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元)의 중국 지배와 고려와의 관계 이길상 가. 몽골의 중국지배 (1) 유목지대의 몽고족 유목(遊牧)사회가 농경(農耕)사회를일시적인 힘으로 정복할 수는 있어도, 이를 지배하고 통치하는데는 여러 가지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인데, 그것은 인구의 열세, 문화적인 후진성, 관습의 차이,통치기술의 미숙(未熟)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정복한유목왕조들은 중국에 동화(同化)되거나, 동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중 지배구조를채택하는 것이 상례(常例)로 되었습니다. 몽고가 동서양에 걸친 정복사업을 수행할 때도, 그들이눈독을 들인 것은 유목초원지대로서 농경사회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러나초원지대를 장악한 몽고가 다시 농경사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이곳의 풍부한 경제력이대단한 매력을 주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농경민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복의 목표가 된 것이 중국을 비롯해서 한반도와 일본,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가 다시 포함되었습니다. 몽고제국 내부의 사정도 문제가 대단히 많았는데,후계자를 미리 정하지 않는 유목사회의 관습은 절대권력자가 죽고 나면 그 후계문제가항상 시끄럽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오고타이칸의 즉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고,그의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더욱 노골화되어, 안으로는 일족(一族)내의 권력장악을위한 항쟁으로 모든 기강은 흔들리고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렇게 되자 속령(屬領)통치는 무정부적인 상태를 가져오고 지방에 웅거하는 지방분권 세력이 나타나 통일제국의 형성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칭기즈칸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주치는서아시아 원정에 공을 세웠으나 부친 칭기즈칸 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차가타이는칸의 지위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일리강을 중심으로 막영(幕營)생활을 하면서 유목생활의전통을 지켰으며, 셋째 오고타이가 칸을 계승하여 정복사업을 계속하였고, 막내인툴루이(Tului / 1192~1232)는 1227년 칭기즈칸의 사후 몽골 본토와 대부분의 군대를통솔하며 섭정으로서 국정을 도맡았고, 1229년의 쿠릴타이(집회)에서 형인 오고타이를제2대 칸으로 추대 하였습니다. 툴루이는 그후 금나라에 재침입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1232년 본토로 귀국하는 도중 병사하였는데, 그에게는 케레이트족 출신의 부인 소르칵타니와의사이에 몽케(망구)·쿠빌라이·훌라구(푸라그)·아리크부가 등 훌륭한 네 아들을두었습니다. 몽고는 말자(末子)상속의 유풍이 있었기 때문에 칭기즈칸의 사후, 막내툴루이가 칸을 계승해야 했으나, 현실을 직시한 툴루이 가(家)에서는 은인자중(隱忍自重),세력이 큰 제 3자 오고타이에게 칸을 양보하였으나, 이때부터, 오고타이가와 툴루이가사이에는 권력의 암투가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암투는 오고타이가 죽은 후 표면에 나타나, 그의장자 귀위크가 칸을 계승하였으나, 그의 칸 계승을 반대한 집안의 어른 바투(칭기즈칸의맏 손자)와 일전을 각오하고, 바투가 지배하고 있던 남러시아에 자리잡은 킵차크한국을정벌하기 위해서 서정(西征)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이 후 칸의 계승은 툴루이가에서계승하여 4대 칸이 된 것이 몽케였습니다. 그는 동생 쿠빌라이로 하여금 중국·티베트·다리(大理)·안남(安南)을,훌라구로 하여금 서아시아 이슬람교의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고, 자신도 남송정벌을결의하고, 쓰촨(四川)까지 진군하였으나 진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이에 형의 부보를들은 쿠빌라이는 서둘러 남송(南宋)과 화평교섭을 체결(締結)하고 북으로 회군하다가,수도 카라코럼으로 가지 않고 내몽고의 카이펑부(開平府)에서 소규모 쿠릴타이를열고 칸에 올랐고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여 중통(中統)이라 했습니다(1260) 이래서다시 카라코럼에 있던 막내동생 아리크부가와 4년간의 골육상잔을 거쳐 칸의 지위를확보하고, 인구가 조밀하고 생산력이 풍부한 중국본토를 포함한 대제국의 건설할야심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훌라구가 서 아시아를 정복할 때, 이란 북부지방에는이스마일(Ismailism)이라고 불리던 이슬람교단에 속한 세력권이 있었는데, 이들은시아파(派)의 한 분파로서 7 이맘 파라고도 하며, 물라히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물라히다가 아라비아말로 "바른 길을 잃어 버린 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정통이슬람에서는 이들을 이단으로 취급했으나, 막상 그들 자신들은 이스마일이라고칭했고, 이슬람의 교의(敎義)에 매우 충실하였으며, 다만 이들이 카스피해 남쪽 엘부르즈산맥의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의종교를 이교도(異敎徒)에게 강요하고 여기에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학살하는 등 난폭한행동을 자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훌라구는 텐산산맥 북쪽 길을 돌아 투르크스탄에 이르러이스마일교단의 산성을 공격했는데, 이들의 저항이 워낙 완강해서 곤욕을 치루기도했으나, 결국 산성은 함락되고 그 두목은 몽고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1256)훌라구는 다시 동칼리프가 있는 아바스조의 수도 바그다드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가하여 이를 함락, 500 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이슬람제국을 멸망시키고,여기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일한(일칸)은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며 이후훌라구가계의 후계자들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고인 특유의 만행(?)