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사 26:1-2) 하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신(信)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주의와 구별이 되는 “성곽”이 튼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한 주의 증거요, 메시아왕국의 비전”입니다.
적용 : 현재적으로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도들의 마음, 가정, 그리고 교회에 임하여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복하고 있는가?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묵상
㉠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통치하심에 대해서,
㉡ “큰물이 소리를 높혔다”는 세속화의 물결에 대해서,
㉢ 확실한 여호와의 증거와, 거룩함이 합당하다는 두 가지 요점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