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한류의 위력이 대단하다. 태생적으로 신명과 흥이 넘치는 유전자를 가진 우리 민족의 예술적인 잠재능력이, 세계화와 디지털 수단에 의해 지구규모의 소통이 가능해진 덕분이리라. 우리 전라북도는 한류문화의 수도 만들기를 푯대로 삼아, 전통문화를 성장동력으로 키울 꿈을 당차게 꾸고 있다. 어쨌든 한류의 유행은 태권도와 드라마, 한식, 대중문화를 거쳐 확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의식주와 일상생활에 담긴 우수한 사고체계와 정신문화 그 자체가 수출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속에 아로 새겨진 풍수사상과 같은 인간과 자연과의 상생의 철학은 인류의 보배이다. 산을 숭배하고 산줄기를 사람과 동식물과 같이 보는 통찰, 한국인의 우주관, 산수관, 자연미학 등은 오늘날 지속가능한 개발 어쩌고 하는 서양의 개념과는 격이 다른 훌륭한 사고체계이다. 풍수지리설이나 한국인의 산수관이 한국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한국의 모든 문화재와 도시, 마을의 위치와 구조 등은 한국인의 음양오행관이나 풍수관에 대한 안목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문화행정을 오래 한 필자도 풍수공부를 하게 되었다. 오랜 동안 우리 조상들이 축적해 온 자랑스런 유산중 하나가 산줄기와 물줄기를 보는 탁월한 안목이다.
그런데도 우리 세대는 불행하게도 해방된 후 몇 십년 동안 모든 교육과정에서, 식민지시대의 유산인 산맥개념만을 아무 생각없이 가르치고 배워왔다. 신경준의 산경표란 책이름도 모르고 살았다. 산맥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조선 강점을 치밀하게 준비하던 무렵인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또분지로의 손에 의해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조선의 지질을 연구하여 [한반도의 지질구조도]라는 것을 발표하였고, 거기에 기초하여 우리가 지리공부 시간에 외웠던 노령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따위의 산맥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수 천년 동안 산줄기를 인식하던 산경표 체계는 마치 사람들의 뿌리를 따라 가족사를 정리한 족보처럼, 백두산부터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 족보를 정리하고 있다. 부안의 반계 유형원, 고창의 이재 황윤석과 함께 호남 삼대 실학자로 불리는 순창의 여암 신경준(申景濬)이 영조 때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줄기(山經)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이 산경표이다. 최남선에 의해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 널리 유포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근대지리학이란 허울로 도입된 식민지 지리교육에 묻혀버렸다.
산경표는 우리나라 옛 지도에 나타난 산맥들을 산줄기와 하천 줄기를 중심으로 파악하여 산맥 체계를 대간 · 정맥 · 정간 등의 표현으로 백두대간과 연결된 14개의 정간 · 정맥으로 집대성하였다. 우리 전북은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금남정맥이 뻗어 있다. 실제로 노령산맥은 없다는 사실은 산악인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3년 의사 산악인 조석필 선생이 간행한 “백두대간 원상회복을 위한 산경표를 위하여” 간행을 계기로 사회 각계에 큰 울림이 일었다. 식민통치 유산인 산맥을 지우고, 백두대간을 복원하자는 제안은 민족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정신문화의 온전한 복권을 위해서이다. 노령산맥으로는 전라좌도니 전라우도며,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생활문화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오늘날 전남북 경계를 이루는 정읍과 장성간 고갯길은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 가장 낮은 고개로 예로부터 갈대가 많아서 갈재라 했고, 한자로는 위령(葦嶺) 또는 노령(蘆嶺)이라 하던 것이, 식민지시대에 느닷없이 전라도 산줄기의 대표 이름으로 있지도 않은 노령산맥으로 둔갑하였으니 기막히고 한심한 일이다. 조석필 선생이 백두대간 원상회복을 호소한지도 20여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별로 바뀌지 않고 있다. 교과서나 공식문서, 지자체의 홍보자료 등에도 여전이 노령산맥 타령이다. 일제 35년의 상처가 아직도 이리 깊게 남아 있다. 이 한 가지 사례로 보더라도, 구천년 우리 민족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들이 일제강점기에 너무도 많이 훼손되었고, 특히 정신문화의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아직도 부족함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해방 7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우리의 정신문화 복원은 멀기만 한 것인가?
필자는 산경표의 홍보와 여암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순창군의 관광홍보 차원에서, 백두대간 산사람들의 대간,정맥 종주 산행 코스에 산경표의 아버지인 여암유적지를 포함해서 참배토록 하는 아이디어를 수년 전부터 순창군과 산악회 등에 제안하였다. 한국문화의 원류를 자부하는 우리 전북에서부터 우리 정신문화 복권에 앞장섰으면 참 좋겠다. 식민지 찌꺼기 청산의 증표로서 우리 전북에서부터 노령산맥을 어서 말끔히 지우기를 간절히 고대해 본다.
자료출처 새전북신문 / 전라북도 기획관리실장 유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