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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관통한 계엄군의 총탄
증언자: 유춘학(남)
생년월일: 1964. 7. 19(당시 나이 16세)
직 업: 목공(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9. 7
저는 어렸을 때부터 거의 굶다시피 하며 살아왔습니다. 배고픔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뼈저린 체험을 했습니다. 전주에서 살던 어느 여름의 일인데, 아버지께서는 일 나가서 며칠째 집에 돌아오시지도 않고 식량은 아예 다 떨어져 아무것도 먹어보지 못한 채 방구석에 저 혼자서 처박혀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공판장에서 썩어 내버린 과일들을 주어다가 저에게 먹여주시던 일도 기억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를 곯고 있는데, 옆에서 돼지갈비나 뜯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사실은 후처인 셈인데, 이복 누나들이 있었고 그 중의 한 사람은 소아마비로 고생하다 집을 나가 버렸고 지금은 소식도 전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께 역마살이 끼었는지 모르지만 광주에 이사와서도 지원동, 방림동, 학동, 학운동 일대를 매년 이사다녔습니다. 사글세방을 살았으니까 기한이 차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학운동에서 사는데 광산이씨 문중 땅에 무허가 슬레이트 집 한 채를 지어 살고 있으며 집 뒤의 야산을 일구어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산지기한테 매년 얼마씩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열심히 일하셨던 덕택에 동복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외가도 큰 외숙께서 그 곳의 땅을 팔아 지원동에 이사 나와 장사를 하시며 논 팔았던 돈을 모두 없애버리신 모양입니다. 지금도 지원동 화약고 부근에서 사시는데 우리보다 생활이야 낫겠지만 못살기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열서너 살 때의 일입니다. 동네 친구들 너덧 명이 모여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했습니다. 지금은 담배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좀도둑질도 해보았습니다. 지원동 일대가 그때는 모두 논밭이었는데 수박서리니 복숭아서리니 못된 짓만 골라 가며 했습니다. 1번 버스 종점에 가보면 기사 아저씨들이 있는데 기사들이 없는 틈을 타서 기사들의 가방을 뒤져 담배를 한 보루씩 훔쳐낸 일도 있습니다.
1980년 당시 제 나이가 열일곱이었는데 생활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형님은 전주에서 살고 계셨는데 그쪽도 살림이 어려워 일 년에 한 번씩 방세라도 하라고 약간의 돈을 보내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건축일을 하신다지만 나이도 많고 해서 별로 일자리가 없었고 누나들은 모두 시집가버리고 어머니께서는 가끔씩 파출부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서너 살 때부터 계속 자개공장에 나가 일하면서 작은 액수지만 얼마씩 고정적으로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저는 5·18 때까지도 데모 한 번 구경해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수만 명이 가두시위했던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적 관심은 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공장의 친구들끼리도 잘 죽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저는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계속 의문만 제기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때 친구들이라고 해봤자 열일곱여덟의 아이들인지라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리 없었고 어떻게 하면 어디 가서 싸움질이나 해볼까, 아니면 어떻게 하여 계집애나 하나 낚아볼까, 어떻게 하여 폭력서클이나 하나 조직해서 학동파를 밀어버릴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정도였습니다. 사북사태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는 그 곳에 나도 뛰어가 총싸움질이나 해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말하자면 사회적 반항기질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배고픔 때문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1980년 4월쯤 기계대패에 손을 다쳐 일도 못 하고 빈둥거리며 놀고 있을 때 동네 친구인 용학이가 자기 집을 뛰쳐나와서는 나와 함께 서울에 가자고 졸라댔습니다. 그때 제가 그 친구를 따라 서울에 갔더라면 이렇게 총을 맞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럴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아 거절하고 계속 눌러 있었습니다.
5월 18일 10시쯤, 전주에서 내려온 형님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사직공원에 놀러 갔습니다. 오랫만의 일인지라 카메라까지 준비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나섰습니다. 도청 앞까지 와서 버스에서 내렸는데, 내려보니 최루탄 가스 냄새가 사방이 자욱하였습니다. 저쪽 가톨릭센터 앞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가만히 보았더니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쫓겨온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혹시 재미있는 일이 없나 구경도 할 겸 다가가 보았습니다. 경찰 한 사람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학생들을 향하여 고함쳤습니다.
