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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세력을 증오했던 백범김구선생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들라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장본인 사카모도 료마를 든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이순신 장군과 김구(1876-1949) 선생을 든다.
지난 해에도 한 일간지에서 실시하였던 여론조사에서 다음 같이 물었다.
"이 민족의 진정한, 위대한 지도자로서 추앙받는 인물이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란 답이 제일 많았다.
우리는 김구선생을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선생의 민족주의는 요즘 학생들에게 유행하는 좌익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선생의 민족주의는 세계를 향하여 활짝 '열린 민족주의'였다. 선생의 민족주의는 세계를 품는 우익 민족주의였지 좁은 테두리에 갇힌 좌익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方略)으로 무력투쟁을 선택하였으면서도 근본에 있어서는 평화주의자였고 문화주의자였다.
"....그런데 또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 운동보다 민족 독립 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 독립 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 독립 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 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 독립당 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 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 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예 하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 아버지 죽이는 회 - 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남군정서(南軍政署), 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백광운(白狂雲), 김좌진(金佐鎭), 김규식(金奎植)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백범일지 中-
이 내용들은 마땅히 교과서에 수록되어져야할 내용들이지만, 현 전교조 좌익체제에서는 절대 수록될 수 없는 백범일지 내용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이 아닌, 오로지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위해 일제와 싸운 좌익세력들을 결코 용납한 적이 없다.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까지 지냈지만, 고려 공산당(高麗共産黨)을 돕고 이승만, 안창호 등과 대립하다 해임된 이동휘만 봐도 그렇다.
그동안 전교조는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가 중에는 좌파 사회주의 세력들이 많았다고 가르쳤다. 물론 필자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이 땅의 진정한 애국자들은 결코 좌익세력들을 좋아한 적이 없다.
진정한 우파, 백범김구선생
김구선생은 정치가요, 혁명가요, 교육자요, 문화주의자였다. 우리는 선생을 존경한다면서도 실상은 잘 모르고 있다. 흔히 김구선생을 독립투사로서나 혁명가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면만이 아닌 선생의 교육자적인 바탕 역시 이해하여야 한다.
나는 최근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면서 뉴라이트 운동의 사상적 계보를 살피면서 김구 선생을 중심에 모시게 되었다.
선생의 삶과 사상, 실천과 비전이 뉴라이트 정신과 운동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라 할 때의 백범(白凡)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란 뜻을 지닌 김구 선생의 호이다. 이 호는 김구 선생께서 스스로 지은 호인데 자신은 이 땅에 와서 살다간 숱한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평범한 사람 즉 민초(民草)로 살다 가겠다는 다짐으로 그렇게 지었다고 전해진다.
김삼웅 교수가 펴낸 『백범 김구 평전』의 서문에서 저자는 다음 같이 쓰고 있다.
"구한말에서 8.15해방에 이르기까지 평민 출신이, 평민 의식으로 백성과 민족을 위해 몸을 던져 헌신한 지도자는 흔치 않았다. 백범은 태어날 대부터 상민(常民)의 가정에서 상민으로 출생하고 상민의 삶을 사는 상민이었다. 신분 질서가 무너져 가는 시기이기는 했지만 반상의 위계가 엄존하는 사회에서 상민이 국가 주석이 된 것은 백범이 처음이다. 그것도 변칙이나 책략이 아니라 '받들려서' 그 위치에 올랐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신하다운 신하'가 다산 정약용이었다면 망국에서 식민시대 ,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가장 평민다운 평민은 백범일 것이다."
백범의 삶을 살핌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이 그의 일관된 정도론(正道論)이었다. 그는 70평생을 왕조시대, 망국, 독립운동, 임시정부, 해방, 분단, 신탁통치, 건국에 이르기까지 험난하였던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우직스럽게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려 애썼다. 선생이 해방 후 중국에서 귀국하신 후 통일 정부수립을 위하여 노심초사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며 곁에서 선생을 아끼는 분들이 통일 정부 수립이 불가능함을 충고할 때에 선생께서 다음 같이 말하였다.
"
87년 전인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만세운동이 실패로 끝이 나자 이 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 지도자들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출발 하였다. 그날이 만세운동이 일어 난지 불과 40일이 지난 4월 10일 이었다.
