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경 전남 보안과 순사부장. 그후 경부보, 경부로 승진 ․해방 직전 경시 ․해방 직후 암살됨
● 암살된 친일경찰 간부
1945년 초가을 10월 말(음력 9월 9일, 노주봉의 기일은 9월 10일로 되어 있다) 반쯤 차오르는 달이 하늘에 떠 있을 때 광주 구시청 앞 부근에서 쾌청한 가을 공기를 가르고 세 발의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일제 식민지 지배의 최첨병이었던 총독부 경찰로서 전남 지역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경시(警視)까지 올랐던 노주봉이 암살된 것이다.
어떤 경로로 그렇게 쉽게 미군정에 의해 발탁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노주봉은 미군이 전남 지역에 진주하여 전남 미군정이 수립될 초기부터 미군정의 정책 실현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각 지방에 진주한 미군과 그것의 행정통치기구로서 성립된 미군정이 부딪혔던 가장 어려운 과제는 그들이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를 아무런 장애없이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해방 직후 각 지역에서는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고 일제하에서 끝까지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왔던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불과 해방된 지 며칠만에 자생적인 권력기구들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아래로부터 형성된 다양한 민중권력기구들을 토대로 하여 중앙에서 민족통일전선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조직되었다. 건준은 미군이 진주할 무렵이 되자 조선공산당 세력의 헤게모니 장악과 함께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자치를 주도하고 있었다. 치안 영역에 있어서도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치안대, 청년대, 학도대 등이 조직되어 일제 경찰서를 접수하였고, 건준 산하에 통합되어 치안 유지를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지역에서 자신들의 점령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빈 공간 속에서 통치구조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생적인 민중권력기구들을 타파해야만 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이를 위해 남한에 진주한 직후 즉시 일제 총독기구의 온존과 총독 관료들의 유임을 선포하였는데, 그것이 친일 세력의 청산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 직후의 혁명적 요구 속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주구 노륷을 하였던 친일경찰과 행정관료들이 거의 대부분 도피하였지만 미군정의 이러한 비호 속에 친일 세력들은 자신들의 직위에 복귀하여 예전보다 더 악랄하게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해방 직전 조선인들이 오를 수 있었던 일제 경찰 최고직인 경시까지 올랐던 노주봉 또한 일제의 항복선언 직후 도피해 있다가 기존의 치안대를 분쇄하고 미군정 경찰을 새롭게 조직하려는 미군정의 시급한 요구를 맡고 초기 미군정 경찰 요직에 복귀한 것이다.
● 미군정이 도경찰부장으로 발탁한 친일경찰
노주봉은 암살될 당시 미군정에 의해 전남 도경찰부장에 선임되어 자신의 친일경찰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전남 지역에서 미군정 경찰을 조직하고 있었으며 건준과 인민위원회 산하의 치안대를 파괴하기 위해 맹활약하고 있었다. 초기에 미군정은 중앙의 군정청 경무국에서 일사분란하게 각 도경찰부장을 임명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각 도경찰부가 도지사의 관할하에 있었던 기존의 총독부 경찰 체계를 각 주 단위로 경찰이 조직되어 있는 지방자치제하의 미국의 경찰 체계로 개편하려는 시행착오를 범하였기 때문에 각 지방에 진주한 미군 휘하의 각 도군정 장관과 지사에 의해 도경찰부장들이 선임되었다. 따라서 최초로 임명된 각 도경찰부장들은 도군정고문단의 추천을 받거나 청년단체 등의 후원으로 투표에 의해 뽑힌 이들이었으며,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조선 민중의 요구가 강했기 때문에 노주봉을 제외하고는 경찰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선임되었다. 물론 나중에 지방의 도군정이 중앙의 미군정청 산하로 중앙집권화되고 각 도군정 장관의 지휘하에 조직되었던 지방의 미군정 경찰들이 중앙의 경무국 산하에 통합되면서 친일경찰 간부들의 등용이 차차 더욱 노골화되었지만, 노주봉의 경우처럼 미군 진주 직후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발탁된 친일경찰 간부는 극히 드물었다.
