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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남성이 많았으니, 빼어난 여성사가 도려내진 게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번엔 재상부인 한분을 찾아 봤다. 시절이
임진왜란을 겪은 때이고 보니 그 참혹한 시대 한가운데를 헤쳐 나왔을 테니
우리가 625 한국전쟁 같은 재앙을 겪은 것이나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재상부인을 추모하는 행장을 읽다보니 아무리 남편이 쓴 글이라지만
이런 여인도 있었을까 끌려 들어가고 만다.
象村 신흠(申欽)의 부인 이야기다. 58세에 병으로 김포에서 타계한 이씨부인
역시나 아쉬운건 성만 밝히고 그 이름을 알 수 없어서 여성들 입에서 또 한숨이 터질게다.
다만 성씨가 이씨인지라 이씨부인이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재상부인은
동갑내기였던 상촌 신흠에게 열 다섯에 시집 왔다고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님 슬하에서 자란 이씨부인이 열 다섯에 살림을 시작했다는데
상촌의 말을 빌리자면 참 검소하고 속으로 야무지고 소신이 뚜렷했던가 보다.
상촌 집안이 안팍으로 혈족을 많이 거느려 할 일이 그리도 많았고 모임도 많아서
열 다섯에 시집와 했을 고생이 어느정도였을지 알만하다. 그 어린 새댁이
집안 종친 모임 때에도 헤어진 옷을 입고 당당히 일하는데, 비단옷 걸친 집안간
부인들이 내 놓고 비웃고 얕잡아 보더란 걸 쓰는 남편의 속마음이 어땟을까?
요즘 열 다섯이면 중학교 2학년 3학년 쯤 될 것인데. 과연 그 아이들에게
대가집 살림을 맡기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런 모진 삶을 조선 여인들이 질끈
이를 악물고 살아 왔다는 걸 생각하면 속이 뜨거워진다. 그렇게 일하고 낳고 키우고
종이나 머슴처럼 또 일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상촌의 처는 한 사람일 수 있다.
상촌의 남동생 혼자되자 집으로 불러들여 시동생 형수가 한집에 살고
떠돌던 조카를 불러들여 비좁은 방에서 함께 살고, 시시때때로 알아서 들어오는
뇌물을 먹고 탈나지 않을거다 싶으면 받았을텐데 일일이 되돌리고
남편이 당파에 희생돼 끌려가 언제 사형 당하느냐 촌각을 다툴때 조용히
앞 마당에 거적을 깔고 소복입고 풀려나는 날까지 기도했던 여인.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았던 백사 이항복이, '우리 동네에 재상이 많아 재상부인도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청렴결백한 재상부인읜 상촌의 이씨부인 한사람'이라 했더란다.
집으로 돈이 들어오거나 비단이 들어오거나 선물이 들어올 때 마다
'저는 어릴 적 부터 부모님이 이런걸 받으신걸 못 봤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집에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비단은 제 몸에 불편할 따름이랍니다'
그리고 재상부인이 그 박봉에 (임진왜란 이후이니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겠는가?)
자식 다섯을 낳아서 그래도 장남은 번듯하여 선조의 세번째 딸을 며느리로 맞아 들였으니
외척행세 하려면 대단했을 터이나, 궁중과 거리를 두고 함부로 궁궐에 말을 대고
이권을 댄 적이 없었다니. 그 당시 그만한 행실로 살기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런 재상부인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무슨 병인지 헤아릴 길 없으나
이런 자그만 노래 한곡으로 그 시대 썩어빠진 사대부 대감들 보다 위대했던
한 여성을 내 나름 추모해 드리고 싶다.
'길쌈이었으리 길쌈이리라. 당신을 데려간 병도 길쌈이리라
줄줄이 싸들고 온 선물바라지 조용히 돌려 보내고
베들 앞에 밤을 지샌 무수한 날 때문에 당신께선 길쌈병으로 가셨으리라 그리 됐으리라.
이 시대 손가락 이리 저리 콕콕 찌르며 종 부리듯 콧방귀 뀌는 사모님 여사님들
재상부인도 아니면서 길쌈병도 앓아보지 않았으면서 감히 촌스럽다 말라
외제향으로 덮지 못할 썩은내가 어물전보다 진동하리니.....'