그때 백범은 신민회 사건으로 오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백범도 중국으로 망명키로 결심을 하고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때의 사정을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다음같이 쓰고 있다.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백범은 치밀한 출국작전에 성공하여 4월 13일에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5백여명의 동지들이 모여 있었고 임시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임시정부에는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와서 국무총리격인 내무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도산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며 다음같이 말했다.
"내가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번 우리 정부의 청정(聽政)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백범의 청원을 받아들인 도산은 국무회의를 열고 그를 경무국장직에 임명하였다.
이에 백범이 나는 순사될 자격도 못되는 사람이거늘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이 이르기를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 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行公)하라."고 강권하여 백범은 부득이 취임하였노라고 싣고 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백범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임시정부 일을 보고 있을 때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조선에서 나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었던 백범이었던지라, 가정생활이 곤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백범의 어머니는 이미 환갑이 넘은 연세였으나 중국인들의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배춧잎을 주워서 반찬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번은 노모의 생일을 맞았을 때다. 독립 운동가들이 푼푼이 거둬 노모의 생일잔치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백범의 어머니께서 그 돈을 자기에게 주면 입에 맞는 음식을 사다 먹겠노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거둬들인 돈을 노모께 드렸다. 그랬더니 막상 생일이 되자 노모는 음식 대신 권총 두 자루를 내 놓으시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잔치가 다 무엇이냐?"
1945년 11월 28일 백범이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하였다.
"제가 외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서대문형무소에 15년 형기를 받고 갇혀 있을 때에 어머님과 내 안해(아내)는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 밖에 없는 면회를 하기 위하여 서울 와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성경말씀으로 늘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때 어머님께서 면회 오실 때마다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조(자주) 오지 못할찌라도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늘 위로해 주지 못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늘 위로해 주시리라. 부디 늘 기도하는 중에 지내여라."
이렇게 말씀해주시곤 할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마음에 든든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평범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이 있다.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꼭 합당한 표현인듯 싶다.
앞에서 두 차례에 걸쳐 김구선생의 어머니에 대하여 소개한 바이거니와 어머니들의 위대함은 비단 백범의 어머니만의 위대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인 고은(高銀)이 백범의 어머니를 제목으로 삼아 한 편의 시를 썼다. '곽난정'이란 제목의 시이다.
물론 낫 놓고 기역자 알 리 없는
황해도 텃골 군역전 부쳐 먹는 쌍놈의 집 아낙입니다.
그런 아낙이 제 자식 창수가
대동강 치하포 나루에서 왜놈 한 놈 때려죽이고
물 건너 인천 감리역 옥에 갇히니
초가삼간 다 못질해버리고
옥바라지 객주집 식모살이, 침모 살이 해가며
차꼬 물린 살인죄 자식 면회 가서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
이렇게 힘찬 말 했습니다.
몇십년 뒤 여든 살 바라보는 백발노모
중국에 건너와
낙양군관학교 사람들이 생신날 축하하려고
돈 몇 푼씩 걷는 걸 알고
그 돈 미리 받아내어
생신날 단총 두 자루 내놓으며
자네들 걷은 돈으로 샀으니
내 생일 축하의 뜻으로 이 총 쏴
부디 부디 독립운동 이루어주시게
그 뒤 그녀는 여든 두 살로 중경 땅에서 눈감았습니다.
나라 독립 못 보고 죽는 것 원통하다
이 말이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 아니고 무엇입니까.
백범의 '나의 소원'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압제에서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이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을 아무도 예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바로 남북 분단의 비극이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국정 간섭이다.
해방 후 중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새 나라를 건설하겠노라는 큰 꿈을 품고 귀국한 독립 운동가들이 부딪힌 현실은 그들을 좌절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어른이 백범이다. 망명지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키느라 뼈를 깎는 고통의 세월을 조국 광복이란 하나의 목표로 인하여 견뎌 왔다. 그러나 광복 후 그들이 부딪힌 현실은 너무나 참담하였다.
조국은 이데올로기를 따라, 강대국들의 이익을 따라 분열되고 해방 정국은 다툼으로 날셀 줄 모르는 나날이었다. 거기에다 기라성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테러로 인하여 하나 하나씩 쓰러져 갔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백범은 '나의 염원(念願)'이란 글을 남겼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할 것이요 .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요즘 들어 세계화란 말이 보편화 되면서 민족정기나 민족정신 내지 민족의식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증상은 공부하였다는 소위 식자(識者)들 중에 더 심한듯하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듯이 민족의식 없는 지식이나 운동 역시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민족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주의자임을 스스로 밝힌다.
