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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14장의 장편소설이며
1~5장까지는 아래에 연재되어 있습니다.
1/사랑, 장마로 오다
2/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3/첫 키스의 향기
4/철길이 닿는 바다
5/검은 그림자
6/굴레의 사슬
7/연못둥지과수원
8/안개 속의 덫
9/뒤틀리는 운명들
10/색깔이 다른 피
11/성(城)을 떠난 사막
12/장남들의 곡예비행
13/보이지 않는 길
14/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
<6장 여섯번째 이야기>
굴레의 사슬
나는 정라에게 감히 전화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바탕 회오리가 휩쓸고 갔을 혼란을 들춰낸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내 심장이 가슴앓이로 썩어 들어가도 그녀가 먼저 연락을 취하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과거의 사건을 알고 난 후 정라가 겪고 있을 소용돌이가 무엇인지는 자명할 일, 조바심에 위로한답시고 전화를 해서 돌이킬 수 없는 단절로 이어진다면 오히려 더 속수무책일 터였다.
하지만 그런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이동으로 향하는 나를 자각한 것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토요일 오후였다. 결단의 배경에는 문득문득 가물거리며 아련해지는 얼굴이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역시 집 언저리에 숨어 정라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그녀를 쉽게 볼 수 있는 위치, 무방비인 정라가 나를 볼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눈알을 굴리며 골목 어귀를 내내 염탐하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속절없는 시간이 지나 어두워지고, 이슥한 밤까지도 정라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불안감을 망각한 지 오래였다. 초조함을 잃은 지도 오래였다.
이제 더는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비로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결번이었다. 전화번호는 분명 그녀의 전화번호였고, 몇 번씩 확인하고 또 걸었지만 이미 없어진 번호였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지도 못한 채 멍하니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한참이 지났다. 나는 겨우 쪼그라드는 마음을 추스르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집으로 올라갔다. 집은 인적 없는 적막으로 고요하였다. 대문 틈을 통해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집 안을 살폈다. 희미한 불빛조차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또 지났다. 누구 하나 나타나지도 않았다. 현기증이 한꺼번에 밀려와 순간 아득해졌다. 마침내 마음을 접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그러다가 때마침 나타난 낯선 사내와 맞닥뜨렸다. 나를 의아하게 생각한 사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에게서 정라가 이사한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다. 나는 자욱한 마음을 얼싸안고 골목을 내려와야만 했다.
이튿날, 곧바로 직행버스에 몸을 맡겼다. 주홍이에게 정라에 대한 소식을 얻고자 하는 속셈의 결단이었다. 장마 후, 그녀가 홀연히 떠난 뒤 앓았던 열병을 또 다시 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홍이에게서도 정라에 대한 만족할 만한 소식은 얻지 못했고, 되레 그녀에게 정라가 이사 간 것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가능성은 아랫방장골의 유복자를 찾아가 떼를 쓰는 길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헛수고였다. 유복자조차도 이미 고향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주소를 알 길은 없었고, 행방을 찾을 길은 더욱 없었다. 정라와의 끈은 철저히 단절되었다. 내가 미웠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내가 정말 미웠다. 진즉에 좀 더 일찍 그녀를 찾았어야 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쳐들어갔어야 했다. 남겨진 것은, 정라에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견뎌야 하는 실낱같은 희망뿐이었다.
서울로 상경하기 전 꼭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음영석에게 들었던 공회당 사건 내용에 내가 모르는 다른 무엇이 더 있는가를 필히 확인해야 했다. 석우라면 무언가를 알 수도 있겠다 싶어 그를 찾았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앞뒤 가리지 않고 대뜸 과거의 사건 진위부터 물었다.
“물어보구 싶은 게 있어. 정호네 집하구 우리, 진수네 집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겨?”
정라 이름은 쏙 빼고 정호네 집이라고 둘러댔다. 물음에 대한 의도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숨기기 위한 얕은 술책이었다.
“갑자기 뭔 소리여. 누가 뭐라던?”
“나두 조금은 알어. 옛날에 공회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딴 것 알 필요 없어. 니는 공부나 열심히 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구.”
“꼭 알아야겠어. 말해줘. 형이 알구 있는 것 전부 다!”
내 격앙된 질문에 석우는 의아한 듯 눈알만을 굴렸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를 윽박지르며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석우는 마지못해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엄정면 추평리에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와 머슴 셋이 있었다구 하더라.”
“…….”
나는 식도로 침을 꿀꺽 밀어 넣었다. 석우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지주의 집안은 후사가 귀해 대를 이을 자손을 없어서 조카를 양자루 들였대. 양자를 간 조카는 본래 심성이 착하기만 했던가벼. 왜눔들이 토지정리를 할 때 머슴들에게 토지의 일부를 나누어주었대. 머슴들은 나누어준 논밭을 지으며 계속 지주의 일을 돌보아왔구.
그런데 지주의 영화는 거기까지였던 모양이여. 항일운동의 보복으루 제천에서부터 박달재를 넘어 추평리까지 모조리 불태워졌대. 그 충격으루 시름시름 앓던 지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양아들은 고작 네 살이었구. 더구나 남아 있던 토지는 물론 조상들이 대대루 묻혀있는 선산마저 강제루 빼앗겼대.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친일파가 선심 쓰는 척 어린애의 지장을 받아간 것이 화근이었다구 하더라. 결국 지주로서의 영화는 끝나구 멸문으루 추락한 겨. 빈털터리루 가족을 이끌구 정착한 곳이 봉계였구. 그때 머슴의 후손이었던 셋 중 두 명이 고향을 버리구 대를 이어 신의에 뒤따랐대.”