으로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는데, 학살된 인원이 80만명이라고 전해지고있습니다. (2) 원조(元朝)의 중국지배 (가) 원조(元朝)의 성립 쿠빌라이(Khubilai : 忽必烈/홀필열/1215~1294)의제위(帝位)기간은 1260년부터 1294년까지, 35년간으로, 내몽고의 개평(開平)부를상도(上都), 연경(燕京)을 대도(大都)라 이름하여 이 두 곳을 수도로 정하고, 이양도(兩都)을 중심으로 하북, 산서, 산동과 내몽고 지역을 포함하여, 이곳을 복리(腹裏)라고불러 중서성의 직할지구로 하였고, 그 밖의 지역에는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고중앙의 중서성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군사, 행정의 대권을 장악하게 하였습니다.그리고 영토를 확장하면 그 곳에 행중서성을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를 줄여서 행성(行省)이라고불렀습니다.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을 위한 임시 기구였으나,고려의 내정 간섭기구가 됨- 이런 행정, 군사 기구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모든행정관청에 행정장관과 나란히 몽고인이나 색목인으로 임명된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일종의 행정감독관이 있어서, 중국인 관료들이 결재(決裁)하는 서류에 같이 결재를하여, 이들을 일일이 감시하였고, 모든 행정에 간섭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나) 쿠빌라이의 재정(財政) 정책(政策) 당시 재정수입의 골격은 상세(商稅)를 비롯한 전매수입으로서의염세(鹽稅) 등이 였는데, 몽고가 국호를 원이라고 칭하기 전해인 1270년의 재정상태가,모든 것을 합해서 10만 정(鋌) 내외였던 것이, 2차 일본원정을 실패로 끝낸 1285년경에는 무려 270만 정으로, 20배 이상이 되었으나, 반면에 지출도 팽창, 지출이 100만정이상의 수입을 초과하여 적자(赤字) 재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재정적자의가장 큰 원인은 일본원정을 비롯한 대외 정복사업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위해서 쿠빌라이는 다시 상인과 위구르 출신들을 등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상인 출신의 노세영(盧世榮)과 위구르 출신의 셍가(桑哥)등이 등용되어 추진한 재정확보책은 종래의 미봉책(彌縫策)에서 벗어나, 전매(專賣)와관업(官業)을 확충, 이를 통해서 수입을 얻고자 했는데, 생산시설을 늘리거나 외국과의통상을 통해서 활발한 교역을 유도한 것은 아니 였으나, 이로 인한 국내 산업의 개발과수공업 생산의 발전은 사회대중의 구매력(購買力)을 증대 시키고, 경제적으로 활기를띠게 하여 국가의 경제에도 고도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경제규모의 팽창은 통화(通貨)의 공급이 필수적으로따라야 되겠지요. 통화란 유통화폐를 총칭하는 말로서, 흔히들 총통화, 통화 등으로현대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화라고 할 때, 현금과 요구불 예금이여기에 포함되고, 다시 여기에 저축성 예금(정기예금)을 포함하면 총통화라고 합니다.현대국가에서는 그 발권과 관리를 중앙은행에서 담당하고,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데,돈이 흔하다고 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물가가 오른다는 뜻이고, 돈이 귀하다고하면 물가는 안정되나 경제가 위축되는 불경기를 의미합니다. 이래서 돈이라는 것은 국가든 개인이든 말도 많고탈도 많습니다. 쿠빌라이 시대의 원나라도 교초라는 지폐(紙幣)를 발행하고, 중통교초2관문을 은 1냥과 같은 가치로 하여 이를 유통시켰는데, 각지에 평준고를 설치하여지폐를 은(銀)과 바꾸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 신용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10문에서2관문에 이르기 까지 9등급으로 세분하여 발행하였으므로, 소액 사용이 가능하여일상생활에서 물자를 구입하는데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전역에 걸쳐서 유통되었고,유통화폐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송을 지배한 후 경제력을 더욱 높아지고,교역이 활발해 짐에 따라 교초의 발행도 늘려야 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태환에 필요한 은(銀)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쿠빌라이의 해외정복에따르는 비용 조달은 교초를 남발하게 되고, 이래서 교초는 불환지폐(不換紙幣)가되어 물가앙등과 가치 폭락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원의 조정에서는 화폐개혁을 단행, 지원교초라는새로운 지폐를 발행(1287)하여 폭락한 중통교초와 교환하게 하여, 통화위기를 모면하였는데,이는 인물본위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쿠빌라이의 탁월한 정치 수완으로서,그가 도덕적인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세첸칸(賢主)으로도 불리게 된 일면을여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치세기간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후궁중의 사치를 교초의 남발로 충당하면서, 원은 쇠망을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폐(紙幣)를 실질가치가 있는 귀금속(주로 금과 은)과바꿀 수 있는 것을 태환(兌換)지폐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새겨져 있는 만원 권지폐를 가지고 한국은행에 가면, 만원에 상당한 금이나 은으로 바꿔 준다는 것인데,...이를 본위화폐제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공황(1929) 이전 까지는 가능한 것이었고,지금은 어느 나라에서도 개인이 중앙은행에 가서 금이나 은으로 교환해 달라고 해도바꿔주지 않습니다. 이런 지폐를 태환권이 없다 해서 불환지폐라고도 하고법으로 강제 통용시킨다고 해서 법화(法貨)라고도 합니다. 그 국가가 망하면 지폐라는것은 휴지보다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법화가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간에도통용되는 것은 국가의 신용입니다. 