미군정은 한국 내부의 혁명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핵심적 강제력으로 군정경찰의 조직에 맨 먼저 착수했으며 경찰의 양적 규모 또한 일제시대보다 엄청나게 비대화되었기 때문에 경찰 조직 초기에는 경찰 인원의 충원을 위해 이름 석 자만 쓰면 될 정도의 간단한 시험과 사상 검사를 위한 면접만으로도 경찰이 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조선인 도경찰부장의 재량권에 의해 특채되는 경우도 많았다.
노주봉이 암살되던 날, 그가 자신의 집이 가까운 으슥한 골목에 가까이 왔을 때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 “이번 경찰관 시험에 떨어진 사람인데 특채라도 해줄 용의가 없느냐”고 정중하게 물으면서 접근하였다. 노주봉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하여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응시해보라”고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골목 귀퉁이에 숨어 있던 두 청년이 나타나 권총을 꺼내 노주봉을 겨냥했으며 이내 총성이 들렸다. 세 청년들의 행동과 계획은 호위병이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민첩한 것이었기 때문에 노주봉은 그 자리에서 이마와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호위병 한 명도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세 청년은 어디론가 재빨리 사라졌고 노주봉은 곧 가족들에 의해 자신의 집으로 옮겨졌지만 말 한마디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세 명의 청년들은 김영일(金永一, 노주봉 암살 후 살인범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전쟁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암살됨), 정판국(鄭判國, 국회의원 역임, 작고), 김이현(金利鉉) 등으로 김영일과 김이현은 해방 직후 광주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결성되어 치안을 맡고 있던 대표적인 청년단체인 광주청년단〔단장 김석(金晳), 부단장 주봉식(朱奉植)〕의 행동대원이었고, 정판국은 조직의 성격면에 있어서 광주청년단과 비슷하지만 결성시기가 달랐던 화랑단의 단원이었다. 노주봉의 암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직후의 치안상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화랑단은 일제의 항복선언이 발표된 8월 15일 저녁 광주서중학교 강당에서 졸업생 1백여 명이 모여 광주학생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정부 수립에 협력하고 치안유지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화랑단은 처음에는 단원인 정영범의 집을 본부로 삼았으나 나중에는 광주서중 교사로 옮겨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 8월 18일 오전 10시에는 광주극장에서 광주청년단 결성식이 열렸고, 회장에 김석, 부단장에 주봉식이 선출되었다. 이들 청년단은 전남 지역에서 건준이 조직되자 건준 치안부장인 이덕우와 협의하여 건준 치안대의 활동을 맡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준 치안대장은 광주청년단 단장인 김석이 겸임하였고 부대장, 특무대장(나중에 노주봉 암살을 맡은 김이현)이 선출되었다. 치안대 본부는 당시 광주시 대인동 창평상회에 있었던 건준 사무실에 있었으며 광주청년단 사무실은 도청 앞 무덕전(현재의 상무관)에 있었다.
이들 청년단은 광주 지역의 각 경찰서를 접수하여 치안유지를 위해 건준 산하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미군이 광주에 진주했을 때 치안대의 이름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미군정의 기록에는 이들 청년단원들이 흰 셔츠를 입고 자신들을 맞이했다고 하여 ‘화이트 셔츠(White Shirt)단’이라고 적혀 있다(미군정 군정보고서 참조). 그런데 이들의 활동에 의해 친일경찰이 처벌된 경우는 노주봉 이전에도 벌써 두 번이나 있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화랑단은 맨 처음 할 일이 친일경찰에 대한 민족 심판이라고 생각하고, 1942년 2차 광주학생운동 때 서중 5학년이었던 기한도를 경양방죽에서 물고문으로 익사시킨 정아무개 형사 등 10여 명의 친일경찰들에 대해 재판을 열고 태형을 가했다.