“그럼, 지주 집안이 그렇게 멸문된 겨? 정호네가 지주구, 우리하구 진수네가 머슴 자손이구?”
“그렇지. 진수네와 우리가 그 두 명의 머슴 후손이다. 그중에 할아버지를 잘 만난 우리 집안이 지금은 부농으로 성공한 셈이지. 요즘 세상에 지주구 머슴이구 다 무슨 소용이겠니. 양반두 돈 주구 사던 시절이 훨씬 이전의 일인데. 그래두 처음에는 서루 상부상조하며 사이가 좋았었대.”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둘 게 있다. 해방 전에, 정호 아부지와 우리 아부지가 일제의 보국대루 끌려가 다리를 놓는 현장에 배치되었대. 밤낮없이 온갖 고생을 하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던 모양이여. 그러다가 교각을 세우던 옹벽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대. 그때 정호 아부지가 급물살에 쓸려가는 우리 아부지 목숨을 구해 주었다구 하더라.
훗날 둘은 거짓말처럼 탈출에 성공했다더구나. 하지만 아부지는 숨어서 강제징용을 면했는데 정호 아부지는 다시 전쟁터루 끌려갔대. 해방되던 해 한쪽 다리를 잃구 겨우 고향으루 돌아왔구.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모두들 소용돌이에 또 휘말렸던 겨. 마르크스에 심취한 정호 큰아부지의 좌익과, 마을 구장을 주축으루 한 우익이 생겨났구. 지주의 큰아들은 마르크스, 머슴의 아들들은 민주주의, 명분 없이 휩쓸렸던 셈이지. 전쟁 전에는 좌익의 정호 큰아버지가 못할 짓을 하구 다녔는데, 전쟁 후에는 진수 아부지의 날뛰는 모습이 뿔난 망아지 같았다구 하더구나. 전쟁이 터지자 정호 큰아부지는 행적을 감추었대. 휴전이 되구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왔지만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두 없었구. 그래서 급기야는 공회당 사건이 터졌어. 부자를 끌어다가 정호 큰아버지 숨긴 곳을 실토하라며 집단폭행이 있었대. 그 사건이 오늘날까지 쉬쉬들 하며 숨겨온 사건이여!”
“그럼 우리 아부지는?”
“아부지두 어쩔 수 없이 휩쓸렸어두 정호네한테는 우호적이었든가 벼. 목숨까지 빚진 입장인데 은혜를 원수루 갚을 수는 없었겠지. 청주루 이사 간 작은아부지가 약간 더 심했던 모양이여!”
“작은아부지?”
“그렇지만 작은아부지두 진수 아부지처럼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구 하더라. 정작 아부지는 그들 부자에게 목숨 빚을 갚은 사람이여.”
“그건 또 무슨 소리여?”
“거의 죽어서 가마니에 덮인 채 버려진 부자를 괴산으루 시집간 딸네집으루 옮겨 살린 사람이 아부지였다더라.”
“형은 그런 얘기들을 누구한테 들었어?”
“할무니한테 들었다. 할무니는 입두 벙긋 못하게 하니까 아예 아는 체하지 마러. 묻어두는 것이 좋은 과거의 사건들이여. 우리 세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지!”
나는 더는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물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모든 정황은 명백해졌다. 정라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멸문이 어떻고 머슴이 어떻고 엿들은 의문이 비로소 풀렸다. 정호의 성난 표정을 본다면 지금까지 치유되지 않고 존재하는 지주와 머슴이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속이었다. 선대에서부터 시작된 굴레의 사슬, 이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나 다름없는 싸움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한낱 지주의 딸을 흠모하는 머슴의 아들이며, 피해자의 딸을 사랑하는 가해자의 아들일 따름이었다.
떠올랐는가 싶으면 저절로 기우는 태양의 반복이 하염없이 되풀이되었다. 느리게 물이 흐르고 바람도 흘러서 해가 바뀌고, 또 느리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흐르는 세월이 그저 무의미하고 느린 연유는 오로지 정라의 무소식 때문이었다. 나는 숨은 쉬고는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명치는 정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늘 저렸다.
여름방학 역시 지척지척 고향으로 내려왔다. 농번기였지만 집안일은 관심 밖이었고, 무대뽀삼형제도 별반 어울리고 싶지 않아 은둔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책을 읽거나 보낼 곳도 없는 정라를 향한 편지를 낙서처럼 긁적이는 것이 전부였다.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고,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네. 애절한 그리움의 시!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서 하나의 몸이 된 연리지, 암컷과 수컷이 각기 눈과 날개가 하나뿐이어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의 새 비익조, 오래도록 사랑하고 끊어지지 말자는 시나 명문들을 옮겨 적기도 하며 긁적인 그리움의 분량이 마침내 노트 한 권을 점령했다. 어머니는 두문불출 은둔해 있는 것만으로도 대입예비고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며 지극히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지난밤에는 별반 관심도 없는 스포츠게임의 텔레비전을 보다가 무심코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를 깨워서 사랑채로 보내지도 않고 안방에 그대로 방치해두었는지, 새벽녘이 되어서 팽창된 방광 때문에 눈을 떴을 때 안방에 누워 잠들었음을 알았다.
