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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생한다, 고로 존재한다"- 공생에 관한 세 가지 시선
하나의 책, 세 개의 시선
톰 웨이크퍼드 지음 , 전방욱 옮김, 해나무, 2004
#1
왜 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것일까? 먼저 중요한 원인은 모든 생물체의 세포들은 작은 티백처럼 미량화학 수준의 내용물을 조금씩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지의류의 경우 녹조류의 세포벽을 통해 약간의 당이 흘러나오고 균류에는 외막을 통해 질산염이나 인산염이 흘러나온다. 한쪽의 동료가 흘려보내는 대부분의 화합물들은 다른 쪽 동료에게 유익하다. (36쪽)
내겐 두 명의 조카가 있다. 아직 돌이 채 안된 여자아이와 이제 4살이 되는 남자아이. 완전 귀요미들이다. 음, 귀요미……. 솔직히 딱 10분만 그렇다. 아이들과 놀기 시작하고 10분,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30분쯤 지나면, 내 정신인지 네 정신인지 모를 상태. 완전 기진맥진이 돼서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버린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는 게 참 유약한 존재구나.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 오랜 기간을 엄마, 아빠에게 기대서 살아야 하니.’ 그러면 아이들이 왠지 안쓰러워 보이고,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아이들 곁으로 간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이들만이 약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아니 생명이란 게 그렇다. 어디 이 세상에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가 있을까. 다들 다른 생명체에게 기대어 살아가기 마련인 법. 생명이란 모름지기 부족한 존재고, 그렇기에 같이 산다.
말미잘과 흰동가리의 공생, 각자의 이득이 있기 때문에 맺어진 관계일까?
‘부족하기에 같이 산다’는 말은 너무나 익숙해 그저 그런 이야기 중 하나 같이 들린다. 그러나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의 톰 웨이크퍼드는 그 이면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묻는다. ‘왜 생명체는 함께 살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답한다. ‘흘리기 때문이다.’ 오호라, 그렇다. 우리가 나무들 옆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 나무들이 산소를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벌들이 꽃에게 가는 이유? 꽃이 꿀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분명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부족한 존재다. 그러나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생명이 택한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풍부함이다. 부족하기에 자기 것을 틀어쥐는 탐욕이 아니라, 오히려 뭔가를 밖으로 내보내는 잉여적 방식. 요컨대 자신을 선물적 존재로 만들도록 생명은 진화한 것!
하지만 생명이 뭔가를 흘려보낼 때, 그건 누구에게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 곁에서 상쾌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나무가 산소를 내보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신선한 산소를 주는 고마운 나무~. 그러나 나무 입장에서 보면? 나무는 광합성으로 먹을거리를 만들고 나면, 그 찌꺼기인 산소를 내보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환영해 마지않는 나무의 상쾌함은, 실은 나무의 똥인 것.^^;; 나무가 산소를 내보내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가 살기 위해서지, 우리에게 상쾌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준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것, 이것이 선물로서 생명의 존재양식이다.
꽃이 만드는 꿀은 생명의 또 다른 잉여적 모습이다. 꽃이 꿀을 만드는 것은 꽃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곤충들이나 새가 꿀을 먹으러 올 때, 살짝쿵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에게 전달해주길 바라서다. 꽃은 꿀로 택배비를 지불하고, 곤충이나 새는 그 돈을 받고 꽃가루를 배달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내가 택배비를 선불로 주는데 그 택배기사가 내 물건을 제대로 운송할 보장이 없다면, 나는 택배비를 지불하려 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러나 식물은 다르다. 벌은 형편없는 택배기사다. 벌에 붙은 꽃가루가 제대로 운반된다는 보장은 없다. 재미나게도 벌들은 자기 몸에 뭍은 꽃가루를 걸리적거리게 여기고, 자꾸 떼어내려 한다. 그래서 운송사고는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식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꿀을 생산해낸다.
<나우시카>에서 오무가 독을 정화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장면이야말로 정말 감동적인 순간!
여기에 생명의 진화 방식으로서 선물의 경제학이 출현한다. 선물과 교환은 다르다. 교환은, 쉽게 말해 기브 앤 테이크다. 가는 만큼 오고, 오는 만큼 준다. 그러나 선물은 비대칭적이다. 가는만큼 온다는 보장도, 오는 만큼 주지도 않는 것.