백범의 민족정신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두드러진다. 백범은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민족에 대하여 다음같이 쓰고 있다.
"나는 공자, 석가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지옥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 진데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이니 만큼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통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진리권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 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 어느 민족 내에서나, 종교로나, 정치적 경제적 이해의 충돌로 두파, 세파로 갈라져 피로써 싸우는 일이 있거니와 지나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뉴라이트 운동에는 세 가지 사상적인 뿌리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와 공동체주의이다. 도산 선생이나 백범 선생 같은 선배들이 주장하였던 인류와 세계를 향하여 열린 민족주의가 뉴라이트의 민족주의이다.
백범의 열린 민족주의 정신
지난 날 일본이 펼치려 하였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지배하려는 민족주의였다. 중국이 내세워온 민족주의는 자기들이 중심에 서려는 민족주의이다. 그래서 패권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백범이 생각한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민족주의였고, 문화의 힘으로 세계에 앞장서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나의 소원》 중에서 '민족국가'를 논하는 항목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아직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으므로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일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 볼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 모두가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에 낙을 삼기를 희망한다."
백범의 이런 글을 읽을 때면 그 어른의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느끼게 된다. 요즘 같이 생각들이 좁아지고 궁색하여진 때에 백범의 이런 글을 읽고 넓은 생각에 접할 수 있는 자체가 신선한 도전이 된다.
백범은 우리 민족이 미래의 세계 문화를 이끄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오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序曲)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희랍민족이나 로마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의 신봉자 백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즈음 세계는 양 진영으로 갈라졌다. 민주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그 시절 새롭게 독립하여 나라를 꾸리게 된 지도자들에게는 민주주의 보다는 사회주의 쪽이 훨씬 매력이 있어 보이던 때였다. 그래서 많은 신생 독립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택하였다. 그래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점에서는 현명한 지도자들을 만난 셈이다 해방 정국의 양대 지도자였던 이승만도 김구도 둘 다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지도자들과 두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양 대 세력들 간에 이승만 세력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긴 하였지만 김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도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범은 앞에서 소개한 글, 《나의 소원》 중에서 '정치 이념'을 논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정치 이념에 대하여 다음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교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을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런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는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을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온다. 일, 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혹은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백범의 민주주의 사상
백범이 남긴 연설과 글을 읽어보면 그가 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가 보편화 되지 못하였던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대하여 놀라움과 존경심을 표하게 된다. 앞에 글에서도 언급한 바이거니와 해방 정국의 그 극심하였던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 양 거두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확신을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우리들 후손들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혜택이라 하겠다.
백범이 《나의 소원》에서 쓴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살펴 보자.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길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나는 백범의 글 중에서 이런 부분을 읽을 때면 마음속으로 감탄을 하게 된다. "정치에 있어 가장 좋은 길은 가만 두는 길이다." 이런 부분이 얼마나 탁월한 생각인가?
뉴라이트 운동은 철저하게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추구한다. 작은 정부란 다름 아니라 백성들에 대하여 최소한의 간섭을 하는 정부를 일컫는다. 모든 민간 부분이 자율적인 원리와 질서로 물 흐르듯이 나라가 유지되어가게 하자는 생각이 뉴라이트의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백범의 생각은 뉴라이트의 입장과 일치 된다.
문화와 교육에 대한 백범의 생각
백범은 제도 교육을 받지 않은 분이다. 이승만 박사가 세계의 명문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까지 받은 최고의 지적 엘리트였음에 비하여 백범은 교육이라고는 고작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정도의 무학(無學)에 가까운 분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과 경륜의 깊이는 여느 교육을 받은 분에 비해 두드러진 바였다. 백범의 그런 생각과 경륜 중에 교육과 문화에 대한 생각이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백범의 《나의 소원》이란 글 중에서 민주주의와 교육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자.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지 그 내용은 아니다.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대한 복종 이들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그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 있는 것이니,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의 국론을 움직이려면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야 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서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를 보더라도, 홍문관(
written by Gedeon
첫댓글 제아무리 사상이 뛰어나고 진정한 애국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좌우 분변없이 행동할수있기 마련입니다. 김구가 통일을 하고자 순진하게 김일성을 찾아갔던것을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우파들은 말하죠..김구가 대통령됐으면 나라 북한한테 넘어갔다고....입으로 애국하는거랑 시대를 읽어 애국하는거랑은 .....천지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