“웬 눔의 비가 이렇게 밤새두룩 오는 겨!”
아버지의 푸념이 귓속을 간질거렸다. 밤부터 소나기가 줄기차게 내렸나 보았다. 몇 년 전의 홍수처럼 세찬 빗줄기 소리였다. 하지만 그때 같은 설렘조차도 내겐 느껴지지 않았다. 정라, 이제는 장마의 추억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정라의 무소식 탓이리라.
“땅값은 지대루 쳐 준답니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불 틈을 비집고 스며들었다. 듣기에도 생소한 땅값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부모님의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선뜻 일어나 소변 볼 일도 참은 채 숨죽여 대화를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두 봉계를 떠나야지 어쩌겠어. 이제 이장 자리두 넘겨주구 했으니까 땅만 팔리면 갑시다! 가격까지 다 맞춰 놨으니까 여기 논만 팔리면 바루 떠날 수 있구먼.”
“석우가 사고만 치지 않았어두 안 가두 될 일이잖어유! 진영인가 갸가 꼬리친 거 맞지유?”
“새삼 들춰내서 무엇혀. 석우가 절대루 아니라구 하니 믿을 수밖에. 진영이 갸가 몸에 손댔다구 동네에 소문을 퍼뜨렸다 하더구만! 어쨌든 챙피한 일이니까 앞으루 입에 담지 맙시다 그려!”
“정말이지, 동네 아줌마들이 수군거리는데 뭐라 말을 못하겠어유!”
“자꾸 말하지 맙시다. 나두 챙피해서 얼굴두 못 들구 다니겠구려!”
“도대체 연못둥지 그 야산에서 과수원은 지대루 될까유?”
“죽기 살기루 개간해보는 거지. 5,000여 평은 되니까 잘만 하면 논농사보다는 나을 겨!”
엿들은 대화 내용은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석우가 진영에게 사고를 쳤다.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친 모양이었다. 그래서 쫓기듯 동네를 떠나 연못둥지라는 야산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일순간, 주마등처럼 스치는 섬광이 있었다. 진수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의 석우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섰던 행동이며, 불구덩이를 뛰어들어 진영을 구출하던 동작 하나하나의 느낌이 남달랐었고, 석우의 목덜미에 매달린 진영의 몸짓 또한 예사롭지 않았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석우가 겨우 고등학생인 진영의 몸에 손을 댔다는 뜻이라면 단순한 불장난이나 첫사랑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잘된 겨. 너무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여. 아부지가 돌아가시구 나서 떠났어야 했는데……. 난 지금두 공회당을 지날 때면 그때 일 때문에 소름이 끼치는구먼!”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면서유. 그래두 당신이 없었으면 그들 부자는 죽었을지두 모른다구 했잖어유. 그만하면 당신은 할 도리 다 했어유. 막무가내인 진영이 갸 아버지가 문제였지!”
“당신하구 혼인하기 전 일이었으니까, 참혹한 건 상상두 못할 겨!”
“그나저나 혹시 석우 쟤가 진영이 갸하구 결혼한다면 당신은 받아줄 거여유?”
“아직 한참 남은 일을 가지구 미리 걱정하지 맙시다. 이사 때문에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그냥 불장난쯤으로 여겨야지, 애들 앞날을 어찌 알 겨!”
아버지의 길게 내뿜는 한숨 소리가 이불 위로 내려앉았다. 그 한숨에는 조상 대대로 얽히고설킨 사슬의 고리를 이미 오래전부터 끊고 싶었던 강한 의지가 묻어났다. 누구보다 사건의 소용돌이 핵심에 있었던 고뇌가 응어리로 고스란히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지그시 찡그리며 이불 틈으로 밖을 훔쳐보았다.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날아온 빗줄기가 창틀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서둘러 몸을 털고 일어났다. 석우에게 좀 더 명확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어디를 나갔다가 왔는지 오후가 되어서야 도둑고양이가 숨어들듯 집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석우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따졌다.
“형, 간밤에 우연히 들었어. 진영이랑 난 소문은 도대체 뭐여?”
“이제 건방지게 니까지 윽박지르는구나! 이건 월권이여. 까불지 말구 니는 니 공부나 잘 혀!”
“형, 나, 꼭 알아야 혀!”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정라 때문이라는 얘기까지는 차마 들먹일 수 없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직은 정호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난 아무 짓두 안 했어. 겨우 키스 한 번으루 진영이가 날 꼼짝 못하게 붙잡으려구 꾸며낸 얘기여. 마을에 소문이 다 났으니까 챙피해서 떠나긴 하지만 니까지 신경 쓸 일 아니여. 신경 꺼!”
석우가 힘주어 잘라 말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여전히 지울 수 없었다.
“그럼 앞으루 어떻게 할 겨?”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그냥 돌아가는 대루 맡기는 거지.”
“형두 진영이가 마음에는 있는가 보구나.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사랑하는 것두 아니지만 싫지두 않어. 내가 내년 봄에 군대 갔다가 제대하구 진영이 갸두 졸업한 몇 년 후에 다시 생각해보기루 했어.”
“그럼 지금 진영이를 만나구 오는 길이여?”