또 1945년 9월 초순경에는 해방정국에서 적산 관리와 치안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던 광주청년단이 광주서중학교에서 해방기념 축하 운동회를 개최했는데 운동회가 끝날 무렵 교문을 나서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일제 때의 고등계 경찰인 강홍섭(姜洪燮)을 발견하고 집단구타해 현장에서 즉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은 진주 즉시 일체의 자생적 민중권력기구들을 불법화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광주에서도 자치적으로 치안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광주치안대와 청년단체들이 불법화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친일경찰들이 발각되기만 하면 린치를 당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지만, 미군정청의 이러한 정책이 발표되자 친일세력들은 각지에서 재준동하였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충성하였듯이 미군정에 충성하면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권력을 되찾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미군정이 친일세력들을 기용하여 자치적인 권력기구들이 일거에 와해될 리는 만무했으며 미군의 무장력과 친일세력에 의한 지배와 저항이라는 과정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노주봉에 대한 암살사건 또한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9월 25일 10시 전남 도경찰부 회의실에서는 미군정에 의해 발탁된 친일경찰들이 모여 치안대와 청년단의 활동을 저지하고 미군정 경찰의 권력을 확립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일제 때 전남에서 가장 높은 경시직을 맡은 노주봉을 전남경찰위원장(미군정의 경찰위원제도 도입에 따른 도경찰부장의 명칭)에 추대했다. 또 이들은 치안대와 청년단체들이 치안유지라는 이름하에 일본인에게 행패를 가하고 일본인의 재산을 점탈하고 있으며 경찰에 린치를 가하고 있다고 미군정청에 보고하고 치안대와 청년단체의 해산을 강력히 주장했다.
해방 후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며 치안확보에 전념하고 있었던 광주치안대는 친일경찰들의 이러한 작태와 미군정의 정책에 분개하였으며 친일경찰들로 구성된 도경찰과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노주봉이 암살되던 날 당시 친일경찰과 미군정 전남 도경찰 조직의 움직임에 대한 정찰을 맡고 있었던 치안대 특무대원 정판국은 광주청년단 본부에 들러 이제는 도경찰이 된 친일경찰들의 그러한 작태를 보고하였고, 특히 노주봉의 지휘하에 건준치안대, 화랑단, 청년단의 해산 계획이 주도면밀하게 짜여져 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듣고 광주청년단의 부단장인 주봉식은 미군정이 자치저인 치안대를 불법화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 분노하였으며, 청년단 본부 건너편에 위치한 전남 도경찰부 청사에 친일경찰들이 모여 밤늦게까지 치안대와 청년단을 분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신들의 죄상에 대한 반성은커녕 악질적인 책동을 꾸미고 있는 것을 보고 울분을 터뜨렸다(전남일보사, 《광복30년》1, 48~49쪽 참조), 노주봉의 암살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던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미군정은 노주봉의 사망 직후 미군정청 포고령 2호 위반 혐의로 광주청년단 단장인 김석과 부단장 주봉식을 체포하였고, 암살을 맡았던 김영일과 정판국을 살인 혐의로 구속, 수감시켰다. 김이현은 도피 생활을 하던 중 1948년 6월 서울에서 체포되었으나 정부 수립직후인 같은 해 9월 2일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 8개 단체의 진정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고 정판국과 함께 석방되었다. 광주청년단 부단장인 주봉식은 1947년 7월 8일 미군정 재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았다.
● 학생들에게 유난히 잔인했던 악명높은 고문기술자
그러면 과연 해방 직후 청년단과 치안대의 계획적인 처단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노주봉의 친일 죄상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식민지시대 후반기에 전남 지역의 조선 민중들과 독립운동자에게 ‘노 경부’로 알려진 노주봉의 본명은 노주현(盧周鉉)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주봉(周鳳)이란 이름은 그의 자(字)이다. 조선 《총독부 전라남도 직원록》에도 그의 이름은 노주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집안 문중에서는 덕망있는 인물로 존경받았던(노주봉은 자신의 문중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각별하여 일제시대에 족보 편찬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풍천 노씨’ 문중의 족보편찬 사업을 하여 문중 사람들의 촉망을 받기도 하였고, 자신이 축적한 부를 호남지역의 남종화에 탁월한 동양화가들 -의제 허백련도 그 중 한 명이다-을 위해 오랫동안 후원할 정도로 유림 풍류객의 면모도 보였다) 노주봉은 1901년 그의 10대조가 이주해온 전남 나주에서 아버지 노재승(盧在昇)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그 후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대 중반 무렵을 전후하여 경찰관 시험에 합격하여 경찰에 발을 들여놓았고 《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1927년 당시에는 전라남도경찰부 보안과의 순사부장으로 승진하였는데 그 당시 보안과장을 지냈던 구자경(具滋璟)을 제외하고는 보안과에 근무하는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제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게 된 것은 광주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수사, 고문하면서부터였다. 