난 우리 조카들을 볼 때, 이 선물의 경제학을 뼈저리게 느낀다. 애기들 웃음 한 번 보겠다고 얼마나 ‘우르르 까꿍’을 하며 쇼를 했던지. 시크한 둘째 조카는 이런 노력을 반나절정도 해야 겨우 한두 번 웃어준다. 더욱이 애들이 나 좋으라고 웃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웃겨서 웃는 것일 뿐.(음…내 쇼가 어이없어 웃는걸지도^^;;)
첫째 녀석도 마찬가지다. 그 놈과 잘 지내보려고 과자 같은 것을 사가지고 가면, 약발이 먹히는 것은 그날 딱 하루다. 다음에 가면 언제 선물을 줬냐는 듯 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다시 어색한 만남에서 시작하게 된다. 애 앞에서 억울해 할 수도 없고, 그냥 선물 따위 줬다는 걸 싹 잊고 시작하는 수밖에. 허나 아이의 망각은 선물의 진수일지도 모른다. 선물을 미끼로 해서 기브 앤 테이크의 교환관계를 바라는 내 어리석은 마음을 무색케 하는. 선물을 한갓 교환물로 만들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로서 망각.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 ‘선물’이라는 것은 그냥 수사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애들이 연약하고 안쓰러워서 아이의 곁을 다시 찾는 건 아니었다. 뭐라 얘기할 수 없어도 애들이 내뿜는 그 생생한 생명의 기운. 그 매혹적인 기운에, 지쳐서 숨어있다가도 다시 애들에게 갔다. 가서 툭툭 건드리고, 물고 빨고 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은 생명의 존재 양식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보여준다. 부족하기에, 잉여적 존재로 진화한 생명. 생명은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선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생명의 경제란 교환과는 다른, 비대칭적인 선물의 경제인 것. 바로 여기에 생명의 생존 전략인 공존의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신근영(남산 강학원 연구원)
#2
미생물 거주자와 사람의 관계가 불행을 불러온 아주 희귀한 사례도 있다. … 데이비드 필립은 … 백혈구 세포를 충분하게 생산할 수 없으므로 자랄 때마다 더 커다란 플라스틱 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이 플라스틱 방은 그의 몸을 다른 살아있는 생물체로부터 지켜주는 ‘버블’이었으며 이 때문에 언론에서 버블보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하루를 버티려면 10만 달러 이상이 드는, 논란이 많았던 열 두해의 생을 마감하면서 버블보이는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면역결핍증인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버블보이는 어떤 생물체가 미생물 동료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부차적이거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생명 유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사람은 이런 생물체와 동맹을 유지하는 법을 배울 때만 건강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버블보이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람이나 다른 생물체는 모두 멸균된 상태로는 오래 살 수 없다.(112쪽)
어릴 적, 홍도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너무 신이나 이리저리 홍도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녔다. 에메랄드 빛 바다, 그 속에서 노니는 탐스런 바닷고기, 형형색색의 불가사리, 생전 처음 보는 풀들과 나무들. 처음 가본 남쪽 지방인지라 모든 게 신기했다.
풍란은 바위에서 자라기 때문에, 집에서 키울 때에도 그런 환경을 만들어줘야만 한다.
그 중에서 풍란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나와 아버지는 홍도의 작은 산을 오르다 풍란 한 무더기를 발견했다. 어린 마음에 노란 난초꽃이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나는 그 난초를 집으로 가져가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야생 난을 집으로 가져가면, 금방 죽어버린다’는 아버지의 만류에 나의 바람은 깨져버렸다. 실망한 나는 아버지께 ‘왜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가셨다. 아버지를 대신 해 그 대답을 해 준 사람은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의 저자 톰 웨이크퍼드였다.
난은 지금껏 균류 없이 혼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할 때는 물론이고, 다 자란 난초 역시도 미생물 동료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난은 다 자라도 뿌리가 기형적으로 작아서 영양분과 물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다. 하지만 균류가 그 뿌리에 결합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땅 속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가는 거대한 균사들의 그물망, 이것은 난초의 식량 공급원을 형성한다. 그러니 균류가 없다면 난은 굶어죽게 될 터. 그야말로 균류는 난에게 ‘죽어도 못보내!~’는 소중한 존재다.