(5월 3일 국악방송 '우면골 상사디야' <신 명심보감> 코너 원고)
♣ 고전코너 ‘신 명심보감 --- 청렴결백 재상부인 신흠의 처 이씨 ’
놀보 이 시간은 마음을 밝혀줄 보배로운 거울같은 ‘명심보감’을
새롭게 풀어보는 ‘신 명심보감’ 자리입니다.
초란 고전 속에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며 마음에 양식을 쌓아보는
‘신 명심보감!’ 오늘은 고전 속에 어떤 구절인가요?
놀보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이겨 내면서 어려웠던 시대를
살아 온 선열 중에 ‘청렴결백 재상부인’ 소리를
들었던 여성도 있었습니다.
초란 청렴결백하면 보통 공직자에게 썼던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여성에게 청렴결백 재상부인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냥 입바른 칭찬이었겠죠.
놀보 어허, 그 시대에도 재상만치나 존경 받는
재상부인도 있었다는데 반가워 하는게 아니라
초란 (하오톤) 조선시대에 그런 선배 사모님이 있었습니까
뉘신지 듣기를 청하겠습니다.
놀보 ‘청렴결백 재상부인’ 소리를 했던 사람이 놀라운
인물이거든요. 백사 이항복 생각 나시죠?
초란 백사 이항복이 ‘청렴결백 재상부인’ 소리를? 진짜
궁금해 지네요. 어떤 부인을 두고 그렇게 말했나요?
놀보 상촌 신흠이 58세에 세상을 먼저 떠난 부인을
추모하는 이씨부인 행장에 그 내막이 기록됐는데요.
자신의 부인을 추모하는 글을 써 올리던 신흠이
남들이 비웃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이씨부인의
살아 온 행실을 기록한 이 몇구절 한번 보세요.
초란(낭송) 아들이 옹주와 결혼해 왕실과 가까웠지만
스스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 자랄 때
입지 못한 옷을 이제와 입자니 마음이 편치 못해
못 입겠노라 하며 검약히 살았다. 살다가 홀로된
남동생을 부인이 집으로 불러 들여 친 남매처럼
살아 시동생과 형수인 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떠도는 조카들을 집으로 불러 들여 좁은 방에서도
함께 재우고 키웠던 부인은 때때로 들어 온 뇌물을
돌려 보내기 일쑤였고, 내가 큰 죄를 받아 사형에
처할 위기에 몰리자 풀려날 때까지 마당에 거적을
깔고 지냈던 부인이었다.
놀보 자, 길고 길게 이어진 이씨부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이루다 전할 순 없습니다만, 그 상촌 신흠이
먼저 간 부인을 보내는 애틋한 마음을 실어서
백사 이항복이 했던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낭송) 일찍이 재상 이항복이 말하기를 ‘우리 동네에 재상이
많아 재상부인 또한 많은데, 청렴결백한 재상부인은
상촌의 이씨부인 한 사람 이더라! ’
초란 아, 바로 거기서 ‘청렴결백 재상부인’ 소리가
나왔군요. 상촌 신흠의 이씨부인. 58세로 김포에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 슬픔을 달래며
추모하는 신흠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놀보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 ‘청렴결백 재상’도
눈 빠지게 기다리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 이씨 부인처럼 ‘청렴결백 재상부인’ 역시
갈증나게 기다리는 사람 아닌가 싶습니다.
초란 사내이면서 여성보다 더한 애교와 아첨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상촌선생이 전해 주고 싶었노란 이씨 부인
살아 온 이야기들.
놀보 요즘 이런 옛 이야기 듣고 콧웃음 칠 분도 있겠지만
분명 자랑스런 우리 선대 인물 아닌가요. 여성이지만?