“어떻게든 매듭은 지어야 할 것 아녀. 동네에 소문을 냈으니까. 사과 받느라구 늦었어.”
꼬여도 된통 꼬여버렸다. 발원지가 어딘지 모르는 까마득히 높은 쓰나미가 몰려와 덮쳤다. 머슴의 큰아들인 형은 머슴의 딸인 진영을, 머슴의 작은아들인 나는 지주의 딸 정라를, 하물며 진영은 정라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적었다.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아릿한 통증은 무슨 의미인가, 손바닥으로 심장 언저리에 문지르자 새우등처럼 등이 저절로 굽어졌다.
“야, 니 왜 그려. 어디 아픈 겨?”
“아녀, 그냥…….”
“이모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구 하더니 몸이 축났나 보구나. 까다롭게 굴지 말구 아무거나 적당히 처먹어, 인마!”
석우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 머리카락을 휘저어 헝클어놓았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듯 허공 멀리에 눈을 던졌다. 비 그친 하늘은 차갑고 탁했다. 잿빛 하늘은 잿빛 하늘로, 질척이는 땅은 질척이는 땅으로, 한없이 원을 그리며 빙그르르 맴돌았다. 몸도 마음도 깊이 침몰되며 뿌옇게 스러져갔다. 정라의 얼굴이 아득히 스러져갔다.
정라와 단절된 숱한 날들이 뜨고 졌다. 기다림은 한없이 지속되었다. 우유부단함의 결과는 참담했다. 그녀를 만났던 날이 언제였을까 아득하여 가슴은 수시로 저리고 아려왔다. 그녀는 나를 완전히 잊기로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쩌면 이토록 무심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나를 잊었다. 아니, 아예 버렸다.
사막에 흙먼지가 일듯 심장은 황폐해졌다.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심한 몸살을 자주 앓았다. 열병은 혹독했다. 갑자기 열이 치솟아 온몸에 비 오듯 땀이 흘러내리다가도 한겨울 같은 오한으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맑은 콧물은 감각도 없이 어느 틈에 흘러내리는데 입술은 메말라 건조했다. 기침은 토악질처럼 치받았다. 머릿속은 온통 연기 속처럼 혼미했고, 관절뼈 마디마다 이음새가 이완되는 듯 무기력해지더니 마침내 몸뚱이마저 물먹은 솜처럼 버거워졌다. 당연히 몸무게는 줄어 점점 쇠약해지고 눈언저리는 퀭해졌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 결과였다.
이모는 무슨 병이 있는가 보다 의심하기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보약 한 첩을 보내오게 하였다. 하지만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바에야 차도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어른들은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보이지 않는 병을 알 리 없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기발한 방법이 떠오른 것은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정라의 학교 이름을 알고 있는 터이니 학교로 찾아가면 되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에 이빨 사이로 감동의 신음이 튀어나갔다. 이토록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차마 생각조차 못한 내가 어리석고, 밉고, 바보스럽고, 한심스럽고, 모멸스럽기까지 했다.
곧바로 정라가 다니는 학교 주변에 잠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주일째 잠복하고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하물며 그녀의 학교 인근에 대학교가 있어 데모 진압을 위해 쏘아댄 최루가스를 연일 마셔야 했다. 최루가스를 삼키며 정호가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하고, 그녀가 보고 싶어 핑계 삼아 코를 풀며 매캐한 눈물을 찍어냈다. 결국 그녀를 포기할 만큼 마지막 의지마저 서서히 약해져갔다.
여느 때처럼 정라를 만나기 위해 교문 인근에 숨어 있었다. 아침에는 멀쩡했던 날씨였는데 여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닐우산을 사서 썼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머리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눈두덩을 타고 입술 위로 흘러내렸다.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세찬 입김으로 빗방울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물방울이 조각으로 분해되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불쑥 불량학생처럼 느껴졌다. 아니, 나는 오래전에 이미 불량학생이 되어 있었다. 수업 도중에 이탈하는 것은 물론 등교를 거르는 날이 다반사였고, 툭하면 정라를 만나러 잠복하는 등 어디를 보아도 모범생의 행동이라곤 찾을 곳이 없었다.
학생들이 하교할 시점부터 숨어서 훔쳐보던 시간이 얼마간 지났을까. 인형 같은 학생들이 그나마 가늘어진 빗줄기를 피하려 럭비공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큰 인형, 작은 인형, 통통한 인형, 가냘픈 인형, 어쩌면 제각각의 모습이 이다지도 다를까! 깡충깡충 뛰며 교문을 나서는 여학생들의 눈에 띌까 오늘따라 유독 잠복의 동태를 감추어야 했다.
하교하던 학생들 숫자도 눈으로 헤아릴 정도로 뜸해졌다. 오늘도 헛수고였다. 내가 미웠다. 형편없이 침몰한 내가 정말이지 초라하고 미웠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미 등을 돌려 돌아서고 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영원한 이별의 뒷걸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우이동 언덕에서처럼 하얀 교복 상의에 감색 조끼의 교복을 정갈하게 입은 정라가 교문 옆에 비켜서 있는 것이 벼락같이 눈에 들어왔다. 비를 피해서 머리에 떨어진 빗방울을 털고 있는 그녀가 가까이 와 있었지만 놓쳐버렸고, 그녀는 당연히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도 못하고 있을 터, 우이동에서 처음 만날 때처럼 겨우 이름 석 자에 그리움을 쏟아내었다.