미국의 달러화가 강세라는 것은 미국의 국가적인신용이 높다는 것이고, 미국의 달러에 대한 원화의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한국의상품가치를 비롯해서 국가적인 신인(信認)도가 낮다는 것을 1차적으로 의미합니다. 거기에 부채는 누증되고, 유동성이 부족하면, 부도(不渡)가발생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기업은 국가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거나, 채권자와 화의신청을하고, 국가라면 국제통화기금(IMF)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줄 것을 요청, 위기를 모면하는데이를 IMF 사태라고 우리들은 말 합니다. 경제라는 것은 힘이나 이론만으로는 안되는것 같습니다. 부자가 되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분명한 것은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어서, 수요(需要)를 확대하고 공급(供給)을 늘리면간단한데,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3) 문벌 지상주의 과거(科擧)가 송대 이후 중국 관료 세계를 구성하는중요 제도였으나, 원대에 이르러 이제도가 폐지되고, 고대의 관리임용방법인 세습(世襲),은음(恩蔭), 추거(推擧), 이원출신(吏員出身) 등의 제도로 복귀하였습니다. 개인의능력이나 인물 본위의 인재 등용에서 문벌중심으로 관리 선발이 이루어졌다는 것은,씨족적 사회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봉건적, 혈통적 사회 질서 속에 머물러 있음을의미하며, 이러한 제도는 결국 문벌사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소수의 몽고인이 다수의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관리로 임용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의 사정이 이렇게 만들었다고는하나, 이러한 전통주의에 따르는 인재등용 방법은 일반 서민에게까지 적용되어 일반민중을 군호(軍戶), 민호(民戶), 참호(站戶), 장호(匠戶)로 대별하고, 각기 세습화된직능과 신분을 부여하였습니다. 군호와 참호는 군역(軍役)과 역전(驛傳)을 맡아보는세습화된 특수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일반 민호와는 사회적 위치도 달랐습니다. 이들 군호와 참호에게는 1명이 군역에 종사하면 400무(畝/묘)에 해당하는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는데, 이것은 1 묘에 한 말의 과세를부과한다고 가정할 때 40석을 면세 받는 계산이 되고, 이런 혜택이 누구에게나 있는것은 아니고, 몽고제국 창건 당시부터 국가에 공헌한 가문의 출신자 가운데서 과거(過去)의공적을 참작하여 국가가 선출해서 고정화 시키고, 국가의 배려에 의하여 그 직분을세습적으로 지닌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특혜였습니다. 과거제도의 폐지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의 불만을 초래하였고,이들을 무마하기 위해서 한 때 부활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였고,피 지배 신분의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도 국가가 세심한 배려를 기울려 세습화하고고정화시킨 데서 문벌과 전통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원 왕조의 현실적인여건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안고 있었다고할 수 있습니다. (4) 인종(人種) 분리주의 소수의 몽고인들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수한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채택한 것은 몽고인 제일주의였고,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처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사나 행정에서 요직을 몽고인이 차지하였으나, 그방대한 조직을 무식한 몽고인들 만으로 채우기에는 역 부족이 였기 때문에 협력자를얻어야 했는데, 종래의 유목 정복왕조들이 택한 중국 지식인 등용대신에 색목인(色目人)들은그들의 파트너로 선정하여 지배층을 형성하였습니다. 색목인(色目人)이란 눈이 푸르거나 노랗다고 해서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종족이 섞여서 복잡하다는뜻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투르크계 제족과 이란계 민족들이 대부분이 였는데, 몽고인들이중국본토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이들과 교섭하고 있었으며, 중국과는 이질적인 문화전통속에서성장하여, 인정이나 안면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라고불렀던 중국인들을 통치하는데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색목인 중에는 관리로 임용되는 자, 중국문화를흡수하여 학예에 종사하는 자, 무역 상인으로 활약하는 자들이 많이 나왔고,특히 투르크계의 위구르인들은 정상(政商)으로 중용되어 왕공(王公)들의 자본으로고리대금에 종사했는가 하면, 티베트의 승려는 라마교를 궁정에까지 끌어들여 권력의보호 아래, 중국의 불교를 탄압하는 등 횡포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자기들의 고유문자, 언어, 혼인과 장례의풍습 등의 사용을 원의 조정으로부터 허락받았고, 재판에서도 그들만이 따로 행할수 있는 등 각가지 특혜가 주어져, 원(元)왕조 각 분야에 공헌(貢獻)하여 이름을남긴 자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한인(漢人)으로 취급된 제 3의 신분은 금나라에 치하에있던 화북인, 그리고 거란인, 여진인, 고려인, 발해인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금국치하의중국인과 남송치하의 중국인을 신분적으로 갈라놓아, 이간책(離間策)을 도모한 것은정책적 수단이 였고, 거란인과 여진인 중에도, 몽고에 협력했거나, 중국화하지 않고순수한 유목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부류는 그들과 같은 몽고인으로 취급해 주었으며,중국에 동화되었거나 중국화한 나머지는 계급을 낮추어 이들과 갈라놓음으로서, 이들간의민족적 단결을 막고자 했습니다. 최하위층에 있던 남인(南人)들은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그 치하에 남아있던 사람들로서, 이들을 만자(蠻子)라고 부르기도 하여 홀대(忽待)하고,생산에만 종사하게 하였으며, 무거운 공부(貢賦)의 의무를 지웠는데, 금국 치하에있던 한인(漢人)이라고 할지라도 국가관료로 임용될 수 없었으며, 주(州)나 현(縣)의관리로 임용되는 것이 고작이 였습니다. 