초란 오늘 ‘신 명심보감’ ‘이씨부인’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다음 카페’ ‘우면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놀보 좋은 자료나 담론은 ‘우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망실 이씨 행장(亡室李氏行狀)
망실 이씨는 계통이 전의(全義)에서 나왔으니,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으로서, 절도사로 영의정에 추증된 제신(濟臣)의 딸이요, 절도사로 병조 참판에 추증된 문성(文誠)의 손녀이며, 양주 목사(楊州牧使) 공달(公達)의 증손녀이다. 어머니 상씨(尙氏)는 선무랑(宣務郞) 붕남(鵬南)의 딸이며, 영의정 진(震)의 손녀이다.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에 부인을 낳았는데, 부인은 나와 동년생으로서 생일만 나보다 늦다. 부인은 친정에서 자랄 때부터 이미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15세 때에 나에게 시집왔다. 나는 소싯적에 부모를 여의었고 전해온 가산도 탕진되었었는데, 부인이 어린 나이로 살림을 맡아 집안일을 스스로 처리하였다. 나는 내외척과 종족이 매우 많았는데, 문회(門會)가 있을 때마다 보면, 음식ㆍ의복ㆍ거마 따위를 서로 다투어 호사스럽게 하여 서로 뽐내었으나, 부인만은 해진 옷을 입었고 억지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 중에는 혹 보고 비웃는 자도 있었으나, 선비의 행검을 아는 사람은 부인이 바로 현부인임을 알아보았다.
나는 일찍이 《사기》 화식전(貨殖傳)을 읽지 못하여 재산 모을 줄을 몰라서 집안이 몹시 빈궁하였는데, 부인이 힘써 일하여 생활을 영위하고 나를 항상 풍족하게 공대하였으며, 조상을 받드는 데 이르러서는 어ㆍ육ㆍ소채 등 모든 제수들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추었다.
기축년에는 내가 고질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부인이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좋은 음식을 장만해 주고, 의원을 맞아두고 약을 맛보아 가면서 손수 약을 조제하여 병을 간호했으며, 1년여 동안 허리띠를 풀거나 머리를 묶지 않았다.
부인의 성품은 특히 청렴 결백하고 분명하여 의리에 손상되는 물건은 취하지 않았다. 내가 사마시에 합격했을 때 상 부인(尙夫人 부인의 모친)께서 동복(僮僕)을 주자, 부인이 대뜸 사양하여 말하기를 “오라버니들이 사마시에 합격했을 때는 준 것이 없었는데, 계집애만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조와 병조의 참판직에 있었고 병조에는 또 오래이고도 누차 재직하였다. 그래서 간혹 비복들을 통하여 뇌물을 가지고 교제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부인이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 친정 아버지를 섬길 적에 이런 일이 없었으니, 커서 남편을 받드는 데도 아버지 섬기듯이 할 뿐이다. 그런데 어찌 이끗 때문에 우리 집안 규범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이 날로 청결해졌다. 궁중과 인척을 맺음에 미쳐서는 더욱 과분함을 두려워하여 항상 겸손하여 낮추는 것으로 몸을 단속하고, 궁중과 서로 통하여 사사로 알현해서 빌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인은 또한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기지 않아서, 매점 매석으로 폭리를 노리는 자와 이리저리 관망하여 군현에서 공헌할 물품을 대납해 주고 폭리를 취하는 자와 돈을 써서 임금의 원조를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기를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직 길쌈을 해서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갈 뿐이었다.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이 같은 이웃에 살았는데, 부인의 오라버니인 이공 수준(李公壽俊)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 재상 부인이 많으나, 그 중 청렴 결백한 분은 오직 부인이더라.”고 하였다.
내 아우는 일찍이 숙부의 후사로 출계되었고, 자씨가 홀로되어 가난하게 살자, 부인이 홀로된 자씨를 맞아와 한솥밥 먹으며 30년을 지내는 동안에 남들의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부인은 내 아우를 마치 친동기간처럼 친애하여 형수와 시동생 사이인 줄을 모를 정도였으므로, 아우가 나이 50이 되고 벼슬이 높아짐에 미쳐서도 마치 아동 시절과 같이 허물없이 대하였다. 여러 조카들에게도 그렇게 대하였으므로, 서울에서 살 적에는 여러 조카들이 날마다 와서 모였는데, 마치 자기 집처럼 명함도 통하지 않고 곧장 중당(中堂)으로 들어오곤 하였다.