이쯤 되면, 어떤 것이 난이고 균류인지를 콕 집어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아니 불가능하다. 난초는 오로지 난-균류의 생물계(生物界)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난을 집으로 가져오는 도중 이러한 계(界)는 파괴된다. 바로 균류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웨이크퍼드에게 난을 집으로 모셔가 키운다는 발상은 매우 터무니없는 생각일 테다.
사실 난 뿐만이 아니라,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 속엔 무수히 많은 미생물들이 득실거린다. “사람의 창자에는 우리의 소화를 도와주는 5백 종류 이상의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져 있는데, 이들은 우리들이 섭취하는 음식물의 5분의 1까지 담당하고 있다.”(112쪽) 나의 장 건강을 위해 식이섬유를 찾는 것도, 실은 장속 세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다. 뭔가 찜찜하고 근질근질한가?^^ 하지만 미생물들과 우리 몸이 관계 맺고 있는 그물망, 이 인연이 장이 바로 ‘나’다.
헌데, 현대의 위생담론은 하나의 공생체로서 살고 있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무시한다. 이것은 미생물, 세균을 모조리 제거한 청결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라고 외쳐댄다. 결국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세균들과 접할 기회가 없는 채로 살게 되었다. 이런 식의 위생은 역으로 현대적 질병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천식과 알레르기. 영국과 호주의 경우, 30년 전에는 드문 병이었던 천식 환자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미국에서 천식은 1년에 5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알레르기도 이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이런 병이 급작스럽게 늘어난 이유는, 점액세균과의 접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음용하던 청결한 식수에는 수억 마리의 점액세균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염소 소독 이후 그 수는 아주 적어졌고, 점액세균에 의해 우리의 면역계가 훈련받는 필수적인 과정은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세균이 사라진 자리, 우리 생명도 시든다.
<버블보이>는 위생숭배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무균의 수술실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나고, 거품과 같은 보호막, 멸균된 플라스틱 인큐베이터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인류.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영화 <버블보이>의 한 장면.
재밌게도 버블보이의 모습은 ‘온실 속의 화초’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집에 모셔다 놓은 달랑 한 촉의 난, 그것은 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난이 균류, 야생토양의 온갖 것들과 맺었던 관계망들이 다 허물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 깨져버린 관계를 보충하기 위해 우리는 비싼 각종 영양제를 투입하면서, 거의 ‘뇌사상태’의 난을 억지로 살게끔 한다. 인위적인 기계장치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각기 공급받는 버블보이 또한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분리된 하나의 개체는 관념 속에서나 존재한다. 어디에 순수한 난초 한 촉, 순수한 인간 한 명의 신체가 존재하랴? 그들은 언제나 난초-균류 공생체, 인간-미생물 공생체라는 하나의 계, 즉 집합적 신체로만 존재해왔다. 생명체들에게 ‘산다(生)’는 말은 ‘함께 산다(共生)’는 말과 절대 분리될 수 없다. 공생은 공생함으로써 생기는 비용이나 이익을 떠나, 생명의 존재 방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공생한다, 고로 존재한다.”
정철현(남산 강학원 연구원)
#3
마굴리스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의 진핵생물 조상은 호흡과정을 통해서 산소를 방출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박테리아 포식자였다. … 잠재적인 공생자박테리아가 처음 침입하였을 때 박테리아의 먹이는 아마도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희생자의 일부는 이들 초대받지 못한 손님에 대한 내성을 진화시켰다. 이 침입자는 원래는 자신의 희생자가 될 영양분이 풍부한 세포 내에서 살아 있는 채로 잘 지내게 되었다. 이들이 해를 끼치지 않고 침입한 세포 내에서 번식할 때 이전의 포식자들은 이전의 먹이생물과 상대의 찌꺼기를 먹는 공생관계를 형성하였다. … 이후 10억년 동안 피침입자와 침입자는 생태학적으로 역동적인 동맹을 맺으며 살았다고 마굴리스는 추정한다. 결국 이전의 포식자들은 순화되었다. 이들은 지금의 미토콘드리아로서 세포기관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168쪽)
흔히들 농구가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달리는 운동이라고 하지만, 내 농구는 그렇지 않다. 나는 철저하게 발을 떼지 않고 농구를 한다. 어떻게 그러냐고? 쉽다. 공을 받으면 가만히 서서, 많이 뛰어다니는 사람에게 패스를 하면 된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땀 흘리지 않고 농구를 할 수 있다. 놀라운 능력이지 않은가.