원 왕조가 중국인들에게 이렇게 혹독하리만치 억압과제약을 가하여, 엄중한 감시와 경계(警戒)를 했던 것은, 몽고 이전에 중국본토에무력으로 정복왕조를 세웠던 어떤 이민족도 궁극에 가서는 중국 문화에 동화되고자주성을 상실하여, 중국민족에게 다시 정권을 넘겼던 역사의 교훈을 통감했기때문입니다. 세조쿠빌라이를 비롯해서 모두 11대를 이어온 원나라역대 군주 가운데, 단 한명도 중국어와 한문자에 통한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모든 칙령(勅令)을 비롯한 중요한 공문서에 몽고어와 몽고문자로 표현하고 기록하였다는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중국문화의 동화력을 경계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있습니다. (5) 라마교와 파스파문자 세계를 정복한 몽고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늘로부터뜻과 명령을 부여받은 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만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삭막한 초원 사막 지대에서 찌들은 유목생활로 연명에 급급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도속일 수도 없는 일이었고, 따라서 문자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었고, 중요한 문서는시리아문자를 모방한 위구르문자를 사용하다가, 그와 비슷한 문자를 만들어 몽고어를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몽고문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세계의 제패(制覇)라는 위업(?)을 달성하자 문자에 대한 욕구도 생겨나게 되어 이른바파스파문자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파스파(1235~1280)는 라마교의 고승으로서, 파크파라고하기도 하고, 바쓰바(八思巴)라 음역(音譯)하기도 하는데, 1253년 쿠빌라이가 티베트를정복했을 때, 그의 설교에 감동한 나머지 그를 데리고 왔고, 쿠빌라이가 칸으로 즉위한이후 국사(國師)가 되어 전 티베트의 통치권을 위임받았으며, 쿠빌라이의 명을 받고파스파 문자를 창안, 1269년에 완성하여 이듬해 공용문자로 정식 채용·공포하였습니다. 파스파문자가 티베트 문자를 개혁한 것으로 왼쪽에서오른쪽으로 쓰며, 세로쓰기용으로 된 모가 난 글자라고 하는데, 황제의 조칙(詔勅)이나중요한 공문서에는 반드시 파스파문자를 몽고 공용문자로 규정하고 이것을 사용하도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스파문자가 쓰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보급이 잘되지 않았으며,따라서 하나의 행정문자의 구실을 담당했을 뿐, 상용문자로 일반화된 것은 위구르문자에서변형된 몽고문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에서는 한문자, 아라비아문자등 각국의 문자도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라마교(Lamaism)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불교로서, 7세기경 당나라와 네팔의 불교가 들어와,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본교(bon敎)와 혼합되어 토착화되었는데, 그 후 8세기 중엽, 인도로부터 밀교(密敎)가들어와 이후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반야중관(般若中觀)사상을기초로 하여 이를 밀교와 융화시킴으로써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확립되었고, 그 후티베트인들의 관음(觀音) 정토(淨土)사상과 결합되어, 그 통치자인 다라이라마를관음(觀音)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따르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의14대 다라이라마는 중국 지배에 항거하고, 1959년 측근들과 함께 인도로 탈출하여망명 정권을 이루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 방문 문제로 중국과의 외교적인 마찰을빚기도 하였습니다. 원나라에서는 어느 유목사회와 마찬가지로 주술적인미신이 강하여, 모든 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마교가 각종궁중의식에 적용됨으로서 국교화하였고 전몽고인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라마교에대한 국가적 우대는 "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욕을 하는 자는그 혀를 자른다"는 법령까지 만들게 되자, 라마승들은 이를 이용하여 불교를박해하고, 사원 건립과 불사(佛事)에 과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등 그 부작용 또한심각했다고 합니다. 나. 원 제국과 고려와의 관계 (1) 고려왕조의 명암 원이 중국을 지배한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약 90년간, 고려에서는 원종에서부터 공민왕의 치세기간이 됩니다. 원종 이후 고려왕의 묘호(廟號)에는 祖나 宗이 사라지고, 충(忠)자를 앞에 붙인 왕이라 부르기 시작하는데,충렬왕(1275-1308), 충선왕(1308-1313), 충숙왕(1313-1330, 1332-1339), 충혜왕(1330-1332,1339-1344), 충목왕(1344-1348), 충정왕(1348-1351) 등이 이들로서, 재위기간이 둘로나온 것도 있습니다. 충(忠)은 누구에게든 충성했다는 것인데, 왕조사회에서임금이 신하에게 충성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금이 충성을 했다면, 그보다 윗자리의대상이 있어야 되겠지요. 몽고와 화의가 성립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했을때(1270), 거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붙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 왕의정비(正妃)는 원의 공주(公主)라야 한다는 것이었고,...이래서 고려의 왕실은 몽고의혈통이 뿌리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려사(高麗史)을 이야기할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918)34대 공양왕까지(1392) 475년간 지속하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산술적인 수자에 불과하고,사실상의 왕조교체는 사정에 따라 여러 차례 변동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의 변동은거란과 북송이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게 망했을 때(1125 / 1127), 고려에서는 이자겸의난(1126)과 묘청의 난(1135)이 일어납니다.