노주봉은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수사를 담당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전남 지역에서 독립운동자들의 색출과 수사에 악명을 날렸고, 사상관계 사건을 전담하면서 경부보(이기홍 옹의 증언에 의하면 노주봉은 경부보가 되면서 고등계로 배치되었다고 함)와 경부로 승진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경시(해방 직전 조선 전체를 통틀어 조선인으로서 경시를 지낸 자는 21명뿐임)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노주봉은 반민특위 활동이 있기 전에 암살되었기 때문에 그가 계속하여 보안과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는지 고등경찰과로 옮겨 활동하였는지, 또 고등경찰과로 옮겼다면 그 시기가 언제인지에 관한 분명한 조사 기록을 구할 수가 없고, 그의 직위와 담당부서 이동을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증언자 김이현은 해방 직전 노주봉이 특고과 과장을 지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음). 그의 친일 죄상 또한 일제하 전남 지역에서 학생운동을 하였거나 독립운동을 하였던 인물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살펴볼 수밖에 없으므로 실제의 그의 친일행적보다 축소될 여지가 크다고 하겠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혐의로 노주봉에게 수사와 취조를 당했던 증언자들에 의하면 노주봉은 특히 학생들에게 원인 모를 적개심을 품고 가장 잔인하게 다루었던 친일경찰이라고 한다. 미군정이 진주하여 전남 군정경찰의 조직에 영향을 미쳤던 경찰 간부들로는 미군 진주 초기에 군정청 경찰위원에 임명된 노주봉, 김의택(金義澤), 김정택(金正澤), 홍용구(洪鎔球), 조희인(曺熙仁) 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노주봉은 학생들을 고문, 취조하는 방법이 가장 악랄하였고 사건을 억지로 엮어 만드는 데에도 수완이 뛰어났다.
노주봉이 맡았던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건으로는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들간의 충돌을 계기로 발생하였던 광주학생운동, 1932년 전남노농협의회 사건, 1934년의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1942년의 무등회 사건과 제2차 광주학생운동 등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색출과 탄압에 수완을 인정받고 있었던 노주봉은 고흥군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던 중에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터지고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광주에 자리하고 있는 전남도경찰부로 발탁되었다. 나주역에서의 한일 학생 충돌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명치절 행사에 동원된 광주학생들은 일본국가 부르기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시위를 하면서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외쳤다. 같은 해 11월 4일과 5일에는 독서회 ‘성진회’의 지도자인 장재성의 주도하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였고, 12일 광주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라는 표어 아래 일제 타도와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하였다. 광주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일시위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수그러들었으나, 1929년 11월부터 1930년 4월까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광주학생운동은 광주 지역만 하여도 260여 명이 구속되고 수많은 학생들이 퇴학당할 정도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검거와 탄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하였다. 일제 경찰이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고문 방법은 무차별 구타에서부터 철봉을 팔이나 다리에 끼워 주리를 트는 것,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허리나 손톱 등을 마구 지지는 것, 두 손과 두 발을 묶은 채 코와 입을 젖은 솜으로 틀어막고 그 솜 위에다 큰 주전자로 고춧가루 물을 퍼붓는 방법, 심지어는 야심한 자정 무렵에 경양방죽으로 끌고가서 팔다리에 수갑을 채우고 무거운 추를 달아매어 방죽으로 처박는 등의 가혹행위까지 자행했다. 그러나 노주봉은 광주학생운동 당시에는 아직 경부로 승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과장이나 주임급의 책임자로서가 아닐 고문기술자로서 취조와 심문의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에 발각된 전남노농협의회는 전남 지방 최초의 공산주의자 비밀단체로 3백여 명의 회원을 가진 항일결사체였다. 1932년에 이 조직은 노주봉 등의 도경찰부 친일경찰들에게 발각되어 회원 중 이정윤, 김호선, 정동화, 최창진, 김재동, 최차도, 최정기 등 28명이 검속됨으로서 약화되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1933년 김홍배를 중심으로 전남노농협의회의 재건의 성격을 띠고 조직되었는데 조직총책에 김홍배, 조사․연락책에 황동윤, 선전․교양에 이기홍, 조직․총무에 오문현과 함께 농민조합원 야학교사 등이 참여하여 결성하였다. 이 독립운동단체는 완도, 해남, 강진, 영암, 장흥, 진도 등 수개 군에서 3천2백여 명이 참여했던 방대한 조직이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인근 지방의 농민조합을 조직적으로 상호 연계시키고 조세 및 공과금의 인하, 청년과 소년의 교양, 봉건사상과 지방색의 배격과 같은 농민층의 일상적인 요구를 결집시켜 일제항일투쟁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이것은 독립운동의 성격을 띨뿐만 아니라 농민운동 및 사회운동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1934년 1월 27일 발각되어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었고 관련자들은 경찰 조사에서 1년, 예심에서 2년을 소요한 끝에 3년만인 1936년에야 목포지원과 대구 법원(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조직의 선전, 교양 사업을 맡았던 이기홍 옹의 증언에 의하면 노주봉은 이 조직사건을 맡은 공로로 1935년 고등과 특별고등계-대개 과장이나 계장은 일본인이었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조선인 주임이 있음-의 주임(경부보의 직급)에서 경부로 승진되었는데 동족인 조선인들에게 고등계의 일본인 경찰보다 몇 백 배나 더 악질적이었다고 한다.