지극히 정적이고 고요한 농구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드리블을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드리블을 몇 번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웬일이지 나의 예상대로 올라와야 할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계획이 뒤틀리는 이 난감한. 나에게 공은 너무나도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생물체였다. 이렇게 자기 멋대로 꿈틀거리는 공을 주고받으며 경기를 하다니. 그래서 ‘드리블을 없앤 농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불규칙하게 꿈틀대는 공들로 가득했다. 바로 박테리아들.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우발적 마주침들의 역사다. 동물과 식물들은 부모자식 사이에서만 유전자를 주고받지만, 박테리아들은 마주치는 박테리아들과 곧바로 유전자를 교환한다. ‘유전자 주입 섹스’라 불리는 이 과정이 박테리아 진화의 한 축이다. 그래서 박테리아들은 설령 독성이 있는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그 독에 내성이 있는 박테리아와 마주치게 된 경우 바로 유전자를 교환한다. 그래서 내성 박테리아와 만난 박테리아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박테리아는 죽는다. 박테리아는 이런 마주침들을 통해 빠르고 우발적으로 진화한다.
드리블은 역시 강백호?! 허리허리! ^^
이런 박테리아들 중에 가장 극적인 예가 미토콘드리아가 된 박테리아다.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은 먹잇감의 내부로 침입해서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박테리아다. 그런데 이 박테리아가 원핵세포를 잡아먹기 위해 그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원핵세포가 박테리아에게 죽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우연하게도 포식자 박테리아와 원핵세포가 함께 살게 되었다.
포식자 박테리아나 원핵세포의 입장이 되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 같다. 포식자는 원핵세포를 잡아먹으려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정작 잡아먹지 못했다. 그렇다고 후진해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원핵세포 입장에서도 ‘이젠 죽었구나’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웬걸! 죽지 않고 당황한 포식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 어색한 상황을 어찌할까. 이 순간이 두 생명이 만난 우발적 상황이었다. 반갑다기보다는 오히려 당혹스럽기만 한 마주침. 그러나 이 마주침으로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둘은 우발적 상황을 통해 새롭게 바뀌었다. 박테리아는 세포 안에서 미토콘드리아로 변했고, 원핵세포도 소기관을 갖게 되고 진핵세포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원핵세포에서 진핵세포로의 진화가 이렇게 우연하고도 어색한 공생관계에서 이루어졌다니. 박테리아든 원핵세포든 누구도 이를 의도하거나 예상치 못했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자연은 온 사방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공들로 가득 찬 방이다. 그 속에서 때로는 이 공과 부딪히고 또 저 공과 충돌하는 일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 충돌로 새로운 변화들이 갑자기 펑! 하며 나타난다. 이런 변화가 지금의 수많은 생명들을 만들어낸 자연의 방식이었다. 나도 그런 우발적인 것들의 산물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서로 눈이 맞은 사건, 내가 살아오면서 부딪힌 수많은 사람들, 나를 통과해간 무수한 바람과 냄새, 소리 등. 이 모든 우연들의 결과가 지금의 나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통과한 무수한 우연들의 결과야말로 지금의 '나'가 아닐지.
내가 농구를 싫어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우연들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조차도 우발적인 만남들의 결과라면, 내가 ‘나는 농구를 싫어한다’라는 생각했던 것 또한 농구공과 마주쳤던 결과일 것이다. 요컨대 농구공 또한 이미 나를 만들어낸 만남들 중 하나라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농구가 좋아질 리는 없다. 하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난다거나 하면, 혹 누가 알겠는가. 그 마주침들을 통해 나중에 농구가 좋아질지.
생명의 설계도 따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마주침뿐. 거기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그 만남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그 우발적 마주침들이 없었다면, 생명의 역사는 쓰여질 수 없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