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고 왕권은 회복되었다고는하지만, 곧 이어 무신정변(1170)으로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완전히 해체되고, 최씨무신집권시대(1196-1259)를마지합니다. 이 시기에 몽고의 1차 침입을 받았고(1231), 강화(講和)가성립되었으나, 몽고가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자, 정권유지에 불안을느낀 최우는 몽고와의 강화를 깨고 강화(江華)도로 천도하여 항몽을 결의합니다.부처님의 영험(靈驗)으로 병란(兵亂)을 막고자, 그 어려운 중에서도 16년간(1236-1251)의긴 세월을 정성 모아 대장경을 조판했지만, 수 차에 걸친 몽고의 침입은 이런 소망도아랑곳 없이, 찬란했던 고려청자가 이때부터 맥이 끊어지기 시작하였고, 무신정권도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대장경은 고려대장경(8만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이 때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이 였던 삼별초가 신분의불안을 느껴 조직적으로 항거하였으나, 진압되었고(1273), 몽고는 국호를 원이라고치고, 고려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다른 정복지에서 했던 것처럼, 사람을죽여 머리로 피라미드를 싸고, 귀를 잘라 포대에 담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고려에 대해서 가혹한 요구와 만행을 저질렀던 것은 사실입니다. (2) 원의 고려 지배 이시기에 나타난 용어들을 중심으로 풀어보면, 고려는원의 부마(駙馬)국이 되었다고 하는데, 부마란 왕의 사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려왕은 원 왕실의 사위라는 것이지요. 1258년 최의가 주살(誅殺) 됨으로서 최씨무신정권은무너지고, 왕권이 회복되어 몽고와의 관계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나 태자를 몽고에입조(入朝)케 하였는데, 이에 태자 전( )은 40여명의 일행과 함께 몽고의 상도(上都)카이펑(開平)에 들어 갔습니다(1259) 이 때 몽고에서는 몽케가 죽고 쿠빌라이는 귀로에올라 북몽고로 돌아가던 길이 였는데, 여기서 태자 전을 만나 두터운 후대를 아끼지않았다고 합니다. 이듬해(1260) 태자 전이 부왕(고종)의 부음(訃音)을받고 귀로에 올랐을 때 쿠비라이칸은 부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귀로를 보살펴 주어무사히 귀국하여 원종(元宗)으로 즉위하고, 태자를 두 차례 몽고에 보내어 성의를표시하고 강화도에서 나오려고 하였으나, 무신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한 때 폐위되기까지 하였으나, 몽고의 개입으로 복위되어 다시 연경으로 들어갔다가 귀국하여 개경으로환도하였습니다(1270) 원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려는 태자(太子)를 격을 낮추어세자(世子)라고 불렀는데,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때 원의 수도 연경에서 머물었고,쿠빌라이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후 고려 왕실의 정비(正妃)는 반드시원의 공주를 마지해야 했으며, 공주의 소생이 왕위를 잇게 되는 것을 이때부터 법으로정하게 되었습니다. 몽고풍(蒙古風)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 봤을 줄 압니다.몽고의 풍속이 고려에서 유행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일품(?)이 호복(胡服)과변발( 髮)로서, 이것은 만몽(滿蒙)계 북방민들의 옷 모양과 머리털을 처리하는 모습을두고 일컫는 말인데, 몽고족은 머리 한가운데를 고속도로처럼 밀어버리고, 양 옆의머리를 길게 길러, 양귀 밑으로 두 갈래로 땋아 늘였는데 이를 개체(開剃)변발이라고하고, 만주(여진)족은 앞 머리와 옆 머리카락을 자르고 뒤통수의 머리카락만 남겨서한 줄로 길게 땋아 늘어 뜰였는데 이를 체두(剃頭)변발이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은장발(長髮), 선비족은 삭두(削頭)라 하여 머리를 빡빡 밀었고, 한(韓)족은 어려서는댕기머리, 성인이 되면 상투를 틀었습니다. 충렬왕이 연경에서 즉위하고 원의 공주와 함께 고려에귀국했을 때, 호복과 개체변발을 하고 나타나 조정의 신하들이 비애를 금치 못하고소리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신하들 중에서도 호복과 변발을 쫓는 자가늘어나, 일반화하기 시작하다가 공민왕 때 반원정책으로 변발은 사라졌지만 복식과언어에서는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몽고식 이름. 말 끝에 붙인 치(赤 :이치, 저치, 장사치, 양아치 ), 임금의 진지상인 수라(水刺), 절다말(赤馬)과 가라말(黑馬)등의 말 이름 등은 그 후에도 오래동안 사용되었고, 조선후기까지 관리들의 평상집무복인단령(團領), 무신들이 비올 때 신는 수화자(水靴子), 남자의 소매 좁은 저고리인착수(窄袖), 가랭이가 좁은 홀태바지, 여자의 머리에 얹는 족두리, 옷고름에 차는장도(粧刀), 얼굴에 찍는 연지 등등이 몽고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몽고풍에 대칭해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것이 있었는데,고려의 의복, 신발, 모자, 음식(떡) 등이 원나라에 전해진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두 나라 사이에 문물의 교류가 빈번했던 것은 양국 왕실간의 혼인, 사절, 상인 등의내왕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런 것과 관계없이 몽고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 혹은원의 왕실에 아부하기 위해서 끌려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되는것이 이른바 공녀(貢女)였습니다. 