“조, 정, 라!”
자신의 이름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라가 금방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열리며 동그란 구슬처럼 일순간 팽창되었고, 착한 눈썹꼬리는 아래로 처졌다. 나는 온몸의 에너지가 분산되어 그만 철퍼덕 주저앉고 싶었다.
“여, 여긴 어떻게?”
“니 만나려구, 오래전부터 기다렸어! 일주일 넘었어!”
내 눈동자는 여지없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변해버렸고, 목소리는 이미 힘을 잃었다. 그래도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 곁으로 냉큼 걸어가 우산을 받쳐주었다. 그녀는 굳이 호의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동료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고는 다급히 말했다.
“빨리 따라와. 일단 버스 먼저 타!”
정라가 총총총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쫓아 오리새끼처럼 뒤따랐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움츠리고 버스를 기다리던 몇몇 학생들이 힐끗거렸다. 정라의 머리가 곧추세워졌다. 그것은 어쩌면 남학생이 우산을 받들고 있는 현실을 동료들에게 부각시키려는 우월본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모른 척 그저 눈동자를 깔았다.
머지않아 버스가 도착했고 투명 끈에 엮인 듯 그녀를 따라 올랐다. 자리가 없어 각자의 손잡이를 잡고 통로에 섰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마음 탓인지 무엇보다 머쓱한 생각마저 들었다. 더구나 승객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찢어지는 차장 아가씨의 지친 목소리로 인하여 서로의 간극에 침묵만이 흘렀다.
마침내 그녀 곁으로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했다. 어깨에 남아 있는 빗방울을 살며시 털어주었다. 맺혀 있던 빗방울이 내 손등으로 굴러 떨어졌다. 남자의 손길을 의식한 그녀의 곁눈질이 금방 다가왔다. 새치름하니 따가운 눈초리였다.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손등의 빗물을 엉덩이춤에 쓱싹 문질러 닦아내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루……. 이사 간 겨?”
“신, 내, 동!”
정라는 단어의 마디마다 짧게 끊어 대꾸했다.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내리는 곳까지 동행할 것을 마음먹은 바에야 그곳까지 가면 그만이었다. 차라리 중심 잡기도 버거울 정도로 덜컹거리는 버스가 오히려 고마운 입장이었다. 그녀도 나도 각자 비틀대며 다시 침묵했다. 그렇게 어색한 모습으로 또 몇 정거장을 흘러 보냈다.
그녀가 앞서 내렸다. 서둘러 황급히 우산을 씌워주며 밀착했다. 어깨가 가볍게 스쳤다.
“어디까지 따라올 겨?”
정라가 매몰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냉정한 억양에 움찔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리워했던 숱한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하면 간단하게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상들의 얽히고설킨 과거로 인하여 괴리로 고착되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그래서 힘주어 말했다.
“비 맞구 가게 할 수는 없잖어!”
“상관 마!”
“집까지 가는 게 싫으면 아무 빵집이나 들어가. 나, 니한테 할 말이 있어!”
부러 퉁명스럽게 뇌까렸다. 내 깐에는 그녀로 하여금 긴장을 각인시키기 위한 강한 어필이었다. 정라는 내 의지를 눈치챘는지 말없이 걷다가 작고 허름한 분식집으로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하얗고 예쁜 손수건을 꺼내었다. 이어서 머리며 얼굴과 교복에 떨어진 빗방울을 찍어냈다. 내 눈은 빗물을 찍어내는 정라에게 고정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다시 그녀의 밧줄에 묶이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손수건을 한 겹 두 겹 사각으로 가지런히 접어 넣으며 그녀가 물었다.
“이사한 것은 언제 알았던 겨?”
“아주 오, 오래되었어. 주소 알려구 방장골 큰집까지 찾아갔었어!”
“왜 나를 그렇게 열심히 찾는 건데?”
여전히 도사린 물음에 선뜻 답변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마땅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숱하게 울먹이고 숱하게 삼켰던 순간들은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단어들이 일순간에 지워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돼버린 이유는 더구나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는 결론부터 말했다.
“앞으루, 나 찾지 마!”
나는 아예 벙어리가 돼버렸다. 깊은 나락으로 추락한 듯 고개를 꺾고 침묵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꼭 그래야 하는지조차도 정라에게 되묻는다는 것이 그저 아득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종지부를 찍듯 덧붙였다.
“정호 오빠한테 얘기 들었어.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 죽겠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어!”
이미 예견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연락을 끊은 연유가 명료하게 밝혀졌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피해자였고 나는 가해자였다. 피해자의 아씨를 선망하는 가해자의 머슴이었다. 그러나 화가 났다. 대관절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살기 위해 탈출의 여지가 없었던 조상들의 운명에 얽매여야 한다는 말인가, 가슴은 옥죄어 숯덩이가 되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틀려버린 지 오래였다.
일순간, 심장에서 불끈 치밀고 올라와 머리를 때리는 울분이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그녀를 쏘아보듯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힘주어 말했다.
“알어. 나두 정리 안 되기는 마찬가지여. 그런데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몹시 화두 나!”
“그럴 필요 없어. 앞으루 나 찾아오지 마. 하물며 지금은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할 학생이잖어.”
그녀는 여전히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내 항변은 결국 또 애원이 되고 말았다.