노주봉은 특히 그 잔인성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고등계 수사에서는 노주봉과 오세영(청년동맹운동을 하다 일제에 체포, 회유되어 경찰이 되었음), 이민행 등 세 명의 경찰들이 한 조가 되어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자행하였는데 노주봉은 그 고문을 총지휘하였다. 당시 노주봉은 피의자들에게 이 조직의 활동이 일본공산당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는 억지 자백을 강요했는데 치가 떨리는 물고문(긴 나무의자에 눕히고 손발을 묶은 다음 한 사람은 그 위에 올라탄 채 물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사람은 주전자의 물을 코에 부어넣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자백을 강요했다)을 여러 번 사용했다. 심문을 받는 사람은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몸짓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내용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 그것을 부인했으며 그렇게 해서 고문은 수차례씩 반복되었다. 물고문이 끝난 다음에는 담뱃불로 지지고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이 뒤따랐다. 노주봉에게서 고문을 받았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갖가지 방법의 혹독하고 공포스러운 고문 못지 않게 잊을 수 없는 것은 사건 수사나 복역이 끝난 후 반불구의 몸으로 석방되어 나왔을 때 자신의 피해자들을 느글거리는 언행으로 위로하는 노주봉의 태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의 관련자 중 한 사람이 복역을 마치고 1937년 초에 석방되었는데 노주봉은 친절한 얼굴빛으로 다가와 등을 토닥거리고 끌고가서 억지로 술을 대접하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라고 위로했다는 것이다. 대개 가혹한 고문과 직접적인 수사 지휘는 노주봉과 같이 수완 좋은 조선인들에게 맡겨졌는데 이에 비해 일본인 경찰 간부들의 방법은 더욱 교묘했다고 한다. 같은 조선인 경찰관을 통해 혹독한 고문을 가한 다음 이론적으로 탁월한 일본인 고등과장은 심문실에서 취조받고 있는 사람을 불러내어 “그 영리한 머리로 지금도 늦지 않으니 일본에 협력하여 새로운 삶을 찾으라”는 등의 말로 회유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광주학생운동은 1942년의 무등회 사건과 같은 해 5월의 동맹휴학사건 등 이른바 제2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에서 학생들은 학병지원반대, 징병제도 반대, 창씨개명 반대, 일어상용 반대 등을 요구하며 일제에 항거하였으나 광주고보생 350여 명이 검거되었고 기한도, 윤봉현, 강한수 등은 취조 3일만에 고문으로 절명하였으며 다른 두 명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은 대부분 곧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전라남도경찰부 보안과 차석으로 있던 노주봉은 독립운동 수사에 능란한 메달리스트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특별수사반장으로 발탁되어 이 사건을 맡았다. 학생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노주봉은 부하 고문기술자들과 함께 한밤중에 경양방죽으로 학생들을 끌고가서 방죽 속에 처박았다 꺼냈다 하는 고문의 수법까지 자행했다. 이 사건으로 복역중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이 되자 풀려나왔는데 해방 직후 학생들의 린치로 사망한 친일경찰 강홍섭은 경양방죽 그 자리에서 노주봉의 명령대로 고문을 실행했던 자였다.