"빨리 해산하라."
"우리는 해산할 수 없소!"
양쪽이 팽팽히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위로 휙 돌더니만 경찰 병력을 향해 명령했습니다.
"쏴라!"
그 순간 '빠바방' 하는 소리와 함께 최루탄이 터졌습니다. 거기서 저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우왕좌왕하다가 형님의 손을 놓쳐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동생만 데리고 도청 쪽으로 피신을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동생과 함 께 전자오락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잠깐 피신해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보니 도로에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충장로 일대를 시위하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눈이 매워 죽을 판이었는데 학생들은 맵지도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거기서부터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와보니 형님이 먼저 와 계셨고 우리는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사진 찍으러 공원에 가기로 하고 아침에 출발하였는데, 못 찍었으니 다시 공원으로 가지고 했습니다. 시내로 나오는데 도청 앞쪽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어서 노동청에서 MBC 방송국 부근을 거쳐 광주경찰서 앞을 지나 금남로로 나왔습니다.
도로에는 돌멩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별로 없어서 충금지하상가 공사장을 지나 공원으로 갔습니다. 공원에서 사진 몇 장 찍으며 있었는데 시내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천변 도로를 따라 시위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저곳이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뛰어가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따라다니기도 재미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9일 아침에 형님은 전주로 다시 가시고 저는 그날도 직장에 출근하였습니다. 목공소에 계속 나갔는데 20일 저녁 때 사장이 잠시 출근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1일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시내 쪽으로 놀러 나왔습니다.
지원동 시내버스 종점 부근에 가보았더니 이상하게도 시내버스들이 운행도 하지 않고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변으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아침에 경찰이 와서 뭐라고 하더니만 운행을 중지하더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9시쯤이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타고 시내 쪽으로 나갔습니다. 전남대 병원 못 가서 남광주역 부근의 도로에 용달차 한 대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시내에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아 더욱 궁금했습니다. 어떤 학생이 복면을 하고 M16 소총을 멘 채 지프차를 타고 외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아주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 의대 앞 로터리를 거쳐 조선대 정문으로 통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0여 명의 공수부대들이 몽둥이를 허리에 찬 채 줄을 서 있었습니다. 50미터 정도 전방에 그들이 서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만 "야!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하며 고함쳤습니다. 우리는 무서워서 재빨리 뒤로 돌아 로터리 쪽으로 나와서 기계공고 쪽으로 갔습니다. 노동청 부근에서는 최루탄을 쏘면서 일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구경한다고 계속 있어 보았자 최루탄 세례나 받고 눈물 콧물이나 흘릴 것 같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 보니 버스들이 돌아다녔습니다. 1번 버스 종점 부근에 관광버스가 한 대 서 있길래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빵이며 음료수가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몇 개 먹고 다시 밖으로 나와 파출소에 가보았는데, 파출소도 박살이 나 있었습니다. 지원동 파출소의 유리창은 모두 깨져버렸고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8톤 트럭이 오더니만 타라고 하더군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옆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몽둥이를 하나씩 주었습니다. 몽둥이를 들고 차를 두들기면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 안에서 삶은 계란도 주고 김밥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기계공고 앞에서 다시 군용트럭으로 타라고 하였습니다. 차만 바꿔타고 다시 조선대 쪽을 지나 법원 앞을 거치고 산수동 오거리-교육대-교도소 앞 톨게이트까지 갔습니다. 가면서 보니까 차에는 요란한 구호들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전두환을 갈아 마시자!"
이런 것들이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교도소 부근에 도착해 보니 어떤 한 사람이 낫을 들고 "이 새끼들 다 때려 죽여야 한다!"고 고함을 치고 있더군요. 저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다가 차를 돌려 다시 시내로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운전수에게 김밥을 주 면서 "제발 돌멩이는 던지지 말라"고 하더군요. 다시 기계공고 앞에까지 와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어떤 아줌마가 나를 보더니만 "어린 꼬마가 무슨 일이냐?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나무라더군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의대 앞 로터리쯤에 오니까 차량에서 총을 한 자루씩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기웃거렸더니 총을 나누어주던 사람이 나에게 총을 내밀었습니다.