공녀(貢女)란 치욕의 역사가 남긴 산물임에는 틀림없고,다시 기억하기 싫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겠지만, 이것은 고려후기에 시작하여 조선왕조중종때 까지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몽고가 저고여 피살사건(1225) 이후, 이를구실로 고려에 침입하여, 항복 조건으로 고려의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씩을바치라고 한 것이 그 효시(嚆矢)가 되었고, 원(元)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1271),계속해서 고려에 공녀를 요구하였는데, 이로부터 고려는 원의 왕실과, 귀족·고관이요구하는 여자의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여자뿐만 아니라, 멀쩡한 남자를 거세(去勢)한 환자(宦者)도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이로 인한 고려의 풍속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하여, 조혼(早婚)이유행하였고, 결혼도감(結婚都監) 또는 과부처녀 추고별감(推考別監)이라는 회한한관청이 등장했으며, 1274년 3월 원나라는 만자매빙사(蠻子媒聘使)라는 듣도 보도못했던 사신이 명주 1640단을 가지고 와서 여자 140명을 내 놓으라고 욱박 질렀습니다.이에 고려에서는 역적의 처나 파계한 승려의 딸 민간의 독녀(獨女) 등으로 이 무리한요구를 매워 나갔는데, 만자란 중국 남송 치하의 강남인들로서, 이들을 결혼시켜주기 위해서 사절까지 보낸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그 대가로 1인당 명주 12필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공녀 요구는 계속되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궁녀가 되었거나, 황제나 후비(后妃)의 심부름꾼으로 배치되었는데, 그 중 기황후라고부르는 기자오(奇子敖)의 딸은 순제의 제 2황후가 되어 그 영광이 친정에까지 미쳐서,그의 오라버니 기철은 고려후기 대표적인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되어, 정치에 많은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의 여자들이 원나라의 왕실에 가득 하자 이것이 고려풍(高麗風)이라는유행을 만들었고,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귀족·고관으로서의 체면이 서는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녀의 폐습(弊習)은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원나라에 대한 공녀는 끝났지만, 원을 대신한 명나라에서도 공녀를 요구해왔습니다.그리하여 고려를 멸하고(1392),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에서도 명나라에 공녀를 바쳤는데,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의 경우 한비(韓妃)는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았고, 석비(碩妃)는영락제(永樂帝)를 낳았는데, 이들이 모두 조선의 공녀들이 였으며, 석비가 낳은 영락제는처음 연왕이 되어 베이징에 주둔해 있다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난징을 점령하고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자기의 본거지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20년간의 공사기간을거쳐 거대한 자금성(紫禁城)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공녀를 보내기도 하고 중단하기도 하였으나,1521년(중종 16) 명나라에서 세종 가정제가 즉위하자, 조선에서는 하등극사(賀登極使)라는축하사절을 보내면서 공녀의 철폐를 요구하였고, 명나라에서도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못하여 이를 허락하므로써, 300 여 년 간 각가지 애환과 사연을 남겼던 공녀 문제는공식적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다. 성리학(性理學)의 전래 (1) 원으로부터 전래된 문물들 원의 고려지배가 궁극적으로 고려에 많은 부담을 주었고,자주성과 영토의 상실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지만, 이러한 외압을 당할 때 마다역사라는 기록은 두 가지 부류의 유형(類型)을 등장시킵니다. 원에 적극 협력하여일신의 영달을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에 항거했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습니다.누가 옳았고 글렀는가는 하기 좋은 말로 역사가 심판한다고 우기지만, 그 역사의심판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를 요즘 말로 시대마다 이데올르기가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의 영향하에서 이른바 혜택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는,딸이나 누이, 아들이나 형제를 공녀나 환관으로 보내어 출세(?)한 사람도 있었고,몽고인들이 매 사냥을 좋아하자,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그들의 매 수요를충당 시켜주고 비위를 맞추기도 하였고, 개인적으로 매(鷹)를 사냥용으로 길들여이를 원나라의 유력자에게 바쳐서 출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들여 사냥용으로쓰인 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방 유목민들이 육로(陸路)로한반도로 들어 올때는 압록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대개는 강물이 얼음으로 변하는겨울철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하(山河)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속도로가시원하게 뚫린 지금과는 달라서 길이 여간 복잡한게 아닙니다. 낯 설은 외지인, 특히나언어와 풍속이 다른 이방인이 이정표(里程標) 하나 없는 길을 찾기란 더욱 힘든 것은자명한 이치고, 길을 잘 아는 현지인을 안내자로 삼아야 하는데, 그 안내자 역할은내국인이 적격이겠지요. 물론 이들이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반역자가 되겠지만 침략자의입장에서는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에게 협력해서 출세한 사람도 많았다고합니다. 대개 이런 부류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기시작하면 무서운 세상이 됩니다.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이들의 교만은 하찮은 서민을사람으로 대접할 리도 없고, 서민들의 재산을 마구 약탈해서 재산을 불리고 지배층을형성하였는데, 이들을 통칭해서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고 교과서에서는 기록하고있습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서 고통받는 것은 서민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마찬가지가됩니다. 