노주봉의 친일행적이 이러하였으니 해방 직후 그가 독립운동가들과 청년단, 치안대의 핵심적 처단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노주봉은 잔인하고 집요하게 독립운동 사건을 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건의 조작을 일삼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번은 1920년대 중반에 일어났었던 형평운동과 유사한 움직임이 있다고 하여 형평사의 관련자들을 검거, 취조하기까지 하였다.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 자금의 상단 부분이 경제력이 있었던 백정 직업의 형평사 구성원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노주봉의 친일 죄상에서 드러나듯이 광주학생 독립운동 이래로 특히 학생들에게 가장 잔인했던 노주봉이 해방 직후 치안대와 청년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암살된 친일경찰의 뒷이야기
일제시대 전남 지역에서 친일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주봉의 주변 이야기는 소설가 송기숙 교수에 의해 1970년대 말에 소설화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동족에게 악질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자들 중에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해방 후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며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새로운 지배자인 미군정에 충성하여 출세함으로써 과거에 자신이 괴롭혔던 독립운동가와 조선 민중들에게 오히려 앙갚음하려는 자들이 많았다. 일제시대에 친일행위는 곧 철저한 ‘반미’를 의미했으므로 친일파들의 이러한 변신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소설가 송기숙 교수는 미군정 초기에 친일경찰 간부로는 가장 먼저 발탁되었던 노주봉을 그러한 인물의 전형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군정하에서 출세하여 분단 정권 수립 후 새로운 애국자로서 변신하여 정부 요직을 차지했던 다른 친일파 거두들과 달리 노주봉은 일찍 암살되었고, 따라서 해방 후 권력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해방이 되자 보복과 처단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 타지역이나 서울로 올라가서 미군정에 협력했던 친일경찰들의 경우에는 자신들로부터 고문과 박해를 받았던 독립운동가들이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피압박 민중들로부터의 직접적인 보복이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총독부 경찰이 된 후 줄곧 자신의 출생지였던 전남 지역에서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전 10여 년 이상을 광주에 있는 전남경찰부에서 일했고, 해방 후에도 같은 지역, 같은 경찰관서에서 근무했던 노주봉은 처단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방에서는 친일 가문과 독립운동을 하는 가문들이 상호 대치하는 상황이 빈번하였다. 양반 유림가문 출신이기도 했던 노주봉은 조선시대 호남 성리학의 거봉이었고 의병운동을 하기도 했던 장성 노사 기대승이나 기고봉을 배출했던 장성 기씨 문중의 원한을 깊게 샀다. 제2차 광주학생운동 당시 노주봉이 지휘했던 고문으로 숨진 기한도 또한 기씨 문중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원한은 지방에서는 정치체제와 정권이 바뀌더라도 오래 남게 마련이다.
따라서 해방 후 노주봉의 자식들은 대부분 성공하였다 할지라도 지역사회에서 아버지의 친일 오명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노주봉의 장남은 해방 후 교육계에서 성공하여 전남 지역민들의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아버지가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학생들의 모교였던 전남 지역 명문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그는 1970년대에 자신과 학병시절 동기였던 유기춘 전 문교부 장관의 힘으로 교육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노주봉의 장남이 교육감이던 시절에 노주봉을 소재로 한 소설이 발간되자 전남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지역의 각 서점에서 그 책을 회수했던 일도 있었다. 노주봉의 장남이 도교육감으로 임명된다는 소문이 나돌자 같은 교육계의 교장으로 있던 기씨 문중(제2광주학생 사건에서 사망한 기한도의 집안 형제)의 한 교장은 당시 문교부 장관을 찾아가 웃통을 벗어 젖히고 자신이 광주학생 사건 때 당했던 고문의 흔적을 내보이며 노주봉의 장남이 교육감에 임명되는 것을 저지하려 하기도 했다. 그의 딸 또한 노주봉이 수집하였던 서화 등을 결혼 당시 혼수품으로 가져갔다가 시아버지의 분노를 사서 결혼 첫날 마당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불태웠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분단된 조국에서 자손 대대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명성과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다른 친일 인물들에 비해 노주봉은 상대적으로 불행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가 지은 죄의 대가를 그의 자손들이 얼마만큼은 치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