"너도 하나 들어라."
"아니오, 나는 안 가질라요!"
하고 거절하고 도청 뒤쪽으로 가보았습니다. 사람이 웅성거려서 가보았더니 사람이 한 명 죽었는지 길바닥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저쪽으로 군인들이 서 있는 것이 보여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낮 동안에 우리 집 앞 도로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저녁식사 때 하면서 함부로 밖에 나다니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다음날(22일) 아침에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현대교통 본사 사무실이 지원동 버스종점에 있었는데 사무실 유리창이 모두 박살나 있었고, 세워둔 시내버스에는 총알 구멍이 여기저기에 나 있었습니다. 지원동 부근을 배회하다 그냥 집으로 돌아와 놀았습니다.
다음날(23일) 아침식사를 하면서 아버지께서 오늘은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공장에나 나가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듣는둥 마는둥 하고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목욕하러 가자고 하여 10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화순방면으로 걸어가다가 해태상이 있는 곳 부근에서 아카시아꽃을 따 꿀을 빨아 먹기도 하였습니다. 몇 명의 아이들이 거기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 자고 하여 그들은 돌아가고 세 명만 남았습니다. 우리끼리라도 목욕하러 가자고 하여 하천가로 나갔습니다. 하천변에는 남해어망 사장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앞마당에는 딸기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집의 담을 넘어들어가 딸기를 따 먹고 나오려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담을 넘어 도로 쪽을 바라보았더니 화약고 옆의 도로에는 소형 버스가 한 대 서 있었고 양쪽 숲에는 계엄군이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 계엄군들이 버스를 향해 집중사격을 하고 있었습니다. 왼쪽 산 숲속에는 20명 정도의 계엄군이 있었고, 차량은 붉은 색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시신을 싣고 화순방면으로 나가려던 차량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천 건너편의 오른쪽 산속에도 10여 명의 군인들이 매복해 있으면서 집중사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천에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목욕하다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려다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벼랑에 매달려 있는 듯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논둑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서 도망가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재미있어서 한참 동안을 구경하였는데, 약간 무섭기도 하여 뒤로 물러서서 구덩이에 몸을 파묻었습니다.
그러나 구덩이가 깊지 않아서 오른쪽 상반신과 얼굴은 내놓고 있어야 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멎고 군인들이 숲에서 나와 이것저것을 조사하며 버스 안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내가 맨 앞에 있었고 두 친구는 내 뒤쪽에 있었는데, 수색하던 군인 중의 한 명이 우리를 향해 겨냥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냥 쳐다보고 있었는데, 빵하는 일발의 소리와 함께 제 두 눈에 불꽃이 번쩍하더니 뒤로 펑하고 나자빠졌습니다. '아이쿠, 내가 총을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 속에는 부모님의 얼굴과 형제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만 들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만 내가 넘어진 자리에는 들쑥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쑥냄새가 내 코를 찌르더군요.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담벼락을 잡고 일어서서 걸어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1백 미터 정도를 비틀거리며 걸어 내려와 남해어망의 사장집을 두 손으로 두들기며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아주머니가 나오더니만 나를 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군요. 사람을 부르러 갔었던 모양인데, 저는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내가 총맞았던 순간에 친구들은 모두 도망했는데, 그 친구 둘이 연락했는지 현대교통 소속의 정비기사 두 분이 뛰어왔습니다. 한 분이 자기 와이셔츠를 찢어서 총알에 관통당한 내 등의 뒤쪽을 틀어막고는 나를 업고 도로 쪽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님께서 2백 미터쯤 떨어진 하천가에서 빨래를 하시고 계시다가 저를 보시더니만, "워메! 우리 아들!"하시면서 펄쩍펄쩍 뛰셨습니다. 아마 그때 어머님께서도 정신을 잃으실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1번 버스 종점에 아버지께서도 나와 계셨고, 동네사람들도 모두 나와 있었습니다. 또 어느 틈에 연락이 되었는지 벌써 앰뷸런스까지 대기되어 있었습니다. 나를 업고 오신 현대교통의 정비기사와 부모님께서 동승하시고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응급실에 도착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의사가 나를 보더니만 맨 먼저 이름이 뭐냐고 묻고 이어서 나이와 주소를 물었고, 뒤이어 간호원이 와서 혈압을 재고 어쩌고 하더니만 바로 수술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정신만큼은 초롱초롱하였는데, 수술실에 들어가 천장에 달린 둥그런 조명등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깨어나 보니 저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고 한밤중인 것 같았습니다. 깨어나는 순간부터 수술부위에 통증이 있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아팠던지 그날 밤새도록 아버지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아버지, 저 좀 살려주세요."