“나두 그러구 싶을 때가 많았어. 하지만 나, 니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아무것두 못했어!”
“지금은 고등학교 삼학년이라 공부가 더 급혀. 대학 간 다음에 생각혀. 조상들 얘기 자꾸 들먹이면 니, 그나마 싫어질지두 몰러!”
그녀의 싫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주춤 물러섰다. 아직은 싫지가 않다는, 싫어질지도 모른다는 표현만으로도 희망을 가져야 할 판이었다. 그래, 기다리자. 일말의 가능성만 있다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기다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기다림에 익숙해진 깊이만큼, 기다림에 익숙해진 넓이만큼, 조바심을 낼 문제도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건 그녀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 나는 애써 평온을 찾으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비로소 짤막한 바람을 정리하는 슬기를 보였다.
“알았어. 그런데 가끔 전화하는 거는?”
“그것두 당분간은 하지 말어. 집이 여러 가지루 복잡혀!”
“무슨 일이 있는데?”
“오빠가 군에서 사고를 치구 말뚝을 박는다나벼. 장기하사인가 뭔가 하구 시비가 붙어서 영창 갈래 말뚝 박을래 해서 일단 말뚝 박는다구 했구. 아부지두 요즘은 그냥 집에 있어. 수술하구 나서 겨우 얻었던 직장도 잃었어.”
“수술! 무슨 수술?”
“위벽에 구멍이 뚫려서 길바닥에 쓰러졌는데 지나가던 고등학생들이 시립병원에 옮겨 겨우 살았어. 전쟁후유증 때문에 거의 매일 술이여. 그리구 할무니두 많이 아퍼. 아픈 아부지가 할무니를 돌보구 있어. 어무니는 대학 구내식당에 나가구…….”
집이 이사를 하고 연락이 없었던 동안 그녀에게도 어지간히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 듯했다. 남루하고 진득거리는 일상이 그녀의 얼굴에 그늘로 멍울져 보였다. 어쩌면 그리움을 빙자한 나의 아픔은 사치에 불과한 일이었다. 정라의 하소연에 내 입장만 표현하려 했던 것이 쑥스러워졌다.
“미안혀. 마음 아픈 일두 많았는데, 내 입장만 얘기해서. 정라 니 말대루 할게. 가끔, 가끔……. 편지하는 건 괜찮지?”
“알았어. 우선 편지만 혀. 그것두 너무 자주는 하지 말구. 나중 문제는 나중에 생각혀!”
그녀는 책가방에서 주섬주섬 쪽지를 꺼내어 주소를 적어주었다. 나는 주소를 적어주거나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이모네 전화번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다음을 기약하는 명분은 확보한 셈이 아니던가, 그녀와의 간극이 더 벌어지지 않게 노력하면 될 일이 아니던가, 당장은 응어리진 가슴앓이를 안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에 만족하는 인내를 배우면 될 일이었다.
라면으로 비에 젖은 한기를 달래고 분식집을 나왔다. 그녀와 나는 서로 어찌할까를 망설이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본심은 정라를 집까지 배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쳐 있는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굳이 집까지는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 같은 판단이 들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갈게. 이거, 우산 가져 가!”
“아니여, 니가 가져 가. 난 괜찮어!”
“그렇게 혀. 그냥, 니가 가져가는 게 좋겠어!”
극구 거절하는 그녀에게 무작정 우산을 건네주었다. 이사한 신내동까지의 거리는 모를 일이었으나 더는 빗방울을 맞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에서였다. 나는 정라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용기를 잃지 말고 꿋꿋이 이겨내자는 다짐이었고 그녀를 향한 위로의 표시였다. 정라는 미소를 보이면서도 살며시 손을 뺐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손의 감촉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때마침 미끄러지듯 버스가 정거했다. 나는 줄곧 그녀를 바라보며 게처럼 옆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자 정라의 모습이 구겨진 비닐우산 밑으로 가려졌다. 그녀는 그녀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금세 저만치 거리가 멀어졌다.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아스팔트로 다시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스팔트는 뽀얀 물안개를 자욱하게 뿜어 올렸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저 단순히 안부만 전하며 위로하려던 생각이었는데, 그리움의 노트가 한 권이었던 만큼 그녀를 항한 고백은 절절했다. 평소에 말로 할 수 없었던 단어까지도 과감하게 나열했다. 특히 쑥스러움에 말하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단어도 저돌적으로 나열하며 정라의 마음을 엿보려 시도했다. 때로는 동정으로, 때로는 애원으로,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편지 1
정라야, 잘 있었니? 이렇게 편지라는 것을 쓰니 새삼 낯설다. 네가 옆에 없다는 의식을 하니까 염치없게도 넋두리를 쓰기에 조금은 가볍구나.
지난해부터 너를 만나지 못하고 전화도 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참으로 힘들고 무기력했다. 아마도 하늘색 원피스 차림을 보았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었지. 너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토록 처량한 일인 줄은 나 자신도 몰랐던 일이다. 내가 태어나서 너를 보아왔던 세월보다 그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너의 목소리는 환청처럼 아련해지기까지 했으니까.