나의 질녀(姪女)가 몇이 있는데,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므로, 부인이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입히고 먹여 주었다. 그리고 이공 수준이 자식을 잃고 아내마저 병이 위독했는데 우거할 곳이 없었으므로, 부인이 나에게 청하여 침실에 거처하도록 해주고, 그분이 작고하자 그곳에 빈소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 후 이공과는 그대로 4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 또 무당을 통하여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고, 모든 사도(邪道)에 관계된 것들은 반드시 피하여 멀리하였다. 부인은 새벽에 일어나 손수 식사를 준비하고, 스스로 숟가락질을 하지 못하는 비천한 어린애와 늙고 병든 분에게는 밥을 떠먹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치레는 극히 검소하여 고운 비단옷을 몸에 붙이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혹 비단옷을 지어 드리면 즉시 상자에 넣어 두면서 이르기를 “나는 화려한 옷을 입으면 절로 불편하니, 내 성질이 본시 그렇다.” 하였다.
내가 계축년의 화를 당했을 때, 부인은 죄인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은 채, 당(堂)을 내려와 거적을 깔고 거처하면서 밥도 먹지 않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찬출되고 나서도 화단(禍端)이 그치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곧 사사(賜死)의 명이 있을 것이라 하여, 평소 친한 손님도 자취를 감추고 동복들도 다 흩어져 가 버렸으나, 부인은 분수를 따라 환난에 처하여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이 나를 잘 도와 주었다.
무오년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자는 대론(大論)이 일어났는바 그 의논에 참예하지 않은 사람은 극형을 면치 못할 형편이었으므로, 큰아들 익성(翊聖)이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할까 하는 뜻으로 묻자, 부인이 이르기를 “내 비록 걱정스럽고 두려우나 어찌 너에게 옳지 못한 일을 하도록 하겠느냐.” 하였으니, 대의에 통하고 큰 법칙을 분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니 세상에 남자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시(詩)와 예(禮)를 구실로 남의 무덤을 파내거나, 치질을 핥아 주고 수레를 얻은 자와 같은 무리들이야말로 부인의 풍도를 들어 본다면 어찌 조금 꿀리지 않겠는가.
천계(川啓) 계해년(1623, 광해군15) 정초 초2일에 김포(金浦)의 시골집에서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이 58세였다. 이해 3월 28일 정사에 통진(通津) 신촌리(新村里)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익성(翊聖)은 선조대왕의 제3녀인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장가들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고, 그 다음 익전(翊全)은 도사(道事) 조창원(趙昌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진사 박호(朴濠)에게 시집갔는데, 부인보다 앞서 죽었다. 그 다음은 진사 조계원(趙啓遠)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박의(朴漪)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강문성(姜文星)에게 시집갔고, 1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익성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면(冕)이고, 그 다음은 변(昪)이며, 그 다음은 최(最)이다. 장녀는 홍명하(洪命夏)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박호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2남은 세모(世模)ㆍ세해(世楷)이고, 1녀는 이수인(李壽仁)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조계원은 3남 1녀를 두었고 강문성은 2녀를 두었으며 면은 해흥군(海興君) 윤훤(尹暄)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내가 졸약(拙約)하여 큰 하자가 없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부인이 내조해 준 힘이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제 아버지가 칭찬한 것은 제 아버지 아닌 사람이 칭찬한 것만 못하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언론을 전할 만한 군자에게 우러러 비문을 부탁하려 하노니, 그렇게 하면 후세에 전하는 자가 믿고 증거로 삼을 것이다. 흠은 행장을 쓴다.
