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7월 10일 프랑스가 낳은 대문호 프루스트가 태어났다.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프루스트를 “일인칭 화자의 인생과 연애의 편력을 복잡한 시간 구성으로 더듬으면서 무의지적 기억의 환기에 의하여 의식의 심층을 조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소설의 새로운 국면을 연” 세계적 작가라고 소개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머니가 준 홍차에 살짝 적셔진 마들렌을 음미하던 ‘나’의 눈앞에 옛 기억들이 줄줄이 펼쳐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 방학을 보냈던 마을 콩브레와 그곳 사람들의 일화가 ‘나’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끝없이 그려진다. 성당과 종탑, 두 갈래 산책길, 남편 사후 집 밖으로 나가는 법 없이 동네 노처녀 이야기만 해대는 레오니 아주머니 ….
외롭게 살아가는 동네 음악가 뱅퇴유, 아버지가 죽은 후 영정에 침을 뱉는 뱅퇴유의 딸, 산사나무 울타리 앞에서 만난 질베르트, 은둔자인 척하지만 실상은 형편없는 속물 르그랑댕, ‘나’가 동경하던 공작 부인의 우아한 모습 …. 이 모든 아련한 기억들이 갑작스러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나’가 짝사랑한 질베르트의 아버지 스완 씨는 콩브레를 회상할 때 어김없이 떠오르는 기억이다. 스완 씨는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콩브레 유일의 인물로, 섬세하고 예술적인 귀족이다. 그런 스완 씨가 뜻밖에도 화류계 출신 여인 오데트에게 마음을 준다. 오데트는 사실 자신의 이상형과 거리가 까마득했다. 그런데도 스완 씨는 문득 오데트에게서 보티첼리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을 느끼고, 그 순간부터 질투와 욕망으로 말미암아 기나긴 고뇌를 안겨주는 사랑에 빠져든다.
흔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힘든 소설이라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인간 사회의 모습과 거대한 자연의 힘을 담아내는 데 골몰하는 일반 소설들과 달리, ‘인간’ 그 자체와 인간 내면 ‘의식의 흐름’을 펜의 흐름을 내맡긴 채 유유히, 그것도 엄청난 길이로 흘러가는 특이한 소설인 탓이다. 쉽게 말해 줄거리가 뚜렷하지 않아서 그렇다.
게다가 스완 씨가 터무니없는 오데트에게 정신없이 빠져든 까닭도 이해하기 어렵다. 소설은 오데트에게서 보티첼리 그림 속 여인의 느낌을 받은 것이 스완 씨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보티첼리의 그림을 알지 못하는 독자 앞에는 감상과 해석을 가로막는 가파른 고갯길이 놓인다. 기나긴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이런 묘사가 말 그대로 수두룩하다.
프루스트는 소설에서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물론 프루스트는 이성 간의 보편적 사랑에 관해 언급했지만, 나는 그의 인식을 나 스스로에게 적용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찾아내는 데 활용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정리할 때 줄거리만 떠올리는 집착에 빠지지 않아야겠다는 뜻이다.
수십 년의 인생은 수많은 찰나와 초 단위의 집적일 뿐 결코 듬성듬성 놓인 큰 사건들로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아니다. 잃어버린 모든 시간들을 세세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제2의 인생’을 살 겨를이 없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등 특이한 이력이 눈길을 끄는 프랑스 역사학자 앙드레 모루아(1885∼1967)는 “세상에는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명언을 본떠 장차 명언이 될 만한(?) 말 하나를 창조해본다.
“세상에는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 (*)
첫댓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