그래도 지식인들은 붓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는데 이들이 직접 권문세족의잘못을 욕할 수는 없고, 전설이나 신화 등을 원용해서 우회적으로 권문세족들을 풍자하고비난했는데, 이런 것을 패관(稗官)문학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문운(文運)이 맥을 이어 간 것은,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의 외손(外孫)으로서 학문을 매우 좋아해서, 연경에 만권당을짓고 고려의 이제현을 비롯한 조맹부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交遊)하며 서사(書史)를토론했고, 원의 조정에서도 많은 서책을 하사하였으며,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고려의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문학과 의학, 농학 등의 실질적인학문과 목화의 전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성리학의 전래는 새로운 사상체계를만들어 이념세계에도 일대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2) 성리학(性理學) 정주학(程朱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송학(宋學),혹은 주자학(朱子學) 등으로 불리고 있는 성리학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막상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용어가 가미되면서,알 듯 말 듯 한 용어들이 수없이 나오고, 이 학문의 원조(元祖)는 중국의 송나라지만,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과되면서 줄여진 것이 아니라 많은 내용이 다시 추가되어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비단 성리학만이 아니라 사상이나 학문, 법령, 종교,의례 등 외래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원주지에서 보다 훨씬 까다로워 지고 복잡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소화하고 감당하지 못하면,대충 넘기는 습성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유학이라고 하면 4서(論語, 孟子, 大學, 中庸)와 5경(詩,書, 易經과 春秋 및 禮記)의 내용을 익히고 실천하는 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漢·唐 시대에는 훈고학이라 하여, 字句의 해석에 주력하여, 스승의 학설을고수하고 전하는 문헌적·해석적인 고전(古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성리학은 4서를 통하여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려는 학문이라고 정의를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 학풍이 북송시대부터 나타난 중앙집권적인 독재군주권을옹호하고, 관료주의를 합리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민족이 중국을 침입하고지배하게 되자, 중화(中華)의 자존심과 대의(大義)와 명분론(名分論)으로 학문적인체계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성리학의 출발은 북송 인종 때의 주돈이(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비롯되는데, 그의 설에 따르면 우주의 본체는 태극(근원)인 동시에 빛도 소리도 냄새도형체도 없는 무극(無極/ 무한, 무량, 무형)으로, 아무런 차별도 없으나, 이것이 움직이면양(陽), 정지해 있으면 음(陰)이 되어, 음양(陰陽)이라는 두 가지 기운(이기/二氣)이생기고, 움직이고 정지하는 음양의 조화에서 다시 수(水), 목(木), 화(火), 토(土),금(金)의다섯 원소가 발생, 그것이 오행(五行)이며, 이 음양 오행의 정(精)이 합하여 인간남녀 양성(兩性)을 비롯한 만물(萬物)이 형성되는데, 만물 중에 가장 고귀하고 뛰어난기(氣)를 타고 태어난 것이 인간의 양성, 즉 남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순수하고 선한 것으로써, 이러한 선한경지를 성(誠)으로 표현하고, 우주의 본체는 태극이고, 인간의 본성은 성(誠)이며,성을 다한 사람이 성인이 되고, 인간에게는 5행에서 파생한 5성이 있는데, 이것이오상(五常)으로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이며, 인간의 육체는외물(外物)과 접촉할 때, 이 오성이 감동하여 선악(善惡)의 구별하고, 외물과접촉이 없으면 선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나, 오성이 감동할 때 악(惡)이 생기는것은 욕심(慾心)때문으로 인간은 무욕(無慾)을 본의(本意)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하였습니다. 주렴계의 제자로서 정호(程顥/明道)와 정이(程 이/伊川)형제가 이 학설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정이천은 우주를 2원적으로 관찰, 우주간에있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理와 물질적인 氣로 보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창하였습니다.그의 학설에 의하면, 기(氣)에 의해서 만물은 형(形)이 생기고, 이(理) 역시 형이있는 곳에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理)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선한 것이나, 인간의 기질은 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선이라고할 수 없다고 하여 인간 기질의 성에는 선악의 구별이 있음을 말하고, 청기(淸氣)을받은 기질은 선이며, 탁기(濁氣)를 받은 기질은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이천 사상의 특색은 성즉이(性卽理) 재적기(才卽氣)의2원론에 두고 있는데, 기는 이의 형태를 빌린 것에 불과하므로 함양(涵養)과 진학(進學)에의해서 기질이 나쁜 점을 고쳐 선한 길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함양이라 함은 경(敬)을지니는 것을 말하고, 사물에 일관하는 원리 원칙을 옳게 파악하는 치지(致知)를 역설하였는데,일사(一事) 일물(一物)에도 모두 일리(一理)가 있으니 이 일사 일물을 깨치면 마침내만사 만물의 도리에 통하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이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서 학문적으로완성되었는데.