더구나 너를 뿌리치고 떠난 오빠 앞에서 울며 애원하던 모습은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그 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이 아팠다. 너희 집을 찾아가고 방장골 큰집을 방문하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내내 많은 생각을 했다. 정라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모네 집으로 전화 연락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일까? 뒤늦게 조상들의 사연을 알게 되어 연락이 없을 터인데 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오빠를 그렇게 보내야만 했던 아픔은 치유된 것일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내 성격이 심각할 정도로 소심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유독 너에게만은 그렇게 되었다. 설마 이런 나를 무시하며 힐책하지는 않겠지? 당당하지 못한 내가 더 미웠지만 너를 좋아하고 있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 소박한 마음 그대로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뿐이다.
정라야, 이런 마음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니? 하지만 그저 온전히 받아주었으면 한다. 어떤 이유도 부여하지 말고 조건도 달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이지 난 너의 머슴이 되어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나의 처음이 그러하였듯 항상 너를 잊지 않으려 노력할게. 지금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자는 네 생각을 존중할게!
너에게 고백하지만 난 고등학교를 분명 잘못 선택했다. 차라리 충주에 남아 재수를 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할 것을 후회가 된다. 삼류도 그런 삼류가 없어. 이제 와서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앞으로 남은 숙제가 더 많아졌다. 공부도 무지막지하게 해야 하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농사를 지을 생각까지 한다는 것 자체가 초라한 도피일지도 모르겠구나.
정라야, 우리 기운 내자. 네가 기운이 없어 보이면 나도 기운이 없어진다. 아직은 미래가 더 화려한 학생이잖니! 조금 있으면 학교 갈 시간이야. 오늘은 이만 줄일게. 또 편지 쓸게. 안녕!
회신 1
편지 잘 받았어. 편지를 받으니까 좀 이상해. 그래도 그냥 괜찮아. 가끔 생각나면 또 꺼내볼 수도 있으니까! 사실 난 아직 어려서 세상이란 게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오빠가 데모를 하다가 본의 아니게 군대를 가고, 거기서도 싸움을 해서 인생이 바뀌고 하는 게 납득이 안 돼. 할머니의 병환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야. 아버지가 수술할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더구나 아버지는 수술부위가 회복이 늦어져 마음이 아파. 아버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셨던 분이었는데, 우리 집은 왜 잘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이런 현실에 화가 나. 요즘은 복잡해서 공부도 잘 안 돼. 당분간 편지만 해. 지금은 이 정도까지만 양보할 수 있어. 안녕!
편지 2
정라야, 내겐 너무 소중한 정라야! 할머니의 병환이 깊어지고 아버지의 건강 회복이 늦어진다고 하니 정말 걱정이다. 더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런 것도 없다는 것이 더욱 미안하구나! 오빠의 일은 너무 마음 쓰지 않으면 좋겠다. 오빠는 누구보다 똑똑하여 마을에서 제일 선망 받던 남자였잖니. 오빠는 훗날 집안의 기둥 역할을 톡톡히 해내리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두 집안…….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너의 증조할아버지와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지주와 머슴 관계였다지? 이것은 곧 너는 지주의 딸이고 나는 머슴의 아들이라는 얘기도 된다. 세상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지면서 계급이 무너지고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많은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대부분 지주의 지위는 추락하고 머슴의 지위는 상승했지. 차라리 그것으로 끝이었어야 하는데 한국전쟁이 조상들에게 더 몹쓸 짓을 시켰더구나.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에게 우익과 좌익이라는 두 갈래의 선택만을 강요했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당사자 자신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날까지 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생각해보면 그래도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행복한 거겠지. 적어도 목숨을 맡기고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은 없으니까!
정라야! 이제는 지주도 머슴도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는 시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너의 머슴이고 싶을 때가 더 많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너의 조상들을 받들었듯이 나는 너에게 옛날처럼 돌아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가족들의 노여움이 삭여지고 다시 화해의 기틀이 마련된다면 차라리 행복할 거다. 나 하나쯤은 정라를 위해서 너끈히 그렇게 버릴 수 있다. 너를 위해서라면!
다만 너의 진정한 마음이 궁금해. 네 마음도 오빠와 같은 생각이라면 마음을 바꿔주었으면 한다. 물론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고 했지. 혼란스럽고 나처럼 화도 난다고도 했지. 하지만 내가 노력할 테니 도와줘. 이토록 아픈 마음들을 가지고 계속 살 수는 없잖니? 너는 그냥 나의 주인이라는 부푼 긍지를 가지고 모든 것을 너그러이 덮어주면 좋겠어. 서로의 가족에게 의리 있었고 사이좋았을 옛날로 돌려놓는 데 내가 최선을 다할게. 언제까지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너의 메아리를 기다리련다.
정라야, 오늘은 너를 생각하면서 이만 잠들어야겠다. 우리 자그마할 때 흔히 하천을 헤집고 놀던 생각이 난다. 꿈속에서는 고향의 하천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언제 한번 그 추억의 하천을 다시 걸어보지 않으련? 길도 흘렀고 너도, 나도 흘렀지만……. 안녕!