"간호원 누나! 나 좀 살려주쇼!"
"오메! 의사 선생님! 나 좀 살려주쇼!"
다음날 아침까지 무려 8시간 동안을 계속 발악하였습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외국인 기자 한 사람이 카메라를 메고 왔는데, 중환자실에 있던 환자들을 한 명 한 명 촬영하였습니다. 또 간호원이 와서는 아버지에게 저를 옆의 다른 침대로 옮기라고 이야기하니까 아버지께서는 화를 버럭 냈습니다.
"금방 그 침대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 것을 보았는데, 왜 하필 우리 자식을 그 침대로 옮기라고 하느냐!", "우리는 여기가 좋다"고 하시면서 침대이동을 거부하고 그 침대를 계속 고집하셨습니다.
27일 새벽녘에는 간호원들이 들어오더니, 창 부근에 누워 있던 환자들을 복도 쪽으로 옮기고 또 창문을 가렸습니다. 저도 복도 쪽으로 옮겼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그때 아마 도청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9시쯤 되어서 흰색 철모를 쓴 군인들이 병원에 들이닥쳤습니다. 군인 한 명이 제가 있던 중환자실에 들어오더니만 창문 밖을 가리키며 저 쪽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간호원이 방림동 쪽이라고 하자 그 군인이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12시쯤 되어서 군인 둘이 의사와 간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환자들을 한명씩 조사하러 다녔습니다. 내가 있던 중환자실에서도 10여 명이 총상환자로 분류되었습니다. 그 뒤 바로 10층 입원실로 옮겨졌습니다.
10층 입원실에 가서 총상환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10층에만 해도 약 20여 명의 총상환자들이 있었고, 내 방에도 6명의 총상환자가 있었습니다. 입원하고 있는 중에 전일방송에 근무하는 프로듀서라고 하는 사람이 왔었는데, 나에게 와서 어떻게 하여 총을 맞게 되었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준 적도 있습니다.
얼마쯤 지나서(6월 15일경) 원장실에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환자들을 한명씩 불러 나갔습니다.
우리 방에 있던 환자들과 함께 세 명이 조사를 받으러 원장실에 갔는데 군인과 경찰 10여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중령이 차고 있던 권총을 빼어든 채 이름을 물었습니다.
무서워서 그냥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중령이 총을 한쪽에 치워놓았습니다. 그 때야 안심이 되어 내가 총맞은 상황을 하나하나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네 말은 모두 사실인 것 같다!"며 곧장 돌려보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돌아온 뒤에도 한두 시간씩 실랑이를 벌이다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과정에서 소위 폭도인가 아닌가, 혹은 열성분자인가 아닌가를 구별하였던 모양입니다.
최영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납탄을 맞았다고 하더군요. 납탄이 본래 없었는데 이상하게 납탄을 맞았다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납탄을 맞게 되면 살이 계속 썩어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간첩 아닌가 하여 그 사람은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 죽도록 얻어터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뒤 입원한 환자들이 마구 잡혀가고 해서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퇴원하려고 의사한테 이야기했더니 그냥 무조건 퇴원하라고 했습니다. 한 달 정도 입원해 있었는데 치료비가 얼마나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퇴원해 버렸습니다.
저는 오른쪽 폐가 약간 상했으며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습니다. 지금도 등 뒤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고 비가 오려고 하면 쑤시고 아픕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픈 것 같습니다. [5.18연구소]
첫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되세요