[주D-001]시(詩)와 …… 파내거나 : 경전이나 예의를 핑계삼아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뜻함.《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유자(儒者)들이란 시와 예를 구실로 남의 무덤을 파서 도둑질을 한다. 대유(大儒)가 이르기를 ‘동쪽이 훤해진다.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소유(小儒)가 무덤 속에서 대답하기를 ‘아직 시체의 속옷을 벗기지 못했으나, 입에는 구슬을 물고 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 가에 무성하네. 살아서 보시(布施)도 하지 않은 자가 죽었다고 어찌 구슬을 입에 무는가.」라고 했습니다.’ 하고는, 쇠뭉치로 시체의 턱을 쳐서 그 다문 입을 벌리고서 그 구슬을 빼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치질을 …… 얻은 자 : 옛날 진왕(秦王)이 병이 들자, 의원(醫員)을 불러놓고 치질을 혀로 핥아 치료해준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莊子 列禦寇》
亡室李氏行狀
亡室李氏。系出全義。高麗太師棹之後。節度使贈領議政濟臣之女。節度使贈兵曹參判文誠之孫。楊州牧使公達之曾孫。母曰尙氏。宣務郞鵬南之女。領議政震之孫。嘉靖丙寅生夫人。與欽同年生。月日後於欽。在室已有令聞。十五。歸于欽。欽少喪怙恃。舊業蕩析。夫人以稚年當家。家事自理。欽申表宗黨甚盛。每於門會。飮食服御。爭事侈大以相高。獨夫人攝弊衣不苟華。在列者或目笑之。而知士行者識其爲賢婦人也。欽不曾讀貨殖傳。家徒璧立。夫人拮据爲生。供奉欽常給。至於奉先。鼎俎籩豆。山澤畢具。無少缺者。己丑。欽遘痼疾幾不興。夫人鬻簪珥。備珍羞。延醫嘗藥。手自分劑。不解帶束髻者凡一年所。性尤廉介明白。非義不取。欽中司馬試。尙夫人錫以僮指。夫人輒辭之曰。諸兄之司馬也。無錫也。女安敢獨也。欽嘗忝佐兩銓。於西銓又久而累。間有從婢使欲以貨款者。夫人謂曰。吾少而事嚴君無此事。長而奉君子如嚴君焉。何可以利故重垢吾家範。以此閨閫日淸。逮聯姻禁掖。益懼盛滿。持以謙卑。不爲交通私謁附麗計。亦不艶人貴富。聞人家廢著居貨者。顧納郡縣貢獻牟利者。治金錢連結奧援者。恥之不啻若浼。唯日枲麻織紝。自資而已。李相國恒福在比隣。語夫人兄李公壽俊曰。吾里中宰相夫人多矣。其廉潔者惟夫人云。欽有弟早出後。有姊孀而貧。夫人與寡姊同爨三十年無間言。親愛弟猶同胞。不知其爲嫂叔。及弟年艾而官大。猶如童兒時。遇諸姪亦然。在京師也。諸姪日來集。不通名直造中堂如其家。欽有姪女數人。飄泊無歸。夫人致之家。衣食之。李公壽俊喪子。妻又疾革。無所於寓。夫人請於欽置諸寢室。歿而遂殯。仍與李公同產者四歲。不喜巫祝祈禳。諸涉左道。必辟遠之。晨起手自治具。飫及孺賤而不自匕也。有老病者。推食與之。自奉極儉。綺紈錦繡。不近於身。子女有製進者。卽箧之曰。華服我自不便。吾性然也。欽罹癸丑之禍。夫人囚首墨面。下堂寢苫。推擗不食。欲自決者數。洎放黜竄逐。禍端不息。皆言將有後命。親賓卷跡。僮僕散落。夫人能隨分處患。左右欽無違。戊午大論起。不與議者將鼎钁斧鉞。家豚翊聖問其去就。夫人曰。吾雖憂畏。豈可令汝爲不義耶。其通大義辨大防如此。世之號男子身而詩禮發蒙。舐痔得車者。聞夫人之風。不亦少遜也哉。天啓癸亥正月初二日。疾卒于金浦莊舍。年五十八。以三月二十八日丁巳。葬于通津新村里癸坐原。擧二男五女。男長翊聖。尙宣祖大王第三女貞淑翁主。封東陽尉。次翊全。娶都事趙昌遠女。女長進士朴濠。先夫人卒。次進士趙啓遠。次朴漪。次姜文星。一女未嫁。翊聖五男三女。男長冕。次昪,炅,最。女長洪命夏。餘幼。朴濠有二男二女。男曰世模,世楷。女曰李壽仁。餘幼。趙啓遠三男一女。姜文星二女。冕娶海興君尹暄女。生一女。幷幼。欽之得成拙約。無大玷汚者。實夫人內相之力。古人云其父譽之。不若非其父譽之。茲仰瀆於立言之君子。庶後之傳者信而有徵。欽狀。
象村稿卷之二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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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선시대 여인들 삶에서의 많고 많은 덕행들이 유교사회의 실천덕목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 강요되거나 사회적 통념에 따른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청렴의 실천은 철저히 개인의 의지나 신념이 없이는 실행이 어려운 덕행일 것입니다.
든 가난은 남이 눈치 채기 어렵지만 난 가난은 쉽게 알수 있다 했으니
남자들 청렴은 난 가난으로 청렴의 실천이 세상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
든 가난의 여성의 청렴은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좋은 자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