회신 2
양우야, 언제부터 그렇게 편지를 잘 쓰기 시작한 거야? 말수가 적어서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설득력 있네. 네 편지를 읽다가 보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쉽게 해결될 것 같아 다행이야. 어쨌든 고향 하천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용기까지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세상에 못마땅한 것이 너무 많은가 봐! 요즘은 자꾸 화도 나고 괜히 서러워서 가끔 눈물도 나. 엄마가 식당을 나가고 없는 시간에는 내가 집안일까지 해야 해. 할머니 병이 점점 악화되어 감당하기가 버거워졌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고집이 강한 성격이라 아직도 피해의식 속에 살아. 과거를 생각하면 이해하면서도 이제 좀 벗어났으면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나 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어둠속에 사는 아버지를 보면 안타깝다가도 벌컥 화가 나. 그래서 더 그런지 과거가 단순히 조상들만의 몫이라고 단정 지어지지가 않아. 당사자들인 우리 아버지가 있고 신진수나 너희 작은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쉽게 화해될 일은 아닐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떠나지 않아.
양우야, 지금은 모든 게 너무 복잡해. 몹시 피곤해. 우선 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제 대입예비고사가 불과 네 달밖에 안 남았잖아. 안녕!
편지 3
정라, 사랑하는 정라!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머릿속에서는 맴돌지만 정작 말하기는 힘들고 어려웠는데 자꾸만 입속에 오물거리니까 이렇게 감미로운 줄은 몰랐다.
나, 너 정말 사랑해! 너 아닌 누구를 이토록 그리워하며 밤새도록 가슴 아파봤을까? 너 아닌 누구를 안타까워하며 그토록 가슴앓이 해봤을까?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베토벤이 연주가 끝난 줄도 모르고 계속 지휘봉을 흔들었다는 애절함 같은 것을 네가 아닌 누구에게 느껴봤을까?
너와 함께 미래를 꿈꾸어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거짓일 테지.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씩 너와 결혼하는 꿈을 그려보는지 모른다. 바보처럼……. 그래, 나는 바보다. 분수도 모르고 오로지 내 마음만을 믿고 네가 이해해주길 바라는 진정한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 통제할 수도 없으니 정말 바보 같지?
참, 우리 집은 봉계를 떠나 연못둥지로 이사를 했다. 야산 구릉지에 저수지가 두 개씩 있어 지명이 연못둥지이고, 마을과 떨어진 외딴곳이다. 아버지는 임야 산등성이에 집을 짓고 사과과수원으로 개간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 이사한 연못둥지과수원에 처음으로 내려갔다. 석우가 얼마 후 군대에 간다기에 송별회 겸 한번 보고 싶어 내려갔었지. 야트막한 야산의 과수원이었지만 꽤나 웅장하더구나.
과수원을 한 바퀴 돌면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봄이면 파릇한 초원이, 여름이면 싱그러운 신록이, 가을이면 알알이 가득한 열매가, 겨울이면 순백의 그윽한 설경이……. 춘하추동 멈추지 않는 연못둥지과수원에서 무릎을 꿇고 대지의 양분을 기꺼이 호흡하리라. 아득한 옛 시절이 눈앞에 어리고 노을이 과수원에 선명하게 어리어 비칠 때 사랑하는 사람과 가느다란 노랫가락도 읊조리리라. 애틋했던 과거를 전설처럼 이야기하며 영원한 행복을 가꾸어 나가리라!
정라, 사랑하는 정라! 이런 혼자만의 넋두리가 당황스럽겠지. 학생의 신분도 벗어나지 않은 주제에 참으로 엉뚱하기도 하지. 네가 어떻게 생각할까 불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얘기해버려서 홀가분하기도 해.
이제 받아들여야 하는 몫은 너에게 돌아갔다. 차근차근히 탑처럼 사랑을 쌓는다면 십 년 후인들 약속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성급한 날 용서해주겠지? 누구에게도 널 빼앗기기 싫은 내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인정해주면 차라리 행복할 것 같다!
정라야, 오늘은 정말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이 편지를 꼭 보내야 할까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용기를 내련다.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고,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서 하나의 몸이 된 연리지,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기 하나뿐이어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의 새 비익조, 옛 시구詩句를 빌려 간절한 미래의 꿈을 실어 보낸다. 그리고 어떤 힐책도 달게 받으련다. 오직 내 솔직한 마음만은 받아주길 바라며, 안녕!
PS: 또 하나, 나는 아버지에게 대학을 포기하겠다고 처음으로 말했다. 그동안 게으름을 피운 나를 많이 힐책하셨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형이 군대를 가고 없으면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과수원이라 어쩔 수 없이 수락한 듯하다. 사실 나는 농사를 짓고 싶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신 3
양우야, 정말 당황스럽다. 당분간 편지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난 지금 한가하게 사랑 이야기나 할 만큼 여유가 없어. 뭐가 뭔지 마음이 온통 뒤숭숭하고 혼란스럽기만 해. 하물며 우리 입장과 나이에 벌써 결혼이라는 단어까지? 앞으로 그나마 너에 대한 약간의 싫지 않은 감정이 미움으로 바뀌지 않게 조심해줘. 나중에, 좀 더 커서 모든 것이 이해될 때쯤 다시 연락하는 게 좋겠어. 내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내가 연락할 테니 당분간은 편지도 하지 마.
PS: 나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기로 했어. 지금은 도저히 대학을 갈 만한 형편이 안 돼, 최악이야. 졸업하고 나면 직장 어디라도 알아봐야 할 입장이야. 내 가정 사정은 모르고 불어를 잘한다고 외국어대를 권유하는 선생님에게 미안해 죽겠어. 그나마 마을에서 수재였던 너와 내가 왜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지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 요즘은 눈물도 많아지고, 한심스럽고, 짜증스럽고, 화나고, 미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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