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존재하는 것으로 보았고,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하였습니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기에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선악을 인정하려 하였습니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것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용이 어렵지요, 내 방식대로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광대무변한 우주란 있는 동시에 또한 없는 것으로서, 이것이 태극이고, 이 태극의動과 靜에 따라서 양과 음이 생기는데, 보이는 것은 양, 숨은 것은 음, 다시 태양은양 달은 음, 땅은 양 바다는 음, 오르막은 양 내리막은 음,.....이런 식으로 삼라만상을풀었고, 이 삼라만상의 생성소멸을 수 목 화 토 금이라는 다섯 개의 원소를 가지고설명하였는데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에 대해서 선악을 구분짓고자 하였습니다. 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두고 풀이를 했다는 것이지요.예의와 범절, 분수를 지키는 것이 인간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짐승이라고 보았습니다.그러면 다시 예의는 무엇이고, 범절과 분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것을 理와 氣를 두고,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우주생성에는 의미의 세계와 실체의 세계가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이 있는 것과 같이, 소우주인 인간에게도 육체라는 보이는 형상(氣/행위,행동)과, 이 육체를조절 운용하는 마음(理/억제,자제)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것인데,어떻게 보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논란과도 비슷하나, 우리들이 흔히듣는 말 가운데,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지,...돈만 있으면최고냐, 마음을 옳게 써야지 사람이지,...여기에서 마음도 곱고(예절도 바르고) 얼굴도 예쁘면(심성도 바르면) 성인,마음이 고우면 군자, 얼굴만 예쁘면 범인, 둘 다 나쁘면 짐승(오랑캐), 절대적인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런 식으로 설명된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길을 갈 때, 다리가 아파서 말을 타고 갔다면,말을 타자고 충동질 한 것은 누구고 실제로 말을 탄 것은 또 누구냐는 것입니다.말을 타자고 한 것은 아픈 다리겠지요. 아프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고, 그리고말을 탄 것은 육신이 될 것이고,....이렇게 보면 정신세계를 理, 힘의 원천을 氣라고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며, 반대로 마음이 즐거우면 육신도 즐겁고 육신의즐거움은 마음의 즐거움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 이것은가능하고, 오랑캐는 즐거움만 추구하다 보니(마음이 행동을 누르지 못하니) 예절을 모르고 따라서 짐승과 다를 것이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名分論이라고도 합니다. 주자는 이런 명분론의 입장에서 4서를 해석하고 그주해(註解)를 달았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인간의 통과의례를 엄격히 하여각자의 분수를 지킴으로서 인간사회의 조화로운 질서가 유지된다고 보고, 주문공가례(주자가례)라는일종의 생활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다분히 봉건적인 신분질서와 그 한계를 강조하였다고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고려 말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고,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이루게 되었으며, 침체에 빠진 불교를 대신해서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되었습니다.그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지도적인 이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였는데,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이때 이미 중국에서는성리학이 자취를 감추던 시기였는데, 조선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에의해서 다시 정리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여, 이른바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을 펼치기 시작하였는데,...다시 내면적 도덕원리인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예설(禮說)로 발전하였고, 예절을 모르면 금수보다 못하다 하여 세세한 면까지 서민생활을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얽어 매었는데...주자가례에서 밝힌 관혼상제 중 관례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혼례도 현대화되어 특이한 예식장문화로 변질되었으며, 상례도 간소화되어차츰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 남은 제례(제사)가 곧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해도복잡하고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성리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3년거상(居喪)과 시묘(侍墓)살이는 고사하고, 도로가 자동차로 막혀 몇 시간을 차안에서보내면서 까지, 그래도 지금은 고향을 찾아 조상의 설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이것이언제까지 계속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다음 이야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